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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C512D><colcolor=#ffffff> 중화민국 제6대 행정원장 위훙쥔 俞鴻鈞(유홍균) | Yu Hung-chun | |
출생 | 1898년 1월 4일 |
청나라 광둥성 신회현 | |
사망 | 1960년 6월 1일 (향년 62세) |
중화민국 타이베이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민국(대만) |
학력 | 상하이 성요한 대학교 |
최종 당적 | |
재임기간 | 제3대 상하이원할시 시장 |
1937년 7월 27일 ~ 1945년 8월 13일 | |
제10대 재정부장 | |
1944년 11월 20일 ~ 1948년 5월 31일 | |
제4대 타이완성정부 주석 | |
1953년 4월 17일 ~ 1954년 6월 7일 | |
제6대 행정원장 | |
1954년 6월 1일 ~ 1958년 7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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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상하이 시장, 타이완성 정부주석, 행정원장 등 중요 직책을 역임했다.2. 생애
1898년 광동성 신회현에서 출생했다. 1915년 상하이 민생중학을 졸업하고 상하이 성요한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신문편집을 맡았으며 1919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중학교 조교로 일하다가 이후 영자신문인 <대륙환보>의 기자로 일했다. 1927년 광저우 국민정부 외교부장 대리 천유런의 영어 비서로 임명되었고 국민당의 1차 북벌로 상하이가 국민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오면서 상하이로 돌아가 상하이 시정부 영문비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외교부 선전과장과 <시정주간> 주편을 맡았다. 이후 상하이 시 재정국장 대리, 참사, 비서장 대리 등을 맡으며 상하이 시정을 돌봤다.1932년 4월, 상하이 시정부 비서장에 정식으로 임명되었으며 1936년 우톄청을 대신하여 상하이 대리시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7월, 정식으로 상하이 시장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 시장으로 일본에 항전하였으며 충칭으로 퇴각하여 중앙신탁국 상무이사에 임명되어 영국령 홍콩 사무를 담당했다. 1941년 6월 재정부 정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8월 관리위원회 상무위원에 추대되어 중앙신탁국장을 겸하게 되었다. 1944년 11월 국민정부 재정부장 겸 중앙은행 연구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5월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7월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 12월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 철군 문제를 협상하는 전권대표로 파견되었다.
종전 후 폭등하는 물가와 실업문제를 안정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으나 국공내전의 재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6년 3월 IMF와 세계은행 이사로 임명되었고 6월 최고경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0월 행정원 수정구 정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47년 2월 쑹쯔원 내각에서 국영사업 매각계획을 논의하였으며 10월 장췬 내각에서 면화매입계획을 진두지휘하였다. 1947년 10월 전국경제위원회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48년 5월, 헌정의 실시로 웡원하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재정부장에서 물러나 중앙은행 총재만을 맡게 되었다. 6월에 미국원조운용위원회 부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1948년 8월, 누적된 적자로 인해 정부가 파산할 위기에 처하자 화폐개혁을 위해 B계획이라 불리는 금태환본위제 개혁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 시행되었다. 위훙쥔은 상하이 경제독도원에 임명되었으나 실질적인 화폐개혁의 지휘는 장징궈가 맡았다. 하지만 화폐개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행정원장 웡원하오와 총통 장제스 모두 책임을 지고 하야하였다.
1949년 1월 중앙은행 이사회 상무이사가 되었으며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국고에 있는 5억 달러 어치의 금괴와 은, 달러를 대만으로 이전하였고 이후 국부천대를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천청 내각에서 다시 재정부장과 중앙은행 총재를 맡았으며 교통은행과 농민은행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53년 4월, 우궈전 사건으로 타이완성 정부주석 우궈전이 하야하자 신임 타이완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로 전임 행정원장 천청이 부총통에 당선되자 장제스로부터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되었다. 5월 25일, 위훙쥔 임명안은 470명 중 360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후 타이완성 주석자리를 옌자간에게 넘겨주고 행정원장에 취임했다.
1957년 미군 상사가 인근 주민이 자신의 아내를 훔쳐봤다고 주장하며 일방적으로 잔혹하게 살해하고도 무죄를 선고받는 레이놀트 사건이 벌어지자 대만 전역에서 엄청난 반미 운동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미국 대사관과 주대미군이 연계된 마약 스캔들까지 불거지면서 대만 정가는 대혼란 속으로 치달았다. 사태가 격화되면서 흥분한 타이베이 시민들이 미국 대사관에 난입해서 직원들을 구타하는 사건까지 벌어졌고 미국문화원과 미군 합동방위사령부도 성난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위훙쥔은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1958년 7월 행정원장에서 물러나 다시 중앙은행 총재직에 전념하였으나 1960년 6월 1일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민국인물대사전, 하북인민출판사.
- 장옥법, 중국현대정치사, 고려원.
- 신승하, 당대중국, 대명출판사.
- 로이드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지식산업사.
- 김지환, 전후중국경제사(1945~1949), 고려대학교출판부.
- 장성구 외, 대만현대정치사 상권, 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