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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협회 16석 | ||
17석 | ||
※ 중추원은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사실상 기능이 정지됐다. | ||
재적 50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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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협회 | |
한자 명칭 | 皇國協會 |
창립일 | 1898년 6월 30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전신 | 혜강공국 |
이념 | 보수주의 (대한제국) 전통주의 왕당주의 (친(親)고종) 상권수호운동 보호무역주의 전제적 계몽주의[1] 친러 |
창립자 | 홍종우 |
중추원 의관 | 16석 / 50석 (33.0%) (해산 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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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옥균 암살로 유명한 홍종우, 길영수 등과 보부상들이 이끈 협회.
중추원에서 독립협회가 자유주의, 급진주의적 좌파 성향을 보였다면 황국협회는 이에 반대하는 왕당파, 보수주의, 전통주의적 우파 포지션이였다.[2]
2. 활동
19세기 말,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가자 이에 위협을 느낀 보수파들이 설립한 협회. 사실상 정부의 어용단체나 다름없는데다가 독립협회를 탄압한 끝에 독립협회 해산에 큰 기여를 하여 현대의 평가는 많이 박한 편이다.[3]3. 성향
황국협회의 구성원은 당연하게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은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었는데 독립협회는 한양의 시전 상인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지주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 외국의 물산이 자유롭게 들어온다면 보부상과 같은 소상들은 몰락하는 것이 당연하였고 이에 반발하였다.[4] 거기에다 여흥민씨 가문과의 연줄 역시 존재하여 황국협회의 수뇌부는 그들과 협력하여 각종 인력 동원등을 하였다.[5]4. 여담
황국중앙총상회라는 이름이 비슷한 단체가 있다. 이쪽은 서울 시전상인들이 모인 상권수호운동 단체이다. 황국협회와는 정반대로, 만민공동회를 지원하는 등 독립협회와 협력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둘다 황국과 상인이 들어간다는 점 때문에 한능검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간혹 출제되곤 한다.홍종우, 길영수, 이기동이 황국협회를 함께 이끌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사람들의 성명 중 1자씩을 따 ‘홍길동’으로 불렀다는 말도 있다.
5. 주요 인물
6. 둘러보기
[1] 홍종우 등은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온건하게 개혁을 이끌기를 바랬다.[2] 물론 이는 당대의 맥락의 보혁 스펙트럼으로, 1948년 민주공화정 정부 수립으로써 출발한 오늘날 진영 대립과는 양상이 크게 다르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후 일제강점기가 도래하면서 한국 내 정치 계파의 연속성은 크게 단절되었다.[3] 사실 독립협회 해산의 계기를 준 것은 중추원 설립 후 국외로 추방된 서재필과 반역죄로 쫓기던 박영효를 대신으로 추천한(...) 독립협회 자신들이었지만, 이들이 어용단체로서 독립협회 탄압에 앞장선 것도 사실이었기에 평가가 나쁜건 딱히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4]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사실 보부상들은 조선초에 이미 부상단(負商團)이라는 것이 결성되어 있었으며, 그 뒤에도 조정에서는 국가 대사나 국난 위기 때 이들을 수시로 사역하였다. 이러한 조직과는 별도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자 역할들로 조선후기 각 지역에서 생겨난 3~5일장의 실질적인 주역들이였다.(물가변동의 직접적인 체험자들) 또한 구미열강들의 물산들은 공산품들이였지만, 이들이 조선에서 가져가는 것들은 주로 쌀이였다.(개항이후 대부분의 구미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상품성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인근의 청나라와 일본이 집중적으로 침투하고 있었다.)[5]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여흥민씨 가문과의 개인적인 연결이라고 하기보다는 조정에서 통제되고 있는 보부상단체들을 정권을 일끌고 있던 민씨들이 사용하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