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4 01:11:39

린뱌오


파일:임표.jpg
중화인민공화국 1,2대 부주석
본명 린위롱 (林育蓉,línyùróng)
한문 林彪
한국식 독음 임표
영문 Lín Biāo
양춘(阳春)
출생 1907년 12월 5일 청나라 후베이성 황강(黃冈)
사망 1971년 9월 13일 몽골 인민 공화국 은드르항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황포군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무신론
부주석
재임기간
1대 1958년 5월 25일 ~ 1969년 9월 6일
2대 1969년 9월 6일 ~ 1971년 9월 13일
부총리
재임기간
2대 1954년 9월 29일 ~ 1959년 4월 27일
3대 1959년 4월 27일 ~ 1965년 1월 3일
4대 1965년 1월 3일 ~ 1971년 9월 13일
국방부장
재임기간
2대 1959년 9월 17일 ~ 1971년 9월 13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국공결렬 이후2.3. 항일전쟁 및 제2차 국공내전2.4. 1950년대2.5. 국방부장 취임 및 문화대혁명2.6. 쿠데타 음모 및 죽음
3. 평가4. 주요경력5. 여담6. 매체에서7. 참고문헌
"린뱌오는 전장(戰場)과 초연(硝煙), 선혈과 생명이 오가는 곳을 갈망하는, 당대의 한신(韓信)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울 날이 멀지 않았다. 청사에 남을 공을 세울 테니 두고 봐라."
장제스, 1937년 제2차 대일(對日) 국공합작 당시 군사회의 석상에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2. 생애

2.1. 초기이력

1907년 후베이성 황강의 방직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이후 1924년 공산당원인 사촌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1925년 겨울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군문에 들었다.[1] 1925년 말에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군관학교 졸업 이후 공산당원 예팅의 연대에 배속되었다. 1926년 7월, 중국 국민당 소속으로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해 공을 세우면서 고속승진해 나갔다. 소대장이었던 계급이 불과 몇 달만에 대대장에까지 올랐고 이듬해에는 대령까지 진급했다.

파일:external/www.sjsu.edu/linbiao1.png

2.2. 국공결렬 이후

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 점령 직후 공산당원을 대거 학살하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우한마저 분공을 결정해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난창에서 공산당의 난창 폭동에 가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주더와 함께 유랑하다가 정강산 투쟁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을 만났고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펑더화이와 함께 홍군 최고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렸다. 이후 강서 소비에트로 건너가 국민정부초공작전이 시작되자 1930년의 제1차 초공작전에서 담도원의 병력을 섬멸시켰으며 1931년의 제2차 초공작전, 제3차 초공작전에서도 활약했고 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제4차 초공작전, 1933년에 시작된 제5차 초공작전 중에 활약했으나 5차 초공작전에서는 결국 중과부적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이후 대장정에 참여해 옌안까지 가게 된다.

2.3. 항일전쟁 및 제2차 국공내전

2차 국공합작이후, 1937년 9월 린뱌오는 팔로군 115사단장이 되어 산시성 핑형관에서 일본군 제5사단 21연대 소속 치중부대를 매복공격해 궤멸시키는데 이것이 백단대전과 함께 공산당의 양대 승전으로 유명한 평형관 전투다. 하지만 핑형관 전투 자체는 엄청난 승리로 언론에 선전된 것과 달리 공산당의 전과가 그렇게 보잘것 없었고 이런 핑형관 전투 규모의 싸움조차 공산당은 후에 벌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전투에서 노획한 일본군의 망토를 입고 승마를 하다가 그를 일본군으로 오인한 아군의 사격으로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옌안으로 후송되었다가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까지 간뒤 1942년까지 요양해야 했다. 쏜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 부상 후유증[2]으로 전선에서 활약하지는 못하고 항일군정학교와 중앙당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일어난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은 본부인 옌안이 함락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린뱌오가 다시 전선에 투입되어 동북항일연군을 개편한 둥베이 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만주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린뱌오는 1948년 10월, 창춘 공방전에서 창춘에 농성중인 국민당군을 포위했는데, 포위망에서 민간인 피난민의 도피를 막으면서 식량이 떨어지게 하는 전법을 사용하여 민간인 아사자가 수만명이 발생했고,[3] 식량이 떨어진 국민당군은 결국 항복했다. 이렇게 되자 국공내전은 공산당쪽으로 흐름이 기울게 되었고 린뱌오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1949년 베이징을 함락시킨데 이어 1950년에는 광시성까지 내려가 장제스대만으로 쫓아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으로 린뱌오는 당과 군에서 고위직에 올랐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2.4. 1950년대

6.25 전쟁 때는 마오쩌둥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린뱌오를 낙점[4]하고, 1950년 9월에 그를 베이징으로 불러 전황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린뱌오는 그간 파악해온 상세한 정보와 탁월한 전략적 식견을 바탕으로 인천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정확히 예측하여 마오쩌둥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침공하지 않는 상황에서 예방적인 조선출병은 무리라고 단호히 반대했으며, 우회적으로 사령관 직책도 고사하였다.
마오쩌둥: "만약 미군이 인천이나 다른 지역에 상륙한다면 북조선 인민군은 패할 것이 분명하다. 38선 이북으로 퇴각해 압록강변까지 다다르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봤나?"
린뱌오: "우리가 수용함이 마땅하다. 동북전쟁 시절, 우리가 국민당군에게 밀려 압록강변에서 발을 구를 때 조선은 우리를 받아줬다. 단, 직언을 용서해라. 미군이 우리 동북 경내를 타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경솔하게 출전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는 성립된 지 1년도 채 안 된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엉덩이에 땀 마를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웃집 일에 간섭할 형편이 못 된다. 게다가 공군도 없고 해군도 없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사람들과 기껏해야 기관총 정도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북조선군을 추격한 미군이 동북에 진입했을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는 내가 직접 나서서 전쟁을 치르겠다. 우리 땅에 남의 나라 군대가 들어오는 것은 단 한명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0) 복잡했던 중국의 한국전 참전 과정

결국 아직 온전치 않은 건강 문제와 린뱌오 본인의 완곡한 고사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에는 당시 서북군구 사령관이던 펑더화이가 임명되었다.[5]

6.25 전쟁 이후에도 린뱌오는 1950년대 내내 특별한 돌출행동 없이 은인자중하는데, 여기에는 가오강(高崗) 사건도 영향을 마쳤다. 국공내전은 물론 6.25 전쟁 기간에도 후방 병참기지로 동북지방을 잘 관리하여 '동북왕'으로 위세를 떨친 가오강은, 1953년에 당과 군부 인사들을 포섭하여 류사오치를 밀어내고 정권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때 덩샤오핑과 함께 포섭을 제안받은 천윈마오쩌둥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여, 가오강은 오히려 역공을 받고 권총자살을 시도한 뒤 1954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최초의 숙청인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으로 비화된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국공내전기 동북에서 교분이 깊었던 린뱌오에게 가오강과 한패인지 추궁했고, 린뱌오는 마오쩌둥에게 굳건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겨우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마오쩌둥의 성격을 잘 아는 린뱌오로서는 바짝 몸을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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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린뱌오

1955년 인민해방군이 계급제도를 도입하자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서 10대 원수에 임명되었다. 10명의 원수를 한번에 임명했기 때문에 10대 원수라고 부른다. 린뱌오 이외에 나머지 9명은 주더, 펑더화이, 류보청, 허룽, 천이, 뤄룽환, 쉬상첸, 녜룽전, 예젠잉.

2.5. 국방부장 취임 및 문화대혁명

건강 때문에 정치나 군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던 린뱌오는 1959년 루산회의(庐山会议)에서 펑더화이가 몰락하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을 비판한 펑더화이를 축출하고 펑더화이가 맡던 국방부장직을 린뱌오에게 주게 된다. 이때부터 린뱌오는 마오를 잘 잡아야 권력이 온다라는 신념이라도 생겼는지 본격적으로 마오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 당시 그가 마오쩌둥에게 아첨하기 위해 펴낸 책이 그 유명한 마오쩌둥 어록(정식명칙: 마오주석 어록)이다. 이 서문에서 린뱌오는 "마오쩌둥 주석은 천재이며, 그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만마디의 말에 맞먹는다."라는 소리를 했다.

이런 가운데 1962년 중국과 인도 사이에 국경분쟁(중인전쟁)이 발생하고 양측이 충돌하자 린뱌오는 다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인도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린뱌오는 재빨리 문혁파의 선두에 서서 당내의 마오 반대파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다.

린뱌오는 "해서파관의 저자 우한은 마오주석에 반대하는 반동이며, 그를 옹호하는 자들 역시 모두 반동이다"라며 베이징 시장 펑전을 비롯한 베이징 시 당위원회와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 문화혁명 오인소조를 공격했다. 또한 1959년 대약진운동실패로 마오를 밀어내고 국가주석에 취임해 있었던 류사오치를 1967년부터 물고 늘어져 결국 류사오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마오는 1959년 이래 잃었던 정권을 되찾았으며, 이로 인해 마오는 린뱌오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져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월 역류, 7.20 사건 등 굵직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며 2인자 자리를 굳혔다. 다만 국방부장으로 있었으면서도 후계자 자리를 굳히기 위해 문화대혁명파와 홍위병이 인민해방군과 군부 실세를 공격하는데 방관하거나 협조함으로서 아들 린리궈가 지배하고 있던 공군을 제외한 군내 영향력은 줄어든다.

2.6. 쿠데타 음모 및 죽음

이 당시 린뱌오는 중국언론에 의해 "마오쩌둥의 친밀한 전우"라는 호칭으로 지칭되었으며, 이는 마오의 공식적인 후계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의 방대한 저서들에서 명구절만 모아서 만든 마오주석어록이라는 소책자를 전국적으로 배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자신이 쓴 서문에서, "마오주석의 말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말 천마디에 맞먹는다"라는 아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당시 중국인민들은 이 마오주석어록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며 암송해야 했으며, 각국어로 번역되어 68 혁명등 서방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등 조반파의 난동이 심각 수준에 치달으면서 중국은 외교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마오쩌둥은 중앙문혁소조의 과격파를 대독초라 부르면서 이들을 제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린뱌오의 군부가 대대적인 질서 안정 차원에 들어갔고 각 지방의 인민해방군들이 홍위병의 소요를 진압했다. 린뱌오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문혁을 지속하다가는 중국이 결딴날 수도 있다고 인식,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연합하여 문혁 중단과 경제개발을 주장했다. 하지만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비롯한 상하이방은 경제개발보다는 계급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1969년 중국 공산당 9차 당대회 정치보고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상하이방을 지지함으로 린뱌오와 천보다는 일단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을 겪고 나서 충격을 받은 중국 지도부가 미국과의 화해를 꾀하자 이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마오쩌둥으로부터 고립주의자, 대국 쇼비니스트라는 비난을 들었다.

이듬해인 1970년 8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9기 2중전회에서 린뱌오와 천보다는 국가주석직 부활과 천재론이라는 카드를 내놓음으로 상하이방을 견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천재론을 존치할 것을 주장함으로 천재론 삭제를 주장하던 장춘차오를 몰아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 부활과 천재론에 대해서 모두 분명하게 반대를 표명했고 8월 31일, 천보다를 숙청해버렸다. 마오쩌둥 입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상징인 장춘차오를 내칠 수도 없었고 천보다의 경제안정론은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대단히 린뱌오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왔는데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문화대혁명과 자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당내 이론가 천보다와 군사 실력자 린뱌오의 결합은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권위에 치명타로 다가올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그동안 린뱌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린뱌오가 문혁을 계속 옹호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는데 9차 당대회와 9기 2중전회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제거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천보다가 마오쩌둥에게 난타당하고 숙청당한 것의 본질이 린뱌오에 대한 견제라는 것은 중국 정가에서는 다 아는 일이었고 린뱌오의 권위는 계속 축소되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린뱌오는 1971년 3월에 공군부장으로 있던 아들 린리궈, 아내 예췬, 이외 수하들과 함께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 계획을 수립했다.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지방 도시들을 시찰하고 있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실패했다.[6]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다급해진 린뱌오는 소련으로 망명하기 위해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1E 비행기[7]를 탔는데, 비행기가 조종사의 실수몽골 영공에서 추락하면서 일가족과 함께 6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8] 이를 9.13 사건이라고 한다.

린뱌오 일가가 몰살당한 후 오법헌, 이작붕, 구회작을 비롯한 린뱌오의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감행되었다. 특히 이들의 개인왕국이었던 공군은 수뇌부 전체가 조사를 받거나 수감되었다. 마오쩌둥은 초기에 이들이 과오를 인정한다면 관대하게 처분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들이 관련 자료를 인멸하면서 죄를 숨기려 하자 격노하여 모조리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상당수의 인사들이 당에서 제명되고 수감되었으나, 린뱌오 측근을 제외하면 대부분 몇달 후 석방되었고[9], 린뱌오 측근들도 사형같은 극형은 받지 않고 10여년 후인 덩샤오핑 집권 이후 석방되었다.

3. 평가

전쟁에 있어서는 매우 뛰어난 장군이었고 전략적인 식견도 있는 인물이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내성적, 소극적 성격이어서 용장(勇將)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지장(智將)으로서의 면모는 탁월했다 할 수 있다.

혹자는 군사적으로 뛰어났지만 토사구팽 당한 점 때문에 영포한신에 비유하기도 한다. 린뱌오의 경우 논란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섬기던 주군(마오쩌둥, 유방)을 상대로 반란을 도모하려다 실패하여 최후를 맞았다는 점도 비슷하고.

국공내전 당시 린뱌오가 도시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펑더화이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마오가 린뱌오의 손을 들어 도시에서 철군해 농촌으로 이동한 뒤 농촌의 지주들을 숙청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국공내전의 흐름이 바뀐 일을 보더라도 그의 식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린뱌오를 "장군 15명을 합쳐도 린뱌오 한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고 극찬했고, 적이었던 장제스"저놈은 전쟁의 마귀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사실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부터 린뱌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황푸가 배출한 가장 우수한 군사가는 4기생 린뱌오"라고 했다. 그리고 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5월에 린뱌오가 동북(만주) 지방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 "린뱌오가 갔다면, 앞으로 동북은 편할 날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왠지 한신을 놓친 항우가 연상된다. 아 근데 항우는 한신을 무시하지 않았나...그래도 장제스가 인재보는 안목은 있었던 모양

그러나 이렇게 군사적으로는 천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역시 노회한 마오쩌둥을 당할 수 없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카리스마, 저우언라이의 중후함, 덩샤오핑의 비전 같은 것을 갖추지 못했으며, 기껏해야 군 사령관 정도의 재목이었지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펑더화이에 비해서도 정치적인 안목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인데 펑더화이는 인민을 걱정해서 마오에게 쓴소리를 하다가 실각한 반면, 린뱌오는 마오의 개 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마오를 배신해 망했기 때문에 높이 평가되기 힘들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마오 사후 복권되었으나, 린뱌오 및 그 일당은 아직까지도 반혁명집단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도 린뱌오를 펑더화이 마냥 복권은 안되어도 어느 정도 능력적인 부분은 재조명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 덕인지 80년대만 해도 기록말살형(인민의 브러쉬질)에 처해진 린뱌오는 각종 항일영화나 국공내전 관련 영화에서 그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90년대부터는 그래도 나오는 편이다.

4. 주요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국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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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2대 3대
펑더화이 린뱌오
(1959년 9월 17일 ~ 1971년 9월 13일)
예젠잉

5. 여담

권력욕이 있는 인물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좀 히키코모리적인 성향도 있었다고 한다. 린뱌오의 평생 모토가 한밤 중의 외로운 처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공산 정권 수립 이후 열린 원수 진급식에도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했고 옛 부하들이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나가기 귀찮아 그래서 1970년 루산회의에서 천재론을 내세우다가 장춘차오에게 패배했을 때도 마오쩌둥이 자아비판 정도면 용서해주겠다고 하는 것을 북대하에 칩거하면서 따르지 않을 정도였고 이것이 그의 완전한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런 성격은 그가 타고난 약골이었던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황푸군관학교 재학 시절에도 새벽 구보에서 걸핏하면 낙오해서 따귀를 얻어맞는(...)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치부 교관이던 녜룽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부터 "말수가 적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다. 웃거나 찡그리는 법이 없고, 돌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이런 기질이 더욱 심해진 것은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큰 부상을 입은 뒤 모르핀 과다투여로 중독된 탓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한 신경 이상으로 한동안 물과 바람, 햇빛을 두려워했고 산수화조차도 보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일상적인 수분섭취조차 어려워해서 궁여지책으로 아내가 찐빵에 물을 적셔서 준 것(...)으로 수분을 보충할 정도였다. 비서들의 증언에 의하면, 물과 접촉하기 싫어한 나머지 1년에 발을 2번밖에 안 씻었다고도 한다. 심지어 바람이 무서워서 면전에서 비서들이 서류 넘기는 것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밖에 고기, 생선과 해산물, 과일까지 피했다고 하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모르핀 중독에다 2인자를 노렸다는 점에서 그 나라뚱땡이 덕후와 비슷하다..?! 거기다가 아들 린리궈가 공군을 개인왕국처럼 지배했다는 점에서도 괴씨와 비슷하다.

중국내 애연가들이나 애주가들에게 부관참시(?)당하는 신세이기도 하다. 이유인 즉슨 장쉐량, 덩샤오핑, 마오쩌둥은 술과 담배를 즐기고도 각각 100세, 90세, 80세 넘게 장수했는데 린뱌오는 술과 담배를 멀리했는데도 60대까지밖에 못살았다는 이유 때문(...). 물론 단순히 술과 담배를 멀리해서 오래 못 산건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핑계거리나 농으로 언급되는 것이기는 하다.

모자를 쓴 사진이 대부분인데, 탈모인이다.

6.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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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의 린뱌오. 배우 유립평(由立平)이 분했다.

파일:건군대업임표.jpg
영화 건군대업에 나온 린뱌오. 배우 마천자(馬天子)가 분했는데...배우 보정이 너무 심하다. 이 영화에서 린뱌오는 쑤위와 함께 19세의 국민당군 쫄병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당시 두명 모두 이미 영관급 장교였다.[10]

호이4에서 중국 공산당 장군으로 등장한다. 원래 운남성의 군벌 룽윈과 초상화를 공유하고 있었으나 1.5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오면서 룽윈이 고증에 맞춘 초상화를 갖게 되었다.

7.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 개혁과 개방, 조영남, 민음사.
  • 모택동 비록 상, 하권, 산케이 신문사, 문학사상사.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2권,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당대 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1] 초대 교장이 장제스에 정치주임은 저우언라이였다.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군벌을 막론하고 중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을 다수 배출했으며 의열단을 비롯한 조선인도 상당수 여기서 공부했기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참고로 린뱌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원봉과 동기생(4기)이다. 여기를 거쳐갔던 독립운동가로는 주로 북한쪽으로 간 이들이 많다. 6.25때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최용건은 여기서 교관을 지냈다.[2] 치료 과정에서 모르핀 중독에 빠졌다는 설도 있다.괴링??[3] 공산군이 6월부터 국민당군 10만명을 포위했는데, 보급로가 끊긴 국민당군 사령관인 정동국(鄭洞國) 소장은 포위망 내의 민간인에게 식량을 징발했고, 민간의 식량도 다 떨어진 10월이 되어서야 9만 5천명의 포로를 남기며 항복했다. 국민당측에서는 많게는 60여만명의 아사자가 났다고 주장하고, 서방역사가들은 국민당측 소스를 인용하여 약 20만까지 잡고 있지만, 중공측은 포위망내 민간인 인구가 40만명이었으며 약 5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항복한 국민당군 사령관인 정동국은 이후 감옥에 갔다가 풀려나 중공 정부 수리부에서 일하면서 88세까지 장수했지만, 창춘 포위전에서 일찍 항복하지 않아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에 대해 매우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4] 린뱌오 이전에 역시 국공내전기 역전의 지휘관 쑤위(粟裕)가 사령관 물망에 올랐으나, 쑤위도 오랜 격무로 건강이 좋지 않아 제외되었다.[5] 이런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방에서는 린뱌오가 총사령관인 것처럼 오인되었다. 실제로 1970년대 이전에 나온 6.25 전쟁을 다룬 한국과 미국의 저작물에는 하나같이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을 임표(린뱌오)라고 적었다.[6] 쿠데타의 범위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쿠데타 자체가 아예 공상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부터 나름 실제적인 계획이 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린뱌오의 아들이 주도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만, 린뱌오가 여기에 주동적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7] 12년 후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때는 트라이던트 2E 모델이 주인공이 됐다. 이래저래 중국과 엮인 기종인 셈.[8] 린뱌오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기록들이 그나마 공정성을 가지고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그전에는 비행기 폭발 사고설, 소련 망명설, 밥먹다가 바주카포(...)에 맞아서 일가 몰살했다는 설까지 돌았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 나온 반공서적에는 비행기 사고는 페이크마오와 그 일당에게 천안문 지하로 끌려가 고문당하다 죽었다라는 이야기도 실렸다.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9] 이는 공군의 기술적 특징상, 인력을 대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린뱌오 쿠데타 음모 이후, 공군 간부들이 연루유무에 상관없이 모조리 체포되어서 공군이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한다.[10] 동갑내기이자 친구인 쑤위는 린뱌오에 맞먹는 지휘능력을 가졌다고 일컬어졌으나, 성격이 매우 겸손했고 결정적으로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1955년 당시 인민해방군 원수로 추대될 뻔했으나, 본인이 극구 사양해서 대장에 머물렀고, 정치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반역자로 찍힌 펑더화이와 사이가 나쁜 탓도 있었지만) 험악한 시절을 평탄히 보내다 1984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