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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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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1년 |
사망 | 1909년 (향년 58세) |
본관 | 평산 신씨[1] |
자 | 언여(言汝) |
호 | 양원(陽園), 노봉(蘆峰) |
직업 | 정치가, 사상가, 학자 |
소속 단체 | 시강원문학 홍문관제학 군부대신 중추원부의장 철도원총재 함경도관찰사 |
부모 | 아버지 신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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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사상가, 학자이자 온건 개화파 인물이다. 동도서기론을 죽기 직전까지 고수하였다.2. 일생
그는 1884년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개화당 내각에 들어갔다.그는 급진 개화파가 온건 개화파를 제거했을 때 제거 당하지 않았다.[2]
또한 1894년 갑오개혁 때도 참여하여 김홍집 친일 내각에 들어가 개혁을 주도하기도 하였고 1896년 을미의병 시기에는 남로선유사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이 된 뒤에 단발,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 등을 반대하다 독립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도서기론 사고 방식이 매우 강해 결국 독립협회와는 대립하게 된다. 그로 인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고 복귀되기를 반복한다. 특히 1898년 법부대신 시절 나륙법과 대역참형을 복구하려했는데, 이 때는 김홍륙이 고종과 순종 부자를 독살하려다가 실패했고 김홍륙이 처형당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때문에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연좌제 부활 시도로 맹렬한 공격을 받고 뒤이어 고발·탄핵되자 이를 버틸 수 없게 된 고종에 의해 면직되었다.
그는 을사조약 때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 뒤 의정부참정을 거쳐 1905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홍문관학사, 1907년 장례원경(掌禮院卿)·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1907년에는 신과 구를 합일하겠다는 취지로 민병석, 이용직과 함께 대동학회를 조직하였으나[3] 신채호에게 비난을 받고[4] 박은식과 장지연이 이에 맞서 대동교를 창설하였으며, 이후 의병을 일으킨 허위에게 투항을 권하였다. 1909년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성학을 일으켜 세우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면 저승에서도 한이 없겠다.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3. 저서
《양원집(陽園集)》, 《유학경위(儒學經緯)》[1] 정언공파 29세 선(善) 항렬.[2] 사실 온건개화파의 주요인물인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조영하 정도를 제외하면 그외 온건 개화파는 제거되지 않았다. 심지어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온건 개화파 거물들도 애당초 사상의 차이로 대립했을 뿐이지 제거 대상은 아니었다. 단, 민영익 같은 경우는 척족이기도 하고 급진파와 점점 사이가 멀어졌기에 제거 대상이 되었다.[3] 의도는 좋았으나, 현실적으로 일제에 부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기선 사후 대동학회는 본격적인 친일단체로 활동하였다. 신기선만 억울하게 당한 셈이다.[4] 이완용과 송병준, 신기선을 일제의 3대 충노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