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23:06:37

펑더화이

펑더화이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제1ᆞ2기)
{{{#!wiki style="margin: -0px -10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FFF
제1기
천윈
린뱌오 펑더화이 덩샤오핑
덩쯔후이 허룽 천이
우란푸 리푸춘 리셴녠
제2기
천윈
린뱌오 펑더화이 덩샤오핑
덩쯔후이 허룽 천이
우란푸 리푸춘 리셴녠
녜룽전 보이보 탄전린
루딩이 뤄루이칭 시중쉰
← 정무원 부총리
국무원 부총리 (제3ᆞ4기) →
}}}}}}}}}}}}}}}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wiki style="margin: -0px -10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 군사위원회 부주석
(1945년-1954년)
주더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청첸 린뱌오
가오강 류보청 허룽
천이 뤄룽환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주석
(1954년-1975년)
주더
(제1기)
펑더화이
(제1ᆞ2기)
린뱌오
(제1ᆞ2ᆞ3기)
류보청
(제1ᆞ2ᆞ3기)
허룽
(제1ᆞ2ᆞ3기)
천이
(제1ᆞ2ᆞ3기)
덩샤오핑
(제1ᆞ2ᆞ3기)
뤄룽환
(제1ᆞ2기)
쉬샹첸
(제1ᆞ2ᆞ3기)
녜룽전
(제1ᆞ2ᆞ3기)
예젠잉
(제1ᆞ2ᆞ3기)
청첸
(제1ᆞ2ᆞ3기)
장즈중
(제1ᆞ2ᆞ3기)
푸쭤이
(제1ᆞ2ᆞ3기)
룽윈
(제1기)
웨이리황
(제2기)
차이팅카이
(제2ᆞ3기)
뤄루이칭
(제3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1983년-)
쉬샹첸
(제6기)
예젠잉
(제6기)
양상쿤
(제6ᆞ7기)
자오쯔양
(제7기)
류화칭
(제8기)
츠하오톈
(제8ᆞ9기)
장완녠
(제8ᆞ9기)
후진타오
(제9ᆞ10기)
궈보슝
(제10ᆞ11기)
차오강촨
(제10기)
쉬차이허우
(제10ᆞ11기)
시진핑
(제11기)
판창룽
(제12기)
쉬치량
(제12ᆞ13기)
장유샤
(제13ᆞ14기)
허웨이둥
(제14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파일:중국 공산당 문장 옐로.svg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wiki style="margin: -0px -10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000,#e5e5e5
중국공산당 중앙혁명 군사위원회 부주석
(1937년-1949년)
주더
(제6ᆞ7기)
저우언라이
(제6ᆞ7기)
왕자샹
(제6ᆞ7기)
류사오치
(제6ᆞ7기)
펑더화이
(제7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1954년-)
린뱌오
(제8ᆞ9기)
허룽
(제8기)
녜룽전
(제8ᆞ9ᆞ10ᆞ11ᆞ12기)
천이
(제8ᆞ9기)
류보청
(제8ᆞ9ᆞ10ᆞ11기)
쉬샹첸
(제8ᆞ9ᆞ10ᆞ11ᆞ12기)
예젠잉
(제8ᆞ9ᆞ10ᆞ11ᆞ12기)
덩샤오핑
(제10ᆞ11기)
양상쿤
(제12ᆞ13기)
자오쯔양
(제13기)
류화칭
(제13ᆞ14기)
장첸
(제14기)
츠하오톈
(제14ᆞ15기)
장완녠
(제4ᆞ15기)
후진타오
(제15ᆞ16기)
궈보슝
(제16ᆞ17기)
차오강촨
(제13기)
쉬차이허우
(제16ᆞ17기)
시진핑
(제17기)
판창룽
(제18기)
쉬치량
(제18ᆞ19기)
장유샤
(제19ᆞ20기)
허웨이둥
(제20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국방부장
{{{#!wiki style="margin: -0px -10px;"
{{{#ffff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FFF
초대 제2대 제3대
펑더화이 린뱌오 예젠잉
제4대 제5대 제6대
쉬샹첸 겅뱌오 장아이핑
제7대 제8대 제9대
친지웨이 츠하오톈 차오강촨
제10대 제11대 제12대
량광례 창완취안 웨이펑허
제13대 제14대 제15대
리상푸 둥쥔 - }}}}}}}}}}}}}}}
파일:彭德怀_02.jpg
1955년 새롭게 제정된 원수 군복을 입은 펑더화이
<colbgcolor=#ee1c25><colcolor=#ff0> 중화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 부주석
정체 彭德懷
간체 彭德怀
한국식 독음 팽덕회
영문 Péng Déhuái
석천(石穿)
득화(得華)
출생 1898년 10월 24일
청나라 호남성 상담현
사망 1974년 11월 29일 (향년 76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1898~1912)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임시정부(1912~1913)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북양정부(1913~1915)
파일:중화제국 국기.svg 중화제국(1915~1916)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북양정부(1916~1928)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1928~1949)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1949~1974)
학력 후난군관강무당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무신론
부총리 재임기간
2대 1954년 9월 29일 ~ 1959년 4월 27일
3대 1959년 4월 27일 ~ 1959년 9월 17일
국방부장 재임기간
1대 1954년 9월 29일 ~ 1959년 9월 17일
서명 파일:pdhsg.jp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제1차 국공내전 시절2.3. 중일전쟁2.4. 제2차 국공내전2.5. 6.25 전쟁2.6. 실각 및 숙청
3. 수훈4. 주요 경력5. 평가 및 여담

[clearfix]

1. 개요

펑더화이중화인민공화국군인이자 정치가다. 한국에서는 6.25 전쟁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지휘관이었던 팽덕회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파일:팽덕회 중국.jpg
후난성 샹탄시에 위치한 펑더화이 고택

2.1. 초기 이력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성 출신이다. 유년기의 삶이 상당히 기구한데,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나 학대가 심하여 어려서부터 광부나 노비 등 막일을 전전했다고 한다.[1][2] 16세에 탕성즈의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그 후 후난군관강무당(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국민혁명군의 장교가 되었다. 이후 북벌에 참가하고 1928년 2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공결렬 이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 핑장에서 봉기했다가 후에 마오쩌둥과 주더의 정강산 해방구에 합류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2.2. 제1차 국공내전 시절

이후 홍군(공산군)을 지휘하여 창사 봉기에 참여했고 제1차 초공작전에서 린뱌오와 함께 담도원의 병력을 섬멸했다. 이후 제4차 초공작전까지 승리했으나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국민혁명군에게 끝내 밀려났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붕괴 후에는 대장정에 참여했다. 펑더화이는 린뱌오와 함께 홍군에서 가장 유능한 야전 지휘관으로 꼽혔다.

1934년 1월, 중국공산당 6기 5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36년,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37년 8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군사위원으로 선거되었다.

2.3. 중일전쟁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1940년 화북 지역에서 연대 100여 개를 동원한 백단대전을 지휘했다. 이 때 일본군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기는 했으나 팔로군의 희생도 매우 컸다. 마오쩌둥은 이것을 자신에 대한 항명 행위로 받아들여 격노했고, 팔로군에게 일본군에 대해 철저히 수세로 일관하라고 지시했다.[3] [4]한편 일본군은 백단대전을 계기로, 그간에는 적대 세력으로 쳐주지도 않고 기껏해야 비적 취급하여 방치해두다시피 하던[5] 중국 공산당을 섬멸하고자 신멸작전을 실시, 화북 지역의 중국 공산당 해방구들을 초토화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이 때의 큰 타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으로 화북 지역의 치안 유지 병력이 대거 차출되면서 이전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2.4. 제2차 국공내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직후 국・공 양당은 일단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며 협상을 벌였지만, 실제로는 둘 다 내전은 불가피함을 알고 뒤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중앙군사위원회가 결성되자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거되었다. 1946년 당시 국민당군은 약 200만명, 공산군은 110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펑더화이의 부대는 국공내전 초기 17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펑더화이의 부대는 옌안부근에 주둔하면서 당지도부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46년 국공내전이 다시 발발하자 후쭝난의 국민당군 26만명 및 마부팡의 후이족 기마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펑더화이는 1947년 3월 압도적 전력의 후쭝난군에게 옌안을 내주고 후퇴했고, 공산당 지도부는 내몽골 방면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산악에서 게릴라전을 펴던 펑더화이군은 5월 판롱진에 있던 후쭝난군의 보급창고를 기습 점령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에 중원 전역에서 산재한 공산군의 게릴라전 때문에 국민당의 본거지인 저장-장쑤성 방면에서의 후쭝난군의 보급은 어려워 졌다. 이로서 후쭝난군은 보급불능에 빠져 위기에 빠졌고,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후쭝난군은 1948년 2월 옌안을 다시 내주고 섬서성에서 후퇴했고, 펑더화이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1949년까지 남진-서진하면서 간쑤성, 닝샤성, 칭하이성을 점령했다.

후쭝난군은 쓰촨성까지 후퇴했으나, 쓰촨성 토착군벌들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국민당을 배신하고 공산군에 투항해 버렸다. 국민당군의 지휘관 후쭝난과 마부팡은 그대로 대만으로 도주했고 나머지 부대는 그대로 항복했다. 그리하여 남진해온 펑더화이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계속 서진하던 류보청군과 쓰촨성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후 펑더화이군은 계속 서진하여 현재의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진격했고, 이곳의 국민당군을 토벌했다.

2.5. 6.25 전쟁

"눈이 검다니… 이것이 현대전인가?"
― 펑더화이,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도강 직후 포연으로 새까맣게 변한 설원을 보고[6]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펑더화이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는데 유엔군이 개입하여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7]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어 출병을 결정하고 펑더화이를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1950년 10월, 부사령관 쑹스룬과 함께 북한에 파견했다.

원래 마오쩌둥이 사령관으로 고려했던 인물은 국공내전 당시 화둥야전군 사령관, 제3야전군 부사령관 등을 맡았고 6.25 전쟁 시점에서는 대만 침공을 위해 한창 준비 중이던 쑤위(粟裕)였다. 하지만 1950년 7월 평소 고혈압위장병, 메니에르병까지 앓던 쑤위가 쓰러져 치료를 위해 소련으로 가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 린뱌오가 임명되었으나 린뱌오는 한반도 출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린뱌오 역시 쑤위와 마찬가지로 건강이 많이 안 좋아 칩거 중이었다. 주더는 야전사령관을 맡기에는 나이가 있어서 패스, 천이는 친우이자 최고의 파트너인 쑤위가 쓰러진 바람에 역시 패스, 쉬샹첸도 몸이 안 좋아서 요양을 위해 칩거 중, 류보청은 육군대학 설립에 열중하고 있어서 임명 불가, 천겅은 이미 베트남에 파견되어 호치민을 돕고 있었다. 따라서 사정이 되면서 한반도 출병에 찬성했던 펑더화이가 맡게 된 것이다. 알고 보면, 평소에 한반도의 정세에 많이 관심 있던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의 한반도 출병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전황을 비관하던 지도부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도 크게 작용했다. 어떤 반공주의 한국 작가의 괴서적 《모택동과 임표》에는 린뱌오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괴설을 싣고 있으나 린뱌오는 6.25 전쟁 개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 대신 대만 침공이 물건너가 중화민국 멸망에 실패하고 어쩡쩡한 양안관계가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지만, 당시 펑더화이도 6.25 전쟁 참전이 2년 넘게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 테니 할 말은 있을 듯.

파병된 부대는 모두 인민해방군 부대였으나 중국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직접으로 맞붙는다는 인상을 피하려고 이 부대들을 굳이 '중국 인민지원군'이라고 명명하였다. 즉, "이 군대는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핍박받는 조선 인민들을 가엾게 여겨 스스로 참전한 것임. 그러므로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 없음"이라면서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민지원군이 참가하자마자 유엔군은 이들이 중국 정부에서 보낸 것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참전한 공군도 자기네들은 인민해방군 공군과 관계 없다며 기수에 "중국 인민지원군"이라고 한자로 써 붙이고 나왔는데 그럼 자기 돈으로 전투기 사서 출전했다는 소리니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1051609474240004300-001.jpg
펑더화이(왼쪽)와 김일성(오른쪽). 혈맹국 전쟁 수뇌부인데도 이 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나빴다.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한반도로 건너 온 펑더화이는 김일성 탓에 많이 고생하게 되었다.

펑더화이는 총사령관을 맡기 전부터 김일성의 오판으로 벌어진 6.25 전쟁의 무모한 앞뒤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북한에 도착해서는 멀쩡한 군단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주제에[8] 중국군을 고기방패 취급하면서 막무가내로 진군하라고 우기는 김일성의 무능에 학을 뗐다. 중국군이 밀어붙이면 미군이 알아서 철수할 거라고 빽빽 우기는 햇병아리 김일성을 상대로 일본군, 국민당군과 숱한 전투를 치르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펑더화이가 크게 언쟁하면서 주먹다짐하기 직전까지 갔다는 썰도 있다.# 이 때 펑더화이는 김일성을 향하여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했다고 한다.
11일 황혼 무렵에 다시 열린 펑더화이·김일성·박헌영의 3자 회동은 초반부터 분위기가 냉랭했다. 박헌영은 특히 소련 측이 제공한 정보를 들어 “미군이 곧 철수할 것”이라며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추격을 하지 않으면 미군이 철수 계획을 철회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쳤다. 미군에게 한반도에서 철군할 핑계거리라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급히 추격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미군이 철군할 요량이라면 우리가 추격하지 않아도 물러날 것”이라며 전날과 같은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다. 박헌영은 남로당 총책답게 공산주의자의 논리로 맞섰다고 한다. 그는 “추격을 펼쳐야 미국의 자산계급 내부의 모순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펑은 “미군 몇 개 사단이라도 없애고 나서야 그런 미국의 모순을 심화할 수 있는 법”이라며 단순하게 땅을 확보하는 전략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맞섰다. 아울러 펑은 “지금은 우리 군대가 휴식과 보충을 취해야만 전장에 나설 수 있다”며 다시 선을 긋고 나섰다.
그러자 김일성이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는 “당장에 3개 군(軍)을 진격시켜야 한다. 다른 부대는 한 달 정도 쉬게 한 다음 공격에 나서도록 하자”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면서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졌다는 것이다.(중략)
“당신들의 관점은 틀렸다. 모두 기대와 바람에서 출발하고 있다. 당신들은 예전에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최소한 미국이 개입한다면 어쩔 것이냐를 전혀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미군이 반드시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역시 미군이 물러나지 않을 경우에는 어쩔 것이냐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전쟁에서 빨리 승리를 거두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아 결국 전쟁을 연장시켜 놓지 않았느냐. 당신들은 전쟁을 요행(僥倖)으로만 보고 있다. 국민들을 가지고 도박을 벌이는 일과 같은데, 이러면 앞으로의 전쟁을 또 실패로 몰고 갈 공산이 크다. 우리 군대는 앞으로 두 달을 휴식하며 보충할 예정이다. 하루도 줄일 수 없다. 그 기간이 3개월에 이를지도 모른다. 상당한 수준의 준비가 없으면 우리는 1개 사단도 남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단코 적을 우습게 보는(輕敵) 당신들의 착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 펑더화이가 직무에 충실치 않는다고 하면 심판해라, 그리고 나를 죽여라!”(후략)
선즈화(沈志 華) 교수의 저서[9]
펑더화이가 김일성과 갈등한 다른 일화로, 1951년 5월에 춘천 북배산 일대에서 미 제24사단, 미 제7사단, 한국군 제6사단에게 삼각으로 포위당한 중국군 제180사단 총 7,000명이 패잔병 1,000명만 남기고 풍비박산, 대참패한 일이 있다.# 이때 중국군 제180사단의 측면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유사시 퇴로를 확보해야 할 북한군 제1군단은 중국군 측에 통보하지도 않고 퇴각해버렸고, 이 일로 병력을 어이없이 잃은 펑더화이가 크게 화냈다고 한다. 광둥성 자오칭도시보, 홍콩 명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일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두 대 쳤고 얼굴이 퉁퉁 부은 김일성은 일주일간 숟가락을 못 들었다고도 전한다.#

출병 후 펑더화이는 미군이 화력과 물량 면에 강점이 있지만, 도보 행군을 싫어하고 야간 전투에 취약하며 공중 지원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약점을 통찰하였다. 이것은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가 자신의 저서 《The Korean War》에서 "이놈들은 차만 타고 다니려고 하지 자기 발로 걸어 이동하는 것을 도저히 모른다. 이런 꼴을 선배님들이 보신다면 땅속에서 목 놓아 우시겠다"면서 비판한 내용과 일치한다.

보병의 강점 중 하나는 어지간한 험지에도 문제 없이 배치,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군하지 않고 차량에만 의존하는 보병은 이 강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지형이 평탄한 곳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대에는 차량은 갈 수 없어도 보병은 갈 수 있는 곳이 꽤 된다.[10]

이것을 이용하여 펑더화이는 산악지대에 대군을 매복했다가 깊숙이 들어온 미군과 한국군을 시계가 제한되어 포격과 폭격 지원이 용이치 않은 저녁과 새벽 사이 포위하듯 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한국에는 인해전술로 알려져 있지만, 엄연한 포위 작전(구대전법)이었고 중국군이 단순히 병력으로만 밀어붙인 건 절대로 아니었다. 돌려 말하자면, 해당 전역에 투입한 인원 자체는 중공군이 UN군에 대해 결코 압도적으로 많은 적이 없지만, 개별 전투에서는 기동이던 매복이던 다양한 방법으로 최대한 수적 우세를 확보한 후에야 돌입해서 UN군 입장에서는 인해전술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웃픈 점은 그런 식으로 부대를 유연하게 운용해서 우세를 달성하라고 있는 것이 미군이 사랑하고 넘치게 갖고 있는 차량인데 이걸 한반도에선 활용할 상황이 당시엔 제대로 못되었다는 점이다. 양측이 서로의 전술적 강점을 꺼리는 가운데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2년여간 계속 휴전선 부근에서 고지전 중심의 교착된 상태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평안도에 있던 펑더화이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을 담당하던 마오쩌둥의 큰 아들 마오안잉이 1950년 11월 25일에 미 공군 F-80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전사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의 전사를 베이징에 바로 보고했으나 중간에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여 마오안잉이 죽은 지 3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보고했다. 게다가 먼저 보고한 게 아니라 마오쩌둥이 아들의 안부를 물어보자 실토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다가 "전쟁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한 뒤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주석이 본을 보여야 한다며 장남 마오안잉을 참전하게 하되, 펑더화이와 주변 몇몇 사람 외엔 이 사실을 극비리에 붙였다. 게다가 사령부는 공습에 대비, 동굴과 같은 구조였는데 네이팜의 화염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야사에 따르면 사령부가 불타는 와중에 펑더화이가 직접 마오안잉을 구하려 하였으나 그 안에 있던 장교가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다른 장교들이 뜯어말렸다고 한다. 이후 전사 보고를 접한 마오쩌둥은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라고 쿨하게 넘기는 듯했지만 훗날 문화대혁명 시기에 펑더화이를 극렬히 조진 것을 보면 이 일로 앙금이 생겼을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

펑더화이는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고 1953년 7월 27일, 지난했던 6.25 전쟁 휴전협정 조인식에 중국 대표 중 한 명으로서 참석하여 휴전협정서에 조인하고 전쟁을 끝낸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장에 임명되었다.
파일:external/1813.img.pp.sohu.com.cn/11ceaadd4beg215.jpg
리즈시절의 펑더화이와 마오쩌둥.

2.6. 실각 및 숙청

중국에 돌아와 6.25 전쟁을 원점으로 돌린 공로로 국방부장 겸 부총리를 맡았다. 펑더화이는 자신이 국방부장 시절이던 1955년에 군에 계급제를 도입하였고 자신은 군 서열 2위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 군 서열 1위인 주더가 당시 70살이었고, 건국 이후 나이 문제로 사실상 퇴역 상태였기에 펑더화이가 현역 중에서는 군 내 최고 서열이었다. 주더는 선천적으로 몸이 강골이었던지라 문화대혁명 이후까지 살아남아 국가원수 대행도 하고 90살까지 살았다.

계급 폐지는 '노동자 인민이 스스로 나서서 하는 혁명무력과 평등한 군대'를 꿈꾸던 소련도 시도했던 일이다.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세비키는 계급을 폐지했지만, 적백내전이 시작되자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전쟁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면서 러시아제국 군인들을 대거 영입하고 이 군인들의 지휘권을 보장해주었다. 1935년 스탈린 시대에는 아예 계급을 부활시켰다. 다만 이 군인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 없었기에 정치장교를 한 명씩 붙였다.

펑더화이는 소련군과 미군을 모범으로 삼고 인민해방군을 전문성이 낮은 의용병에서 전문성이 강화된 기술군으로 탈바꿈하게 하려고 계급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병사 개개인의 당성을 강조하던 마오쩌둥의 노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후에 숙청의 빌미가 된다. 1956년에는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 8차 당대회에 참관하기 위해 방중 중이었던 소련 대표단장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함께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질책하며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를 소집할 것을 강요하여 김일성이 숙청한 인물들을 복권하도록 지시했지만 김일성은 펑더화이와 미코얀이 귀국하자마자 이들을 다시 숙청했다.

1959년 루산회의 직전의 중국의 상황은 마오쩌둥이 야심차게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이 신문과 라디오에서 초과생산 뉴스가 잇따라 나왔던것과는 반대로 질낮은 불량품이 넘쳐나고 일부 지역에서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며 부종환자들이 속출하는 등 파국으로 나타나는 징후가 본격적으로 드러났을때였다. 펑더화이가 1959년 7월에서 8월에 걸쳐 열린 루산회의에서 한 발언은 펑더화이 자신을 비극처럼 비참한 운명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 루산회의를 앞두고 고향인 후난성의 농촌을 시찰한 펑더화이는 선전과는 정반대로 곡물수확량이 급속히 감소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이 곤경에 처하는 현실을 직접 살펴보며 루산회의 기간에 마오쩌둥에게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전하면서 노선 전환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정중한 태도로 작성되었지만, 마오쩌둥 노선에 관한 비판이었으니 지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편지를 회의석상에서 공개하여 토론 의제로 채택하고 펑더화이가 당의 지도에 도전한다면서 비판하였다. 심지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8월 백단대전에서 마오의 지시를 어기고 일본군을 상대로 허락없이 승리했던 옛날 일까지 끄집어내어 펑더화이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몰염치한 행동에 펑더화이도 회의석상에서 반박했지만,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에서 결국 해임되었고 후임 국방부장으로 린뱌오가 임명되면서 후일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다.
마오쩌둥 본인도 계획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끝내 수정을 미뤘고, 펑더화이가 숙청되는 걸 본 저우언라이덩샤오핑같은 타 지도부급 인사들은 몸보신에 급급하면서 마오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을 못하고 대약진운동이 2년 정도 연장되고 말았으며 결국 아사자가 중국 전역에서 속출해버렸다. 결국 펑더화이 개인이나 중국 인민들에게나 커다란 비극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파일:펑더화이 숙청.jpg

결국 중국공산당 8기 8중전회에서 반당분자로 몰려서 비록 동지 경칭은 받았으되 정치국 위원 직무가 정지당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및 국방부장에서 해임되어 린뱌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파일:external/scontent.cdninstagram.com/12534667_1722192214658817_1675200654_n.jpg

파일:external/www.jiaxiangwang.com/ld-pengdehuai-1966-pidou.jpg

파일:external/history.people.com.cn/F201205031459122336300240.jpg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는 펑더화이. 그에게는 생애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1965년, 베이징 부시장이자 시대의 전문가인 우한이 쓴 해서파관에서 해서가 펑더화이고 가정제가 마오쩌둥이라는 장칭야오원위안의 억지주장으로 해서파관 사건이 일어났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에서 퇴출당했고, 마오쩌둥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홍위병의 공격 대상이 되어 박해당했다.

1966년 12월 27일에 장칭이 파견한 홍위병들이 쓰촨의 펑더화이의 자택으로 몰려들었다. 홍위병은 칠순에 가까운 늙은 펑더화이를 모질게 고문하였고, 그 결과 그는 늑골이 부러지고 얼굴이 완전히 짓이겨졌으며 폐가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홍위병들은 만신창이가 된 펑더화이를 끌고 다니면서 조리돌림했고 펑더화이는 거의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앓았다.

베이징의 감옥에 끌려간 펑더화이는 "마지막으로 경례를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마오쩌둥에게 최후의 편지를 썼고 병세가 악화되어 1973년 감옥 의무실로 이송되었다가 1974년 11월 29일에 암으로 사망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지 17년 후 같은 날에는 그와 함께 6.25 전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을 이끌었던 쑹스룬도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때 펑더화이뿐만 아니라 허룽도 조리돌림을 겪었는데, 군의 원로가 이렇게 참혹하게 박해받는 것을 본 인민해방군은 크게 격앙되어[11] 난징 군구에서 펑더화이를 구출하겠다고 특공대를 파견하기도 하였고[12] 마오쩌둥은 군부에게 과격한 홍위병들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여 군부를 달래야 했다. 이에 군부는 각 지방당부와 관청을 점령하고 패싸움하던 홍위병들을 총칼로 짓밟아 어느 정도 화풀이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군부가 정재계를 거의 장악하는 등 군부의 편중이 심해지자 홍위병을 다시 편들어 군부를 숙청하였다.
“당원과 민중들이 모두 펑더화이 동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당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했으며 혁명사업에 일관되게 충성하였다. 작전에는 용감했으며 어떤 곤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스스로 엄격하게 기율을 지켰다. 개인의 득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무거운 책임을 거리낌없이 맡았다.”
중국공산당이 1974년에 사망한 펑더화이(팽덕회)에게 덧씌워진 누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1978년에 거행한 추도회에서 덩샤오핑(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13]
1978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펑더화이 사건이 재조사되어 사면되었고 1978년 12월 24일 추도회가 열려 덩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고 1981년 6월 27일 11기 6중전회는 펑더화이, 황청, 장원톈, 저우샤오저우를 반당 집단으로 결의한 8기 8중전회의 결의를 오류로 평가하면서 펑더화이를 완전히 복권시켰다.

시진핑 현 주석과도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14]은 제2방면군 시절부터 펑더화이의 정치장교였는데, 당시 펑더화이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가문이 몰락하였고 시진핑도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소련군은 인적, 물적 자원을 상당수 러시아 제국군으로부터 계승해 초기에 공산당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인사들이 좀 있어서 그들을 견제, 감시할 존재로서의 정치장교가 필수적이었다. 반면 중국 인민해방군국부군을 때려치우고 홍군으로 넘어올 때부터 아예 사상적으로 전향했거나, 홍군에서 군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정치장교라고 해봤자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저 사기 및 사상 교육 담당 참모에 불과했다. 마오쩌둥도 명목상 주더의 정치장교였는데도 실제로는 홍군의 총사령관이었고 명목상 총사령관인 주더가 오히려 마오쩌둥의 참모장 격이었다.

3. 수훈[출처]

  • 일등홍성장장 一等红星奖章(1933년)
  • 항전승리훈장 抗战胜利勋章(1945년)
  • 일급국기훈장 一级国旗勋章(1951, 1953년)
  • 공화국영웅 금성훈장(1953년)
  • 일급팔일훈장 一级八一勋章(1955년)
  • 일급독립자유훈장 一级独立自由勋章(1955년)
  • 일급해방훈장 一级解放勋章(1955년)

4. 주요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국방부장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대 2대
펑더화이
(1954년 9월 29일 ~ 1959년 9월 17일)
린뱌오

5. 평가 및 여담

파일:중국 펑더화이.jpg
샹탄 펑더화이 탄생지의 동상
  •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명장(名將)이나 오히려 그러한 업적과 성품 탓에 노욕에 찌든 상관에게 찍혀 험한 말년을 보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반란을 일으키려다 비참하게 죽은 린뱌오한신에, 주더는 권력투쟁에서 벗어나 편히 죽었다고 하여 조참에 비유하곤 하는데 펑더화이는 직접적으로 모반을 일으킨 것도 아님에도 다소 억울하게 역적으로 내몰려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는 점에서 같은 성씨를 가진 팽월과 비슷한 감이 있다.
  • 국공내전 때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6.25 전쟁에서도 중공군의 사령관으로서 참전하게 되었다. 사실상 거의 육군만으로 편제된 중공군은 제해권, 제공권이 없었지만 135만명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을 바탕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에 대규모의 병력을 이용한 포위 작전으로 치명적 타격을 가하여 38선까지 몰아넣었지만, 이후 6.25 전쟁은 2년 여의 지리한 소모전 끝에 휴전이라는 어중간한 결말로 종결되었다.[16]
  • 전장에서 부하들을 늘 걱정하는 덕장이었다. 들것에 실려가는 부상병을 직접 나르는 모습에 부하들이 감동하였을 정도. 또 마오안잉의 사망과 연관되었다는 박일우가 준 신선한 계란 10알을 본인은 손도 대지 않고 부상병들을 위해 계란죽을 쒀서 먹이라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물론 이걸 마오안잉이 중간에 스틸해갔다가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도 현역 시절에나 퇴역한 후에나 부하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마오의 방침을 무시하고 소신대로 백단대전을 벌인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아부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는데, 열악한 보급을 받으며 고생하는 부하들을 걱정해 마오쩌둥에게 진언을 올렸지만 번번히 무시당했다.
  • 또한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번의 공세를 펼쳐 심각한 인력 손실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중국군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여 마오쩌둥에게 2개월에서 3개월간 전군에 휴식을 명령하고 이듬해 3월쯤에 공세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김일성이나 북한 주재 소련 대사 라자예프[17]는 지금 당장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달라고 주문했지만, 펑더화이는 그런 무리한 요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실전을 뼈저리게 겪었던[18]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것에 관해 독전파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펑더화이가 옳게 선택하였다며 치켜세웠다.
  • 이러한 생각은 당시 중국군과 대치하던 유엔군의 미8군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의 생각과도 비슷했는데 두 사람은 무리한 진격보다는 충분한 물자와 인력 보충을 도모하고 전략상 요충지를 차근차근 점령해나가는 쪽을 선호했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8월 15일 광복절까지 종전하겠다고 무리한 남진을 선택한 김일성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 미국의 논픽션 작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리지웨이를 중국군으로, 펑더화이를 미군으로 옮겨놨어도 두 사람은 실제 역사와 같이 판단했을 것으로 평가했다.
  • 그리고 결국 마오쩌둥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장비나 화력보다는 병사 개개인의 사상의 각성을 중시한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6.25전쟁 직후 임명된 국방부장 시절 미군과 같이 첨단무기와 프로페셔널한 전문군인을 갖춘 군대가 강한 군대가 될거라고 생각해 국방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기도 했다. 어쨌든 여러모로 현실적인 안목과 전장에 대한 혜안을 가진 군사 전문가였지만, 하필이면 상관이 마오쩌둥이라 고생만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 군인으로써 바라보았을때 그는 항상 부하들을 걱정하고 상대진영의 약점을 예리하게 통찰할수 있었던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을 이끌고 내려와 너무 잘 싸운 덕에 북진통일을 실패하게 한 원흉중 하나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좋게 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여러모로 마오쩌둥과는 정반대인데, 그쪽은 공산 진영의 대국 중국을 데리고 정책 실패를 한 덕에 대한민국과 일본의 발전 기간이 생겨 전세계적으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써의 평가는 낮으나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주의적 반중주의자나 정치현실주의자들에게 고평가받는 반면 이쪽은 능력 있는 인물이나 상대 진영이라 욕을 먹는 케이스. 그러나 엄연히 말해서 펑더화이는 군인으로써 명령을 따랐을 뿐, 실제 모든 책임은 펑더화이를 보낸 마오쩌둥에게 있다는 반론 역시 적지 않다.[19] 단순히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만 비판할것이 아니라, 베트남전에서 명장으로 활약한 채명신 장군이나 베트남 공산군의 지략가였던 보응우옌잡 같이 한 명의 군인으로써 객관적으로 그를 평가해야 한다는 여론도 존재한다. 군인으로써 상당히 훌륭한 인물 중 하나였는데도 하필 공산 진영의 인물이라 제1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욕을 먹는 케이스.
  • 한국에서는 한국한자음인 ‘팽덕회’라고도 많이 부르며, 일본에서도 일본한자음인 ‘호우토쿠카이([ruby(彭徳懐,ruby=ホウトクカイ)])’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된 인물로, “펑더화이: 중국의 군인ㆍ정치가(1900~1974). 6ㆍ25 전쟁 당시 중공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국방부장에 취임하였으나 실각하였다가 1978년에 다시 명예가 회복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2023년 7월 27일 북한에서 진행된 전승절 기념 공연에서 동영상에 잠깐 나왔다.

[1] 후에 펑더화이가 장교가 된 뒤 할머니를 다시 찾았는데 그땐 집안의 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2] 그의 할머니는 아편 중독자였고 그 냄새가 싫었던 팽덕회는 자다가 일어나 아편그릇을 발로 차버렸다. 할머니는 크게 노하여 친족회의를 소집하여 그를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한다고 했다. 계모(근데 막상 이 계모의 아들이자 펑더화이의 이복동생도 후에 같이 중국군에 들어가 형처럼 장군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펑더칭(팽덕청)이었다. 625전쟁에도 펑더화이의 부하, 더 정확히는 펑더화이의 부하인 송시륜의 부하 장군으로 같이 참전했고 장진호 전투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는 찬성했고 아버지도 친족회의의 뜻이라면 그리하자고 했다. 당시 중국은 아직 배타적인 농촌 분위기가 있어서 법보다는 친족이나 마을사람들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 쫓겨나면 갈 데도 없으니...다만 외삼촌이 반대한 덕분에 살아났다고 한다.[3] 팔로군의 세력이 국민당군에 미치지 못했기에 병력 손실을 입으면 국민당군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겨줄까 우려한 것이다. 마오쩌둥이 항일전보다 국민당군을 상대로 한 세력 확장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국민당군과 팔로군의 차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중국군 주력인 국민당군은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여서 패배를 하더라도 세력이 유지될 수 있었으나 팔로군은 그대로 전멸이다. 전면전이 아닌 삼광작전 때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또한 만주의 공산군은 40년대 초반 주력 다 중국 본토로 빠진 관동군도 아닌 만주군에 전면전을 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벌였는데도 전멸당한다. 세력확장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해방구가 주로 일본의 점령지인 화북지역에 설치된 것까지 고려하면 생존>항일>세력확장이란 평가가 옳다. 진짜 세력확장이 우선시되었다면 일본군보다 약한 국민당군의 지역인 사천 등에 해방구가 화북보다 더 많이 세워졌을 것이다. 생존도 쉽고 세력확장도 쉬우니까. 그리고 해방구는 단순히 공산당의 세력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릴라전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군이 농촌동원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4] 이는 궤변이다. 국민당이 일본과의 전면전에서 패배하더라도 세력 유지를 할 수 있다는 말은 중일전쟁의 성격을 지극히 오해한 결과이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홀로 악전고투했고 그 결과 전 연안지역이 일본에게 점령되기까지 한다. 일본 군부의 목적이 중국 정복이었음은 의심할 바 없는데, 이들의 목표를 최소한 중원을 점령하는 것으로 잡아도 장강 이남으로 밀려난 장제스 국민당 정권이 멀쩡히 권력을 유지할 가능성은 낮다. 즉, 중일전쟁은 국민당 입장에서도 생사가 걸린 혈투였다는 것. 공산당의 해방구가 사천같은 남쪽에 설치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럴 경우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이 아닌 공산당을 우선 쓰러뜨렸을 것이기 때문. 5차례나 토벌작전을 개시해 겨우겨우 연안까지 몰아낸 공산당이 하라는 국공합작은 안하고 슬금슬금 다시 남쪽으로 세력확장을 한다면 이는 명백히 국공합작 위반이기에 국민당에게 처맞아도 할 말 없다. 그리고 공산당 입장에서도 소련의 무기와 자금 지원을 손쉽게 받기 위해서는 남중국이 아닌 화북에 근거지를 두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또한 생존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모호한데, 우선 당의 생존을 논한다면 중일전쟁과 공산당의 생존은 딱히 관련이 없다.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 이전에도 수없이 괴멸과 부활을 반복해왔기 때문. 공산당의 강점인 조직력과 무한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소련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한, 공산당은 생존 운운할 만한 약한 조직이 아니다. 모택동 본인의 생존이라면 관련이 있어도... 모택동이 영악하게 국민당과 일본 사이에서 세력확장을 꾀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이는 중국을 통일한 역대 군주들이 가졌던 덕목이기도 하다. 이런 모택동의 전략은 주효했으며, 중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은 입장에서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했다.[5] 앞 주석에서 말했듯이 팔로군은 너무 약했다. 또한 팔로군은 중국 농촌이 피폐해져감에 따라 농촌 빈민들이 도주하고 결성한 여러 도적집단, 그리고 종교집단과 결합했다.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 즉 만주국이 종교집단을 이용했기에 도적집단과만 결합했는데 이러한 일본의 경험이 '공비'라는 말을 낳았고 이에 따라 '비적' 취급을 했다.[6] Heixue Chubing Chaoxian Jishi "Black Snow: The Actual Record of the Decision to Send Troops to Korea". Beijing, 1989.[7]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당시 자국을 이(齒), 조선, 즉 한반도를 입술(脣)에 비유하면서 한반도를 중국의 국가안보정책상 최고 요충지로 선언한 셈이다.[8] 1951년 당시 북한은 기나긴 공방전에 전황마저 불리한데 인민 정규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징집할 2~30대 남성도 부족하자 연변의 조선족을 상대로 모병활동을 벌이고 심지어 고등학생은 물론 그보다 어린 중학생들까지 의용군이란 명목하에 전쟁터로 끌고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9] 출처는 다음과 같다. "천젠, 선즈화, 밀턴 라이텐버그, 캐스린 웨더스비 공저, ARGO 연구소 번역, <한국전쟁의 거짓말 :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의 불편한 동맹>, 2018, p.122~124."[10] 물론 차량화, 기계화로 기동성과 화력을 확보하는 것의 전략적 이점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크다. 한반도가 지형적으로 완전히 차량화보병의 카운터였을 뿐이다. 더군다나 안그래도 기동로가 한정되어 있는데 전선의 병력 밀도가 워낙 높다보니 기동전은 당시 미군으로서도 도저히 무리였다.[11] 차마 마오쩌둥에게 대놓고 항의하진 못하고 장칭을 비롯한 4인방에게 죽여버리겠다고 욕을 퍼부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4인방 중 1명은 마오쩌둥의 부인이다.[12] 마오쩌둥이 난징 군구에게 군정을 허용하면서 달랜 덕에 특공대는 철수하였다.[13] 출처: 펑더화이의 자서전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14] 習仲勳, 1913~2002. 국가부주석까지 지낸 혁명 원로 중 한 명이다.[출처] 위키피디아 중국어판 펑더화이 문서[16] 애초에 미군과 한국군을 38선까지 밀어낸 시점에서 미군의 위협을 쳐내고 북한을 지킨다는 중공군의 원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전술적 능력은 뛰어났어도 보급과 병참 등의 군수지원이 부실했던 중공군에게 그 이상을 원하는 건 너무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눈이 돌아간 마오쩌둥이 잘하면 남한을 먹을 수 있겠다면서 진군을 지시했고 그 결과 미군에게 두들겨 맞고 어중간한 결말로 끝나버렸다. 물론 현재는 펑더화이가 중공군을 이끌고 들어와서 북진통일을 막은 것 자체는 펑더화이가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남한까지 전부 먹는답시고 무리하다가 소모전만 잔뜩 펼친 것은 전적으로 마오쩌둥의 책임이다.[17] 소련인임에도 스탈린의 의사에 반해 행동했는데, 김일성과 친한 독전파였다.[18] 독소전쟁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에게 무리한 진격을 여러번 강요했다가 모조리 말아 먹은 적 있다(...). 애초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람이 너무 많이 죽은 소련은 또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현실주의자인 스탈린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자체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19] 주로 이쪽은 자신이 속해있는 진영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반중주의나 내지 정치현실주의자가 아닌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객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