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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987ab><colcolor=#ffffff> 중화민국 제9대 부총통 롄잔 連戰(연전) | Lien Chan | |
출생 | 1936년 8월 27일 ([age(1936-08-27)]세) |
<colbgcolor=#ffffff>중화민국 산시성 시안시 | |
재임기간 | 제9대 부총통 |
1996년 5월 20일 ~ 2000년 5월 20일 | |
학력 | 국립타이완대학 (정치학 / 학사) 시카고 대학교 (정치학 / 박사) |
소속 정당 | |
종교 | 개신교 |
[clearfix]
1. 개요
대만의 정치인.2. 생애
2.1. 출생 배경
롄잔 본인은 시안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롄헝(連橫, 1878-1936)은 타이난 태생의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롄헝은 대만의 역사를 중화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기전체로 정리한 대만통사(台灣通史)를 저술하여 대만의 민족의식 고양에 크게 기여하고 여러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대만총독부의 아편정책[1]에 찬성한 것[2]을 계기로 대만 지식인들과 갈등하다 1933년에 상하이로 이주했다.롄잔은 아버지 롄전둥(連震東, 1904-1986)이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도중에 태어났으며, 롄전둥은 중일전쟁 시기 중국국민당의 요직에 있었다. 이렇게 대만 출신이면서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다가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반산(半山)이라 한다. 대륙출신을 唐山 또는 阿山이라고 부른데서 나온 말. 모계는 외성인이다.[3]
롄잔이라는 이름은 롄잔이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롄헝이 중일전쟁의 발발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중국의 연전연승을 바란다는 의미로 성과 맞춰서 이렇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아들의 돌림자가 성(勝 승)인데 자신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은 듯. 그래서 자는 오히려 이름과 정반대로 영원한 평화를 뜻하는 융핑(永平)으로 지었다.[4]
전후 아버지가 대만으로 귀향하면서[5] 1946년에 대만으로 건너왔다. 아버지 롄전둥은 전후 초대 타이베이현 현장으로 임명된 후 타이완성 성의회 비서장을 거쳐 1947년 국민대회 선거에서 고향인 타이난시 대표로 선출되었고, 국부천대 후에는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내정부 부장을 역임하였다. 롄잔은 국립타이완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2. 순조로워 보였던 권력의 길
1996년 총통선거 당시 리덩후이와 함께 롄잔 왼쪽에 있는 사람이 바로 마잉주.
1970년대 중반 정계에 입문하여 교통부장, 외교부장 등을 거쳐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타이완 성 성장으로 재직했고, 이후 행정원장(총리급)도 역임했다. 리덩후이 중화민국 총통시절인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대만 부총통을 지냈다. 국민당 내에서도 1995년부터 당내 2인자인 부주석으로 재직했다.[6]
2.3. 두 차례의 총통선거 패배
정부와 집권 국민당 내에서 다수의 요직을 거쳐 외견상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지만, 1996년 총통선거에서 리덩후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던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정계 경력이 (선거를 통한) 선출직이 아닌 국민당, 행정부 내의 임명직이었다. 이 점은 2000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국민당 내 라이벌 쑹추위와 후보 경쟁력 논란을 빚는 요인이 되었다.국민당 내부의 라이벌 쑹추위(왼쪽)와 함께
3파전으로 진행되어버린 선거를 다룬 타임지.
2000년 총통 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타이완 성 성장 후임이었던 쑹추위와 끝내 반목하여 단일화에 실패, 정권을 천수이볜한테 넘겨주게 된다. 당시 롄잔은 부총통이자 국민당 부주석으로 외견상 리덩후이의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지만, 당시 국민당에서 선거 경쟁력이 가장 높은 사람은 쑹추위였다.[7] 하지만 리덩후이는 쑹추위가 아닌 롄잔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8]
천수이볜 - 롄잔 2004년 총통 선거 텔레비전토론. PTS에서 진행되었다.
(2004년 총통선거 개표 결과에 침통해하는 롄잔과 쑹추위. )
2004년 대만 정부총통 선거 결과 |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여부 |
총통후보 | ||||||
부총통후보 | ||||||
1 | 천수이볜 | 민주진보당 | 6,471,970 | 50.11% | 1 | 당선 |
뤼슈롄 | 민주진보당 | |||||
2 | 롄잔 | 중국국민당 | 6,442,452 | 49.89% | 2 | 낙선 |
쑹추위 | 친민당 | |||||
선거인수 | 16,507,179 | 투표수 | 13,251,719 | |||
무효표수 | 337,297 | 투표율 | 80.28% |
2004년 선거 패배에 승복하는 롄잔. 함께 한 사람은 왼쪽부터 런닝메이트였던 쑹추위 친민당 주석, 국민당 양립부장 왕진핑, 당시 타이베이 시장이였던 마잉주이다.
그리고 2004년 롄잔-쑹추위 연합후보로 나갔으나 0.228%, 불과 수만 표의 차이로 또 천수이볜한테 지고 말았다. 당시 두 후보의 표차가 박빙이었고, 선거 하루 전에 있었던 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의혹을 받으면서 패배한 국민당이 재검표 요구, 선거불복 운동을 펼치면서 한동안 대만 내부는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9] 결국 11월 4일 총통 선거 패배를 최종 인정했다.
2.4. 권토중래: 양안관계 개선을 선도하다
2005년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 주석과의 회동. 56년에 걸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적대관계가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낙선 이듬해인 2005년, 국민당 당수로는 56년만에 중국 본토를 방문하여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직접 양안관계에 대한 회담을 가졌고, 국공내전 이래 반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공산당의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했다. 또한 본토 시절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방문하여 구 총통부 청사를 방문하고, 국부 쑨원이 안장된 중산릉을 참배하였다. 천수이볜 당시 총통을 비롯한 민진당, 대만 독립진영은 당연히 이러한 롄잔의 행보를 '제3차 국공합작', '중국 편향', '배신' 행위라고 맹비난했지만, 천수이볜 정부의 무리한 분리독립 행보로 인한 중국과의 관계 악화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0]
비록 2004년 이후 더 이상 총통선거 출마는 하지 않았지만, 양안관계 정상화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2차례의 총통선거 패배로 위축되었던 국민당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고, 이는 3년 후인 2008년 마잉주의 총통선거 당선과 국민당의 정권 탈환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후진타오, 시진핑 등 중국 공산정부의 수뇌부들과 여러 번 갖는 등 중국국민당의 실권자로서 여전히 지위는 굳건한 듯.
2015년의 근황.
3. 이모저모
- 재산 규모가 한화로 1조 원이 넘는 대부호로 알려져 있다.# 롄잔의 가문은 청대부터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지역 토호 가문이었고, 대만 반환 후 롄잔의 어머니인 자오란쿤의 주도로 투자를 통해 재산을 크게 불린 것으로 전해진다. 고모부인 린보쩌우(林伯奏)[14]역시 꽤 성공한 은행가였다.
- 2013년과 2014년에도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과도 회동하는 등 양안관계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15] 2014년 2월 방문에서는 중국 베이징대학 명예교수직에 임명되었다.
- 2015년 9월 3일 중국이 중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을 명목으로 거행할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단 개인자격이고, 중국 공산당측과의 교류에 긍정적인 인물임을 감안하더라도, 대만 정계의 시각은 여야를 막론하고 부정적인 편이다. 대만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민진당은 "최대 군사위협인 중국에 동조하는 매국 행위."라고 가장 열심히 비판했으며, 중국과의 화해 협력에 적극적인 국민당과 마잉주 총통조차 "중일전쟁 승리의 주체로서 중화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 대만의 여배우이자 가수인 백빙빙의 딸 백효연의 죽음(백효연 사건)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원흉이라는 소문이 있기도 하다. 평소 외성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백빙빙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다가 백빙빙의 딸이 납치되자 경찰이 비밀리에 수사를 하던 중에 납치사실이 언론에 새나가는 바람에 범인들이 몸값 받는 것을 포기하고 백효연을 잔인하게 살해했는데 이 사건을 언론에 흘린 장본인이 롄잔의 측근이라는 것. 롄잔측은 이를 부인했으나 진실은 알 수 없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6 | 제9대 정부총통 선거 (부총통) | 중화민국 자유지구 | | 5,813,699 (54.00%) | 당선 (1위) | |
2000 | 제10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 중화민국 자유지구 | 2,925,513 (23.10%) | 낙선 (3위) | ||
2004 | 제11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 중화민국 자유지구 | 6,442,452 (49.89%) | 낙선 (2위) |
[1] 대만총독부는 아편전매제 및 아편구입 허가제를 실시해 재정수입을 올림은 물론 아편 가격을 슬금슬금 올려 아편중독 문제를 해결했는데, 1920년대에는 재정수입 하락을 이유로 아편유익론을 전파했다.[2] 이때 쓴 글 내용이 상당히 황당했다. 예를 들면 "아편은 러시아인의 보드카와 동남아인들의 고추와 비슷한 약이다."라는 서술이 있다. 그래서 위작논란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작가, 번역가로 활동한 롄헝의 외손녀 린원웨(林文月, 1933~2023, 롄잔의 사촌누나)는 누군가 롄헝을 모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롄헝의 이름을 도용해 글을 출간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관련 기사[3] 어머니는 자오란쿤(趙蘭坤, 1910-2011)으로, 선양시 태생이다. 롄전둥과는 1934년에 결혼했다.[4] 본인이 지은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붙여주었다고 한다.관련 기사[5] 물론 후술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낙향한 것이 아니라 대만 접수에 필요한 일을 맡기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그를 파견한 것에 가깝다.[6] 롄잔이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에 오를 당시 그의 전임자는 장제스, 장징궈 총통 시절 군부 요직을 차례로 역임했던 외성인 출신의 하오보춘 전 참모총장이었다. 리덩후이의 롄잔 기용이 국민당 내에서 대만 출신 본성인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7] 쑹추위는 1994년 실시된 최초이자 유일한 타이완 성의 민선 성장으로 당선되어 선거 경쟁력을 입증한 바 있었지만, 롄잔은 1996년 총통선거에서 리덩후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것이 선거 경험의 전부였다. 이후 실시된 실제 선거 결과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롄잔보다 무소속이었던 쑹추위가, 천수이볜과 근소한 표차로 2위를 차지했던 것만 봐도 이 점은 명백했다.[8] 이를 두고 당시 리덩후이의 선택이 천수이볜의 당선을 돕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쑹추위가 외성인인 것에 반해 롄잔은 (출생은 대륙이지만) 본성인이라는 면도 있으며, 비록 몸은 국민당에 있으나 대만 독립을 원하는 리덩후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롄잔이 지고 민진당이 집권하는 것을 내심으로는 바랐다는 점이다.[9] 국민당의 재검표 요구를 대만 대법원이 수용하여 천수이볜을 일단 총통에 취임시키고 재검표를 했는데, 여전히 천수이볜의 득표 수가 롄잔의 득표 수보다 많았다. 이를 근거로 11월에는 천수이볜의 당선이 확정된다.[10] 특히 롄잔의 방문 직전 중국은 "대만과의 통일을 위해 '비평화적'(즉 군사력 동원 포함)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된 <반분열국가법>을 통과시킨 바 있었고, 이로 인해 양안간 대립 분위기가 격화된 상황이었다.[11] 롄이 아닌 팡이 자기 본성이다. 과거 중화권은 관부성이라고 하여 전통적으로 결혼한 여자가 자기 성 앞에 남편 성을 붙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오늘날 중국 대륙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나 대만에서는 현재도 쓰는 사람이 있다.[12] 문서 상단의 주석에서 언급된 린원웨의 여동생이다.[13] 마지막 관선 타이베이시장, 1994년에 직할시장이 관선에서 민선으로 전환되면서 치러진 첫 민선 타이베이시장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천수이볜에 밀려 낙선했다.[14] 린원웨, 린원잉 자매의 부친.[15] 중국은 마잉주 대만 총통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각각 국민당 주석, 공산당 총서기 자격으로 양안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안했지만, 마잉주 총통은 "중화민국 총통(즉, 주권국가의 원수) 자격이 아니면 중국과의 정상회담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때문에 롄잔은 당시 시점에서 중국 공산정부의 수뇌부와 만날 수 있는 대만의 최고위급 인사였다. 이후 2015년에 시진핑과 마잉주가 정상회담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