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08:24:26

재정경제긴급처분령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절망적인 1948년3.2. 재정경제긴급처분령3.3. 상하이에서의 개혁3.4. 자본가들의 반발3.5. 개혁의 실시3.6. 탄압3.7. 긴급처분령의 폐기
4. 결과5. 정책이 실패한 이유6. 매체에서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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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겨우 40일 만에 금원권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여 종이조각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수천만인의 재산은 하루 아침에 한푼어치도 못되는 무로 돌아가버렸다. 이것이 사람들의 사기와 나라의 운명에 크게 영향을 줘 대륙을 상실하게 된 주된 이유가 되었다."
대만 역사학자 심운룡.

2차 국공내전 중이던 1948년 8월 19일부터 11월 1일까지 74일에 걸쳐 시행된 중화민국 국민정부화폐개혁 및 물가 통제 시도. 의도와는 다르게 참혹한 실패로 끝나 아슬아슬하던 국민정부의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켜 국민정부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2. 배경

1945년 중화민국은 8년을 끌었던 중일전쟁을 승리로 끝냈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승리는 '참승'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참담한 대가를 치러낸 비참한 승리였고 1936년까지 꽤 건실한 수준으로 성장했던 국민정부의 경제는 완전히 파탄났다. 1945년 시점에서 중화민국의 재정수입은 1조 2,413억원이었으나 지출이 2조 3,480만원으로 1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보고 있었다. 일본군의 항복으로 여러 영토가 수복되면서 정부수입은 1946년 2조 8,979억으로 증가했으나 장제스가 2차 국공내전을 재개하면서 군사비 지출이 폭증함에 따라 정부 지출이 7조 5,747억원으로 폭증했고 적자는 오히려 4배로 늘어났으며 1946년의 지출 중 군사비 지출만 6조원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징병과 무거운 세금으로 인하여 농촌의 생산력은 계속 떨어져서 전전의 수준을 회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추락하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공장에 원료가 공급되지 않아 대다수의 공장들이 노는 형편이었다. 거기에 군사비는 오히려 늘어만 갔으니 경제적인 파탄은 가중되었다. 국민정부는 1945년 시점에서 9억 달러 상당의 외환과 4억 달러 상당의 금괴, 10억 달러에 달하는 일본으로부터 압수한 재산이 있었으며 또한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초기에는 이로 지출을 충당하여 경제를 재건하려고 했으나 폭증하는 군사비를 감당할 수 없자 계속 화폐를 찍어내 이를 충당하려 했다. 당연히 화폐가 남발되면서 물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솟아서 상하이의 쌀값은 1947년 3월부터 12월까지 19개 폭증했으며 1937년 시점과 비교해 이미 1,800배로 폭증했던 1945년의 물가는 진정되는커녕 1946년 기준 60,000배로, 1947년 기준 14만배로 폭증하였다. 환율도 추락하여 1945년에 20 : 1이었던 환율은 1946년 3월에 2,020 : 1로 추락하였다. 여기에 2차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공산당군이 각지의 도로와 철도를 파괴하고 농촌을 장악하면서 공업은 더욱 피폐화되어 경제는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공산당군과의 전투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음은 물론이요 내부 민심 소요가 격화되면서 후방에서 노농운동, 학생운동, 지식인들의 반정부 운동이 들불 붙듯이 번져나갔다. 여기에 미국의 국민정부에 대한 신뢰도 차차 바닥을 치게 되었고 경제 회복이 되지 않으니 미국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졌다. 당연히 중국공산당은 흔들리는 국민정부를 매판 제국주의 정권이라고 공격하면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국민정부로서는 민심 수습과 국가 안정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수불가결이었다. 그리고 장제스로서는 13년 전인 1935년 11월 경제 대공황과 장강 대홍수, 미국의 은구입법으로 인한 은 유출로 한번 경제적 붕괴의 위기를 맞았다가 법폐개혁이라는 모험을 통해 성공적으로 경제를 회복시켜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때처럼 다시 한 번 승부수를 걸어 볼 만했다고 판단했음직하다.

3. 전개

3.1. 절망적인 1948년

상술한 바와 같이 국민정부의 경제 지표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내전이 확대되면서 생산력은 바닥을 치는데 반면 전쟁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남발된 법폐들이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화중과 화남으로 밀려들면서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다. 1948년 6월 14일 장제스의 고향이기도 한 저장성 닝보에서 쌀을 요구하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7월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6월 25일과 7월 10일에는 물자가 하루만에 30배 폭증했고 물가는 시간마다 상승하여 정상적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폐가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있을 때 닥치는대로 물건을 사서 조금이라도 재산을 보전하려 했고 상인들은 괜히 물건을 팔아 손해를 보느니 그냥 폐업을 선택하였다. 1948년 시점에는 폭증하는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어 상하이난징 간 비행기 운행이 취소될 정도였다. 길거리에서는 대공황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수레에 돈을 싣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야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불안은 가중되었다. 1948년 8월 5일 중국의 유력지인 대공보는 사설을 통해 <가장 심각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누구나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파멸의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내일을 생각함이 없이 그날그날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고 불리한 전황과 정부의 특단의 조치에 대한 각종 괴소문이 돌아 민심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중화민국중앙은행의 영국인 고문 시릴 로저스는 이미 국민정부 최상층까지 불안이 확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8월 11일 재정부왕윈우가 수개월 안에 중화민국이 파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시점에서 국민정부가 선택해야 할 것은 2차 국공내전을 중단하고 군비를 줄여 경제를 회복시키거나 1935년의 법폐개혁을 성공시켰듯이 획기적인 화폐개혁을 통해 상황을 무마하는 것이었다. 내전을 중단할 수는 없었던[1] 국민정부는 후자를 선택했다. 행정원장 웡원하오는 장제스의 동의를 얻어 7월 초부터 화폐의 즉각적 교환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자문을 구했으나 전문가들은 화폐개혁이 불가할 뿐더러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8월에 이르러 경제위기가 너무 심각해짐에 따라 웡원하오는 쑹쯔원, 우흡경[2], 장가오 등 경제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다시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군사지출이 줄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고 일관되게 반대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더 이상 수가 없다고 여긴 웡원하오와 왕윈우는 통화개혁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3.2. 재정경제긴급처분령

8월 초를 기해 국민정부는 중앙은행의 전국 지점에 새 지폐를 나누어주고 8월 13일 밤을 기해 통화개혁을 실시하기로 하였으며 중앙은행은 비상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하지만 국민정부 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8월 13일 화폐개혁안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8월 16일 중앙은행총재 위훙쥔이 B계획이라 불리는 새로운 계획을 제안했는데 1대 300만원의 비율로 기존 법폐와 신폐를 교환하며 정부는 국민이 소유한 금, 은, 미국 달러를 압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웡원하오, 왕윈우와 외교부장 왕세걸이 모두 이 계획에 찬성함에 따라 기존의 A계획을 폐지하고 장제스에게 위훙쥔의 B계획을 보고하였다. 장제스 역시 B계획에 대해 찬성을 표시하며 여기에 아예 새로 받은 지폐를 마음대로 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삭제해버렸다. 8월 18일, 장제스와 쑹쯔원은 난징으로 돌아와 B계획에 대해 논의에 부쳤다. 사람들은 허점이 가득한 계획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장제스는 위기가 너무 심각하여 이제 주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못박았으며 검토는 이미 몇번이나 했으니 이제 실시해야 할 시간이이라고 하였다. 또한 결함이 있으면 나중에 교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중앙정치위원회와 행정원은 B계획을 승인하였다. 8월 19일 밤 장제스는 총통 비상권을 이용하여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공포하였다.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정부가 금, 은, 달러를 회수하며 300만원 대 1의 비율로 화폐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위기의 근본적인 문제가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자임을 알았기 때문에 웡원하오는 처분령에 적자가 지출의 30%를 초과해선 안 된다고 판단해 수입물자에 대한 40%의 관세를 부여하는 등 세입을 증대시키며 군과 정부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해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겠다고 규정하였다. 국방부허잉친 역시 물가가 안정된다면 군사지출을 축소하겠다고 약속했고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를 경제관제구(經濟官制區)로 획분하고 경제독도원(經濟督導員)을 임명해 긴급처분령의 실행을 감독하기 위해 위훙쥔과 장징궈를 상하이로, 쑹쯔원을 광저우로, 장려생을 톈진으로 파견하였다.

또 선거를 앞둔 미국에서 중화민국에 더 우호적인 공화당이 이길 것이라고 판단한 중화민국은 새 지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안정차관>이라 불리는 미국의 차관을 얻고자 하였다. 그간 민주당 정권은 중화민국이 원조의 선행조건으로 <스스로 돕는 능력>을 보여줄 것을 국민정부에 주문하면서 차관을 거절하고 있었다. 국민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8월 23일 주중 미국대사 레이튼 스튜어트는 "관변 측에는 정부의 관심이 1월에 보다 동정적인 공화당 우세 의회의 출현에 열심히 쏠리고 있음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방안은 모험을 걸고 실시된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3.3. 상하이에서의 개혁

하지만 광동성장 쑹쯔원과 장려생 등은 개혁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조치의 실행에 그다지 열의를 올리지 않았다. 9월 말에 이르러 광저우톈진의 물가는 8월 19일과 비교하여 2배 상승하는 등 긴급조치의 효과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반면 상하이에서는 경제독도보조원 장징궈의 주도로 정열적인 개혁이 행해지고 있었다.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경제도시로 중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났다. 만약 상하이에서 화폐개혁과 물가안정이 성공한다면 이는 국민정부에 엄청난 힘이 될 터였다.

상하이에서의 개혁은 명목상 독도원 위훙쥔이 책임지고 있었으나 위훙쥔은 장징궈가 하자는 대로 하는 인물에 불과했다. 장징궈는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즉각 경제안정대대(經濟安定大隊)를 조직하여 송호경비사령부의 관할에 두었다. 그리고 대대장에 타오이샨(陶一珊, 도일산), 부대대장에 장야민(張亞民, 장아민)을 임명하였다. 장징궈는 경제안정대대를 사업공회의 시장에 상주시키고 시장을 순시하며 투기를 단속하게 하였다. 또한 장징궈는 심복 왕셩(王昇, 왕승)을 통해 1947년에 조직된 감난건국대대(戡亂建國大隊)를 동원하고 7천명 규모의 대상해청년복무총대(大上海靑年服務總隊)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개혁의 구호를 외치며 개혁을 선전하게 했으며 투기를 단속하게 했는데 이들은 단속을 명목으로 행인들을 함부로 수색하고 차량을 검문하였으며 상하이의 자본가들은 물론 상하이의 국민당 관리들까지도 불만을 품게 하였다. 게다가 억압적인 태도로 마구 누른다고 해서 상인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물건을 팔 이유가 없으니 상인들은 정부가 강제한 물가로 물건을 파느니 그냥 물건을 팔지 않았다. 자본가들의 불만을 의식한 장징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가장 우려되는 일은 고급 관리들조차 대부분 현재의 정책에 대해 관망하고 회의하며, 혹은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나는 고독하게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고위 관리 중에 나를 돕거나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장징궈는 자본가들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며 그들이 그의 앞에서는 우호적인 것처럼 굴지만 뒤에서 저지르지 않는 죄가 없다고 비난했다. 8월 25일 장징궈는 독도원판공처에서 긴급경제회의를 소집하여 면사포 가격의 안정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날 회의에는 상하이 시장 우궈전, 사회국장 우카이신(吳開先, 오개선), 6구공회 대표 롱이신(榮一心, 영일심), 중방공사(中紡公司) 총경리 슈윈장(束雲章, 속운장), 부총경리 우웨이징(吳味經, 오미경), 금융관리국장 린총용(林崇庸, 임숭용), 외소위원회 주임비서 류젠화(劉建華, 유건화) 등 10여명이 참석했다. 회의는 장징궈와 중앙은행 부총재 류궁이(劉攻藝, 유공예)가 주재했다. 이날 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 1. 면사로 면화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미국 원조 면화를 국영과 민영 각 사창에 분배한다.
  • 2. 상하이시 사회국이 면상공회의 책임자를 소집하여 국내산 면화의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다.
  • 3. 면사 가격은 8월 19일의 가격인 금원권 707원을 상한선으로 하며, 따라서 중방공사의 고시가격도 707원 이내에서 결정한다.
  • 4. 민영사창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판매한다.
  • 5. 가격제한을 이유로 고의로 제품을 판매하지 않은 경우 검사원을 파견하여 각 창고를 수색한다.

3.4. 자본가들의 반발

하지만 긴급경제회의의 결의에 자본가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우선 6국공회 이사장 왕치즈(王啓字, 왕계자)가 이의를 제기하며 8월 19일에 제시된 면사포 시가는 모든 면제품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으며 면화의 가격도 제한하여 면사포 가격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방직업계에서 면사포의 합리적인 가격은 최소 950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상업을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합법적 이윤을 보증받기 원한다. 따라서 가격제한을 반드시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며, 장기적인 이익의 침해는 생산에 대한 심각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도리에도 어긋난다."고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국영사창인 중방공사 이사회 역시 "현재 중방공사에서 생산하는 20번수 면사의 실제 생산원가는 780원이며 더욱이 이것은 아직 이윤을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다. 그럼에도 가격을 707원으로 제한함으로써 손실이 막대하다. 중방공사로서는 비록 정부의 명령을 준수하여 제한가격 안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조정이 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생산하기 어렵다."고 정부의 조치가 무리한 것임을 지적했다.

이에 장징궈는 <상하이 시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해 "현재의 생산 상황을 사문포(斜紋布)의 예로 살펴보면, 배급 면사의 가격, 노임, 전기요금과 기타 생산원가를 제외하더라도 8.19 제한가격으로 판매할 경우 한 필당 1원 8각의 이윤을 남길 수 있다. 이렇게 볼때 일반 사창에서 손실을 보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맞섰다. 하지만 상하이 시장 우궈전은 위훙쥔에게 "만일 현재의 면화 가격과 면사포의 판매가격이라면 어떠한 사창이라도 장기적으로 생산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현재의 제한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일찍이 저렴한 가격에 면화를 사서 비축해 두었으며, 바로 이 면화를 가지고 면사포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허나 8월 26일에 개최된 검사회의에서 장징궈는 상하이의 모든 경제적 감독과 조사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이를 위해 정치, 군사 및 정부 기관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까지 확보하여 시장, 창고, 수륙교통을 조사하여 화물, 금은, 외화의 이동을 철저히 조하하고 위반 시에 이동을 금하라고 지시했다.

본전도 못 건지고 판매를 강요당하는 자본가들이 아우성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소련에서 공부하고 와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친밀감을 느끼던 장징궈에게는 굶주리지 않는 자본가들의 반대는 배부른 자들의 기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장징궈는 상하이에 도착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움막이나 비둘기집 같은 데서 살고 있고, 더 나아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집이 없이 거리나 길목을 떠돌아다니고 있고, 들판과 토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그들은 정말로 짚신 한짝 얻어 신느 것도 사치스러운 거지떼가 된 것이다."라고 지적하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상하이 자본가들을 두고 "그들의 재부와 서양식 집들은 백성들의 해골 위에 지어놓은 것이다. 그들이 하는 짓이 무장강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 외국에서 수입해 들여오는 자동차, 냉장고, 향수, 나일론 양말 등은 이 가난한 민족에 기생하여 번식하는 세포와 같거나 나라의 경제를 파괴하는 아편과 같다. 왜냐하면 고급사치품을 갖기 위해 외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 자살적인 행동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비난했다.

장징궈는 길거리로 나아가 굶주리던 상하이 시민들을 직접 만나 보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매우 평범한 것들이다. 나는 백성들이 매우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보통 백성은 정말 선량하다. 장차 내가 조금만이라도 힘을 갖게 된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백성들과 함께 있기만 한면 패배할 수가 없다."고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중국 국민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지만 경제논리를 선악의 대립으로 구분지어 선의를 바탕으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자살행위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3.5. 개혁의 실시

한편 8월 23일 월요일부터 상하이에서 화폐교환이 시작되었다. 문을 닫았던 은행들은 영업을 재개하여 금원권 1원에 법폐 300만원을 교환하였다. 시민들은 줄을 지어 몰려들어 자신들이 가진 지폐를 금원권과 질서 있게 교환하였다. 화폐개혁은 극초기에는 대성공 같이 보였다. 30만원을 기록하던 전차표는 10전이 되었고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의 한 부 가격은 80만원에서 25전이 되었다. 신문 월정 구독료도 1,900만원에서 6원이 되었다. 금과 은을 내놓으라는 지시는 어차피 귀금속이 별로 없던 도시 하층민들과 중산층은 대체적으로 따랐으나 자본가들은 지폐를 불신하였기 때문에 저항하며 가짜 증명서를 마련한 후 귀금속을 홍콩이나 광저우로 빼돌렸다. 장징궈는 부하들을 동원하여 귀금속 헌납을 선전하는 한편 금과 돈을 교환하지 않은 민간은행들에에 영업정지령을 내리고 상하이의 대부호의 아들 호호를 금과 외환 밀수죄로 체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하이에서는 막대한 양의 금은이 회수되었다. 면포 역시도 법정가격에 판매되었다.

하지만 강압적으로 지폐를 교환하게 하고 금은을 회수하는 일은 곧 한계에 부닥쳤다. 긴급조치 기간 동안 중국 국내의 금은 중 오직 20% 정도만이 금원권으로 교환되었으며 부유층은 신폐를 불신하여 대부분 금은을 내놓지 않았다. 법정가격 이상으로 물건을 파는 것을 군법으로 엄히 다스린다고 공포했음에도 사람들은 제품을 암시장에 팔거나 물물교환하면서 조치에 저항했고 이 때문에 법정가격은 유지되었으나 암시장의 물가는 계속해서 폭등하였다. 게다가 법정가격의 강요로 인하여 금원권 거래가 기피됨에 따라 금원권의 신뢰도 역시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공기업인 중방공사조차도 원가라도 건지기 위해 판매 수량을 계속 줄이다가 결국에는 아예 판매를 중지했으며 직포공장에서는 물물교환이 시작되었는데 물물교환이 시작된 후에야 겨우 각 공장들의 손해가 메워져서 정상영업이 가능했다. 민영사창에서도 면사와 면화를 물물교환하기 시작했다. 장징궈는 면화의 매담 가격을 130원으로 제한하라고 지시했으나 암시장 가격은 170~180원으로 형성되었고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상인들은 제품을 아예 팔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려 했다. 허나 장징궈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8월 25일 상하이 경찰은 야채와 육류를 제한가격보다 비싸게 판 행상 20명을 구속하였으며 다음 주에 수십명을 추가로 검거하였고 중대 위반자를 특별형사법정에 회부하였다. 하지만 장징궈는 이런 피래미 행상들이 몇 푼 더 받은 것까지 가혹하게 때려잡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1주일 안에 석방되었다. 장징궈는 자신이 '큰 호랑이'라고 부른 대자본가들을 사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3.6. 탄압

9월 1일 장징궈는 중방공사의 슈윈장과 우웨이징과 회동, 면사포에 대한 가격 제한 조치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으나 상인들이 면사포를 판매하지 않고 있으며 중방공사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암시장에 나타나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중방공사와 민영사창에서 2달간 판매된 면사의 수량이 적지 않으나 이들 제품들이 역시나 암시장에 출현하고 있음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9월 2일 상하이 항풍사창(恒豊紗廠) 이사장 우시린(吳錫林, 오석림), 신신사창(申新紗廠) 총경리 롱홍위안(榮鴻元, 영홍원) 등이 면포를 사재기한 혐의로 긴급체포되었다. 9월 3일 장징궈는 상하이 공업계 인사들을 초치하여 물가통제 정책을 시행하는 동안에는 사창이 감산하거나 생산을 중단하는 행위를 일체 불허하고 위반할 경우 정부가 공장을 접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날 상하이의 청방 보스 두웨성의 아들 두유병이 증권을 암거래한 죄로 체포되었고 담배 회사 지배인 황이종(黃以總, 황이총), 지물조합장 잔페이린(詹沛霖, 첨패림)이 물건을 쌓아두고 팔지 않은 죄로 체포되었다. 또 2달 전에 외환투기로 체포되었던 왕춘제(王春哲, 왕춘철)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포에도 물가가 안정되지 않자 장징궈는 사포시장의 면사포 교역을 전면 중단시키는 초강경책을 내놓았다.

10월 2일 장징궈는 상하이 시장 우궈전, 중방공사의 우웨이징, 민영사창 대표 왕치즈, 사상업공회 대표 탕즈량(唐志良, 당지량), 면포업공회 대표 동지우펑(董久峰, 동구봉) 등을 소환하여 면사포 공급 문제를 논의한 후 중방공사와 민영사창이 시장을 열어 도매상과 소매상에게 직접 면사포를 배분해서 판매하고 판매가격은 8.19 가격을 표준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10월 2일 회의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 1. 면사포 시가의 상승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즉시 사포시장에서의 교역을 중지하도록 명령한다.
  • 2. 모든 시민은 시민증을 보이고 면포 1장 5척을 구매할 수 있다. 시민증 위에 찍힌 면포 구매일자로부터 3개월 이내에는 다시 이를 구매할 수 없다.
  • 3. 가공 공장에서 보유하고 있는 면포 수량이 신청 수량을 초과할 수 없다.

10월 4일 부로 사포시장 교역이 금지됨에 따라 사상공회 소속 620개 회사가 영업 정지에 들어갔고 수백명의 중개상이 실업자가 되었으며 상당수의 상인들이 암시장으로 진출했다. 10월 5일 사상공회 대표가 장징궈를 방문해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다. 장징궈의 이러한 강경조치로 인하여 상하이로 향하던 일용필수품은 방향을 돌려 가격통제가 행해지지 않는 화남 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상하이 방직업계는 장징궈가 제시한 제한가격에 맞추어 면사 50,000건, 면포 수십만 필을 판매하여 5,000만원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신신사창의 손실액만 500만원에 달했으며 면화 보유가 160,000담에서 22,000담으로 급감했다. 모방직업도 2,000만원의 손해를 보았으며 중방공사는 더 이상 원료를 구할 길도 없어 파산 직전에 몰렸다.

10월 21일, 중방공사 총경리 슈윈장이 중방공사의 각 사창 책임자들을 소집하여 경영 손실을 메꾸기 위한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결국 이들은 대표단을 난징에 파견하여 중방공사의 위기를 호소하기로 결정했고 10월 22일 슈윈장과 그의 비서 왕다수이(汪大燧, 왕대수)가 직접 난징으로 가서 당국에 각 사창의 생산활동이 급감하였으며 원료가 부족하여 더 이상 제품을 공급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3.7. 긴급처분령의 폐기

장징궈의 강경책으로 인하여 상하이시 지역의 가격은 그런대로 통제된 듯 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암시장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다. 원가를 조절하지 않은 상태에서 싼값에 물건을 팔 것만을 강요하니까 기업들의 생산량은 격감하거나 아예 중단되었고 공식 시장에 나오는 물건들의 질은 형편없어졌다. 시민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뼈가 많아지고 닭이 더 이상 보통 크기의 알을 낳지 않는다고 불평했으며 더 비싼 값이지만 훨씬 좋은 물건을 파는 암시장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결국 상하이로 향하는 필수품들이 아예 다른 지방으로 흘러가면서 상하이의 물자부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9월 4일부터 상하이에서는 쌀이 품귀 현상을 보였고 야채와 육류도 떨어졌으며 겨울이 다가오는데 석탄 공급도 중단되었다. 장징궈는 부하들을 풀어서 닥치는대로 상인들을 처벌하고 창고 안의 물건들을 끄집어내서 강제로 판매하게 했지만 언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했을 뿐 곧 식량, 의류, 연료, 비누, 종이, 신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들이 부족해졌다. 로이드 이스트만은 상하이를 물가 통제의 작은 섬이라고 표현했다.

9월 30일 정부는 상하이 경제독도서 관할지역을 난징, 강소, 절강, 안휘성으로 확대했으나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는 없었다. 10월 2일 정부는 8.19 제한가격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담배, 주류, 주석박, 제지에 붙는 세금을 증세하고 이들의 판매가를 20% 상향조정하였다. 이틀 동안 문을 닫았던 가게들이 다시 문을 열자 사람들은 다른 물건들도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가격이 오르기 전에 물건을 사겠다고 닥치는대로 물건을 사들였다. 하지만 가게 주인 입장에서는 팔면 손해이므로 물건을 감추고 영업시간을 줄이거나 휴식시간을 늘리는 식으로 판매를 줄이려 했다. 10월 7일에 이르러서는 상하이에는 더 이상 살 것도 팔 것도 없어졌다. 유아용 분유와 약까지 공급이 중단되어 병원들도 운영을 중단하는 판이었고 죽은 사람을 위한 관조차 없어졌다.

결국 10월 27일 행정원장 웡원하오는 난징에서 재정경제 관련 수장들을 소집하여 경제관제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는 왕윈우, 장려생, 곡정강을 비롯한 난징의 경제 수뇌부들과 상하이에서 온 장징궈, 우궈전 등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는 가격 통제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동의했지만 "유연성을 가지고 그때그때 대처할 필요가 있다. 가격제한 조치 가운데 불합리한 부분은 조정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공급과 수요를 조절하여 민생 일용품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합의했다. 오로지 장징궈와 장려생만이 경제통제의 유지를 주장했으나 나머지 각료들이 모두 반대하여 물가통제는 폐기되었다.

10월 30일 웡원하오는 장징궈와 유공예를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도로 불러들였다. 10월 31일, 웡원하오와 왕윈우가 장제스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11월 1일, 국민정부 행정원은 재정경제긴급처분령과 가격제한 정책 폐지를 선포했으며 11월 11일, 일반인의 금, 은, 외화 소지를 허용하고 금원권의 태환율을 제고하여 태환율을 200원에서 1,000원으로 제고하고 10은은 매량 3원에서 15원으로, 달러는 4원에서 30원으로 제고하였다. 또 몰수된 물건을 돌려주고 경제범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보석하였다. 장징궈는 상하이 시민들에게 보내는 공개적 편지를 통해 상하이 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킨 것에 대해 사과하고 정부에 자신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4. 결과

"금원권개혁으로 인한 말썽의 전부는 그것이 중국의 모든 종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분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물론 그것이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은 그저 미련한 짓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명 같은 실업인들도 정부에 대해 분격하여 미워하게 되었고. 중산층은 그들의 적은 저축을 전부 시곤하여 바쳤으므로 완전히 망해버렸고, 상점주들은 그들의 물건을 일정하게 정해진 금원값으로 팔아야 했으므로 그들의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중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약간의 금으로 된 장신구 따위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당신은 알지요. 그런데 그들은 이것들조차도 내놓아야 했는데, 그들이 받은 지폐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 금원권개혁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던 것입니다."
1953년, 당시 상하이 시장을 지낸 우궈전의 회고.

가격통제 정책이 폐기되면서 물가는 빠르게 급등하여 2주만에 16배나 상승했다. 품귀 현상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10월의 대규모 사재기 소동 때문에 상하이 시민들 대다수가 소지한 돈을 써 버려서 물건을 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식량 부족 현상은 여전했다. 11월 4일 상하이에서 첫 쌀 폭동이 일어났고 11월 8일까지 이어졌다. 더 이상 약탈할 쌀이 없자 11월 10일에는 밀가루 가게와 통조림 공장을 상대로 약탈이 벌어졌고 일각에서는 물가통제 정책 부활을 요구하면서 "왜 장징궈는 물가억제를 포기했는가?", "왜 그는 상하이를 떠났는가?", "모든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장징궈가 복직하기를 원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폭동에 놀란 상인들은 상하이로 쌀을 더 이상 판매하려 하지 않았고 쌀 위기는 11월 12일 정부가 강서성과 홍콩에서 쌀을 공수한 후에야 겨우 진정되었으며 농민들은 이제 농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 다시 쌀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일단 해소되었다.

하지만 만주와 산동에서 국민정부군은 공산군에게 참혹하게 패하였고 머지않아 홍군이 장강을 도하하여 난징과 상하이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 남방은 대혼란에 빠졌다. 상하이의 공업 생산령은 바닥을 쳤고 수많은 공장들은 영업을 중지하였으며 전력도 부족해졌다. 이자율은 월 500%를 돌파했다. 사람들의 원망이 웡원하오 내각을 향하자 웡원하오 내각은 결국 총사퇴하였다. 익세보는 장제스를 직접 겨냥하여 "총통의 위대한 인격은 믿는 바이지만 그가 너무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고 결국 장제스는 1949년 부총통 리쭝런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고 사퇴하였다. 정부는 귀금속 공매를 통해서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징이 함락되었다. 광저우로 이전한 국민정부는 금원권을 은원권으로 다시 개혁하면서 금원권은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중국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국민당 정권의 수명도 그렇게 끝났다.

이러한 화폐개혁 실패는 장제스와 장징궈에게 아주 아주 뼈아픈 교훈이 되었고 국부천대 이후의 대만의 경제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대만의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장제스는 대만에 자리잡은 1950년대부터 고금리 정책과 강력한 가격통제로 연간 5% 이내의 물가안정을 유지하면서 수출 위주로 경제 성장을 도모하였다. 대신에 인플레이션을 통한 대규모 재정조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거액의 자금이 필요한 중화학공업 대기업이 아니라 부품 생산에 특화된 소기업 중심으로 경제개발이 진행되었다.

5. 정책이 실패한 이유

근본적인 원인은 당연하게도 중일전쟁과 2차 국공내전으로 인해 파탄난 국내 경제 및 국민당 정부의 무분별한 적자재정이었다. 사실 난징 정부의 재정적자는 중일전쟁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다. 1930년대 초반 난징정부의 재정부장이자 장제스의 처남인 쑹쯔원은 "과도한 군비와 군벌에게 가는 보조금을 줄이자"고 권유했으나 무력과 군벌들의 조건부 충성이 권력기반인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고 쑹쯔원은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 승전 이후 장제스 정부는 다시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이런 방침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미 8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 특히 연안 지역의 산업 시설과 농업 지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게다가 이를 제대로 추스리기도 전에 발생한 국공내전은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중국 경제가 회복하기는커녕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떤 정책을 펴더라도 제대로 된 결과를 내기 힘들었다. 1940년대 후반 국민정부의 경제적 위기는 전비는 지나치게 상승한 반면 산업기반이 열악해진 데에서 온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국민정부로선 지출은 줄이고 소득은 올려서 1937년 이전의 호황 상태로 중국 경제를 회복하는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안정이 선결 과제라고 생각한 장제스는 군비를 줄이기는커녕 바로 국공내전을 재개하는 방안을 선택했고 이 때문에 경제가 회복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여기에 더불어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정권이 벌이는 대규모 군사작전은 군비가 쪼들리게 됨에 따라 당연히 추진력을 잃어 갔고 이로 인하여 국민정부의 안정성과 경제적 건실은 더욱 약화되면서 국민정부의 경제를 더욱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이로 인하여 국민정부는 경제적과 군사적으로 동시에 붕괴되는 이중고에 처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각지의 공산당 유격대가 얼마 남지도 않은 수송망을 파괴하고 경제적 유통과 생산 라인을 망가뜨림에 따라 원료와 생필품 보급이 차단되면서 경제적인 붕괴와 민심 이반은 가속화되었고 졸지에는 초인플레이션과 더불어 먹을 쌀이 없어서 폭동이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40년대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인 재정적자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화폐개혁을 하는 것은 성공해봐야 언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했고 이 때문에 재정 전문가들은 일관되게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라고 반대했다. 계획의 주요 실행자였던 쑹쯔원과 장려생 등이 계획에 대해 사실상 보이콧하는 입장을 취했고 행정원장 웡원하오와 재정부장 왕윈우가 결국 2달 만에 포기한 것도 애초에 현실성 없는 계획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1935년 법폐개혁과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나는데 법폐개혁은 재정전문가들이 치밀하게 수립한 계획에 따라 영국과 미국을 동시 공략한다는 보험을 마련해놓고 이루어졌으며 미국이 중국에서 대량의 은을 구입해야 한다는 분명한 유인동기를 염두에 두고 실행한 것이었지만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은 요행수에 불과했다.

또 장징궈의 정책이 지나치게 강경 일변도인 점도 있었다. 상황이 매우 심각한 만큼 주요 자본가들을 때려잡는 강경책을 펴서라도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장징궈의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이는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 자본가들의 반감을 일으켰고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화폐개혁이란 정책 자체에 대한 불신을 일으켰다. 화폐개혁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새로운 화폐에 대한 신뢰, 즉 신용이란 점을 생각하면 장징궈의 행동은 분명 정책이 실패한 원인 중 하나였다. 결국 중국의 초인플레이션이 해결된 것은 천윈을 필두로 한 공산당 관료들이 자본가와 투기꾼을 단순히 때려잡는 방식만 쓰지 않고[3] 미리 물자를 모아서 자본가들과 투기꾼들을 낚은 다음에 물자를 풀어버리는 방책을 써서 물가를 하락시키고 투기꾼들과 자본가들을 패가망신시키고 나서였다.

6. 매체에서

중국공산당 선전 영화인 건국대업에서 비중 있게 묘사된다. 여기서는 혁명사관을 충실히 따라 4대가족의 전횡 때문에 국민정부의 회생 노력이 참혹하게 실패한 것으로 묘사된다.

파일:건국대업두월생장경국.jpg

진곤이 분한 장징궈는 물자 투기를 방지하여 물가를 어떻게든 안정시키려 하지만 상하이의 청방 두목인 두웨성으로부터 '우리 같은 잔챙이를 잡을 게 아니다. 사태의 진짜 원흉은 다름아닌 4대가족이다'라는 폭로를 듣는다. 사촌인 공영간이 상하이의 경제를 파탄을 낸 원흉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공영간은 어머니 쑹아이링과 아버지 쿵샹시의 권세를 믿고 장징궈에게 오히려 개길 뿐이었다. 결국 경제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여기서 두웨성의 '폭로'는 말이 폭로지 사실상 '조롱'에 가까웠다. 두웨성 본인 역시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장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의 청방이 상하이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즉 두웨성의 이 발언은 그런 자신조차 공영간을 포함한 4대가족에 비하면 '잔챙이'와 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 말을 들은 장징궈 본인도 따져보면 4대가족의 일원이었으니 두웨성의 지적은 굉장히 뼈있는 비판. 건군대업이 공산당의 선전영화이긴 하지만 4대가족의 부패상은 서방 언론에서도 계속 장제스가 패퇴한 원인으로 지적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묘사의 모티브가 된 공영간의 황금 밀수 사건 자체는 실재하는 사건이다.

7. 참고 문헌

  • 김지환, 전후 중국경제사 : 1945-1949(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2009)
  • 로이드 이스트만, 蔣介石은 왜 敗했는가(서울: 지식산업사, 1986)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1)
  • 장성구 외, 대만현대정치사 상(서울: 지영사, 1992)
  • 조너선 펜비, 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서울: 민음사, 2014)
  • 히메타 미쓰요시 외, 중국근현대사: 아편전쟁에서 1982년까지(서울: 일월서각, 1985)


[1] 사실 이것도 불가능했다. 1948년에 들어서면 중국공산당은 만주와 화북 지역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기세를 타고 있었고 국민당군은 각지에서 부대 단위의 투항과 탈주가 속출하면서 와해되고 있었다. 경제가 파탄나면서 민심이 국민당을 떠난 상황에서 만주를 점령하면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중국공산당이 장제스의 휴전요구를 받아들일리가 없던 시점이었다. 장제스가 경제위기를 먼저 수습하려고 했다면 늦어도 만주의 공업지대를 상실하기 이전인 1947년 말에 휴전을 제안했어야 한다.[2] 우흡경은 상하이 재계의 거물로 북양정부 시절부터 정부의 경제고문으로 활약해온 재정 전문가였다.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에 따르면 웡원하오가 우흡경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3] 물론 때려잡는 방식을 안 쓴 것은 아니다. 1949년에 상하이 증권거래소를 폐쇄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