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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으로 향하는 계단과 기념관 내의 쑨원 동상. 그 위에는 중국 본토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중국국민당 휘장이 새겨져 있다. |
1. 개요
中山陵 / Sun Yat-sen Mausoleum중화민국의 인물이자 현대 중국의 국부인 쑨원이 안장된 무덤으로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 황제들의 능원이 있는 자금산에 세워졌고 쑨원의 능은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26년 착공되어 1929년 완공되었다. 입장료는 무료지만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다. 쑨원이 사망하고 두 달이 지난 1925년 5월 15일 공모전을 통해 디자인이 선정되었는데 이 양식은 대만의 중정기념당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능문, 쑨원의 관
2. 역사
쑨원은 1925년 베이징에서 사망했고 베이징에 묻혔다. 장제스 지휘 하에 광둥성으로부터 올라온 국민당 북벌군은 1928년 베이징을 점령하고, 북양정부를 전복해 북벌을 완료했다. 국민정부는 새로 난징을 수도로 정했고 1929년에 베이징으로부터 쑨원의 시신을 운구해 난징에 세워진 중산릉으로 이장했다.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12월에는 난징이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국민정부는 충칭으로 도피하면서 쑨원의 시신을 이장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능을 훼손해야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냥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중산릉은 일본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일본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도 쑨원을 국조로 받들었고 쑨원 자신도 아시아주의자로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도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중산릉에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1945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화민국 정부는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으나 1946년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1949년 중국공산당은 난징을 함락하고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으로 쫓겨났다. 그리하여 중산릉은 다시 공산당의 관리하에 들어간다. 다행히 쑨원은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에게 추앙받고 국부로 대접받았기 때문에 공산당도 중산릉을 성역으로 관리했다. 총통부를 함락한 공산당군이 다음으로 향한 곳이 바로 중산릉이었고 그들은 쑨원의 동상 앞에서 예를 표하며 참배한 뒤 그대로 나왔다고 한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홍위병은 봉건잔재를 일소한다며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묘소를 훼손했지만 그들 조차도 쑨원의 묘는 훼손하지 못했다.[1] 하지만 중산릉에 세워졌거나 붙은 여러 국민당의 상징물들은 그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이렇게 훼손된 국민당의 상징물들은 덩샤오핑 시절인 1980년대에 복원되었다.
중국공산당은 신해혁명~국부천대 사이 시기의 역사물에 한해서는 청천백일만지홍기나 중국국민당 국장(청천백일)에 대해 크게 제재하지 않는데 중국공산당의 입장은 중화민국은 1949년에 망해버린 국가고 그 이후는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기념물로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손대지 않지만 현재의 대만을 상징하는 표상으로서는 철저히 탄압한다. 중산릉은 1925년 건축물이라 딱히 이런 지침에 위배되지 않으므로 원형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천백일 마크나 국민당의 여러 표어들이 복원되었다.
더구나 21세기 들어와서는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대만에서 친대륙적인 범람연맹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은 청천백일기에 대해 관대해 졌다. 범람연맹 소속 정치인들이 대륙에 와서 청천백일기를 흔들어도 별 제재를 하지 않는다. 중일전쟁 승리를 기념한 2015년 베이징 열병식에도 선두에 중일전쟁에 참전한 국민당군 소속 노병들과 함께 청천백일기가 버젓이 등장했다.
천자도 아닌 이의 무덤이나 능(陵)의 명칭을 가진 무덤인데 이러한 명칭이 쑨원이 건국한 중화민국 시기 뿐만 아니라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하에서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인들 사이 쑨원의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였던 만큼 특히 중산릉의 방문이 잦았다. 잘 알려진 공식 방문 사례들로는 쑨원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끝마친 1929년과 중일전쟁의 종전 후인 1946년이 있다. 마오쩌둥도 1953년 난징을 방문하여 중산릉을 참배한 기록이 있다.
국부천대로부터 56년이 지난 2005년에는 당시 중국국민당 주석(당수)이었던 롄잔이 중국 본토를 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과 회동하고 중산릉을 방문해 참배한 바 있다. 2023년에는 마잉주가 대만 전현직 총통 중에서는 처음으로 본토를 방문하여 중산릉을 참배했는데 방문 당시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언급하여 관심을 끌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