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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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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건.jpg
중화민국 8대 내정부장
정체 何鍵
간체 何键
한국식 독음 하건
영문 He Jian
운초(芸樵)
출생 1887년 4월 10일
청나라 호남성 예릉현
사망 1956년 4월 25일 (향년 69세)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바오딩 군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내정부장
재임기간
1937년 11월 20일 ~ 1939년 5월 26일

1. 개요2. 생애3. 가족4. 참고문헌5.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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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상계군벌의 일원으로 원래 탕성즈 등의 반장파에 속했으나 1차 장계전쟁을 계기로 장제스에 충성하여 타이완까지 따라왔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887년 호남성 예릉에서 태어났다. 1903년 주자사소학(朱子祠小學)에 입학했으며 예릉현립녹강중학(醴陵縣立渌江中學)으로 진학했다. 1906년 숭고중학(崇古學堂)에 입학했으며 1909년 호남법정학당에 들어가 공부했다. 1911년 신해혁명 발발 이후 우창의 군사학교에서 공부했고 1916년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해 자오헝티의 상군 1사단 1여단에 배치되었다.

1918년 호법전쟁 중에 북양정부가 임명한 호남독군 장징야오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퇴각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1918년 5월 청첸에게 예릉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1919년 탕성즈 휘하에 들어가서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탕성즈가 자오헝티 휘하의 유력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허젠도 자오헝티 정권에서 유력 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26년 탕성즈가 예카이신과의 전쟁에서 패해 중국국민당에 가입한 후에 그도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1926년 6월 탕성즈가 8군 군장에 취임하자 이품선, 섭기, 하두인 등과 함께 2사단장으로 승진하여 북벌에 참여했다.

2.2. 국민당의 1차 북벌

국민당의 1차 북벌 시작 이후 탕성즈의 지휘 아래에 장사를 점령했으며 호북성을 공격했다. 또한 아편 재배를 많은 수익을 거둬들이는 악서에 2사단을 거느리고 주둔하여 8군의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군량미 조달을 위해서 현지의 농민들과 크게 충돌하였는데 농민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군미 동원을 저지하는 등 차차 농민운동과 척지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에 접근하려는 탕성즈의 지시에 따라서 대체적으로 노농운동에 대해 불간섭하며 중립을 지켰다.

1927년 2월 초 8군 산하에서 35군과 36군이 확대 개편되어 독립할 때 35군 군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한결렬 이후 우한 국민정부의 지배구역에서는 농민협회와 총공회가 앞뒤를 가리지 않는 급진적인 토지개혁과 폭동을 일으키면서 토지를 보유한 사람은 정치성향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이거나 고문했는데 허젠은 그 자신이 중소지주 출신이기 때문에 토지위원회에서 급진적 토지개혁을 주장한 마오쩌둥왕징웨이, 탄옌카이와 함께 비판했다. 허젠은 4월 23일 중국국민당 토지위원회 심사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현재 토지 몰수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안되지만, 분배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 토지 몰수 후 정부 혹은 당부에 귀속시키는 것은 반드시 분규를 야기할 것이고, 만약 농민협회에 귀속시키면 분규는 더 커진다. 병사들에 관한한 (...) 만약 병사의 토지를 모루하면 병사들이 작전을 수행할 정신을 동요시킬 수 있다. 본군의 병사 및 관장의 대부분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므로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마땅히 주의해야 한다."

5월 13일, 북벌군이 3로로 나누어 하남에 대한 진격을 시작했고 평서 전투가 벌어지자 탕성즈는 허젠엑 즉시 지원할 것을 명령했고 허젠도 응하여 북상했다. 우한의 북벌군은 6월 초에 카이펑, 정저우를 점령하여 펑위샹 부대와 조우했다.

2.3. 마일사변

그런데 5월 21일, 장사에서 허젠의 막료 여상삼, 36군 독립33단장 허극상, 35군 교도단 단장 왕동원 등이 성총공회, 성농민협회 및 국민당 성시당부 등의 기관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마일사변이다. 이는 자신의 부모마저 농민들에게 조리돌림당하여 폭발한 허젠이 심복 서상삼에게 지시하여 호남의 잔류 부대들을 연결시켜 거사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북벌에 나서 거사를 사주했다는 혐의를 피한 치밀한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황한 탕성즈는 허극상의 군기 문란을 비난하며 장제스 토벌을 주장했으나 허젠은 이것이 부득이한 자위조치라 옹호했으며 이품선 등 반란과 무관한 군장들도 찬동했다. 1927년 6월, 코민테른의 5월 지시가 하달된 이후 일어나자 탕성즈의 지시로 하남 전선에서 퇴각하여 호남, 호북에서 노농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다가 6월 28일 반공선언을 발표, 마일사변에 동참하여 왕징웨이와 탕성즈에게 공산당과 결별할 것을 요구하며 공산당원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왕징웨이와 탕성즈가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오히려 중앙에 공산당의 폭동을 저지할 방법이 있느냐고 항의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이어 7월 15일 국공결렬 이후 사오산에 군대를 파견하여 마오쩌둥의 아버지의 묘를 찾아 파헤치고 유골을 산속에 던져버리라고 지시했는데 마오쩌둥의 보복을 두려워했던 농민들이 엉뚱한 부농의 조상의 무덤을 가르쳐주어서 엉뚱한 사람의 무덤만 파헤쳤다. 이후 탕성즈와 함께 동정에 나서 강우군 사령관에 임명, 35군을 거느려 장강 우안과 좌안을 따라 전진했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난창 폭동이 일어나는 통에 주페이더와 장파쿠이가 동정군에서 이탈하여 허젠 혼자 8월 중순에 안휘성에 진입, 1927년 9월 27일 안휘성 대리주석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후원자 탕성즈는 지나치게 나대다가 리쭝런, 바이충시계계군벌의 분노를 사서 1927년 10월 당계전쟁에서 토벌당하고 허젠은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2.4. 반장전쟁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거행되고 동북역치를 통해 중국 통일이 완수된 이후, 10월 8일 19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2월 주페이더와 함께 정강산 투쟁을 벌이고 있는 마오쩌둥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받고 6개 여단 3만명의 병력을 통솔하여 정강산에 대한 3차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정강산을 경제적으로 봉쇄했다. 하지만 1929년 1월 마오쩌둥이 펑더화이, 주더, 천이 등을 통솔하여 반격하는 통에 격퇴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정강산 근거지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정강산을 버리고 강서성 남부로 이동했다. 이후 19사단장 자리를 유건서에게 물려주고 직할 개편감축 제3분구의 주임위원 겸 신편 7사단장에 임명되어 형주에 주둔, 국민혁명군 제4집단군의 편견을 감독하였다.

그러던 중 1929년 2월, 양호 지역을 장악하고 호남에서 장제스의 세력을 제거하려는 군사참의원장 겸 우한 정치분회 주석 리쭝런의 지시로 루디핑을 대신하여 호남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호남 사건이다. 국민정부는 내전을 방지하기 위해 허젠을 신임 호남성 정부 주석으로 인정했으나 광서파와 장제스 사이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협상이 끝내 결렬되어 1929년 3월 장제스와 광서파 사이의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때 허젠은 장제스의 회유에 넘어가 장제스의 편에 서서 광서군을 공격했다.

중원대전 중에 계군이 6,7월 장사를 공격하고 1930년 7월 창사 폭동으로 장사가 함락되는 등 허젠은 잠시 몰락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장제스가 중원대전에서 옌시산마저 꺾으면서 반장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고 줄을 잘 선 대가로 허젠은 이후 7년이나 호남성 정부주석으로 재직할 수 있었다.

2.5. 호남에서의 통치

1930년 리리싼의 주도로 중국공산당창사 폭동을 일으키자 8월 5일 창사를 탈환한 이후 10월 24일 마오쩌둥의 아내인 양카이후이를 체포하여 남편과 의절할 것을 요구했지만 양카이후이가 듣지 않자 11월 14일에 처형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을 토벌하기 위해 휘하의 4로군을 지휘하여 초공작전에 나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나자 광저우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의 회유를 동시에 받았는데 중앙 옹호를 통전하며 장제스에게 공산당 토벌을 위해 중앙군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고 허잉친의 3개 사단이 파견되어 초공작전을 돕게 되었다.

허젠은 '청당반공'의 구호를 내세워 호남성에서의 공산당 근절을 위해 대대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공산당원들의 자수를 독려하고 각지에 민단을 조직하여 공산당에게 맞서게 했다. 이에 토호열신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국민혁명 과정에서 도태되었던 구시대의 지방 세력가들이 복귀하여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무에 참여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1931년 9월 3차 전성대표대회에서 호남성 집행위원 겸 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국민당에 등기하지 않은 당원들에게 등기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예비당원을 모집하는 등 적극적으로 당무활동을 전개하였다.

천리푸, 천궈푸CC단에 대응하기 위해 도협이라 불리는 전국도로협회호남분회를 거점으로 허젠파라 불리는 독자적인 당내 세력을 육성하여 CC단과 경쟁했다. 이로 인하여 1933년 5차 전국대표 대회 대표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팽국균, 장형 등의 CC단 세력을 이기고 자신의 휘하 세력인 허젠파를 대표로 파견할 수 있었다. 이에 천리푸가 도협이 불법집단이라고 비판하였으나 1934년 4월 호남성 제4차 대표대회에서도 허젠파가 승리하면서 허젠은 다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국민정부는 계파 투쟁으로 각 성의 지방당무가 마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 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집행위원회 책임제에서 중앙특파원 제도로 개정했다.

2.6. 초공작전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자 서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14개 사단을 이끌고 홍6군단을 견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복건사변에서 장제스에게 개겼던 천밍수, 리지선, 차이팅카이 등이 한달만에 진압당하고 천지탕 등 월계군벌들마저 장제스에게 꼬리를 내리고 적극적으로 초공작전에 나서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장제스에게 비행장 건설과 광동, 광서, 호남 지역을 통한 홍군의 퇴로 차단을 비롯한 적극적인 계획을 제안하였고 이를 위하여 1934년 6월 광동과 광서를 직접 찾아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 천지탕 등을 설득하여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켰다.

이후 홍군은 패퇴하여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에 장제스는 1934년 11월 30일 추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형양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홍군을 추격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어 상강에서 홍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완전 격멸에는 실패하고 홍군은 귀주성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했고 최종적으로 섬서성 연안에 정착했다.

2.7. 중일전쟁과 말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호남성 정부주석 자리를 장즈중에게 내주고 내무부장에 임명되어 1939년까지 재직했다. 1939년 군사위원회 산하의 무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항전을 수행했다. 종전 이후 질병을 이유로 공직에서 사퇴하고 형양에 은거하다가 재남경호남동향회에 참가하여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청첸을 부총통 후보로 지지하였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가 패하자 1949년 봄에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1950년 국부천대한 중화민국에 합류했다. 이후 죽을때까지 총통 자정으로 근무하다가 1956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3. 가족

첫째 부인은 6명, 둘째 부인은 5명을 낳았다.

딸 허롄은 하버드 대학교 출신인 저명한 생물학자 탕페이판(汤飞凡)과 결혼했고, 탕페이판은 장인을 따라 대만으로 가지 않고 대륙에 남았다. 탕페이판은 세계적인 미생물학자로 중국의 여러 풍토병의 병원균을 분리해냈고, 1955년 성병인 클라미디아를 세계 최초로 연구실에서 배양하는데 성공하는 등 상당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원래 국민당 정부하에서 방역처장을 맡고 있었지만, 워낙 명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의 행정조직을 인수했을 때도 그대로 유임되었다. 하지만 1958년 반우파투쟁 당시 반동으로 몰려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수모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었다.

허롄의 아들은 중국적십자재단의 임원을 맡기도 했다.

4. 참고문헌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중국공산당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湖南 軍閥政權의 再編 : 北伐時期(1926-27) 唐生智 政權의 정치적 성격, 김세호, 동양사학연구 86권 86호, 동양사학회.
  • 南京國民政府時期 國民黨 地方黨部의 組織과 活動 : 湖南省 地方黨部의 실태 분석(1927-1937)을 중심으로, 김세호, 중국근현대사연구 31권 31호, 중국근현대사학회.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