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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대한제국 군부대신 조희연 趙羲淵 | Cho Huiyŏn | |
이름 | <colbgcolor=#fff,#1f2023>조희연 (趙羲淵) |
오무라 지사부로 (大村智三郞) | |
본관 | 평양 조씨[2] |
자 | 심원 (深源) |
호 | 기원 (杞園) |
출생 | 1856년 (철종 7) 5월 26일 |
경기도 통진군 (現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 |
사망 | 1915년 7월 20일 (향년 59세) |
직업 | 정치가, 관료, 군인 |
작위 | |
주요 경력 | 군부대신 궁내부 특진관 조선귀족 남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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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화기 대한제국의 개화파이자 무신, 친일반민족행위자.2. 생애
1882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1887년에는 군사상업시찰을 위해 상해를 다녀오는가 하면, 그 이듬해인 1888년에는 군기(軍器) 구입 등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상하이(上海), 홍콩을 거쳐 일본의 포병공창(砲兵工廠)을 견학하면서 일본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일본 문물에 자주 접하게 되었다. 귀국한 뒤 그는 양국의 문명을 참작하여 이를 시행하려고 하였고 청일양국으로부터 군기를 사들이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각종 군수 물자를 지원했으며, 전주성이 함락되자 청군을 불러들여 난을 진압하자는 고종에게 극심한 내정 간섭을 불러올 것이라며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한 뒤에는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갑오개혁에 참여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요청에 따라 이두황, 이범래 등을 선발대로 보낸다. 조희연은 이후 일본군이 승전하자 1895년 2월 뤼순, 다롄, 웨이하이에서 일본군을 위문한다.[4]
이후 을미개혁 때 김홍집 친일 내각에 들어가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다 아관파천 때 유길준, 장석주와 함께 체포 명령이 내려져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망명 시기에는 나고야, 오사카 등지에서의 군사 훈련을 시찰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군수공장 및 각종 군사 시설들을 견학하였다고 한다.
1907년 귀국하였고, 1909년에는 표훈원 총재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 한일병합 때 일제에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도 임명되었다.
이전부터 채무가 많아 결국 재산을 탕진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작위를 반납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1915년 5월 '원(願)에 따른 반납'이라는 형식으로 작위를 포기하여 자식에게도 세습되지 않았다. 사망 당시에는 적십자애국부인회 조선본부 평의원으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