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19:41:50

리덩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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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라이칭더
*: 계임총통(부총통이 승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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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중화민국 제7-9대 총통
리덩후이
[ruby(李,ruby=ㄌㄧˇ)][ruby(登,ruby= ㄉㄥ)][ruby(輝,ruby=ㄏㄨㄟ)](이등휘)[1] | Lee Teng-hui
파일:리덩후이 중화민국 전 총통.jpg
출생 1923년 1월 15일
일본령 대만 다이호쿠주 산시쇼
(現 중화민국 신베이시 싼즈구 푸핑리)
사망 2020년 7월 30일 (향년 97세)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룽민 종합병원
재임기간 제7대 부총통
1984년 5월 20일 ~ 1988년 1월 13일
제7대 총통(계임)
1988년 1월 13일 ~ 1990년 5월 20일
제8대 총통
1990년 5월 20일 ~ 1996년 5월 20일
제9대 총통
1996년 5월 20일 ~ 2000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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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본관 영정 이씨
부모 아버지 이금룡(李金龍)[2], 어머니 강금(江錦)
형제자매 형 리덩친(李登欽), 리빙남(李炳南)
배우자 쭝원후이
자녀 아들 리셴원
딸 리안나, 리안니
학력 단수이 구제중학교[3] (졸업)
다이호쿠 구제고등학교[4] (졸업)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농업경제학 / 편입)
국립타이완대학 (농업경제학 / 학사)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대학원 (농업경제학 / 석사)
코넬 대학교 대학원 (농업경제학 / 박사)
병역 일본제국 육군 중위 전역[5]
종교 개신교 (장로회, 대만기독장로교회[6])
신체 185cm[7] }}}}}}}}}
1. 개요2. 생애3. 소속 정당4. 평가5. 저서6. 여담7.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대만)의 정치인이자 7, 8, 9대 중화민국 총통.

총통 재임 시절에 여러 '최초' 기록들을 세웠다. 우선 최초의 대만 현지 출신의 본성인 총통이고, 부총통 경력이 있으면서 선거로도 당선된 경험이 있는 첫 총통이며, 그리고 첫 민선 총통이다.


리덩후이 총통의 육성을 실제로 들을 수 있는 동영상. 뉴스 도입부에서 지금의 CG 떡칠 대만 방송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깔끔함을 느낄 수 있다.[8]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표준중국어 발음이 매우 좋지 않은데 이등휘의 모어가 표준중국어가 아닌 대만어이기 때문이며 해당 언어들의 어투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리덩후이/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소속 정당

<rowcolor=#ffffff> 소속 기간 비고

1946 - 1948 입당[9]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8 - 1971 탈당

1971 - 2001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1 - 2020 제명[10]
사망

4. 평가

총통 재임기에는 대만의 민주화 이행을 주도했고, 국제 사회에서 대만의 독자성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하는 등 현대 대만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해낸 지도자다.

경제적으로도 1990년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는 등의 곡절이 있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대만의 고도성장 기조가 리덩후이 때까지 굳건하여 1992년에 한국보다 먼저 1인당 GDP 1만 달러를 달성했고 재임 후반기엔 IMF 외환위기를 제법 무사히 넘기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대만의 경제성장이 절정에 달하여 임금상승률도 높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내수시장도 나름대로 잘돌아가던 시절이었다.[11] 한편으로 반도체와 IT 등 첨단 사업에 대한 육성을 적극적으로 시작하여 현재의 대만 경제 근간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대만 내에서는 리덩후이 재임기를 좋았던 시절로 추억하기는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에 추진되었던 적극적인 대만 독립 정책과 총통 퇴임 후 행적 때문에 그가 소속했던 중국국민당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오히려 평가가 좋지 못하고 범록연맹 쪽에서의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

다만 신조류로 대표되는 범록 운동권 측에서는 열등감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만 민주화에서 리덩후이의 역할은 절대적인 수준이기 때문.[12] 민주화 항목에도 나오는 것처럼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2020년대 현재 민진당의 파벌은 크게 두 개로 갈라지는데, 리덩후이의 후계자로 육성된 차이잉원 현 총통 세력과 라이칭더로 대표되는 신조류파가 그것이다.

범람 쪽에서도 평가 자체는 애증에 가까운 게 리덩후이가 타이완성 성장, 부총통을 비롯한 각종 요직을 거쳤고, 마잉주 전 총통을 비롯해 롄잔, 쑹추위 등 범람의 주요 거물들이 리덩후이에 의해 발굴, 육성된 인물들이라서 대놓고 리덩후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주리룬은 리덩후이가 퇴임하고 대만 독립파로 전향한 뒤로도 그를 멘토로 섬겼고, 리덩후이가 사망했을 땐 마잉주 전 총통을 비롯해 중국국민당 주요 인사들이 대거 애도 행렬에 동참했다.

그의 대(對)대륙 정책은 영향력이 커서 후임 총통인 천수이볜마잉주 모두 리덩후이가 내세운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차이잉원은 아예 리덩후이가 직접 자문위원으로 임명했던 인물이라 어떤 면에선 그의 수제자 격이기도 하다.

대만 독립을 추구했기에 중국 대륙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좋지 않다. 거기에다 친일 성향까지 겹친지라 대륙에서는 한간으로 분류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 애초에 인지도가 적긴 하지만, 안다 하더라도 친일 성향 때문에 찝찝하다는 인식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도 대만 민주화나 독립 노선 등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선 학계 차원에선 평가하기도 하는 편. 혼종

5. 저서

  • <대만의 주장>(台灣的主張): 1999년 저작. 총통 임기 막바지에 출간한 책이다. 후술할 동일 제목의 2015년작은 이 책의 후속판이다.
    파일:대만의 주장.jpg

리덩후이는 중화민국 총통 퇴임 이후에도 사망할 때까지 1~2년에 책을 꼭 한두권씩은 출간했다. 90살 넘게 나이 먹은 사람이 이렇게 다작을 할 수 있는가(그것도 다국어로!)신기할 정도. 총통 퇴임 이후에만 9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6. 여담

  • 신장이 185cm으로 역대 대만 총통을 비롯한 모든 중화권 지도자들 중에서 최장신이다. 그의 아들인 리셴원(李憲文)은 191cm, 손녀인 리쿤이(李坤儀) 또한 177cm으로 여성으로서는 매우 장신이다.
  • 전 전남지사 박태영과 외모가 상당히 닮았다.
  • 고향인 싼즈구 옆동네인 스먼구 출신인 부인 쩡원후이(曾文惠)와 1949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이중 장남인 리셴원(李憲文)은 1982년에 암으로 30대의 나이에 타계했고,[13] 나머지 두 딸 리안나(李安娜)와 리안니(李安妮)가 있다. 특히 리안니는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 부친처럼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인물이며, 범록 연맹 계열 정당인 대만단결연맹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파일:external/nmstorage.nextmag.com.tw/A733POL02-02_1433145967906_242857_ver1.0.jpg
    파일:external/img.ltn.com.tw/600_169.jpg
  • 그의 이름을 딴 기념 도서관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미국에서 퇴임 대통령의 사료관을 기념 도서관 형태로 설립, 운영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인데, 대만에서는 2022년 1월에 리덩후이의 전임자인 장징궈 전 총통 기념 도서관을 개관한 것에 이어 2번째 사례가 될 전망이다. 장소는 그의 모교이기도 한 국립대만대 법학과 내부가 거론된다.
  • 2012년 중반, 대학에서 대만 독립 문제를 가지고 대만에서 공부하는 대륙 유학생과 설전을 매우 크게 벌인 바 있다. 하지만 마무리는 직접 싸인한 자기 책을 주고 서로 껴안는걸로 훈훈하게 마무리.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0 제8대 총통 선거 중화민국 자유지구
641 (85.24%) 당선 (1위) 초선[14]
1996 제9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5,813,699 (54.00%) 당선 (1위) 재선[15]


[1] 한어병음 : Lǐ Dēnghuī[2] 창씨개명 후 이름은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3] 현 단수이 고등학교.[4]국립대만사범대학.[5] 학도병 징집.[6] 대만의 장로회 교단은 대만기독장로교회가 유일하다.[7] 나이를 감안하면 엄청나게 큰 것이다.[8]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만도 지상파 채널이 3개 정도밖에 없었고 케이블 방송이라고 해도 보도채널이나 종편채널이 아직은 막 허용되던 시절은 아니라서 당대에도 문제는 많았기는 했지만 이상한 쪽으로 튀지는 않았다. 문제는 대만 방송시장의 막장화가 리덩후이 집권 말기인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9] 중국국민당에 대한 반감을 계기로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입당했다.[10] 대만단결연맹 지원으로 인한 제명.[11] 그렇지만 2001년에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나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임금이 사실상 동결되었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1인당 GDP에서 한국한테 역전당하게 된다.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당시 대만 언론에선 IMF 이후 경제 구조적으로 문어발식 기업 경영 자제, 전문화, 벤처 붐 등 새롭게 탄생한 한국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현재도 대만 임금수준은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12] 범록 진영이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이유기도 하다.[13] 위에 소개된 손녀 리쿤이가 리셴원의 딸이다.[14] 국민대회를 통한 간접선거[15] 중화민국 최초의 직선제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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