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총통부 청사 | ||
중난하이 | 난징 총통부 | 대만 총통부 |
||<:><tablewidth=420px><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tablebordercolor=#CC0000><#CC0000><width=100> ||<-2><:><#CC000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명칭 | 한국어 | 중국근대사유지박물관 |
간체 | 中国近代史遗址博物馆 | |
번체 | 中國近代史遺址博物館 | |
영어 | China Modern History Museum | |
분류 | 근현대중요사적 및 대표성건축 (近现代重要史迹及代表性建筑) | |
시대 | 중화민국 | |
일련번호 | 7-1707-5-100 | |
주소 |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창장루292호 江苏省南京市玄武区长江路292号 | |
등재 | 2013년 | |
차수 | 제7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A급 |
총통부 정문
1. 개요
1927년부터 1949년까지 중화민국(국민정부)의 총통부 청사로 사용되었던 난징시 소재 건축물.2. 역사
하늘에서 내려다본 남경 총통부. 우측에는 행정원 건물까지 같이 있었다.
이 자리는 명나라 초기의 황궁 자리이기도 했으며, 명청대를 거치며 양강(兩江)[1]총독의 집무실로 이용되었다. 태평천국의 난 때는 홍수전(洪秀全)의 궁전이 있었으나 1864년에 증국번의 명령으로 대부분 철거되고 1870년에 새 총독 집무실을 지었다. 태평천국의 옥좌가 지금도 내부에 있다.
신해혁명 당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인 쑨원(孫文)의 집무실(임시대총통부, 臨時大總統府)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들어서면서 수도는 베이징에 있게 되었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이 곳을 국민정부의 본부로 삼았다.
중일전쟁 발발로 국민정부는 충칭시(重慶)로 피난하면서 이 곳을 왕징웨이(汪精衛)의 괴뢰정부가 차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료와 함께 국민정부가 이 곳으로 돌아왔고, 1947년에 건물 이름도 (중화민국) 총통부로 바꿔 "國民政府"라는 현판을 지금 보듯이 "總統府"로 바꾸었으나, 불과 2년 만인 1949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에 함락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후 이 건물을 장쑤성 인민정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장쑤성 위원회 등 정부기관의 사무실로 사용했다.[2] 1980년대부터 정부 부처가 속속 이전해 1982년 태평천국 천왕부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1998년 총통부 터에 난징 중국 근대사유적박물관이 건립되어 2003년부터 공개하고 있다. 2004년에는 국가 4A급 여유경구로 선정되었다.
3. 여담
타이베이 총통부와 마찬가지로 난징 시기 역시 집무실과 관저는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특히 장제스의 관저 미령궁(美齡宮)[3]은 현재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2012년 10월에 대만의 대학생들이 난징 총통부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인증샷을 찍어 대만 방송사 메인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
[1] 장쑤성 + 안후이성 + 장시성의 3개 성을 일괄적으로 가리키는 명칭. 3개 성인데 왜 2를 뜻하는 양(兩)을 썼냐면 이 당시 장쑤성과 안후이성은 남직예(南直隸: 명)/강남성(江南省: 청)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장쑤성과 안후이성으로 나뉘게 된 것은 1666년이다.[2] 그래서인지 중국국민당 관련 유적들이 파괴되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무사했다.[3] 1934년 장제스가 부인 쑹메이링을 위해 지은 관저로 관저명도 쑹메이링의 이름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