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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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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
高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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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3년
사망 1923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개화파지식인. 항일 운동가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일본에 매국을 한 것도 아닌, 한 마디로 평가하기 힘든 인물이다.

2. 생애

우선 민씨 일가와 엮여 있는 인물로 고종명성황후 밑에서 일하였는데 백성들에게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이전에도 동학 농민 운동 시기 전봉준은 격서에서 고영근과 민영준, 민영환을 탐관오리로 지목했었다. 전봉준 판결문과 공초 기록문 동명 이인이 아니냐는 의문도 있는데, 네이버 백과 사전의 항목을 보아도, 고종과 명성 황후의 눈에 들어서 고속 승진을 했다는걸 봐도 확실히 그 사람이 맞다. 다만 민영준과는 달리 고영근과 민영환이 부패를 저질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정황과 증거가 없어 의문이 있다.

그리고 관료의 입장으로 황국협회에 가담하였고 다시 독립협회로 이동하여서 활동하였다.[1]. 1898년 11월 고영근은 독립 협회 부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으며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가 그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래서 독립협회 몫의 중추원 의원 17인 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중추원 건으로 독립 협회는 개박살이 났고, 고영근은 독립 협회의 재건을 노렸다. 그 과정에서 반대파 대신들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였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2]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박영효, 안경수 등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게 대표적으로 역적 취급 받던 이들과 함께 독립 협회의 복설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윤효정을 통해서 역시 일본에 있던 우범선을미사변의 일본 측 협력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우범선을 죽이기 위해 일부러 접근해서 친하게 지내다가, 기회를 봐서 살해해버렸다. 우범선을 죽인 직후 경찰에 자수,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면을 요청하는 등,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결국 징역 5년으로 감형, 복역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능참봉으로 재직했고, 1910년 한일 병탄 후에는 일제가 사여한 모든 관작을 사양하고 계속 능참봉의 일을 계속했다. 고종 사후 조선 왕조가 이왕가로 격하된 상황에서“대한 제국 황제”라고 쓰인 비석을 세웠다는 이유로 조선 총독부에 의해 파직되고, 1923년 향년 71세를 일기로 이듬해 사망했다.당시 동아일보 기사(1922년)

3. 평가

그간 악질 친일파 우범선을 처단했고 일제에 부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애국지사로 알려졌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지나치게 미화된 인물이라는 평이 있다.

독립 협회 부회장 겸 만민 공동회 회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개화파 지식인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후 독립협회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을 한 친일파로 볼 수도 있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았다는 점에서 충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인생에 대해 제대로 평가를 하기 위해선 우범선을 암살한 계기에 대해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당장 고영근 본인은 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우범선을 죽였다고 주장을 하였으며, 조선에 보낸 글에서도 이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걸 그대로 믿어주기가 상당히 껄끄럽다. 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과 조선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기에는 독립 협회 활동이나 일본 망명 시기 그의 활동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범선을 암살하기 위해 우범선과 친분을 쌓았다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다면, 우범선과 알게 된 지 4~5년이나 지나서야 그를 죽인 점이 또 맞지가 않는다. 그래서 황현이 기록한 매천야록에서는 홍종우김옥균을 암살하여 고종의 신임을 받은 것처럼, 우범선을 암살하여서 일본 망명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타파하려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모순을 뚫고 이 인물의 일생을 이해한다면 상당히 비판적인 결론이 나오기 쉽다. 본래 민씨 일가에서 일하다가 때를 잘 만나서 승진했던 고영근은 시기를 보고 독립 협회와 친일로 말을 갈아탔지만 실패하였고, 이후 황현의 말처럼 일본 망명 시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우범선을 암살하여서 다시 고종의 아래로 들어갔다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고영근은 대단히 이해타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 된다. 그런데 이 해석을 따른다면 마지막 홍릉 능참봉 시기의 일화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생애 말기인만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거나, 대한제국이 패망한 시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돋보였던 시절을 그리며 남은 여생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본래 민씨 일족에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명성 황후의 심복이었고, 그래서 명성 황후가 죽은 다음에는 일시적으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 개화파 지식인으로도 활동을 하였지만 일본 망명 이후에 우범선이 행각을 알고는 본래의 충성심이 되살아나서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고영근은 대단히 충동적인 인물이 되므로 역시 썩 긍정적인 인물상은 아니다. 또한 이 경우는 또 황국협회에서 독립협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단정지어서 평가하기 힘든 인물이다.

4. 관련 문서



[1] 독립협회로 이동한 배경에 대해서 황국 협회가 폭력적 수구 단체로 변해서 이동했다고 나와있는데, 이후 독립 협회도 만만치 않은 과격 단체로 변했다.[2] 이 시기 고영근은 한국에서 암살자가 올 것을 두려워하고있었다라고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서 기록된 요시찰 한국인 거동에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