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00:25:38

장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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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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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lack,white> 야오원위안
姚文元

(1931 ~ 2005)
왕훙원
王洪文

(1935 ~ 1992)
장춘차오
张春桥

(1917 ~ 2005)
장칭
江青

(1914 ~ 1991)
파일:external/img.timeinc.net/jiang_qing.jpg
<colbgcolor=#cc0000>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문혁소조 1소조장
본명 이청운(李靑雲)[1]
한문 江青
한국식 독음 강청
영문 Jiang Qing
출생 1914년 3월 19일
중화민국 산둥성 제성현(現 유방시(지급시) 제성시(현급시))
사망 1991년 5월 14일 (향년 77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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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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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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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166cm
학력 없음
직업 배우 → 정치가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마오쩌둥과의 결혼2.3. 장칭과 문화대혁명2.4. 몰락2.5. 말년
3. 평가4. 매체에서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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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
1980년 11월에 한 진술.
마오쩌둥의 아내로 1960년대에 문화대혁명을 이끌었으며, 당시 4인방이라 불린 권력자의 일원이었다. 서양에서는 '마담 마오'(Madame Mao)라고 불리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장칭은 장롱을 만드는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그의 사이에서 서녀로 태어났다. 오른쪽 발가락이 태어날 때부터 6개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에 걸려 있었고, 태어난 장칭과 그녀의 어머니가 미웠는지 모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을 했다. 그러나 장칭도 훗날에 문화대혁명에서의 잔혹도에서 알 수 있듯이 성정이 유약하지 않았기에,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에게 맞서 말다툼을 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팔을 이빨로 물기도 했다. 이 때 분노한 아버지가 장칭의 얼굴을 삽으로 폭행했기 때문에 장칭은 앞니 일부를 잃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하고, 그녀의 어머니가 가정부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 후 장칭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무시와 따돌림을 받게 되고, 그곳에서도 아이들과 싸우면서 지내게 된다. 결국 학교도 중도 자퇴를 하게 되는데 한 교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썰도 있다. 그 후 그녀는 몇 달 동안 담배 공장에서 어린이 노동자로 일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경험으로 그녀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면 면에서 어찌보면 그녀는 가부장적 풍습과 당시 중국 사회의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다 칭다오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대학생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공산당 사상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1933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다. 이 와중에 국민당의 공산당 색출 과정에 체포되어 국민당에게 협조한다는 사법거래를 통해서 풀려났다는 소문이 있는데, 장칭이 자신의 상하이 시절의 자료를 모두 없애서 확인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자료를 없애버렸다는 점에서 정말로 협조했을 가능성 또한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34_Jiang_Qing_movie_shot.jpg
장칭이 주연인 영화 포스터. 포스터의 뜻은 '도시 속 검은 그림자' 이다.

이후 장칭은 집에서 가출하여 상하이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으며, 란핑(藍蘋, 람빈)이라는 예명을 쓰며 여러가지 영화들에 출연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난잡한 남자 관계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등 그녀의 상하이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때의 의혹으로는 감옥에서 간수들을 상대로 자신의 형을 낮춰주는 대가로 매춘을 하거나, 마약에 손을 댔다는 등이 대표적이다. 여배우의 ‘찌라시’는 3류 기자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자신에 대한 루머가 일파만파 퍼지는 꼴을 본 장칭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2] 피폐해진 장칭은 2차례 결혼했으나 2번 모두 이혼했다. 결국 장칭은 연극배우 활동을 접고, 1937년 옌안으로 이사했다.[3] 당시 3번째 부인 허쯔전과 별거 중이던 마오쩌둥의 눈에 들어 그와 바람을 피우다 결혼하게 된다.

마오쩌둥을 노동자학교에서 본 장칭이 마오쩌둥의 처소에 난입하여 그와의 대화를 막무가내로 요구함으로 마오쩌둥의 눈에 들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장칭 평전을 쓴 로스 테릴은 만약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결국 장칭이 마오쩌둥의 처소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마오쩌둥이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2.2. 마오쩌둥과의 결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Mao_and_Jiang_Qing_1946.jpg

마오쩌둥의 결혼은 옌안시절 공산당의 큰 스캔들이었다. 단순한 마오쩌둥의 아내가 아닌 대장정 참가 용사인 허쯔전과의 이혼은 공산당 내에 심각한 논쟁을 불려 일으켰다. 무엇보다 장칭 그녀가 국민당 간수들과 매춘을 했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으며 장칭이 감옥에서 사상 전향 서약서를 쓰고 석방되었는데 이런 행위는 당에서 변절 행위로 여겨졌으며, 특히나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과 결혼한다는 것은 당 전체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수 있었기에 당 내에서는 대표적으로 주더저우언라이는 결혼을 크게 반대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끝까지 장칭과의 결혼을 강행했고, 장칭과 동향 사람이던 공포정치의 대가 캉성이 장칭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캉성은 죽기 직전에 장칭 반대파로 돌아서서 장칭이 국민당의 간첩이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마오쩌둥도 늙고 병들어 갈 때가 됐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타협점으로 당핵심은 장칭과의 재혼을 인정했지만 장칭의 정치진출을 막는다는 조건을 관철시켰다. 이때의 약속은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문화대혁명까지 장칭의 정치적 족쇄가 되어 정치적 활동의 제약이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문화대혁명에서 당 혁명소조부의 수장으로 일하면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4인방이라 불리며 마오의 4번째 부인은 훗날 악명 높은 영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대는 훗날 장칭이 문화대혁명 당시 주더와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간부들을 실각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게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에 마오쩌둥과 장칭은 정식으로 결혼했고, 1940년에는 첫째 딸인 리나(李訥, 이눌)가 태어났다. 종전 후 국공내전을 승리하고 1949년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자 장칭은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칭은 훗날 문혁 시대에 보이게 되는 광기와 히스테리를 보이지 않고 공손하고 예의바른 성품이란 평가를 받았었다.

허나 마오쩌둥과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마오쩌둥은 얼마 안 가서 장칭을 대신해 다른 여자를 계속해서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상하이 시절 앓았던 우울증이 재발했다. 그 강도는 극심했다. 자신의 삶은 늘 불행했다는 열등감, 마오쩌둥에 대한 배신감, 언제 자신도 前 부인처럼 내쫓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옭아맸다.[4] 다정하던 장칭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남 몰래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문화대혁명에서 지독한 잔인성을 보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장칭이 변했다는 사실을 마오쩌둥도 모를 수가 없었다. 복잡한 여성 관계로 장칭과 사실상 별거 중이던 마오쩌둥도 장칭에 측은함, 혹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장칭을 달래기 위해 그녀의 당 간부 및 정치활동을 허락했다고 한다. 장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정무원 문화부 산하 영화사업지도위원회(电影事业指导委员会) 위원, 중공중앙 선전부 영화처 처장 등 자신의 전공 분야인 영화 부문에 종사하였다.

2.3. 장칭과 문화대혁명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좀 때린들 어떻다는 말인가?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에게 맞는다면 그건 맞을 만해서 그런 것이다."
문화대혁명 중 장칭의 발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Jiang_Qing_arts_poster.jpg
"백전불태[5]모택동 사상은 혁명예술무대를 밝게 비추었다!"
장칭은 종종 마오쩌둥을 뒤에서 조종한 악녀라고 여겨진다. 장칭이 사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38년 결혼 이후로는 그녀에겐 마오쩌둥을 감히 거스르거나 조종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그녀는 순전히 마오쩌둥의 호의에 의존해서만 권력을 얻을 수 있었고 그걸 알기 때문에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마오쩌둥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며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곤 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그녀의 행동도 1974년 비림비공운동 시점에서 마오쩌둥이 운신도 못할 정도로 드러눕기 전까지는 철저히 마오쩌둥의 의향에 맞춘 것이었다. 그녀는 훗날 마오쩌둥과의 부부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 이후 문화대혁명 초기 몇년간 문화혁명소조를 이끌며 정치국원이 된 후 수천만에 달하는 중국 인민들의 생활을 파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마오쩌둥을 도와 중국을 파괴하고 중국 문화사막지대로 만드는 것을 도왔다.

마오쩌둥이 실시했던 대약진 운동 실패와 소련과의 불화로 그의 위신이 실추하고 류사오치덩샤오핑 같은 개혁파가 득세하자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일으키도록 마오쩌둥을 부추겼고 이로 인하여 베이징 시장 펑전을 비롯한 상당수 당원들이 실각하고 중앙문화혁명소조가 결성되면서 시작된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장칭은 이른바 4인방의 1명으로 전 세계에 악명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1966년 8월에 중앙문화소조 제 1부 조장으로 취임한 장칭은 혁명적인 현대발레를 주장해 경극 같은 중국전통예술을 배척해 많은 전통배우들이 자리를 잃고 중국전통예술 및 잡기는 퇴보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배우였을 당시 자신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던 연예계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다. 1967년 2월 역류에서 쉬샹첸, 예젠잉, 녜룽전, 천이 등 군 원로들의 가혹한 비판에 직면했으나 마오쩌둥의 개입으로 살아남고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1969년 제 9회 당대회, 1973년 제 10회 전국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된 장칭은 캉성 등 정치에서 배척당한 인물들을 대거 사면하여 문화혁명파의 일원으로 만들고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과 함께 4인방이라는 정치국을 결성했다. 린뱌오의 실각 후 이들 4인방은 10회 전국대회 이후 문화혁명의 주도를 담당했다.

이들은 마오쩌둥을 지키고 보필한다는 구실로 여러가지 악행을 일삼았는데, 숙청과정에서 그녀가 했던 개별적인 행동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복수를 자행한 일이었다. 수십년 전 장칭이 탐내던 연극 역할을 가로채고, 미국에서 멋진 생활을 하면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를 위하여 백악관에서 공연까지 했던 왕잉이라는 여자를 잡아들인 것도 그러한 복수 중 하나였다. 결국 이 여배우는 형무소에서 사망하고 만다.

거기에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도 자신보다 예쁘고 잘났다는 이유로 장칭은 그녀를 시기했고, 그녀 또한 장칭에 의해 끝없이 규탄 받아야 했다. 이 때 얼마나 고문하고 핍박했는지 왕광메이가 풀려났을 때 제대로 서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또 왕광메이의 자식을 옥사시켰으며 저우언라이의 양녀였던 여배우 쑨유스(孫維世)가 자신보다 아름다워 마오쩌둥을 유혹했다는 이유로 스파이로 몰아 투옥한 후 부하들을 시켜 7개월간 구타하여 죽였다. 일설에는 윤간고문한 후 머리에 대못을 박아 죽였다는 소문도 있었다..당시 쑨유스는 40대였고 당대 중국의 미남배우였던 진샨과 결혼한 상태였다. 쑨유스의 죽음은 60년대 중국국민들에게 커다란 당혹감으로 다가왔으며 남편 진샨은 10여년가까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81년 베이징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자신의 스캔들과 국민당 형무소에서 간수들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들통날까 봐 장칭은 자신의 동료와 친구, 애인과 그 애인의 친구들 심지어 하녀들까지 투옥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자신을 비판한 사람들 또한 마구잡이로 투옥시켰고 대부분 고문 끝에 사망했다.

허나 그렇게 많은 피를 묻히고도, 아니 그렇게 많은 피를 묻힌 탓에 장칭 본인은 암살당할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녀는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사람들이나 갑작스러운 소리에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누군가 복수하려 들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음을 듣거나 낯선 사람을 보면 땀을 흘리기 시작하면서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장칭의 건물에 생활하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암묵적인 수칙은 이 건물에서 말하거나 걷거나 창문이나 출입문을 열 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었으며,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거나 앞길을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하고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절대로 뛰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성격이다 보니 이 건물에서 생활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였다. 장칭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와 함께 건물 내에서 생활하는 것은 악몽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단지 모자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하인들을 형무소에 보내기까지 했다. 훗날 그녀의 비서였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장칭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서서 말하면 건방지다고 말하며 내가 앉아 있을 때에는 쪼그리고 앉아서 말하라고 화를 냈으며, 큰 소리로 빠르게 말하면 골치가 아프다며 화를 냈고, 목소리를 낮고 느리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짜증난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리즈수이 이전에 마오쩌둥의 주치의로 잠시 일했던 쉬타오는 장칭의 주치의가 된 것이 화근으로 호되게 당했다. 장칭이 쉬타오에게 창문 차양을 내리라고 지시했는데 쉬타오의 동작이 느렸는지 장칭의 기분이 안좋았던 건지는 몰라도 장칭이 쉬타오를 자신의 눈에 햇볕을 비춰 손상을 입힌 반동 분자로 기소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의로 방 온도를 낮게 한 죄목도 추가했는데 춥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장칭에게 온도계를 보여주면서 지금 26도가 맞다고 항변한 것은 정신적 고통을 준 혐의로 추가되었다. 결국 쉬타오를 비롯한 많은 의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숙청되었는데 웃기는 것은 쉬타오는 그 이후로도 장칭의 주치의 일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장칭의 처소를 방문할 때, 그의 수행원들은 장칭과 마주쳤을 때 자칫하면 커다란 재앙을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장칭의 집안에 들어가기보다는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정상적인 업무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그녀를 실각시키지 않았는데, 부부의 정이라기보다는 장칭은 자신의 하인 같은 존재에 불과했고 자신의 어떠한 잔혹한 명령이라도 군말없이 무조건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러운 일을 시키기에는 적격인 것이었다. 장칭은 남편의 잔혹도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남편을 가장 두려워했으며 실제로 그녀를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마오쩌둥뿐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어느 정도 정리 된 후 마오쩌둥은 그녀에게 행정업무는 맡기지 않고 공격견의 용도로써만 그녀를 배치하다 보니, 할 일이 없던 그녀는 구체적인 업무가 들어오기 전까지 포커나 치고 모든 중국인들이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숭이를 비롯한 반려동물들을 기르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 되어버린 베이하이 공원에서 승마를 즐겼고, 거의 매일 밤 외국 영화를 관람했다. 물론 이 영화는 모두 일반인들에게는 상영이 금지된 것이었다.

이때 장칭의 생활은 사치의 극에 달했다. 취미 중 하나였던 사진 촬영을 위해 군함들이 남북으로 항해하면서 대공포를 일제히 발사하기도 했다. 그녀의 수영장은 수십 km 떨어진 곳에서 수로를 파서 광천수를 끌어와 만들었으며, 그녀가 경치 좋은 산악지대를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건설했는데 한 도로는 그녀의 저택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음으로 인해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암석을 수작업으로 깨뜨려야만 했다.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변덕에 대비하여 비행기는 항상 대기 상태에 있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입고 싶다는 특정 재킷이나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뒤로 젖혀지는 긴 의자를 베이징에서 광저우로 수송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띄우기도 했다. 그녀의 전용기차는 그녀 마음대로 아무 곳이나 정거하는 바람에 기차 수송망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장칭은 이런 행동을 수치스럽게 여기기는 커녕 "내가 잘 쉬고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다.

또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젊고 건강한 남자들을 선발하여 그들의 피를 채혈해 자신에게 수혈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선발된 남자들에게 "당신들의 혈액이 내 몸속에서 돌고 있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라고 고압적으로 으스대며 동네방네 자랑을 일삼고 다녔다. 물론 이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이런 행동을 웃기는 짓거리라며 건강상의 이유로 수혈을 금지시켰다.

장칭은 항상 자신의 건강에 불평을 늘어 놓았으나 사실 그녀의 건강은 좋은 편이었다. 다만 그녀는 신경 과민증에 시달렸다. 그녀는 보통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기전에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으며 하루 2차례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다. 장칭의 비서는 장칭이 낮 시간 실내에 머무를 때 햇빛을 커튼으로 이중삼중으로 차단했으며 검은 천으로 덮힌 램프 옆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녀의 거실에 들어가면 무시무시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병적으로 소음에 과민반응을 보여 베이징 댜오위타이에 있는 그녀의 처소에서 비서실 직원들은 새와 매미를 쫒아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때로는 구두를 신지 말고 직원들의 옷이 스치는 소리를 방지하기 위해 팔을 들고 다리를 벌리고 걸으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 상상해보면 매우 웃긴 상황이다.

그녀는 수도에서 몇개 남지 않은 대중용 공원들 중의 하나인 위위안타 공원을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기 위해 폐쇄하라고 지시했다. 광저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광저우에 있는 그녀의 저택은 주장강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머무를 때면 주장강의 선박 통행을 금지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혔으며, 심지어 먼 곳에 있던 조선소는 가동을 중지해야만 했다.

거기에 온도와 통풍이 정확하게 맞추도록 했는데 그녀가 사용하는 방들의 실내 온도는 겨울에는 섭씨 21.5도를, 여름에는 26도를 정확하게 유지해야 했다. 기막힌 사실은 실내 온도조절기가 정확히 가리키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그냥 화내고 싶다는 이유로(...)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실내 온도 하나 제대로 못 맞춰! 나를 괴롭히려고 환장했군."라며 시종들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한 간호사가 통풍구의 위치를 모른다는 이유로 그 간호사에게 큰 가위를 집어던졌는데 다행히도 살짝 빗나갔간 일도 있었다. 장칭은 항상 비서실 직원들에게 "나를 섬기는 것은 인민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소리를 되뇌었다.

린뱌오 일가의 사망 이후 마오쩌둥과 자신까지 겨냥한 암살계획까지 적발되자, 장칭은 린뱌오 일가가 자신을 쫒아와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 후 그녀는 항상 자신을 향한 테러를 걱정했으며 사소한 일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암살음모라고 몰아붙였다. 한번은 자신의 주치의와 간호사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근데 그 이유가 자신이 복용하던 약을 먹은 뒤 자신이 넘어져서 다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던 중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 부부가 베이징을 방문하자 그녀는 자신을 중국의 영부인으로 전세계에 알려서 유명해지고자 했다. 그래서 여러가지 튀는 행동들을 했는데 이는 마오쩌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장칭은 미국의 여교수 록산 위크케들을 불러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는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기 이전의 깊은 애착과 향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연극배우 생활을 추억하기도 했다. 이때 주위의 측근들은 적인 중국 중국 국민당을 찬양하는 장칭에 의해 자신들이 처벌 받을까 봐 엄청난 불안에 휩싸였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하여 10번 정도는 보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웃긴 것은 자신이 중국 영화계에 대한 탄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중국은 왜 그런 영화를 못 만들지? 라고 물었다고 한다. 더 웃긴 것은 만약 다른 중국인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재밌다고 하면 노예제를 옹호하는 봉건적 반동 영화를 좋아하는 반혁명분자라고 비난하고 매도하길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다 중국에 호의적인 외국인 감독들에게도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요리스 이벤스마르셀린 로리단-이벤스 부부가 문화혁명에 대한 호의적인 다큐멘터리 '우공은 어떻게 산을 만들었는가?'를 만들자, 신경질 내면서 비판하는 바람에 이벤스 부부는 빠르게 중국을 떠나야 했다. 심지어 요리스는 모택동하고 친분이 있는 사이였는데도 말이다.

결국 마오쩌둥의 지시에 의해 많은 부분들이 편집되었지만 장칭은 자신의 전기를 출간했다. 비록 장칭이 영부인을 할 기회는 그녀가 바란 것보다는 적었으나 그는 영부인 역할을 즐기며 수행했다. 그녀는 항상 마오쩌둥과 함께 접견하는 외국인들과의 대화에 끼어들려고 애를 썼다. 1974년 덴마크 총리 포울 하틀링이 방문했을 때,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었다고 총리 부부를 반시간 동안이나 붙잡아두는 바람에 만찬에 참여한 400명의 인사들이 기다려야만 했다. 거기에 영부인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대중들이 너무 흥분할 것이라는 이유로 위트케와 함께 수영하기를 거절한 적도 있었다.

1974년 장칭이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내인 이멜다 마르코스와 만났을 때 측천무후처럼 화려한 화장과 복장을 하고 나가려 했으나 마오쩌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장칭은 계속해서 이멜다 마르코스의 화려한 의상을 부럽다는 듯이 계속 쳐다보았고 자신이 평범한 옷만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이에 장칭은 여성스러운 의상을 입고 싶어했다. 당시 중국 여성들은 볼품없는 재킷이나 바지만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였다. 다만 지극히 드문 경우에만 장칭은 드레스나 스커트를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장칭은 중국 민족의상을 디자인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의상은 주름이 굉장히 많은 형편 없는 의상이었다. 그럼에도 장칭은 그 의상을 공식적인 민족의상으로 채택하려고 했으나 이 문제를 심의한 정치국은 예산상의 이유로 거절했다. 그 이유는 주름잡힌 스커트를 채택하면 수많은 중국 여성들이 그 옷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천이 엄청날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의상을 계속 고집했고 결국 마오쩌둥이 불쾌한 표정까지 지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기각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동은 일면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비록 디자인은 실패작이었지만 멋진 의상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중국 여성들이 스커트와 드레스를 착용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타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그 후 얼마 뒤부터 스커트와 드레스를 다시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위의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장칭이 입은 인민복은 다른 인민복과 달리 여성미를 매우 강조하는 쪽으로 개조된 것으로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사치욕을 그나마 조금 해소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기행을 일삼다 보니 마오쩌둥은 그녀를 점점 귀찮게 여겼고 그녀를 멀리하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을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디. 그러나 장칭은 마오쩌둥이 멀어질려고 할수록 더 기를 쓰고 접근했고 이로 인해 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로 마오쩌둥 부부는 두 사람 모두 베이징에 있을 때에도 각기 다른 처소를 사용했다. 장칭은 댜오위타이에서 마오쩌둥은 중난하이에서 생활했다. 장칭이 문화혁명 초기 몇 년간 문화혁명 소조의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때에는 그녀는 마오쩌둥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정치적 역할이 점점 감소됨에 따라 마오쩌둥은 그녀의 접근을 제한했고 종종 자신의 집에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장칭은 말년에는 마오쩌둥의 애첩들에게 알랑거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마오쩌둥은 장칭에게 자신이 해야할 더러운 작업의 상당 부분을 수행하도록 시킨 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자신이 죽은 다음 그녀를 보호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칭이 언제나 이러한 미친 행동과 패악을 반복한 것은 아니었다. 장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매력적으로 굴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멜다 마르코스와의 회견 때였다. 장칭은 이멜다 마르코스가 가지고 있던 미모와 여성미를 부러워했다. 이멜다 마르코스는 젊은 시절 대단한 미녀였고 남편의 사랑까지 받았다. 권력과 매력을 모두 유지한,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가졌다고 매우 고평가했다. 그 때문에 매우 극진한 대접을 보였고, 그녀에게 공손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멜다 마르코스는 귀국할 때 장칭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쑹칭링과도 처음에는 사이가 좋아서 쑹칭링은 장칭을 매우 예의 바른 여인으로 평가했지만 쑹칭링이 문화대혁명의 폭력성을 지적하자 장칭은 즉각 돌변, 쑹칭링에게도 독기를 드러내어 쑹칭링을 충격에 빠뜨렸다.

2.4.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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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아내가 입을 열다. 여배우에서 황후까지."
1977년 타임지를 장식한 장칭

그녀는 자신이 마오쩌둥의 후계자라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이미 인민들의 적일 뿐이었고, 그의 편은 언론들 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음에 다다르자 남편이 죽으면 혹시 자신도 몰락할 것이라는 공포감과 마오쩌둥의 뒤를 자신이 이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동시에 가졌다. 그녀는 의사들이 마오쩌둥의 용태에 대해서 보고할때는 어디서 이런 과장된 보고를 올리냐고 화를 내면서 "부르주아지들이 하는 말은 3분의 1만 믿어야 한다"면서 마오쩌둥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동시에 의료진들에게 "여러분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고 으스대고 마오쩌둥에게는 죽으면 편해진다고 속삭이는 기행을 보였다.

그래놓고 나중에 마오쩌둥이 죽자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에게 왜 지금까지 마오쩌둥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냐며 리즈수이에게 모든 것을 책임전가하며 패악을 부렸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화궈펑이 의료진은 최선을 다 했고 모든 내역을 우리가 확인했는데 문제없었다고 거들어주고 4인방 중 하나인 왕훙원 역시 의료진의 행위에 문제가 없었다고 변호하자 장칭은 의료진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한 다음에 지금까지 자신이 의료진의 보고를 무시했던 것은 까맣게 잊고 왜 자신에게만 주석의 용태를 보고하지 않았냐고 하였다.

그리고 마오의 비서들에게 이제 자신을 위해 일하면 된다고 갑자기 온화한 태도로 돌변하여 사근사근 말하는 등 대놓고 대권을 차지할 욕심을 보였다. 그녀는 마오쩌둥의 비서 장위훵을 찾아가 마오쩌둥이 자신에 대해 평가한 서류들을 제멋대로 훔쳐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삭제했다. 왕둥싱 등이 크게 화를 내며 서류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장칭은 주석님 시체가 식기도 전에 날 축출하려 하느냐?라고 했다.

난징군구 사령관 쉬스유 등은 대놓고 마오쩌둥 사후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독살된 것이 틀림없으며 그 배후는 장칭이라고 주장했는데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석의 죽음에 책임을 지라고 마오쩌둥의 의료진을 핍박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마오쩌둥을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되자 열성적으로 의료진을 변호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1976년 마오쩌둥 사후 상하이의 군사력과 언론을 장악하여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계승하려 했지만, 예젠잉 등 군부와 결탁한 화궈펑의 선제공격으로 10월 6일 긴급체포되어 중난하이에 감금되었다. 장칭은 수감되었을 때 철저하게 격리된 1인용 감방에 들어갔다. 치약은 지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치약 튜브를 삼켜 자살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장칭은 절망한 나머지 감방 벽에 머리를 찧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교도소 당국이 자살을 우려하여 미리 감방벽을 고무판으로 덧씌워버렸고, 혹시라도 다른 짓을 할까봐 감방 벽에 구멍을 뚫고 감시하여 장칭의 자살 시도를 막았다. 그녀는 수감 생활을 불평하지 않았다. 식사나 대접이 최고급이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불만을 터뜨렸을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문을 읽지 못하게 막을 때였다. 그녀는 "지주도 부유한 농민도 반동분자도 위험분자도 다 신문을 읽을 수가 있는데 어째서 나는 읽을 수 없느냐!"며 항변했다고 한다. 물론 신문을 읽지 못하게 막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가 여론을 알지 못하게 막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장칭은 화궈펑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화궈펑은 장칭에게 "죄를 인정하고 이제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다시 출발하면 석방할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하자 장칭은 "감히 나를 석방한다고, 한번 해보시오. 그럼 반년안에 사람들을 모아서 당신들 일당을 완전히 제거해 버릴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화궈펑은 약간 당황하더니 잠시 후에 "만일 당신이 석방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공격하여 당신의 몸은 반 시간도 되지 않아서 갈가리 찢기게 될 것이다."라고 받아쳤다. 1978년 류사오치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감방 안에서 경극을 흉내낸 춤을 추며 류사오치를 조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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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에 끌려가는 장칭

결국 죄를 끝까지 뉘우치지 않자 화궈펑과 덩샤오핑의 주도로 1980년 11월, 다른 4인방과 함께 공개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마오쩌둥 정권 시기의 죄를 밝히고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공개재판은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그녀는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자신을 변호했고 판사를 파시스트, 반혁명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재판관들에게 항의하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중립을 지켜야 할 판사들이 화가 난 나머지 모두 한 목소리로 "입 닥치시오!"라고 소리치기도 했지만, 장칭의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리어 재판장들에게 "쌍년!"이라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남편이 지배했던 당의 강령에 따라 남편의 위지를 실행하겠다고 말하면서 "너희는 나보고 마오쩌둥의 빚을 갚으라고 말하고 있다."고 재판부를 공격했다. "너희는 나와 당 주석인 마오쩌둥을 중상모략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가담했던 수천 명을 모략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하는대로라면, 문화대혁명 10년이래, 수억인민군중이 참가한 이 운동에서, 고발된 모든 주자파, 반도, 특무 및 우귀사신 등등은 모조리 가짜사건,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이라는 것이며, 나 장칭이 기획한 것이라는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이게 어찌 너희의 능력과 재능을 말살하는게 아니란 것인가, 나 장칭이 정말 그런 큰 재주를 가졌다면 내가 어찌 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는가?"

재판 중 장칭의 자기 변론 中
다만 장칭이 일삼아 늘어놓던 다른 궤변들과는 달리, 이 자기 변론은 나름 일리가 있다. 장칭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마오쩌둥의 후광에 기반한 것이지 장칭 스스로의 정치적 능력에 기반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은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는 장칭 자신의 말처럼 만약 장칭이 자신의 능력으로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규모 사건을 기획할 수 있었다면, 그런 강력한 대중동원력을 가진 정치인을 재판대에 올리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는 장칭의 주장의 다른 부분, 예를 들어 당시 장칭에 대한 비판이 '본래 마오쩌둥이 갚아야 할 빚(=마오쩌둥에게 돌아가야 할 책임과 비판)을 장칭에게 갚도록 요구하는 것' 이라는 지적 역시 일리가 있다. 정면으로 마오쩌둥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던 중국 공산당이 그나마 만만한 장칭을 샌드백으로 삼으려 한 것은 사실이고, 장칭의 자기 변론은 일단 이 부분만은 제대로 찌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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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받는 장칭

결국 이 재판 내용이 중국 전역에 퍼져나가며 마오쩌둥을 공격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 중국 인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결국 신세력은 마오쩌둥의 잘못을 크게 거론하거나 비판하는 행위들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 덩샤오핑은 장칭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덩사오핑의 동료들 또한 마오쩌둥에게 부분적으로 협력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죄의식도 있었고, 만약 마오쩌둥의 개를 처형한다면 중국군의 마오쩌둥 추종자들과 극좌파 잔당들이 큰 소동을 벌일 수가 있었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려는 장칭의 입을 막으려 사형시켰다는 뒷소문이 퍼질 우려도 있었으며, 장칭을 순교자로 추앙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결국 1981년, 장칭은 '사형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중국은 집행유예의 개념이 대한민국과 많이 다르다. 한국에서 집행유예는 징역을 비롯한 모든 형의 집행이 정지된 상태에서 범죄자가 기간 동안 다른 사고 또 안 치고 얌전히만 지내고 나면 다시 사회로 정식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제도이지만, 중국에서 사형에 대한 집행유예는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로 사형의 집행만을 해당 기간 동안만 하지 않고 수감자의 수감 태도를 고려하여 이 기간 사이에 형을 조정(감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법정에서는 극형을 내려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사형을 집행해버리기는 애매한 사람들을 위해 무기징역이나 장기 수감 등으로의 감형을 위한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2년 뒤인 1983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때 그가 그토록 혹독하게 괴롭혔던 왕광메이는 재판장에서 그녀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2.5. 말년

이 나쁜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죽음이 그녀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히틀러가 자살한지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옛 나치 추종자들이 있으며 또 새로운 나치 추종자들도 있다.
1991년 6월 8일자 상하이 해방일보의 논평 中
투옥된 이후에 그녀의 행적은 절대 일반 인민들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중국 국영 언론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84년 5월 4일 장칭을 가석방했다는 거짓보도를 하였으나 정작 1984년 8월에 중화인민공화국 법무부는 장칭의 가택 연금 요청을 기각하였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도 1988년 관영언론을 통해 장칭이 여전히 수감 중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결국 장칭은 죽을 때까지 병원 이외에는 감옥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984년 9월에 마오쩌둥의 묘소를 참배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거부되자 목구멍에 젓가락을 쑤셔 자살하려고 했고 1986년 5월에도 양말을 묶어 목을 매었다가 구조된 적이 있었다. 또 1988년 12월 수면제 50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했으며 이 때문에 그 동안 지급되던 수면제가 금지되었다.

그녀가 투옥된 베이징 친청 교도소는 최고로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그녀의 성질은 여전히 더러웠다. 장칭은 감옥안의 몇몇 요구사항들을 고쳐달라고 그녀의 딸 리나에게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적이 있었는데 리나가 거절하자 먹던 수박을 바닥에 던져 버리면서 욕을 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그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시작하자 1984년에 후야오방과 더불어 '합리적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등 비교적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며 편지를 보내 남은 여생을 중난하이에서 보내게 해달라고 석방을 요청했다. 이러한 장칭의 요청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장칭을 중난하이에 두면 장칭을 감시하기 편할 것이라는 의견과 정치 중심부에 장칭을 두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리자 결국 덩샤오핑은 장칭의 석방 요청을 거부했다.

1984년 5월 장칭은 인후암 판정을 받고 치료를 위해 푸싱병원, 공안병원, 301호 일반병참부병원 등을 들락이며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그녀에게 수술을 권유했지만, 장칭은 거절했다. 그녀는 수술로 인해 자신의 목소리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수술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장칭은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였으나 후야오방의 실각과 자오쯔양의 후계자 부상 및 민주화 요구가 강해지자 덩샤오핑의 지시로 1989년 3월에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89년 6월 천안문 항쟁이 발생하자 장칭은 다시 태도를 바꿔 마오쩌둥과 자신은 베이징 거리에서 군중을 살해한 적이 없었다고 덩샤오핑을 비난했고 중국 당국의 장칭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이 시기 장칭은 10년만 있으면 다시 혁명노선이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며 인민일보 기자들을 위한 비밀문건에는 장칭의 야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1989년의 정치적 위기가 끝난 이후 공산당은 장칭의 가택연금을 허락하고 주선교 거리의 2층 건물을 제공했다. 장칭은 중난하이의 마오쩌둥 거처나 조어대의 17호 별장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장칭은 자신의 목을 졸라대며 난동을 부렸다. 1990년부터 장칭은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으며 사위인 왕징칭의 회고에 따르면 많이 쇠약해져서 벽을 짚어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고 한다. 1991년 봄에 되자 장칭은 고열에 시달려 3월 15일에 베이징 공안병원에 리륀칭이란 이름으로 옮겨졌다. 이때 목수술을 다시 제안받았으나 "프롤레타리아 혁명 투사를 당신네들이 정성스럽게 치료할 것 같지 않아!"라고 빈정대며 거부했다. 이후 몸무게가 8킬로나 줄었으며 병원 치료소에서 지내며 흥분에 빠져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였으나 1991년 5월 10일에 어느 정도 완성된 원고를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러다 1991년 3월 3일, 장쩌민이 장칭에게 형집행정지 조치를 내려 풀려났지만 어차피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크게 다를 것은 없었으며 그해 봄 덩샤오핑에게 그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이며 마오 주석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기만했고 진정한 피고이며 결코 편히 죽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의 편지를 보내 덩샤오핑을 격노하게 했다.

5월 13일, 장칭은 1966년 5월 13일 정치국 회의 25주년을 기념하여 인민일보 1면에 '역사상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쓴 다음에 유서를 써내려갔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민은 마오쩌둥 주석의 영도 아래 국민당 반동분자들을 물리쳤으며 혁명의 승리를 쟁취했다. 오늘날 혁명은 덩샤오핑, 펑전, 양상쿤 등의 수정주의 도당들에 의해 도둑맞았다. 주석은 류사오치를 제거했으나 덩샤오핑은 제거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인민과 국가에는 끝없는 재앙이 펼쳐졌다. 마오 주석, 당신의 제자이자 전우였던 제가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5월 14일 새벽 1시 30분, 간호사가 쉬러 나가자 새벽 3시, 장칭은 화장실에서 손수건을 묶어 목을 매었다. 새벽 3시 30분에 간호사가 돌아와 장칭을 발견하고 조치를 취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항년 77세였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녀의 딸 리나가 저택에 달려와서 장칭의 시체를 보고 난 후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 5월 18일, 장칭의 시신은 화장되었다. 그녀가 죽었단 뉴스는 소식통을 통해 알음알음 퍼져 1991년 6월호 타임지가 서방언론 중에선 최초로 장칭 자살설을 보도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6월 4일이 되어서야 신화통신을 통해 이를 확인해주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 조롱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다만 그녀의 죽음에도 몇 가지 의문이 있다, 그녀가 죽고서 약 2년 후인 1993년 초가 되어서야 그녀의 유서가 공개된 점이나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것 등등의 의문점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정적을 용서하지 않던 덩샤오핑이 그녀를 암살했다는 음모론도 꽤 있으나 증거는 없다. 암살 대신에 자살을 사주, 방조했다는 음모론도 꽤 거론되는 편이다. 여담으로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장칭이 마오쩌둥 사망 이후 총살당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적기도 했다.

3. 평가

"장칭은 아주 사악한 여자야! 말로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사악하지."
- 덩샤오핑
"당신은 인간도 아니오!"
- 주더,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의 시신 앞에서 오만불손하게 구는 장칭을 보고 화가 나서 일갈하며.
"저 여자를 두들겨 패라! 저 여자를 두들겨 패라!!"
저우언라이의 장례식에서 모자도 벗지 않고 뻣뻣하게 구는 장칭을 본 군중들의 함성.

이 때 중국인들이 두들겨 패라고 외친 이유가 이 여자가 주동했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조리돌림과 동시에 죽도록 두들겨 팼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이런 구호가 당시 중국인들의 분노와 원한, 울분이 상당히 담겨있다. 이 사건으로 1976년의 1차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중국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마오 지지자들에게는 마오의 눈을 막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고 까이고 있고, 반대파들에게는 사악한 악녀라면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장칭이 마오쩌둥의 실정까지도 죄다 자신의 잘못으로 다 뒤집어쓰고 죽은 탓에 현재 중국 내부에선 평가가 엄청나게 나쁘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영부인이란 자리 자체에 대해 인상이 좋지 않을까.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주요 인사의 부인들이 대외활동 자체를 잘 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가를 건국한 초대 지도자의 아내이자, 그걸 이용해서 각종 폭정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한 고제의 황후인 여태후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조차 장칭을 미화한 것에 가깝다. 여태후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해도 백성들을 다스리는 내정 면에서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옹호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평전과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이라는 평전을 쓴 호주역사학자 로스 테릴은 자료 수집을 위해 중국을 방문했는데,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하나같이 짜증을 내며 "그런 나쁜 년에 대해서 왜 씁니까? 중국에는 다른 좋은 여성들이 많으니 그 사람들에 대해 쓰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칭에 대한 평가를 곱씹어본다면 장칭이 문혁 시절 등에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마오의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 모든 중국인이 마음껏 욕할 수 있는 과녁으로 내세워진 점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당장 장칭이 재판정에서 내지른 '마오의 빚을 나에게 갚으려 하는가? 내가 유죈데 나랑 동참한 너희 재판관놈들은 왜 유죄가 아닌가?' 라는 말은 까놓고 말해서 틀린 것은 없었고 이 때문에 장칭을 증오하던 인물들도 장칭이 너무도 속 시원하게 중국 공산당을 까버리는 통에 장칭에 대한 미움이 조금은 씻겨졌다고 후에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점을 로스 테릴이 지적했을 때는 중국 내부에서 장칭에 대해서 과도한 재평가를 해줬다고 비판을 해댔는데 학계에선 당연히 중국의 주장보단 로스 테릴의 분석을 더 높게 치고 있다.

사실 망국 혹은 국가적 재난의 책임을 한명에게 전가하기 위해 최고 지도자 근처의 여성악녀화시키는 것은 상나라, 주나라 때부터 중국의 오랜 전통이다.

결론적으로 장칭이 권력욕에 집착하여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 유지와 덩샤오핑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 희생양으로 내세워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하겠다. 물론 그 점이 그의 독재자의 수하로서의 악행을 조금이라도 감해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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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에 나온 장칭. 배우 장이단(張二丹)이 분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국민당에게 잡혀서 강간당할 뻔 했다가 알란에 의해 구출된다.

존 애덤스오페라 '중국에 간 닉슨(Nixon in China)'에서도 등장한다. 2012년 공연에서는 조수미가 장칭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이 때 부른 <나는 마오쩌둥의 아내>라는 노래가 유명하다.

5. 참고 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비븐 레빈, 민음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 모택동의 사생활 1,2,3권, 리즈수이,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 북스.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공산당역사 1권 상, 하,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공산당역사 2권 상, 중, 하,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모택동 비록, 상, 하, 산케이 신문사, 문학사상사.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조반의 시대, 백승욱, 그린비.


[1] 중국식 독음은 리칭윈. 리칭원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구름 운 자는 현대 보통화 발음을 한글로 옮기면 'ㅇ ㅜ ㅣ ㄴ'이다. 글자 크기가 작을 때 윈과 원이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헷갈리는 듯.[2] 일부 학자는 이때의 경험이 그녀가 집권 후 통제에 집착하는 원인이 됐다고 추측한다. 무절제한 자유를 누리는 기자, 흥미에 쉬이 휘둘리는 대중을 목도하고 더욱 혐오하게 된 것이다.[3] 이때 장칭이 작정하고 마오쩌둥을 유혹하려 이사했다는 말도 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명이다.[4] 이는 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자가 늘 또다른 반란을 두려워하듯,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더욱 뼈저리게 두려웠을 것이다.[5] 직역하면 ‘싸움에서 진 적이 없는(전무불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