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6:46:57

화궈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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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최고영도인은 공식적인 직책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재임한 최고 실권자를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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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제2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제2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화궈펑
[ruby(华,ruby=Huà)][ruby(国,ruby=Guó)][ruby(锋,ruby=fēng)](華國鋒, 화국봉) | Hua Guofeng
파일:화궈펑 표준 초상.jpg
출생 1921년 2월 16일[1]
중화민국 산시성 교성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뤼량시 자오청현)
사망 2008년 8월 20일 (향년 87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직업 군인, 정치가
임기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국무원 총리
1976년 2월 2일 ~ 1980년 9월 10일
중국공산당 제2대 중앙위원회 주석
1976년 10월 7일 ~ 1981년 6월 28일
중국공산당 제2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76년 10월 7일 ~ 1981년 6월 28일
서명
파일:화궈펑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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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본명 쑤주(苏铸/蘇鑄/소주)
배우자 한즈준(韩芝俊)
자녀 4명
종교 무종교 (무신론)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소속 정당
신장 183cm[2]
성구(成九) }}}}}}}}}

1. 개요2. 생애
2.1. 정가 입문2.2. 당 주석총리
2.2.1. 양개범시
2.3. 정권 선양2.4. 노후 및 사후
3. 평가
3.1. 중국의 전반적인 평가3.2. 고향 산서성의 평가

[clearfix]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무원 총리마오쩌둥의 직계 후계자.[3] 그러나 결국 생전 마오쩌둥의 뜻[4]과 달리 1978년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후 당 고위직에 머물긴 하지만 권력은 없었다.

중국 역대 최고영도인 중 영수(领袖) 호칭을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유이한 인물이기도 하다.[5]

2. 생애

2.1. 정가 입문

1921년 산서성 교성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쑤주(苏铸, Sū Zhù; 소주)이며, 화궈펑(화국봉)이란 이름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대(中隊)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가명이다.[6]

고향에서 상업 학교에 재학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에 입당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으며, 국공내전에도 참전했다.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하자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성 샹인현 당서기가 되었다.

후난성에서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점점 직위가 상승했으며, 1958년에는 부성장까지 이르렀다.[7]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와 후난성 제1서기 저우샤오저우가 실각하자, 마오쩌둥을 열렬히 지지하면서 펑더화이를 비판하고, 펑더화이의 고향이기도 해서 펑의 입김이 셌던 후난성에서 펑더화이의 부하들을 몰아내면서, 마오쩌둥의 눈에 들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주창했다가 대실패를 한 대약진운동 직후인 1961년 마오쩌둥에게 인민의 몸무게가 줄고 있으며 가축들까지 굶주린다고 직언했는데 마오쩌둥은 진실을 말하는 것은 화궈펑 뿐이라며 그를 칭찬하며 신임했다.

마오쩌둥 노선의 열렬히 지지하였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열심히 문혁 정신(?)을 퍼뜨렸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고향 후배[8]였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면담할 때는 표준중국어가 아니라 후난 사투리로 말할 정도였다.[9] 하지만 문혁으로 마냥 탄탄대로를 겪은 것은 아니라서 1967년 5월에 조반파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서 감금되었다가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겨우 풀려난 일도 있었다. 어쨌거나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9.13 사건 이후 중앙 정계로 발탁되어 공안부장, 그리고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

2.2. 당 주석[10]총리

1976년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덩샤오핑장춘차오를 제치고 온건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국내 정쟁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져 총리 대리에 올랐고, 마오쩌둥이 지명하여 마오의 공식 후계자가 되며 마오 사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란 당 / 정 / 군의 최고위직 3자리를 모두 거머 쥔다. 이 3자리를 모두 가지고 있던 사람은 화궈펑이 유일한데, 마오쩌둥은 행정부 수반인 국무원 총리를 저우언라이에게 양보했고, 덩샤오핑 역시 그에게 밀려 총리를 지내지 못했으며, 덩샤오핑 이후에는 아예 당 총서기국무원 총리를 겸직하지 못하게 된다.
파일:external/chineseposters.net/e15-455.jpg
붉은 기를 높이 들고, 강철의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마오쩌둥 사후 1977년 2월에 만들어진 화궈펑 우상화 포스터. 화궈펑은 마오쩌둥 대신 스스로를 우상화하려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에 의해 제동이 걸린다.

1976년 4월 30일 마오쩌둥은 뉴질랜드 총리 로버트 멀둔과의 회담 직후 화궈펑에게 "천천히 하고 서두르지 말라. 과거의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네가 일을 하면 나는 안심이다(你辦事我放心/니판사아방심)"라는 최고 지시를 친필로 남겨주었다.[11] 화궈펑은 이 붓 글씨를 내세워 자신이 마오의 신임을 가진 절대적인 후계자라고 내세웠다.

화궈펑은 당시 무명이었기 때문에 4인방에 휘둘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으나, 마오 사후 한달만에 화궈펑은 예젠잉과 손을 잡고 전격적으로 4인방을 숙청하는 기염을 토한다. 10년 가까이 마오의 위세를 내세워 온갖 전횡을 일삼아 왔던 4인방을 제거하면서 화궈펑이 대권을 손에 쥐는가 싶었는데...

2.2.1. 양개범시

兩個凡是(양개범시)
무릇 마오주석의 결정은 반드시 옹호해야 하고, 무릇 마오주석의 지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화궈펑은 사인방 실각후 위의 "양개범시"론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물론 문혁 시대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화궈펑은 전형적으로 문혁, 넓게 잡아서 마오쩌둥의 폭주 덕분에 승진한 마오의 수혜자로, 문혁 청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화궈펑의 당정의 지도자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의 상급자인 저우샤오저우가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다가 몰락한 일이었으며, 화궈펑은 마오쩌둥을 적극 지지하면서 급부상했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원래 경위국에서 일하며 마오쩌둥을 보좌한 왕둥싱, 지덩쿠이, 우더, 리신 등이었다. 따라서 화궈펑은 문혁 청산에 매우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마오쩌둥 흉내를 내면서 당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당내에는 화궈펑보다 경력이 화려하고 카리스마가 대단한 원로들이 줄줄히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먹힐리 없었다. 당시 신화적인 대장정에 참가한 당원로만 해도 당내에 수십명이 살아 있었다. 화궈펑은 대장정 참가는 커녕 당시 중학생이었고, 대장정이 끝난 4년후인 1938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야 공산당에 입당했다.

집권 당시 55세이던 화궈펑은 엄밀히 말해서 관록과 명성 자체가 72세인 덩샤오핑에겐 숫제 견줄 바가 못 되었고, 덩샤오핑의 심복인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 정도의 레벨로 보기에도 무리일 정도였다. 예를 들어 1949년 국공내전 말기 덩샤오핑은 100만대군을 거느린 류보청군의 총정치장교인 반면, 화궈펑은 고작 여단 정치장교에 불과했다. 덩샤오핑 뿐만 아니라 예젠잉, 천윈 등 중국 혁명을 지도했던 원로들은 자신들은 마오쩌둥과 함께 신중국을 건설한 동료이자 창업공신이고, 화궈펑과 그 무리들은 기껏해야 마오쩌둥의 가신 정도로 생각했는데 가신 출신인 화궈펑이 마오의 후계자가 되어 마오쩌둥의 동료들인 자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건방지게 지시를 하려 하는 것 자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마오 시절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당에 복귀하여 점점 세력을 강화하면서 정작 그를 사면[12]해 준 화궈펑 자신의 권력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혁명전쟁 시절 뛰어난 전공을 세웠던 인물로서 워낙 당과 군에 신망도 높았고, 무엇보다도 건국 후에 충칭 시장을 맡으며 발군의 행정 능력을 보여 저우언라이에 의해 발탁되어 중앙 정계로 떠올랐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혁명가로서나 행정가로서 지지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무난한 지도력과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라는 명분을 갖췄어도, 실질적인 권력 기반이라고는 후난성 한 곳밖에 없는 화궈펑이 덩샤오핑을 상대하기는 너무나 힘겨웠다.

게다가 중국 대중들이 몇십년 동안 찌든 가난, 그리고 문화 대혁명 때 마오이즘의 만행에 환멸을 느껴서 마오의 노선에 회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문혁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화궈펑도 덩달아 인기가 폭락했다. 화궈펑에게 문혁 부정이란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양개범시라는 말로 완만히 문혁을 청산하려 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반발만 높이고 말았다.

그에 비하여 덩샤오핑은 대장정국공내전을 이끈 건국의 영웅 중 한 명인 데다가, 그의 지지자들이 문혁 중에 대거 숙청되었다고 해도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의 상당수가 건재했다. 특히 국공내전 시절 덩샤오핑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제2 야전군 출신들이 군 상층부에 대거 포진해 있어서 군부의 지지가 덩에게로 쏠리게 된다. 거기다가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이 식량 자급 자족, 차관 전액 상환 등의 우수한 실적을 내면서 화궈펑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사실 양개범시는 자신은 마오의 정통 후계자이니 문혁과 마오사상은 옳지만 사인방이나 홍위병처럼 과격한 숙청과 폭력적으로 추진하지말고 온건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산주의 노선을 걷자라는 생각이었다.

2.3. 정권 선양

결국 화궈평이 권력을 잡은지 2년만인 1978년 12월 덩샤오핑이 당을 장악하고 사실상 중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화궈펑은 1979년 문화 대혁명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자아비판을 하고 사임하였다. 화궈펑은 덩샤오핑과 계속된 투쟁에서 차례로 패배하였고 1980년 2월, 11기 5중전회에서 소 4인방으로 지목된 왕둥싱, 우더, 천시롄, 지덩쿠이 등 화궈펑의 심복들도 일제히 사임하거나 면직되었다. 1980년 8월, 전인대 5기 3차 회의에서 덩샤오핑이 당정 지도체제 분리를 구실로 화궈펑에게 총리 하야를 요구하여 자오쯔양이 국무원 총리에 선출되었다.

덩샤오핑은 모양새를 위해서 자신의 직위는 유지하면서 화궈펑만 물러나라는 뻔뻔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고[13] 스스로도 부총리에서 사임하였다. 천윈, 쉬샹첸, 왕전, 왕런충, 천융구이 등 정치국 위원들도 마찬가지로 부총리에서 사임했으며 덩샤오핑을 지지하는 장아이핑, 황화, 류징런이 신임 부총리에 선출되었다. 1981년 6월, 11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통과되어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정리되었고, 화궈펑은 중앙위원회 주석 및 중군위 주석에서 사임하였다. 후임 중군위 주석에는 덩샤오핑, 중앙위원회 주석에는 후야오방이 선출되었으며, 화궈펑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물러나고 완전히 몰락, 1982년 9월에 열린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부주석 직위가 없어지면서 거기에서조차 쫓겨난다. 다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는 재선되었다.

2.4. 노후 및 사후

파일:華國鋒.jpg
실각 이후 실권은 잃었지만, 하야한 후 박해를 당해 문혁 기간 목숨을 잃었던 류사오치펑더화이와는 달리 전직 국가원수의 예우를 받으면서 실권만 없어지는 것에 그쳤다. 사실 본인도 별로 권력욕이 없었던 듯 하며, 대세가 덩샤오핑쪽으로 기울어지자 바로 대권을 포기하고 예우를 받는 쪽을 택했다.

중국에서는 북한이나 스탈린 시절의 소련과는 달리 권력투쟁이 곧 사법살인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없었고, 기본적으로 마오쩌둥과 권력투쟁을 벌이다 실각한 펑더화이류사오치도 국가기관이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실각 및 낙향에 그쳤다.[14] [15] 당연히 문화대혁명 이후에 실각한 화궈펑은 류사오치나 펑더화이보다도 훨씬 더 대접을 받고, 상징적인 지휘에서 "상왕"대접을 받았다. 화궈펑은 2002년까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계속 선출되었고, 장쩌민과 후진타오 같은 역대 주석들도 화궈펑을 어른으로 모시면서 노년을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화궈펑은 정년(70세)이 되는 1991년까지 당 중앙 위원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에도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 점지한 중앙 위원은 정년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2000년대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화궈펑뿐만 아니라 소4인방이라고 불리던 화궈펑 일파(왕둥싱, 지덩쿠이, 우더, 천시롄)도 감방이나 수용소로 가지 않고 한직으로의 좌천으로 마무리되어 천수를 누렸다. 이중 왕둥싱은 99세가 되는 2015년에야 사망했고,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전사이자 우수당원"이라는 추도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9월에는 탈당설 오보가 났다. "나는 공산당원으로서 당과 당원들이 나날이 부패해지고 변질되는 상황을 통탄한다. 이같은 부패로 당이 민심을 상실해 국가와 민족의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공산당이 과거 국민당 및 자산 계급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공산당의 부패를 강하게 질타한 다음에 후진타오 등의 만류에도 탈당을 하겠다고 표명하였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는 중국 관련 뉴스에 자주 있는 해외 반중국 화교 언론[16]이 만든 가짜뉴스로 전혀 근거가 없다. 실제로 화궈펑은 이후 2007년 공산당 17차 당대회에 출석한 바가 확인되었다.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랫동안 별다른 문제 없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다가 베이징 올림픽 관람을 준비하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2008년 8월 20일에 8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해가 2008 베이징 올림픽 기간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거의 묻혔다. 물론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그를 바바오산 혁명공묘[17]에 화장했고, 그 자리에 장쩌민, 후진타오 등이 모두 참석했다. 시신은 고향인 산시성 쟈오청에 안장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오랜 경험을 거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당과 국가의 중요 직무를 역임한 화궈펑 동지"를 공식 추도사로 정했다.

2019년 10월 1일 건국 70주년을 기념해 성대히 열린 열병식에서 군대가 지나간 후 민간인들이 각 시대의 의상을 입고 그 시대의 지도자 초상화들을 앞세운 퍼포먼스를 벌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최고지도자의 초상화가 나온 것은 물론 국조라고 할 수 있는 쑨원의 초상화도 행렬에 나왔지만, 유일하게 화궈펑의 초상화만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모두 군인 고위직을 거쳤고, 딸들도 행정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3. 평가

"똑똑하고 만사에 조심하며 무채색의 재미없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주어진 자료는 잘 다룰 수 있겠지만 탁월한 지적 능력이나 카리스마로 불꽃을 일으킬만한 인물은 아니다."
미국 베이징 주재 연락 사무소[18] 소장 토마스 게이츠가 1976년 4월 화궈펑에 대해 내린 평

3.1. 중국의 전반적인 평가

화궈펑은 중국 현대사의 두 거인인 마오쩌둥덩샤오핑 사이에 끼어 있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마오쩌둥에게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고 국정을 어지럽힌 4인방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등 나름대로의 정치적 역랑을 보여주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서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능력과 존재감은 화궈펑이 이기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그의 대표적 실책으로 꼽히는 문혁의 온건한 철회도 화궈펑이 자리를 잃을 만큼 시대의 흐름에 완전히 어긋났다고 보기 어려운 게, 4인방을 제거한 뒤의 그라면 인민들이 적당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낼 가능성은 충분했다. 화궈펑은 자신의 정당성 확보 목적으로 문혁을 형식적으로 옹호했을 뿐 사회 전체를 다시 문혁 분위기로 만들 마음은 아주 조금도 없었다.

또 거의 강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덩샤오핑을 다시 중앙 정계로 불러들여 기용했고 그의 개혁안을 상당히 받아들여 그가 성과를 내는 것을 허용한 것에서 보이듯이 마냥 보수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남의 아래 머무는 것에 만족할 사람도 아니었고, 화궈펑에게는 덩샤오핑을 제어할 만한 정치력이 없었다. 이 때문인지 화궈펑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이용해 덩샤오핑과 권력 투쟁을 벌이지 않았고,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선양(?)을 했으며 이 때문에 덩샤오핑에 의해 예우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 당국의 공식적인 역사평가에서는 전환기에 급격한 정책으로 나라를 혼란으로 빠뜨리지 않고 온건한 변화를 이끌어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역시 집권 4년은 (1976-1980) 신중국 창립후 가장 단명한 지도자이다.

뤼순감옥에 전시된 역대 중국 지도자 초상화에도 화궈펑은 나와있지 않다.

3.2. 고향 산서성의 평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중앙의 평가와는 달리 고향 산시성(산서성)에서는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오른 자랑스러운 인물이라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였다.

왜냐하면 화궈펑은 진나라(晋)-조나라-병주시절을 포함해 산서성 지방 출신 인물로는 역사 상 유일하게 통일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당나라의 唐자가 진(섬서성의 통일 秦 말고, 진문공 등을 배출했던 산서성의 晉=晋)의 극초기 이름이라 산서성(옛 병주)의 별칭으로 쓰여왔고, 북주 및 수 왕조에게서 가까운 친인척으로서 당국공으로 분봉받아(라지만 무슨 지방자치를 한 것은 아니고 식읍 정도) 그 중심도시인 타이위안시가 훗날 왕조의 초기 근거지이자 발상지가 되어 당나라 내내 중시되었지만, 그곳은 일종의 영지였고 이연-이세민 부자 모두 출생지는 섬서성의 장안 근처이다.

산서성 사람들은 자기 고장사람인 화궈펑이 문혁 당시 마오쩌둥의 위세를 호가호위하며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무고한 이들을 박해한 장칭 등의 4인방을 제거하고, 별다른 혼란 없이 권력을 덩샤오핑에게 선양해 이후 중국이 별 정치적 혼란 없이 개혁개방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높이 평가하여 국가적 위인으로 추모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11년에 산시 사람들의 주도로 고향에 대대적인 능묘를 조성했고, 화궈펑의 유해를 이장했다. 무덤이 크고 아름답게 조성되었는데 아예 이름부터 화국봉능묘, 약칭 "화릉(華陵)"이라고 한다.[19]

이 화릉은 중국의 국부인 쑨원이 묻힌 남경의 중산릉보다도 10배가 크며, 북경의 모주석기념당보다도 더 크다. 이 무덤은 그 규모가 축구장 14개 규모인 10만㎡에 이르고 365개의 화강암 계단을 쌓아올린 뒤 그 위에 묘실과 비석 등을 설치했고 묘비의 높이도 5.5m나 된다. 이는 마오쩌둥의 무덤인 규모가 훨씬 크고 옛 황제들의 무덤과 비견될 정도의 크기인데 이 때문에 중국 내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중국의 중앙 언론에서는 이례적으로 "별로 한 것도 없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돈을 쓴다"며 산시성 지방정부를 비판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시성에서는 역시 고장 출신 위인인 화궈펑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자주 벌어지며 2021년에는 화궈펑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서도 왕후닝한정(중국 정치인) 등의 중공당 상무위원들이 참석해 열렸다.

[1] 음력 1921년 1월 9일[2] 출처에 따르면 키가 183cm였다고 한다. 역대 중국 최고지도자들 중에서 최장신이다.[3] 1세대인 마오쩌둥과 2세대인 덩샤오핑을 잇는 역할이었으므로 1.5세대라고 할 수도 있겠다.[4]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얻기 어려운 인재라며 높이 평가했고, 오랫 동안 (류사오치의 뒤를 이을) 자신의 차차기 후계자로 고려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조정 국면에서 덩(덩샤오핑)은 점점 류사오치와 뜻을 같이 하며 마오와 사이가 멀어졌다. 훗날 마오는 이 무렵 몇 년간 덩이 자신을 겉으로는 섬기는 듯 하면서도 실제 구체적 업무에서는 배제했다며 '죽은 조상 섬기듯 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태도는 마오의 미움을 샀고, 결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덩은 류사오치와 함께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 1호와 2호로 몰려 함께 실각했다. 하지만 마오는 아예 목숨까지 빼앗아 버린 류사오치와 달리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과오도 많지만 공이 더 크고, 그 과오도 차차 고쳐나갈 수 있는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고 평가했다. 마침내 린뱌오 사망 이후 마오는 덩을 다시 불러들여 당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등 요직에 기용한다. 하지만 덩이 문혁(문화대혁명)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고 그의 경제 정책도 마음에 들지 않던 마오는 여전히 흑묘백묘를 이야기하고 다닌다면서 덩은 영원히 복권시킬 수 없다며 다시 실각시켰다. 덩샤오핑 전에 후계자로 생각했던 4인방의 일원인 왕훙원은 사상(문혁에 대한 지지)은 믿을만하지만 능력이 부족하고 덩은 능력은 좋지만 사상이 부족하다고 평가했고, 결국 화궈펑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지한다.[5] 최초는 마오쩌둥의 위대한 영수(伟大领袖)였고, 화궈펑은 영명한 영수(英明领袖)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최근 시진핑이 인민의 영수(人民领袖)로 불리기도 하나 공식적인 호칭은 아니다.[6] 그래서 자녀들은 모두 화씨가 아니라 쑤씨(소씨)이다.[7] 화궈펑이 지방 당간부에 머물던 시기에, 덩샤오핑은 이미 건국 당시부터 런비스(1950년 과로사)와 함께 40대 차세대 기수로 꼽히고 있었다. 덩은 국공내전에서 이름을 날린 전국적 스타로 시작해, 서남국 서기와 부총리를 거쳐 56년에는 당 총서기에 올라 당무를 총괄하면서 전국 레벨에서 놀고 있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화궈펑은 군수, 덩샤오핑은 도지사가 출발점이고, 이후 덩샤오핑이 국무총리까지 가는 동안 화궈펑은 중앙과는 거리가 먼 도지사쯤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이후의 권력투쟁에서 경력과 권위에서 밀려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8] 원래 산서성 출신이지만, 중국 건국 후 후난성에서 20년간 살았기 때문에 후난성인으로 간주된 듯 하다.[9] 마오쩌둥의 경우 동향인인 펑더화이나 류사오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사투리를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근데 둘다 숙청[10] 국가주석이 아니라 당 주석임에 유의할 것[11] 장칭 평전의 경우에는 "당신이 맡고 있어서 내 마음이 편하오."로 번역했다. 이후 4인방은 저 친필에 사실은 장칭과 상의하라는 내용이 빠졌다고 우기며, 과거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는 마오쩌둥의 교시를 문혁을 계승하라는 것으로 멋대로 해석,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려다가 숙청 당했다.[12] 근데 이건 실질적으로 마오의 지시였다.[13] 덩샤오핑의 정치 감각을 보여주는 일면인데, 덩샤오핑은 자기의 권력이 당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당의 권위를 해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화궈펑을 실각시킬 때도 최대한 예우를 갖추었고, 4인방을 비롯한 마오쩌둥의 심복들은 모두 숙청했지만 정작 마오쩌둥 대한 비판은 매우 자제했다.[14] 문화대혁명 시절 당시에는 박해를 당하고 지병이 도져 사망했지만, 이런 박해는 마오쩌둥 광신자들인 홍위병이 사적으로 행한 것이었고 국가권력과는 무관했다.[15]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권력투쟁이 마냥 비폭력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1950년대 초반 저우언라이를 밀어내고 제2인자로 발돋움하려다가 실각한 가오강같은 경우는 실각후 반당행위자로 몰리자 자살했고 린뱌오 같은 경우는 실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도주하면서 추락사했다. 다만 이들과 거사를 같이 한 자들 (가오강의 동지인 라오수스나 린뱌오의 공군 참모들들)은 감방살이를 오래하긴 했지만, 처형되지 않고 대체로 천수를 누렸다.[16] 대표적으로 미국에 서버를 둔 보쉰(boxun.com)이 있으며, 파룬궁 계열 대기원시보도 마찬가지다. 이들 반중 화교 언론들은 주로 가짜 뉴스로 악명이 높으며, 장쩌민 체포설, 장쯔이, 보시라이 성상납설 등을 퍼트리다가 오보로 판정되거나 고소당해 거액을 물어준 바 있다.[17] 대한민국의 현충원 같은 중국의 국립묘지. 과거 문헌에서는 한국식 한자독음에 따라 팔보산 혁명묘지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다.[18] 당시에는 미국은 중화민국을 중국 전토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사관이라는 명칭 대신 연락사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고 사실상 미국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19] 중국에서 신해혁명 즉 제정 종식 이후에도 정치지도자들의 묘를 황제의 무덤인 "릉"이라 부르는 사례가 몇 있긴 하다. 대표적인 예가 쑨원의 묘인 중산릉. 다만 마오쩌둥조차도 무덤에 능을 붙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