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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초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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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의 전개
만보산 사건
(1931.7.1)
제3차 초공작전
(1931.7.1~1931.9.20)
류탸오후 사건
(1931.9.18)
한중 농민 소요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만주사변 발발
第三次 剿共作戰
Third Encirclement Campaigns

1. 개요2. 준비단계3. 전개
3.1. 국민혁명군의 전진3.2. 홍군의 반격3.3. 만주사변의 발발과 3차 초공의 중단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1년 7월 1일부터 1931년 9월 20일까지 진행된 국민정부중국 공산당에 대한 3번째 토벌작전. 제3차 소공작전, 제3차 위초작전, 제3차 초비작전이라고도 한다. 상당히 의미 있는 수준의 진전을 이루었으나 1차 양광사변만주사변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2. 준비단계

2차 초공작전의 실패를 보고 정말로 열불받친 장제스는 3번째 초공작전을 준비, 6월 6일에 내란을 종식하고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고 선언하고 총사령관에 올랐다. 장제스는 6월 22일 군함을 타고 난징을 떠나 난창으로 가서 군사회의를 열어 전투태세를 정비했다. 허잉친이 전선 총사령 겸 좌익 집단군 총사령에 임명되었고 천밍수가 우익 집단군 총사령에 임명되었으며 장제스가 직접 직속부대인 6,9,10,11,14 사단 등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에 나섰으며 이때 영국인, 일본인, 독일인 고문들까지 대동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전체 동원된 병력은 강서성 현지에 주둔한 23개 사단 및 3개 독립여단을 합쳐 30만에 달했다. 장제스는 6월 30일 <초비 출발에 즈음하여 전국의 장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했다.
나는 오늘 전국의 군인은 의연하게, 부동한 결심을 가지고 이 시대의 어려운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에 즈음해서 다음의 두가지 의(義)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믿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는 내전을 평정하고 통일을 보장하는 일이다. 둘째는 적비를 소탕, 격멸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일이다. 오늘의 중국은 빈곤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란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재정의 부족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분열과 지방의 질서 불안정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3. 전개

3.1. 국민혁명군의 전진

"두번째 포위 공격이 끝나고 나서 세번째가 시작되기까지 겨우 한달의 시간이 있었다. 3만의 홍군은 힘겨운 전투를 마친 후 강서성 남부의 근거지로 귀환하기 위해 추가로 1000리의 길을 걸어서 흥국현에 막 집합했기 때문에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대체 병력을 받지도 못했다. 적군의 몇몇 부대가 이미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3차 초공작전에 대한 마오쩌둥의 회고.

1931년 7월 1일, 장제스는 중앙군 전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림으로 3차 초공작전이 개막되었다. 장제스는 2차례의 패배 때문에 북, 동, 서 3개 방면에서 루이진을 향해 매우 신중하게 진군하였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장구직진 분진합격'이라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이는 병력을 분산시켜 적을 향해 신속히 기동한 다음에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 병력을 집중시켜 타격을 가한다는 전술로 홍군의 전술을 모방한 것이었다.[1] 불과 몇달 전에 제2차 초공작전을 격파했던 홍군은 가을까지는 국민혁명군이 초공을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3차 초공이 시작되자 크게 놀랐으며 긴급히 매우 잔혹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통지를 보내 민중을 동원해 적위대, 교통대, 정찰대, 운수대를 조직했다.[2] 당시 홍 1방면군은 루이진에서 멀리 떨어진 건녕 일대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두차례의 초공작전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다.[3] 홍군은 국민혁명군이 천천히 진격하는 사이에 깊숙이 후퇴하며 국민혁명군을 유인했다.
국민혁명군은 7월 2일 광창에 주둔한 홍군을 격파하고 7월 중순 광창과 동고를, 7월 20일에 석성을 함락시켜 홍군을 루이진으로 압박시켰고 7월 21일 시작된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은 도중에 흐지부지해짐에 따라 국민혁명군은 8월 1일 흥국, 우도를 함락시켜 홍군을 더욱 바짝 포위하였다. 장제스는 이러한 소식에 고무되어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강도를 점령한 후 곧바로 광창을 공격할 것이다. 일단 광창을 점령하면, 영도와 흥국을 공격할 것이다. 강서성의 비적들은 머지않아 박멸될 것이다.
1931년 7월 12일 장제스의 일기

홍군은 국민혁명군을 더욱 깊숙이 유인하기로 하고 7월 28일 흥국현 서북지역의 고흥허(고싱웨이) 지구에 집결하였다. 7월 31일 홍1방면군 주력이 흥국에서 북진하여 부전에서 돌파하려는 순간, 국민혁명군 2개 사단이 이 움직임을 간파하고 부전을 점령, 고흥허와 노영반으로 접근하여 홍군은 국민혁명군 9개 사단에게 포위되었다. 전적위원회는 고흥허 방향으로 포위선을 돌파할 계획을 세우고 국민혁명군 주력을 흥국 서쪽과 서북으로 유인했다.

8월 5일 저녁, 흥국과 승현 산악지구에서 국민혁명군의 포위망 중에 20킬로미터 정도의 간격이 생기자 홍군은 포위망 돌파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8월 7일부터 8월 11일까지 연당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제3로군 소속 47사단 소속 1개 여단을 섬멸했으며 양촌에서 54사단에 속한 양개 여단을 격파했고 황피지구에서 모병문의 8사단 4개단, 1만명을 섬멸하고 소총 1만정을 노획하였다. 장제스는 홍군 주력을 섬멸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9월 초, 허잉친 예하의 일부 부대가 루이진을 위협하는 형세에 이르렀다. 공산당의 지배 영토는 불과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수준까지 축소했고 홍군은 홍 12군을 주력으로 위장하여 국민혁명군의 공세를 유도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우회시켰다. 이 시기가 최대의 위기였다.

3.2. 홍군의 반격

하지만 상당수의 홍군 지배지역을 탈환했음에도 8월 28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북벌을 재개함에 따라 초공작전에 더 이상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계속된 폭우와 빈약한 보급 때문에 국민혁명군은 공세종말점에 이르렀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에 맞서 호남성 정부주석 겸 4로군 사령관 허젠은 중앙정부의 절대옹호를 타전하며 장제스에게 4로군이 지친 상태이니 중앙군을 파병하여 광저우 군대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이 요청에 응해 강서성에 주둔한 3개 사단을 차출하여 호남으로 보내고 허잉친을 장사로 보내 허젠 휘하의 장령들과 함께 병력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한편 산악지대를 따라 흥국 지역으로 우회한 후 2주 동안 휴식하며 원기를 보충하고 있던 홍군 주력부대는 국민혁명군의 공세가 둔화된 것을 포착하고 이들이 퇴각하는 틈을 노려 9월 7일 한덕근의 52사단, 장연문의 제9사단에 타격을 가했고(라오잉판 전투) 8일에는 이들을 구출하려온 장광연, 차이팅카이의 2개 사단과 전투를 벌였는데(고싱웨이 전투) 이 전투에서 홍군과 국민혁명군은 모두 3천명의 피해를 입었다.

1931년 9월 15일 방석령 일대의 양촌과 황과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를 팡스링 전투라고 하는데 국민혁명군은 양촌에서 2개 사단을, 황과에서 1개 사단을 잃었고 일영반에서 퇴각하는 국민혁명군 2개 부대가 홍군의 타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다만 홍군 3군 군장 황궁뤠가 국민혁명군의 공습에 전사하는 등 홍군의 피해도 가볍지 않았다. 장제스는 다시 한번 독전하기 위해 9월 18일 난창에서 강서성으로 가는 군함에 탑승했다.

3.3. 만주사변의 발발과 3차 초공의 중단

하지만 초공을 위한 주력부대가 붕괴된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9월 18일,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중국 전역이 충격에 빠졌다. 국민정부는 즉각 장제스에게 난징으로 돌아올 것을 타전했고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항일 여론에 장제스는 9월 20일 공격을 중지하고 난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9월 21일 오후 난징에 도착한 장제스는 광저우 국민정부와 항일을 위한 합작을 논하기 시작했다.

장제스가 돌아가 만주사변에 대응하는 사이, 홍군의 일부는 북방에 남아 국민혁명군을 견제하는 한편, 주력부대가 복건 서북부와 강서 서남부로 확장을 시작하여 회창, 안원, 석성 등을 함락시켜 20여개 현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심지어 공산당원이었던 국민당 26로군 참모장 조박생(趙博生 자오보성)은 동진당(董振堂 둥진탕), 계진동(季振同 지전퉁), 황중악(黃中岳 황중웨) 등의 고급장령들과 중공 비밀 특별지대의 지도를 받아 1931년 12월 14일, 강서성 영도에서 영도봉기를 일으켜 1만 7천명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공산당에 투항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펑위샹의 부하 쑨롄중의 부하였다가 중원대전 중에 국민정부군으로 편제된 부대였다. 홍군은 이들을 홍군 제5군단으로 개편하고 계진동을 총지휘관에, 조박생을 참모장에 임명했으며 샤오진광을 정치위원으로, 류보젠을 정치부 주임으로 삼았다. 또한 5군단 산하에 3개군을 설치하고 13군 군장으로 동진당을, 정치위원으로 하장공(何長工 허창궁)을, 14군 군장으로 조박생을, 정치위원으로 황화청(黃火靑 황훠칭)을, 15군 군장으로 황중악을, 좌권(左權 줘취안)을 임명했다.

4. 결과

홍군은 인민의 지지와 마오쩌둥의 '유적심입' 전술로 국민혁명군 3만명을 사살, 생포하고 총기 1만 4천 자루를 노획했다고 주장하며 승리를 자랑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내부에는 마오쩌둥의 리더십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만약 만주사변같은 외부적 요인이 없었으면 그냥 끝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문은 이후 영도 확대회의로 이어져 마오쩌둥의 실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퇴각하는 19로군을 무리하게 기습하던 홍군이 19로군의 반격에 4천명이 넘는 병력을 잃으며 큰 타격을 입으면서 홍군도 '불패의 대오'가 아니라는 말이 퍼졌다.

한편 국민당은 홍군의 대담성, 융통성, 기동력 등을 보고 크게 놀라게 되었고 홍군이 군기가 엄정하고 복종심이 강한 강력한 전투원이라고 기존에 비적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뒤집게 되었다. 장제스는 3차 초공작전 중에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비적을 진압하면서 겪는 곤란은 대규모 군사 원정보다도 심각하다. 지역의 지형에 익숙한 데다 농민들의 지원을 강제로 얻어, 그는 항상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실질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도 약한 곳에 타격을 가한다. 한편 정부군은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해야만 하므로 지치고 짜증이 나게 된다. 많은 생각을 한 끝에, 나는 이제 빨갱이 비적들의 토벌이 분명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있는 과업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병력을 집중하고 작전 기지를 건설하며, 도로를 뚫고, 비적들이 은신할 공간과 기습을 자행할 기회를 없애야만, 우리의 장교와 병사들이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에야 우리는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있다.
1931년 8월 12일 장제스의 일기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 인민해방군사, 국방부전략연구소.
  •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장융, 존 핼러데이, 까치.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호,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2호, 중국학연구회.
  • 전략의 본질, 노나카 이쿠지로, 라이프맵.
  • 국공비사 5, 최경식, 군사논단, 한국군사학회.

6. 관련문서


[1] 반면 중국 공산당은 국민혁명군이 그저 병력우위를 바탕으로 인해전술을 시도했을 뿐이라고 폄하하고 있다.[2] 중국 공산당은 이를 인민대중의 혁명원조라고 자찬하고 국민당에서는 공산당이 총칼로 인민들을 위협해 강제 동원한 것이라고 폄하한다.[3] 홍군은 자신들이 국민혁명군에 비해 10대 1의 열세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병력 규모가 3만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2차 초공작전 시점에서 6만을 넘었으리라고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