동명의 1964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윤택영(1964)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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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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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94462><colcolor=gold>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 | 순정효황후의 부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 尹澤榮 | Yoon Taek-young | ||
세종대학교 소장의 윤택영 초상 | ||
봉호 | <colbgcolor=#fff,#1f2023>해풍부원군 (海豊府院君) | |
본관 | 해평(海平)[1] | |
이름 | 택영(澤榮) | |
생부 | 윤철구 | |
생모 | 정경부인 홍씨(洪氏) | |
부인 | 경흥부부인 기계 유씨 (杞溪 俞氏, 1876 ~ 1936) | |
자녀 | 장남 윤홍섭 (1893 ~ 1955)[2] 장녀 순정효황후 윤증순 (1894 ~ 1966) 차녀 윤희섭 (1905 ~ ?) 차남 윤의섭 (1912 ~ 1966)[3]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작위 | 조선귀족 후작 | |
생몰 기간 | <colbgcolor=#694462> 음력 | 1876년 2월 22일 ~ 1935년 9월 27일 |
양력 | 1876년 3월 17일 ~ 1935년 10월 24일 | |
사망지 | 중화민국 베이핑 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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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귀족,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조선왕조의 마지막 국구[4]이며 순종의 장인, 즉 순정효황후 윤씨의 부친. 본관은 해평. 작호는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이다. 별명이 채무왕으로 경제관념이 제로인 것으로 유명하다.2. 생애
2.1. 초기
한성부에서 조선 선조 때의 정승이었던 윤두수의 후손인 영돈령부사로 추증된 윤철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 1899년 시강원 시종관에 임명된 것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비서원승, 영친왕부령 겸 혜민원 총무, 영친왕부 총판, 법무협판, 지돈령사사, 육군 참장·부장·찬모관을 역임했다. 1904년 4월에는 경제연구회 총재로 활동한 뒤 7월에는 광부구제회를 조직했다.1904년 황태자비 민씨가 사망하자, 2년 뒤 1906년 당시 12세 된 큰딸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과 결혼시켜 황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윤택영은 친일보다는 항일에 가까웠다.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기 위해 헤이그에 가려고 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가는 것이 대한제국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지않기로 마음먹었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딸이 황후가 되자 황제의 장인 자격으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6]
1908년 1월에는 기호흥학회 찬무부 특별주무원, 10월에 특별찬성회원을 맡았으며, 같은 해 2월에는 대동학회 회원, 9월에 상공근무사 찬성장, 그리고 10월에 일본적십자사 특별위원과 11월에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다.
2.2. 일제강점기 이후
윤택영 |
1920년 엄청난 부채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다가 중국으로 망명, 베이징에 체류하다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35년 10월 24일 객사하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3. 가족
조부는 윤위선이다.경흥부부인(慶興府夫人) 기계 유씨(杞溪 兪氏)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았다. 장녀가 바로 순정효황후 윤증순(1894 ~ 1966)이고 차녀 윤희섭(1905 ~ ?)은 유길준의 차남이자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억겸과 결혼하였다.
장남 윤홍섭(1893 ~ 1955)은 비록 아버지와 같이 채무를 피해 도망가긴 했으나 그래도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도움을 주어 순정효황후로부터 10만원을 얻어다가 신익희에게 주면서 상해임시정부 설립 자금에 보태게 하였고 이후에도 장덕수 등의 유학 자금을 지원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1935년 11월에 귀국 후 흥업구락부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등 아버지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8.15 광복 후에는 한민당 창당 발기인과 심사부원을 거쳐 구 왕궁청 사무장관, 숙명학원 이사장, 그리고 국제법급 외교연구회 이사 등을 지내고 대동청년당 상무이사 등을 지내는 등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차남 윤의섭(1912 ~ 1966)은 형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기 때문에 윤택영 사후 그의 후작 작위를 승계받았으며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로 활동했다. 이후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전몰 장병 추도회에서 조선귀족회 대표로 참석했고 조선귀족회의 장행회에도 참석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에 앞장섰기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수작/습작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4. 여담
-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큰 사위 순종보다 2살 어리다.(...) 당연히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나이차이도 넘사벽으로 무려 20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아버지 욕심에 어린 생과부를 만든다며 황태자비를 동정했다고 한다. 사실 이럴 만도 한게, 윤택영이 황실과 사돈이 되려고 빚까지 내서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한다.
- 21촌 증조부뻘[8]인 먼 친척 윤치호는 윤택영과 윤덕영 형제를 거의 벌레 취급하며 극혐했다. 비록 두 형제나 윤치호나 같은 친일파이지만 윤치호는 그래도 친일을 하면서도 합리주의를 자처하여 한평생을 계몽운동, 근대화 운동에 힘쓴 반면 윤덕영, 윤택영은 경술국적과 순종의 장인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오로지 자신과 가문의 부귀영화를 쌓는 데다만 힘을 썼기 때문이다. 거기다 윤택영은 후술하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빚을 졌다.
4.1. 채무왕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윤택영은 빚이 많았다. 황실과 연을 맺으려 꾸었던 빚을 안갚는 것은 물론, 오히려 부원군 지위를 이용해 더 막대한 빚을 지면서까지 사치와 유흥을 즐겼다. 이로 인해 생긴 별명이 '채무왕', '차금대왕(借金大王)'[9].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장인을 저런 꼴로 방치하는 게 황실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고 해서 1907년에 윤택영이 당시 진 채무의 절반 금액을 고종이 특별히 내주었다. 그러나 그 걸로도 부족했는지 여러 차례 사위 순종을 찾아가 자기 빚 좀 대신 갚아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나중에는 순종이 거절했다. 그래도 믿을 건 피붙이라고 친형 윤덕영에게 돈 좀 꿔달라고 했으나 윤덕영도 동생에게 떼먹힌 돈이 꽤 있었기에 바로 거절했다. 그러자 서울 시내 한복판 요릿집에서 주먹다짐까지 했다.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에 관련 이야기가 나와있다.심지어 일본 정부에게까지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했을 정도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한일합방 당시 받은 어마어마한 금액의 은사금은 어쨌냐고? 그걸로 빚갚긴 했는데 다시 사치스런 소비생활을 하다가 또 채무를 졌다. 하도 돈을 안 갚아서, 보다못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윤택영의 재산을 저당잡고 조사에 들어갔는데, 그 때 혹시나 해서 다른 친일파 귀족들도 조사해보니 역시나 빚에 시달려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11]
결국 일본 의회에서 명색이 일본의 귀족이 궁핍하게 살아서 되겠냐는 소리에 조선총독부에 특별예산을 편성해 귀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귀족들에게 얼마 안되는 보조금은 새발의 피일 뿐이었고 금방 또 날렸다. 그래서 일본 측에서는 이를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고 결국 윤택영은 작위 박탈까지 당했다가 나중에 겨우 회복했다.
1920년 7월 11일 출국한 윤택영 부자 관련 동아일보 기사. |
그러나 빚을 잔뜩 지면서까지 호화롭게 살았던 몸이라 외국에서의 낯설고 초라한 생활에 적응할 리 없었고, 툭하면 딸과 사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귀국할 수 있도록 빚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다가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그래도 장인 겸 신하라고 문상은 해야 한다며 몰래 조선에 왔다가 윤택영이 문상을 위해 올 걸 예상하고 창덕궁 주위를 감시하던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빚 독촉을 해댔다. 위에서 언급한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에 실린 관련 내용이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 · 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이를 견디지 못한 윤택영은 상이 끝나자마자 다시 중국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가 결국 객사하고 말았다.
[1] 24세손 'O영(榮)' 항렬로 나잇대에 비해 항렬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윤치호의 증손자 뻘, 윤보선 대통령의 손자 뻘, 그리고 KBS 윤인구 아나운서의 아들 뻘이며 동요 작곡가 윤극영과 태영건설, SBS 설립자 윤세영과 형제 뻘이다.[2] 윤택영의 장남으로 아버지와는 다르게 독립운동가이자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소속 정치인이다.[3] 윤택영의 차남으로 아명은 윤송무 (尹松茂),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계동정이다. 윤택영 사후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습작했다.[4] 임금의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5] 해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큰형 윤시영은 친척의 양자로 갔으며 작은형은 일찍 죽어 사실상 첫째다.[6] 작호는 본관인 '해평(海平)'에서 유래했다. 조선의 부원군 작호는 대부분 거의 본인의 본관에서 따왔다.[7] 이와 별개로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라는 이름의 집 또한 전시되어있으나 추가 조사를 통해 윤택영의 형 윤덕영의 애첩 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8] 12대조 윤두수의 9대손.[9] 차금(借金)은 돈(金)을 빌린다(借)는 뜻이다.[10] 참고로 '대갈대감'은 윤덕영의 별명으로 몸집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커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동생과 대비되게 착실하게 재산을 모은 부자였다.[11] 사실 이들 친일파 귀족들이 6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받긴 했지만, 문제는 그 형태가 50년 만기 채권이었기 때문에 실제 은사금은 일본은행에서 보관했고 그 이자만 받아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의외로 이들 조선귀족의 재산 증식에 은사금이 별 도움이 못 되었다고 한다. 50년 뒤에 받는다고 해도 그 동안 인플레이션 생각하면 실제 가치는 훨씬 낮아져 있을게 뻔하고, 무엇보다 일제가 35년만에 망해버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