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08:45:08

장제스의 학설

{{{#!wiki style="margin:-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aa> 파일:장제스 투명.svg장제스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생애 · 평가 · 사상과 성격 · 여담 · 한국과의 관계 · 관련 문서 · 대인관계 · 창작물 · 4대가족
인물
가족 장사천 · 장조총 · 쑹아이링 · 쑹칭링 · 쑹메이링 · 쿵샹시 · 쑨원 · 장징궈 · 장웨이궈 · 장샤오옌 · 장완안
사건
사건 신해혁명 · 영풍함 사건 · 제1차 국공합작 · 광저우 상단 사건 ·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국민당의 2차 동정 · 중산함 사건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 · 난창 군무선후회의 · 천도논쟁 · 4.12 상하이 쿠데타 · 영한합작 · 장제스-다나카 회담 · 장황사변 · 국민당의 2차 북벌 · 제남 사건 · 편견회의 · 호남 사건 · 반장전쟁 · 제1차 장계전쟁 · 제1차 장풍전쟁 · 제2차 장계전쟁 · 제2차 장풍전쟁 · 장당전쟁 · 중원대전 · 초공작전 · 제1차 초공작전 · 제2차 초공작전 · 제3차 초공작전 · 제4차 초공작전 · 제5차 초공작전 · 탕산 사건 · 제1차 양광사변 · 만주사변 · 장왕합작 · 제1차 상하이 사변 · 왕징웨이 저격 사건 · 제2차 양광사변 · 7군자 체포 사건 · 시안 사건 · 국공합작 · 중일전쟁 · 상하이 전투 · 동 공작 · 1939년 동계공세작전 · 대륙타통작전 · 국공내전 · 2.28 사건 · 재정경제긴급처분령 · 대만 계엄령 · 백색 공포 · 국부천대 · 국광 작전 · 장제스의 사망
단체 중화민국 국민정부 · 중국국민당 · 황포군관학교 · 국민혁명군 · 남의사 · CC단
기타 중정기념당 · 중정구 · 장공기념가 ·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 · 장제스의 학설 · 신생활운동 · 탈장화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 · 파일:파스케스(세로).svg 파시즘 }}}}}}}}}

파일:중국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권 보수주의 관련 문서
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svg
파일:마카오 국기.svg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관련 이념 국가자본주의 (당국 자본주의) · 삼민주의(일부) (다이지타오주의 · 장제스의 학설)중국 국민당 · 중화제국주의 · 중화민족주의 (극단민족주의(極端民族主義) · 한(漢)민족주의) · 신권위주의 · 신유교주의 · 초보수주의
연관 개념 대한족주의(일부) · 반자유주의 · 법가 · 아주가치(亞洲價值) · 유가/유교 · 중화민족 · 중화사상 · 하나의 중국/양안통일
지역별 대만 · 홍콩
주요 정당* 1949년 이전 진보당△ · 중국국민당당내 우파 (남의사 · 서산회의파)
중화인민공화국 중국공산당◎ · 중국민주당
중화민국/대만 (범람연맹)* 신당 · 중국국민당 · 중화민족치공당 · 친민당
홍콩 (건제파)* 민주건항협진연맹 · 서구룡 새로운 힘 · 신민당 · 신세기논단 · 실정원탁 · 자유당 · 홍콩 경제민생연맹 · 홍콩 공회연합회** · 홍콩 교육 노동자 연맹** · 홍콩 및 구룡 노동조합 연맹** · 홍콩섬각계협합회 · 홍콩신방향
마카오 (건제파) 광둥마카오동맹 · 마카오 고용주이익협회 · 마카오공회연합총회** · 마카오발전신연맹 · 마카오부녀연합회 · 마카오 전문가 이익연회 · 마카오주민회연합총회 · 문화체육연합 · 민중건오연맹 · 사회복무교육촉진회 · 종업원단체연합
싱가포르 인민행동당
주요 인물 1949년 이전 량치차오 · 셰츠 · 쉬충즈 · 쑨커 · 쑹메이링 · 장제스 · 위안스카이 · 캉유웨이 · 후한민
중화인민공화국 덩샤오핑◎ · 량수밍(梁漱溟) · 시진핑◎ · 왕후닝◎ · 양상쿤◎ · 장시공(强世功)◎ · 후시진(胡錫進)
중화민국/대만 (범람연맹)* 마잉주 · 쑹메이링 · 쑹추위 · 장완안 · 장제스 · 장징궈 · 주리룬 · 허우유이
홍콩 (건제파)* 레지나 입 · 렁춘잉 · 성룡 · 스태리 리 · 존 리 · 캐리 람 · 퉁치화
마카오 (건제파) 페르난두 추이 · 호얏셍
싱가포르 고촉통 · 리콴유 · 리셴룽
언론 중국시보 · 중앙일보 · 중국 텔레비전 · 환구시보
단체, 그룹 건제파 · 범람연맹 · 왕왕 그룹
관련 사건, 시기 4.12 상하이 쿠데타 · 개혁개방◎ · 국공내전 · 국광 작전 · 국민혁명 · 국부천대 · 난징 십년(南京十年) · 당국 체제 · 동치중흥(同治中興) · 백색 공포 (대만 계엄령) · 신생활운동 · 양무운동*** · 의화단 운동 · 중국몽 · 중화제국(1915~1916) · 홍콩 국가보안법
그 외 N세대 · 분청 · 시노필리아 · 중국 위협론 · 중체서용 · 친중화민국 · 통일전선 · 한푸 운동 · 홍콩의 민국파
소멸된 정당은 △ 표시 / 중국 본토의 경우 신권위주의 계열 정당과 인물, 조직 등은 ◎ 표시.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분파
}}}}}}}}}
파일:장제스2.jpg
장제스의 학설
蔣介石的學說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0aa> 영어 Political Philosophy of Chiang Kai-shek
Chiangism
창시자 장제스
이념 보수주의 (중국 대륙대만)
삼민주의
유사 파시즘[1]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지도주의)
중국 내셔널리즘 (혁명적 내셔널리즘)
반제국주의 (국부천대 이전)
반자본주의 (국부천대 이전)[2]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1955년 이전)
주요
정치인
장제스, 장징궈, 장웨이궈, 다이지타오
천리푸, 다이리, 쑹메이링 등등
스펙트럼 중도[3][4] (상하이 쿠데타 이전)
우익 (중화민국 국민정부)
혼합 정치 (중일전쟁 시기)[5]
우익 ~ 극우 (대만 백색 공포 시대)
정당

1. 개요2. 성향
2.1. 권위주의 성향2.2. 반공혁명 사이
2.2.1. 사회주의 사상과의 관계2.2.2. 삼민주의문화적 보수주의2.2.3. 파시즘 논란
2.2.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2.2.4. 장제스 정권 분석
3. 같이 보기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이자 총통이였던 장제스의 사상을 일컫는 말이다. 장제스주의(蔣介石主義 / Chiangism)라고도 한다.

2. 성향

우익 권위주의와 유사하다고도 평가받으며, 중국 내셔널리즘적 성격을 보인다.

유교주의, 삼민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6], 혁명적 내셔널리즘, 반제국주의, 가족주의, (비공산)사회주의[7], 유사 파시즘[8] 등등 여러가지 모순되면서 다양한 사상적 요소가 있었다. 반면에 장제스는 자유주의개인주의는 서구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해악이라고 보았다.

2.1. 권위주의 성향

장제스의 권위주의 사상은 1912년경 스스로 발행인을 맡은 군사학 잡지 군성잡지(軍聲雜誌)에서 최초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장제스는 "우리 당이 중국을 강대한 공화국으로 건설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10년 안에, 단지 미국프랑스 공화정의 껍데기만을 치리(治理)하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개명 전제의 정신을 이용하여 계획을 세워야 한다." 라고 언급했다. 개명 전제론은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공화 혁명론에 대항하여 내놓은 입지로 "중국이 급하게 공화제를 도입할 경우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으니 개명한 군주가 우선 민도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통치자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쑨원의 삼서론에 입각하여 국민당의 총재인 본인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장제스가 기본적으로 추구한 것은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가정'이었다. 장제스는 일본 유학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초국가주의와 유년 시절에 받았던 전통 교육, 국민당원으로서의 쑨원의 사상 등의 영향을 모두 받았는데 이 사상들의 공통점들은 바로 강력한 권위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었다. 장제스는 쑨원의 발언을 언급하여 "중국인은 자유를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량치차오의 신민설에서도 언급) 지금 필요한 것은 빈곤의 격퇴(와 이를 위한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장제스는 인민의 자유가 사회의 발전에 비례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의회민주주의가 언젠가 중국에 도입돼야 함은 인정했지만 당대 중국의 상황에는 언감생심이라면서 도입을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을 추구한 쑨커나 다른 지식인과 충돌하기도 했다. 당시 중국은 군벌+일제+공산당의 3단 콤보 개트롤짓 때문에 제대로 의회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거부하긴 했지만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이미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1937년 12월 입법원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훈정 시기 국민당은 언론과 교육을 국민당이 총괄하고 쑨원의 이론과 삼민주의 사상을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제스를 위한 첩보 / 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납치하여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고 CC단도 한몫했다. 중국의 강제 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 데 끌려와서 코로 마라탕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지식인의 반발을 불러오며 이후 국공내전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2.2. 반공혁명 사이

"일본인들은 피부병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다."
"日本人是皮膚病,共產黨是心臟病"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노(亡國奴, 외국에 주권을 잃은 상실된 국가의 국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中國如果亡於帝國主義,我們還可以當亡國奴,尚可苟延殘喘,如果亡於共產黨,則縱為奴隸尚不可得"

장제스의 정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반공 성향이다. 국민당은 1차 국공합작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에 꽤 우호적이었지만, 장제스 본인은 소련 방문을 기점으로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어 여러 번 쑨원에게 국공 합작을 끝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소, 용공 성향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의 고문이었던 미하일 보로딘은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장제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중산함 사건도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쿠데타를 선동하여 역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 장제스의 사상은 반공적이었으나 그의 정책은 자본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 당시 군벌들이 다 그러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적들과 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던 사람이다. 장쉐량을 비롯한 만주 군벌들도 북벌 시절엔 적이었고 펑위샹, 옌시산과는 천하를 놓고 한 번씩 다투어봤으며 리쭝런, 바이충시는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룽윈, 천지탕 등의 지방 군벌들과도 이합집산과 반목을 반복했다. 그 장제스가 국공 합작을 깨기 전까지 일관되게 적대했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편하게 헤쳐모여가 가능한 군벌들과 공산당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군벌들에 우세한 점이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 사상인데 공산당은 국민당보다도 혁신적이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를 알기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목을 매달았다. 더불어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중앙군을 지방에 박아 군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쓰촨, 윈난, 화북의 군벌들은 장제스하면 치를 떨게 되고 아예 공산당과 내통하여 태업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쉐량의 시안 사건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합작을 아주 거부한 것은 아니어서 대장정 이후 공산당에 홍군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다시 받아주겠다고 제안한 바도 있고 시안 사건으로 강요된 합작도 번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일 감정이 너무 고조되어 합작을 거부했다간 국민당의 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컸다. 그래도 공산당은 결국 없애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었고 중일 전쟁 이후 무리한 공세를 취하다가 망했다.

대중에서 장제스는 반공 지도자로 유명하고, 결과만 보면 그렇게 됐지만 그렇다고 '반공'만으로 장제스의 정치적 성향과 사상을 정리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일단 최고 권력자로서 정치적 행보는 둘째치고 국민당의 역사 전체에서 사상 자체만 두고 보면 장제스보다 훨씬 더 일관적이고 원칙주의적으로 반공 우익을 표방해온 세력은 꽤 있다. 국민당에서 진짜 강경 우파 성향은 후한민, 그리고 서산회의파의 중추인 셰츠, 쉬충즈같이 국민혁명 초기부터 국공결렬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들이었고,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히려 보로딘, 왕징웨이 같은 좌파와 가까운 인물로 평가받던 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무슨 권력 한줌 없는 샌님들이 아니라 당장 펑위샹, 리쭝런, 옌시산 같이 국민당 우파 정치인들이 군사력을 필요로 했던만큼 그들의 정치적 명분과 대의도 필요했던 다른 대군벌들과 종종 손잡으며 실제로 장제스의 권력에 심각한 위협을 끼칠 수도 있는 쟁쟁한 정치세력이었다.

당장 서안 사건 때만 하더라도 좀 많이 현실적인 계산도 끼어있지만 허잉친, 리쭝런 같이 총통의 일신이 위험하더라도 초공의 기치가 더 중요하다며 시안도 폭격으로 밀어버리고 초공작전을 지속하자던 강경 인사들도 충분히 있었다. 즉, 피상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국민정부 시기 장제스의 정치적 대립은 자기가 정점인 국민당 vs 한주먹도 안되는 공산당의 1대1 구도가 아니라 실제로 국민당 내에서도 수많은 다른 계파, 경쟁 군벌들과도 동시에 싸우면서 공산당하고도 싸우고, 나중엔 추가로 이들보다 훨씬 강한 일본하고도 싸워야 했던 게 1930년대 장제스의 처지였다. 그리고 장제스가 그 와중엔 본인보다도 더 강경 반공 우익인 다른 국민당 우파 정치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정적들과 싸우며 정신없던 사이 공산당은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일삼으면서도 어쨌든 굉장한 생존력을 발휘하고 타격을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세력을 키운 끝에 2차 대전이 끝나고 2차 국공내전이 터졌을 땐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위세로 성장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중국의 통일자였던 장제스가 왜 '한줌도 안되는' 공산당에게 결국은 패배하고, 특히 장제스 권력의 정점이었던 1930년대에 토벌을 마무리짓지 못했나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쉬워진다. 장제스가 당장 북벌 완수, 동북역치, 이에 따른 다른 군벌들의 반발로 인한 반장전쟁, 중원대전, 여기서 숨돌릴 사이도 없이 만주 사변과 일본의 침략이란 사방의 수많은 다른 적들과 차례로 맞서 싸우는 동안 공산당은 이리저리 쫒기면서도 적어도 세력 확대와 몸집 키우기라는 하나의 전략적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해서 보면 장제스는 국민혁명의 중진들 중에선 오히려 중산함 사건, 상하이 쿠데타 같이 확실하게 반공으로 기울어진 1920년대 후반 이전까지 포함하면 이념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유연했던 편에 속한다.
파일:Long live the revolutionary china_Soviet poster 1927.jpg
혁명적 중국 만세!
1927년에 제작된 소련의 포스터. 쑨원을 중심으로 다른 국민당의 중진들을 소개하고 있다.[9]

이런 측면에서 1930년대엔 둘째 아들이자 친자 논란이 있는 장웨이궈를 독일 유학 보냈지만 그 이전 1920년대엔 장남 장징궈를 소련 유학 보냈다는 사실이 상당히 상징적이다. 국민혁명에서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재 시도와 결렬 사이 1930년대 장제스가 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파시스트 정치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반공에 치중하면서 가장 친해졌던 외부세력이 독일이었다면, 그보다 더 긴 국민당 전체의 역사로 보면 국민당과 가장 우호적이었던 외부세력은 당연히 소련이었다. 국민당의 젊은 혁명가이자 군사 엘리트였던 경력 초기만 하더라도 장제스는 미하일 보로딘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고, 상하이 쿠데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련 측은 소위 '아직 즙을 덜짠 레몬'으로 평가했다. 즉, 공산당 소속은 아니더라도 더욱 혁명적이어질 여지가 있는 동조세력. 때문에 소련은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호의적인 입장이었고, 심지어 상하이 쿠데타 이후로도 국민정부 치하에서 중소관계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막상 중국공산당, 특히 마오쩌둥에 대한 소련의 시선은 1920년대 후반 마오가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주장하며 소련이 직접 키워낸 리리싼을 비롯한 소위 '28인의 볼셰비키'들과 대립각을 세울 때부터 표면적으로는 세계 공산당의 연대 운운하면서도 오히려 상당히 냉랭한 편이었다. 2차 대전 전후 긴 국공내전 시기 내내 소련은 2차 대전 말기 만주 작전 과정에서 생긴 잉여 군수품이나 일본 노획물자를 처리할 겸 대량으로 중공에게 군수지원을 해주기 전까진 이리저리 지령 내리는 거 말곤 사실 딱히 해준 게 없고, 차라리 국민정부 치하 중국을 더 안정적인 현지 파트너로 보고 더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미 끝난 전쟁 막타 치는 거니 이 시기 소련군을 상대한 일본 관동군은 거의 스스로 자체분해됐다 할 만큼 빠르게 대규모로 무너졌는데 관동군 특성상 이때 소련군이 대규모로 얻은 노획 군수물자는 대부분 치하 전차 같은 육군장비였고, 그나마 소련이 후발주자라서 관심 가질 만한 군함, 해상 비행 관련 기술도 아니고 독소전을 겪으며 세계 최강의 육군세력으로 단련된 소련군 관점에선 본토 가져가는 운송비가 더 비싸게 나올 희대의 장난감 같은 물건들이었다. 이러다보니 겸사겸사 땡처리도 하는 겸 소련군은 당시 관동군 노획장비 태반을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공 홍군에게 넘겨줬고,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장난감같다고 땡처리한 이런 일제 군수품은 2차 국공내전기 물적으로 열악했던 홍군의 손에 맹활약했다. 국민당 또한 당장 대만 시절 특히 소련 유학 다녀온 장징궈가 추진한 통제, 계획경제식 경제개발 정책도 그렇고 경제, 국가 건설 정책 전반에서 소련의 영향력도 상당한 편이었다.

개인적인 정치가, 사상가로서도 장제스는 반공주의는 강력하게 견지했지만 그가 추구한 정치적 가치관은 일반적인 반동 우익 정치가 아니라 공산주의식 혁명에는 반대하지만 분명 나름의 근본적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혁명 정치의 일종이었다. 장제스는 평생 본인의 정치적 숙원이자 이상을 쑨원이 시작한 국민혁명의 완성으로 보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 또한 이 뜻을 계승하고 유지할 혁명가로 보았다. 장제스 또한 공산당과 비슷하게 '반동'이란 말을 주로 비공산당 경쟁 군벌 세력을 지칭하는 욕으로 썼고, 외부 열강 세력을 뿌리깊게 혐오했으며, 당시 중국의 자본가 세력은 태반이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라며 이들을 우대하긴커녕 국민정권 치하 중국은 종종 정권이랑 충돌하는 자본가들 또한 '외세 앞잡이', '수구반동' 꼬리표 붙히고 잡아 조지는 그다지 비즈니스프렌들리하지 못한 정권이었다. 당장 장제스가 청방, 남의사 같은 친위 테러조직들을 동원해 백색테러를 저지르고 다닌 희생자들 중엔 공산당 같은 좌익 못지 않게 토지 개혁, 기업과 산업 국유화 등을 추구하는 본인 경제 개혁과 정책에 반대하는 자본가, 사업체들도 종종 두드려패고 조지고 다녔다.

정리하자면 크게 보면 반공 지도자로서 이름이 남았지만 본인 또한 스스로 나름 진보적, 일정 부분 사회주의적 내용이 있는 국민혁명의 혁명가로서 관점을 견지했으며 중국의 재통일과 근대화라는 목적에 유용하기만 하면 중국 전통 유교사상에서부터 친소, 친공 노선을 넘어 친독 파시즘까지 다양한 사상적 조류와 성향을 넘나든 독창적이면서도 유연한 사상가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이데올로기적 다양함과 유연성은 비단 장제스뿐만 아니라 쑨원도 그렇고, 평생의 숙적이자 공산주의자지만 소련의 오리지널과는 영 뭔가 다른 걸 만들어낸 마오쩌둥까지 포함하여 이 시기 중국 정치 지형 자체 전반의 특성이기도 하다.

구체제는 붕괴했고 새로운 체제는 자리잡지 않은 과도기적 난세에서 변화하는 세상의 조류를 맞아 당시 중국 지식인들도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등 각종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분명 뚜렷하게 받았지만 중국의 물리적인 사회경제적 현실은 저런 서구발 근대 사상들과는 너무나 다른 문맥에서 논다는 건 누구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면에서 평가하자면 이런 장제스와 국민혁명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은 유연함과 독창성으로 평가해줄 수 있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자면 소련 입장에선 전략적 동맹이면서 지나치게 반공적이고, 독일이나 일본 관점에선 지나치게 친공용소적이고, 미국과 영국 입장에선 민중을 선동해서 본인들의 이권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빨갱이'나 매한가지라 지원에 소극적으로 나오는 등 국민당에게 마냥 도움만 된 건 아니었다.

2.2.1. 사회주의 사상과의 관계

국내에서 장제스는 보수주의적인 면모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반공주의자이자 문화적 보수주의[10]이긴 했지만, 반사회주의자는 절대 아니었다. 국민당 내에서 우익이긴 했지만 파시스트적 국가협동조합주의라고 하기에는 여러 사회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받았다.

장제스는 실제로 젊은 시절에는 혈기넘치는 좌파 청년이였고 소련에서 교육을 받아 레닌주의적 사상체계와 통치방식을 어느정도 체화했다. 노골적으로 공산당 때려잡자!는 성향이 강해지기 전까지는 서양 좌파들에게서 위대한 사회주의 지도자로 옹호받기도 했다.

대륙 시절 장제스주의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거의 없고 국가자본주의적인 한국의 박정희주의나 일본의 쇼와 국가주의와 달리,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대표적으로 전쟁지원과 무산계급에 대한 부의 분배를 위해 상하이 자본가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한 사건이 대표적이였다.

국부천대 이후 대만에서는 미국의 지원과 감시에 따라 경제정책을 펴야 해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펼 수가 없었고, 전형적인 국가자본주의 정책에 가까워져서 그의 사회주의적 정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제이 테일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그가 '유교적 가치'를 프랑스 혁명의 '급진주의'와 '혁명적 내셔널리즘'을 결합시킨 좌경적인 유교-자코뱅주의(left-leaning Confucian-Jacobinist)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장제스의 독재적이면서도 혁명에 대한 갈망을 보았을 때, 대륙을 마오쩌둥이 통일했고 국부천대 이후 경제적, 정치적으로 우경화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만약 마오쩌둥 대신 장제스가 대륙을 통일했다면 우리가 아는 우익적 독재자가 아닌 사회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 반서구주의적 내셔널리즘을 기반해 미국/소련 체제의 대안으로써 제3세계 국가들을 계도하는 노선으로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1] 또한 국부천대 이후에도 쑨커가 다져놓은 국민당의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통치를 지지했다.

2.2.2. 삼민주의문화적 보수주의

장제스의 삼민주의는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했음에도, 구별되는 특징들이 있다. 쑨원은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서구 자유주의, 계몽주의, 마르크스주의 등등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진보주의를 적극 수용했으나, 장제스는 그러한 가치들이 중국에 맞지 않는 썩어빠진 서구적이고 퇴폐적인 가치라고 보았고 유교적인 문화보수주의와 가부장적 보수주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2.2.3. 파시즘 논란

“우리 개인의 모든 말과 행동은 국가와 민족을 유일의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권위주의 + 반공 성향 정치가였고 대륙에서 장제스의 시대가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날뛰던 1930 ~ 1940년대였던 것에 주목하여 장제스가 파시즘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국민당의 유력 정치가 왕징웨이장쉐량 등은 유럽을 방문하면서 히틀러, 무솔리니를 칭송하며 파시즘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장쉐량은 장제스를 중국의 히틀러로 옹립하여 중국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후 천리푸, 다이리 등 장제스의 측근들이 지휘한 CC단, 남의사 등은 게슈타포, SS와 같은 파시즘 단체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중화민국과 나치 독일이 밀접한 교류를 하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협력한 것 역시 장제스 파시스트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저 시기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평가가 좋았던 시절인 만큼 파시즘이나 히틀러, 무솔리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전 세계적으로 있었다. 윈스턴 처칠 총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도 무솔리니와 파시즘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가 있었다.
2.2.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분명히 장제스 정권이나 장제스를 옹호하는 다이리남의사, 천리푸, 천궈푸CC단 등에서 파시즘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며 흑룡회를 비롯, 일본의 파시즘 성향이 짙은 비밀결사와의 연계가 있었으며 1932년 남의사 결성 이후 중국 내부에서 장제스와 파시즘의 연계에 관한 의혹이 제기된 바가 있다. 예컨대 1932년 7월 대공보는 장제스에게 '귀하가 파시스트당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라는 공개 질문서를 제출했고 왕징웨이 계통의 황포동학구국단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 질문을 보냈다.
작년 이래의 외모, 수재, 비화는 귀하의 6년간에 걸친 전정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귀하는 조속히 하야하여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처지인데도 오히려 불한당들을 이용하여 파시스트당을 조직하려는 것은 위로 쑨원 총리의 유언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아래로 동지의 기대에 배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귀하에 대하여 다음의 제항목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 귀하는 어찌하여 황포동학을 자기 옹호에 이용하고, 혁명을 돌보지 않는가.
2. 귀하는 국민당의 영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당 외에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여 국민 혁명을 파괴하려 하는가.
3. 삼민주의를 고취함에 있어서 폭력 정책을 사용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귀하는 어찌하여 철혈대로 하여금 민중을 압박하는가.
4. 귀하는 황제가 되어 인생의 부귀를 누리려고 하지만 황포 동학을 이용하여 혁명 군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말라.
5. 만약 혁명 구국을 위하여 파시스트당을 조직한다고 하면 바야흐로 항일을 위해 출병하라.
6. 파시스트당의 유일한 수단은 암살에 있으나 귀하는 3천 명의 사병으로 4억 민중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다고 사료하는가.
7. 파시스트당의 경비는 1개월 120만 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귀하의 강회 지역의 영세민이 날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는 궁핍한 상태를 염려한 일이 있는가.
8. 귀하는 파시스트당의 조직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째서 중앙군관학교의 군관특별연구반, 교육총대 및 단경반에 대해 파쇼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가.
9. 귀하는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의 내부는 무솔리니의 친척으로 충만되어 무솔리니 일가의 천하로 보이지 않는가.
10. 귀하는 파시스트당을 존경한다고 했다. 하지만 각국 파시스트당은 대외 무저항주의를 국민에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해 장제스는 "나는 파시즘을 아주 싫어한다."라고 답변할 뿐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어 대공보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중국 혁명의 조직과 방략에는 쑨원 총리가 정한 조직과 방략만으로도 국민 혁명의 사명을 완성하기에 충분하다. 외국의 혁명 방략을 좇아서 중국의 민족성과 상반되는 조직을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만약 내가 사욕을 품는다면 국가도 민족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쑨원 총리를 배반한 반혁명 분자가 국민당 고유의 조직과 방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고유, 유일한 혁명 조직을 회복하지 않고 파시스트의 조직을 좇아서 이를 중국에 강행하려고 함은 공산당이 중국을 적화하려고 함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살아서도 중국 국민당원이요, 죽어서도 당귀가 될 뿐이다. 중국 혁명의 조직에는 국민당의 조직이 있을 뿐이며 중국 혁명의 방략에도 역시 국민 혁명의 방략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 혁명 완성을 위한 유일무이의 도립이다. 이외의 조직은 절대로 반대한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민국 13년에 성립한 국민당의 혁명 정신과 국민 혁명의 조직 및 방략을 부흥시킴으로써 삼민주의의 실현을 기대함에 있다."

하지만 장제스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파시즘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파시즘의 혁명적 열기에 관심을 보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기존 국민당원들에게서 혁명적 열기가 사라지고 오히려 중국공산당에게서만 열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제스의 맹우이며 반공 이데올로그 다이지타오도 한탄했던 문제였는데 장제스는 혁명 열기를 고취시키고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파시즘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고 분명 관심과 희망을 가졌었다.
"1931년 9월 18일 이후,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방하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앞으로 중국 혁명에 대한 협의체는 삼민주의와 파시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국민당의 삼민주의 원칙이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피를 수혈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파시즘은 중국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내용면에서 삼민주의를 활용하고 기능면에서 파시즘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934년에는 이렇게도 말했다.
"유명한 정당이 있는 외국에서는 그 당이 통치권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경우 유명한 정당은 국민당입니다. 그러나 국민당은 권력이 없는 형식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정당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최근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중국에도 파시스트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는 장제스가 파시즘의 사상적 면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는 기능적 수단에 주목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시 중국 엘리트들에게 파시즘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매우 진보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두음 박사는 장제스가 유럽 파시즘에 관심을 보인 분야는 조직에 있지 '사상'에 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분적인 기능적 수단을 차용하는 경우는 비파시즘 계열의 여러 국가에 대해서 얼마든지 보인 경우이다. 예컨대 팩스턴의 견해를 따르면 후안 페론이나 안토니우 살라자르. 사상면에서는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트들은 유교 사상이 근간이 되었다.

요약해서 장제스가 20년대 후반~30년대 중후반에 파시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근대화의 수단 중 하나로 관심을 보인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장제스의 통치 방식은 파시즘적인 색채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2.2.4. 장제스 정권 분석

중국국민당이 권위주의 정권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학적 분석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고 중국 파시즘에 대한 연구도 남의사, CC단, 그중에서도 남의사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중국에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준동한 세력으로 그나마 지목되는 것이 남의사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남의사와 파시즘의 연대를 연구했던 것은 로이드 이스트먼인데 그는 이렇게 규정한다.
남의사가 파시스트 조직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때 역행사의 지도층이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명시적인 방법으로 파시즘에 전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역행사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잠깐이었다.

우선 이런 문제는 무엇이 파시즘이냐는 파시즘의 정의 차원에서 상당히 민감한데 권위 있는 파시즘 연구자들인 로버트 팩스턴이나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는 남의사가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파시즘 단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소위 '파시즘의 최소치'에 중점을 두는 팩스턴의 경우 구조주의적 파시즘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제국조차도 파시즘이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장제스나 남의사나 파시즘 얘기를 꺼낼 건덕지가 없게 된다. 패스모어의 경우에도 남의사는 대중 정당이 아니라 비밀결사로 파시즘식 대중 정당으로는 볼 수 없다고 분류한다.

물론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는 일본식 파시즘의 존재를 긍정할 경우에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긴 한다. 일본식 파시즘을 긍정할 경우, 현양사, 흑룡회를 비롯한 비밀결사들의 행동이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일본 파시즘은 대중 운동보다는 위의 군사,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은 파시즘 정당이 대중 운동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서구와 달리 기존의 국가 조직과 지도자를 탈바꿈하는 식으로 집권하기 때문에 없잖아 국민당의 통치에도 맞아떨어질 건덕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남의사는 1938년 이후로 해체되어 중일전쟁을 위한 정보기관에 흡수되었고 그 이전의 남의사의 첩보 활동들도 단순히 권력 탈취와 국가 개조를 위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정두음 박사의 경우, 남의사를 파시스트 단체로 정의하지만 이는 남의사의 공식적 이념보다는 선전 자료, 출판물을 중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3. 같이 보기

4. 둘러보기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사상의 분파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온건 · 개혁적 보수주의
녹색 보수주의 일국 보수주의 실용적 보수주의 온건 보수주의 진보적 보수주의
현대적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재정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신보수주의
고전적 보수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고보수주의
가족주의
강경 보수주의
초보수주의 교권주의 토착민주의 반동주의 국민보수주의(일부)
인종 보수주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종교적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기독교 우파 이슬람 민주주의 이슬람주의 불교 민주주의
유대 보수주의 종교 시오니즘 가톨릭 보수주의 힌두트바 보수주의 신학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 융합주의 고자유지상주의
지역별 보수주의
보나파르트주의 파일:프랑스 국기.svg 오를레앙주의 파일:프랑스 국기.svg 법통주의 파일:프랑스 국기.svg 드골주의 파일:프랑스 국기.svg 보수혁명 파일:독일 국기.svg
일국 보수주의 파일:영국 국기.svg 대처주의 파일:영국 국기.svg 트럼프주의 파일:미국 국기.svg 푸틴주의 파일:러시아 국기.svg 유라시아주의 파일:러시아 국기.svg
보수민주주의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원칙주의 파일:이란 국기.svg 알폰소주의 파일:스페인 국기.svg 카를로스주의 파일:스페인 국기.svg 프랑코주의 파일:스페인 국기.svg
메넴주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정통 페론주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밀레이주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일민주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따뜻한 보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국민우파 파일:호주 국기.svg 후지모리주의 파일:페루 국기.svg 피노체트주의 파일:칠레 국기.svg 보우소나루주의 파일:브라질 국기.svg 베를루스코니주의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신보수주의 파일:중국 국기.svg 장제스주의 파일:대만 국기.svg
나라별 현황
대만의 보수주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독일의 보수주의 러시아의 보수주의 미국의 보수주의
영국의 보수주의 인도의 보수주의 중국의 보수주의 일본의 보수주의 호주의 보수주의
홍콩의 보수주의
문화, 지역별 현황
한반도의 보수주의
기타
우익 정치 보수주의 페미니즘 성소수자 보수주의 흑인 보수주의 보수적 사회주의
중도실용주의 우익대중주의 군주주의 (왕당파) 아시아적 가치 삼민주의
반공주의 대안 우파 안티페미니즘(일부) 반자본주의(일부) 반자유주의(일부)
부르주아 정당 친생명 귀족 이익 영국 연합주의 전통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보수좌파 탈파시즘 유사 파시즘 사회자유 보수주의
블루 타이드 사회적 위계 백래시 백색 테러 민족주의**
힘에 의한 평화 시니스트리슴 폴크스게마인샤프트 폴크헴메트
관련 단체
국제민주연합 중도민주 인터내셔널 무슬림 형제단 아데나워 재단 에라스뮈스 재단
주요 3대 이념의 분파 (사회주의 · 자유주의 · 보수주의) · 기타(내셔널리즘 · 생태주의 · 포퓰리즘)
* 국민주의는 근대(modern)에 탄생한 이념이다. 따라서 21세기 기준 서구 선진국에서 국민보수주의가 강경 우익인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근대적/현대적(modern) 보수주의이며, 고전적(classical) 보수주의에 속하지 않는다.
상징 | 역사 | 인물
}}}}}}}}} ||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 사상의 분파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공상적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이슬람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 유교 사회주의
생시몽주의 오언주의 푸리에주의 블랑키즘 유대교 사회주의
아나키즘
아나코 생디칼리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적 아나키즘 상호주의 아나키즘 아고리즘
아나코 페미니즘 녹색 아나키즘 사회생태주의 정강주의 후기 아나키즘
반란적 아나키즘 크리스천 아나키즘 아나코 원시주의 아나코 자연주의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즘
공산주의
틀:공산주의 참고.
개혁적 사회주의
자유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유럽공산주의 아랍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 아프리카 사회주의 제3세계 사회주의 말라네시아 사회주의
윤리적 사회주의 시장사회주의 제3의 길
그 외 분파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유럽공산주의 황색 사회주의
보수적 사회주의 생태 사회주의 온건 사회주의 성소수자 사회주의 밀레니얼 사회주의
사회주의적 내셔널리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혁명적 사회주의
지역별 사회주의
블레어주의 파일:영국 국기.svg 노동 시오니즘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룰라주의 파일:브라질 국기.svg 볼리바르주의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차베스주의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나세르주의 파일:이집트 국기.svg 카다피주의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간디 사회주의 파일:인도 국기.svg 마르하엔주의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산디노주의 파일:니카라과 국기.svg
마곤주의 파일:멕시코 국기.svg 장제스주의 파일:대만 국기.svg 왕징웨이주의 파일:대만 국기.svg 인민주의 파일:러시아 국기.svg 혁명 페론주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나라별 현황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미국의 사회주의 영국의 사회주의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일본의 사회주의
프랑스의 사회주의 독일의 사회주의 호주의 사회주의
문화, 지역별 현황
한반도의 사회주의
관련 개념
작업장 민주주의 협동조합 경제민주주의 노동자 자주 관리 프롤레타리아
노동운동 노동조합 파업 계급투쟁 계급협조
사회적 평등주의 국유화 노동조합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연관 이념
급진적 자유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좌익대중주의 기독교 좌파 생디칼리슴
자코뱅주의 마르크스주의 좌익 보수주의 집산주의 인디헤니스모
기타
좌익 정치 탈자본주의 반자본주의 자결권 민족해방
안티파시스트 액션 샴페인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일부) 해방신학 제3세계주의
핑크 타이드 프롤레타리아 정당 아일랜드 공화주의 통일전선 대안세계화
적색 테러
관련 단체
인터내셔널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진보주의 인터내셔널 상파울로 포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 세계반제플랫폼 진보동맹
주요 3대 이념의 분파 (사회주의 · 자유주의 · 보수주의) · 기타(내셔널리즘 · 생태주의 · 포퓰리즘)
상징 | 역사 | 인물
}}}}}}}}} ||

파일:파스케스(가로).svg
파시즘
<bgcolor=#fff,#1c1d1f>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념 국가주의 · 국수주의 · 군국주의 · 권위주의 · 대중주의 · 제국주의 · 민족주의 · 반공주의 · 지도자원리 · 반자유주의 · 반자본주의 · 영웅주의 · 전체주의 · 협동조합주의
분파 교권 파시즘 · 국민생디칼리슴 · 군단주의 · 나치즘(네오나치즘) · 네오파시즘 · 대안 우파파일:모호 아이콘.svg · 러시아 파시즘(유라시아주의) · 렉시즘 · 메탁사스주의파일:모호 아이콘.svg · 영국 파시즘 · 오스트리아 파시즘 · 원류 파시즘 · 이탈리아 파시즘 · 일민주의파일:모호 아이콘.svg · 장제스주의파일:모호 아이콘.svg · 트럼프주의파일:모호 아이콘.svg · 좌익 파시즘(슈트라서주의 · 민족 볼셰비즘) · 천황제 파시즘파일:모호 아이콘.svg · 팔랑헤주의(프랑코주의파일:모호 아이콘.svg) · 프랑스 파시즘 · 에코파시즘 · 유사 파시즘파일:모호 아이콘.svg
정당/조직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 국가 파시스트당(공화 파시스트당 · 민주 파시스트당 · 이탈리아 사회운동) · 독일노동전선 · 국민급진기지 ·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 · 철위대 · 라푸아 운동 · 슬로바키아 인민당 ·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 영국 파시스트당 · 우스타샤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 · 국민대중행동파일:모호 아이콘.svg · 스웨덴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 그리스 민족사회당 · 노르웨이 국민연합 · 대정익찬회파일:모호 아이콘.svg · 동방회 · 러시아 파시스트당 · 렉스당 · 미국 은색군단 · 사쿠라회파일:모호 아이콘.svg · 불가리아 국민군단연합 · 불의 십자단파일:모호 아이콘.svg ·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 · 시리아 사회민족당파일:모호 아이콘.svg · 영국 파시스트 연합 · 오제바브란트바흐 · 유고슬라비아 국민운동 · 육군전우협회 · 조국전선 · 칠레 국가사회주의 운동 · 캐나다 파시스트 연합 · 팔랑헤,(통합 팔랑헤파일:모호 아이콘.svg), · 페르콩크루스츠 · 프랑키스트 운동 · 프랑스 인민당 · 화살십자당
국민조합주의자 · 국민정당 우리의 슬로바키아 · 그레이 울프 · 독일 사회주의국가당 · 민족 볼셰비키당· 소련 자유민주당파일:모호 아이콘.svg,(러시아 자유민주당파일:모호 아이콘.svg), · 조국당 · 조선민족청년단파일:모호 아이콘.svg · 황금새벽당 · 스파르타인당 · 국민공동통치연합 · 혁신관료· 아르헨티나 파시스트당
국제 조직 추축국 · 1934년 몽트뢰 파시스트 회의
군사 조직 추축군 · 친위대 · 돌격대 · 히틀러유겐트 · 아인자츠그루펜 · 검은 셔츠단 · 오스트리아 친위대 · 보국단· 우스타샤 민병대 · 미국 은색군단 · 마카필리파일:모호 아이콘.svg · 발리 콤페타르파일:모호 아이콘.svg · 반볼셰비키 프랑스 의용군단 · 강철늑대 · 황도파파일:모호 아이콘.svg · 남의사파일:모호 아이콘.svg · 아조우 연대파일:모호 아이콘.svg · 레히
인물 아돌프 히틀러 · 에리히 루덴도르프 · 베니토 무솔리니 · 프란시스코 프랑코파일:모호 아이콘.svg · 안테 파벨리치 · 오스왈드 모슬리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 · 비드쿤 크비슬링 · 요제프 티소 · 살러시 페렌츠 · 엥겔베르트 돌푸스 · 쿠르트 슈슈니크 · 안톤 뮈세르트 · 레옹 드그렐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그레고어 슈트라서 · 오토 슈트라서 · 에른스트 룀 · 카를 하우스호퍼 · 카를 슈미트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율리우스 에볼라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오스발트 슈펭글러 · 에른스트 윙어 · 기타 잇키파일:모호 아이콘.svg · 오카와 슈메이파일:모호 아이콘.svg · 안호상파일:모호 아이콘.svg · 이범석파일:모호 아이콘.svg · 아브라함 슈테른 · 장제스파일:모호 아이콘.svg · 다이리 · 호리아 시마 · 미시마 유키오파일:모호 아이콘.svg · 줄리아노 고치 · 마르셀 뷔카르 · 자크 도리오 · 프랑수아 드 라 로크 ·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 · 플리누 사우가두 · 이오인 오더피 · 조르주 소렐파일:모호 아이콘.svg · 조반니 젠틸레 · 알렉산드르 두긴 · 윌리엄 루터 피어스 · 윌리엄 더들리 펠리 · 찰스 코글린 · 아나스타시 본샤츠키· 도미니코 레치시 · 마커스 가비
국가 나치 독일 · 파시스트 이탈리아* · 스페인국파일:모호 아이콘.svg · 크로아티아 독립국 ·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 국민군단국가 · 노르웨이 국민 정부 · 오스트리아 연방국 ·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 산마리노 공화국 · 일본 제국파일:모호 아이콘.svg · 국민군단연합 불가리아
기타 크립토 파시즘 · 탈파시즘 · 파스케스 · 백색 테러 · 멸칭으로써의 파시즘(적색 파시즘)
* 1922~1943의 이탈리아 왕국과 1943~1945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파일:모호 아이콘.svg : 파시즘 여부 논란 있음
}}}}}}}}}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763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763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신생활운동 등이 '유교 파시즘'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34년 이전까지는 중화민국 국가 차원에서도 파시즘적 성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장제스의 개인 정치적 요소라면 모를까 국가 차원에서는 파시즘까지는 아니였다.[2] 우익 반자본주의 참조. 다만 난징 10년 등 국부천대 이전에도 국가자본주의 성향이 있었다고 보는 관점도 많다.[3] Donald A. Jordan (March 31, 2019). The Northern Expedition: China's National Revolution of 1926–1928. Humanities Open Books program, a joint initiative of the 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and the Andrew W. Mellon Foundation. p. 50.[4] Peter Gue Zarrow (2005). China in War and Revolution, 1895-1949. Routledge. p. 239.[5]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어서 우파 성향을 누그러뜨렸다. 게다가 전시 상황+중국공산당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6]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가부장적 보수주의로 분류한다.[7] 논란의 여지는 있다. 일단 장제스는 서구의 자본주의제국주의적 행태라고 보고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공산 온건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였던 쑨원삼민주의적 가치에 따라 지주 계급과 너무 많은 부를 가진 자본가들도 공산당을 뿌리뽑고 나면 정리해야할 집단으로 보았다. 따라서 우익 반자본주의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8] 장제스의 통치 방식이 파시즘과 유사하다는 학계 평도 많다.[9] 왼쪽 상단은 탄핑샨, 오른쪽 상단은 왕징웨이, 왼쪽 하단은 펑위샹, 오른쪽 하단은 천유런이다.[10] 서양을 물질문화, 동아시아를 정신문화로 정의하고 서양의 기술이나 물질적 번영을 본받되, 반드시 동아시아적 정신문화의 미덕을 지켜내야 한다고 믿었다. 장제스가 공산주의를 혐오한 이유도 사실 서구 자유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혐오한것은 그들이 문화적 보수주의를 파괴한다고 본 점도 있다. 그래서 철저한 서양문화와 서구식 제도를 옹호한 후스같은 문화적 자유주의자들과도 충돌했다.[11] 다만 기본적으로 반대파에 대해 불관용적이였던 장제스의 성격을 고려했을때, 대륙을 통일한 후 공산당의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정치적 폭력을 적극적으로 써먹었을 가능성도 높다.[12] 실제로 이념 차이로 인해 국민당이 왕징웨이를 비롯한 좌파의 우한 국민정부와 장제스를 비롯한 우파의 난징 국민정부로 분열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