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09:41:58

이두황

조선군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
<colcolor=#FFF><colbgcolor=#292929> 이두황
李斗璜|Lee Du-hwang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46604096.jpg
이름 <colbgcolor=#FFF>이두황(李斗璜)
공칠(公七)·설악(雪嶽)
본관 인천 이씨[1]
출생 1858년 1월 11일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1916년 3월 9일 (향년 58세)
직업 관료, 군인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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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협력자이자 명성황후 시해범,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 대한제국의 무신으로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2. 생애

1858년 1월 11일 한성부의 빈한한 집안에서 아버지 이명흡(李命洽)[2]과 어머니 조씨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이준황(李俊璜), 아래로 남동생 이문황(李文璜)[3]이 있었다.

1882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장위영(將衛營) 대관으로서 양초초토사 홍계훈 휘하에서 진압에 참여하였다. 청일전쟁에서는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 측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고 평양 주민들을 동원하여 청군의 시체를 처리했다.[4] 우금치 전투에서는 양호도순무영우선봉장(兩湖都巡撫營右先鋒將)의 직책으로 농민군을 다수 살육하였다.[5]

1895년 4월 양주목사로 전임되었다가 6월 육군 참령, 7월 훈련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 승진했다. 10월 8일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이후 금강산과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 머리를 깎고 이토 시치로(伊藤七郞)[6]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료였던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게 살해당했으나, 이두황은 끝까지 살아남아 1907년 순종 즉위 때 귀국하였고, 민비 시해에 대해 사면받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았으며,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정미의병을 제압하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주도하는 등 죽을 때까지 친일 행적을 굉장히 많이 저질렀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하여 전북도장관을 지내다가 1916년 신장염 악화로 인해 58세의 나이로 죽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문을 왔다. 그의 유해는 전라북도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현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김윤식이 짓고 정병조가 이를 썼다.

3. 여담

  •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공무원이었던 차일혁[7]이 1951년에 이두황을 부관참시하고자 그의 묘를 파헤쳤으나, 일본식으로 화장해 뼛가루가 든 항아리만 있었기에 뼛가루를 내던져버리고 항아리는 깨부쉈다고 한다.
  • 일본 망명 생활 도중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도 자기 국모를 시해해 놓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로 다른 망명객들과 함께 영웅인 것 마냥 활개를 치고 다녔다고 한다.
  • <양호우선봉일기>[8]를 기록했다.
  • 이두황 무덤[9]에는 그를 욕하는 문서들이 나돌고 있다. 기린봉 입구에는 단죄비가 세워져 있다.[10]

4. 대중매체



[1] 공도공파 28세 황(璜) 항렬.[2] 족보명 이완필(李完必).[3] 이명 이태황(李台璜).[4] 이때 청군에서는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의 조선군이 이두황의 장위영 군대와 싸웠다.[5] 여기서 이규태이진호도 같이 참전했다. 이진호는 일본군이 훈련시킨 교도중대 350명을 이끌었다.[6] 이토 히로부미의 일곱번째 아들이라는 의미이다.[7] 차일혁의 할아버지가 동학군의 지주인 차치구였다. 이두황은 동학군 살육 때 차치구를 즉결처형했던 전적이 있었다.[8] 1894년부터 1895년 당시 제2차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9] 전주시 기린봉에 그의 무덤이 있다.[10] 시민단체가 2016년 세운 것이다. 파묘된 무덤이 재발견 된건 2013년인데 이걸 밝힌 사람은 다름아닌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