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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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중화인민공화국 제5대 국무원 총리 주룽지 朱鎔基|Zhu Rongji | ||
이름 | 정체: 朱鎔基, 간체: 朱镕基[1] 한국식 독음: 주용기 영문: Zhu Rongji | |
별명 | 경제 차르 | |
출생 | 1928년 10월 23일 ([age(1928-10-23)]세) | |
중화민국 후난성 창사 | ||
국적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칭화대학 (전기공학 / 학사) |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
재임기간 | 제5대 총리 | |
1998년 3월 17일 ~ 2003년 3월 16일 | ||
제6대 수석부총리 | ||
1993년 3월 29일 ~ 1998년 3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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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前 공무원, 정치인이다. 상하이방의 핵심인물이자, 상하이방의 지도자 장쩌민의 후배 겸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지[2]였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로 재직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마오쩌둥의 출신성인 후난성의 창사시에서 태어났다.[3] 명태조 주원장의 18남 민장왕(岷庄王) 주편(朱楩)의 17세손이라고 한다.[4] 청나라가 명나라의 주씨 황족을 학살하자 주룽지의 조상은 호남성까지 피난와서 대대로 살았다고 한다.아버지는 지주이자 지식인으로 출신 성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지식인 - 중산층 이상의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공산당 입당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그가 10살에 사망했다. 이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삼촌의 슬하에서 컸다.
마오쩌둥의 모교인 창사시 제1중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엄청나게 잘해서 3살때 논어를 통달하고 중고시절 한번 빼놓고 모두 수석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7년 베이징의 칭화대학에 입학,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1949년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51년 칭화대학 학생회장이 된다.
2.2. 거듭된 숙청 및 복귀
대학을 졸업한 후 공무원 생활을 했고, 이후 여러군데서 관리 생활을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57년 백화 제방 운동 당시 마오쩌둥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가 출당되었다. 뒤이어 2년간 재교육 캠프에서 노역을 했다.대약진운동 이후 마오쩌둥이 대실패의 책임을 져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자, 덩샤오핑과 류사오치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때 주룽지는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년 후인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과거 마오쩌둥을 비판했던 전력 및 지주계급 출신성분이 문제되어 다시 한번 숙청되었고, 다시 노동을 하게 된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5년간 깡촌으로 귀양을 가서 문자 그대로 돼지에게 인분을 퍼날라 먹이는 일을 하는 개고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을 대비해서 쉬는 시간에 틈틈히 몰래 경제서적을 탐독하였다.
2.3. 출세가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자, 얼마 안가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했고 주룽지도 복권되어 다시 한번 중앙 정부로 복귀한다. 이어 석유부에서 일하고 당원 자격도 복귀되었다. 이어 계속 능력을 보여서 1980년대에는 국가 경제 위원회의 부의장에 임명된다. 1985년 자오쯔양 총리의 발탁으로 덩샤오핑(중앙군사위원회 주석[5]) 앞에서 경제보고를 했는데, 이때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6]주룽지는 사실 대권과는 거리가 먼 중앙부처 공무원을 계속 역임하고 있었다. 원래 중국에서 대권을 장악하려면 지방의 행정수장으로 일하면서 행정능력을 보여야 하지만, 주룽지는 중앙부처에서 관료생활만 계속 한 것이다.
그런데 인재 보는 눈이 좋았던 덩샤오핑에게 관심을 받게 되어 출세코스로 진입하고 1987년 드디어 수도인 베이징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지방 직할시중 하나인 상하이 시장에 임명되었으며, 1987년 10월 중국공산당 1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된다. 이 때 상하이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상하이 서기인 장쩌민을 만나게 된다. 이 둘은 의기투합하여 상하이방이라는 계파를 구성한다.[7] 장쩌민의 후임으로 1988년 상하이시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서기[8]에 임명되었고, 개혁 개방을 지휘하여 상하이 지역의 경제 개발을 지휘한다. 이때 엄정한 부정부패 단속과 관리들의 기율 단속으로 제2의 임칙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당시 주룽지는 상하이에 서기로 재직하면서 195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도시 인프라(교통, 통신, 상하수도, 재건축 등)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현재 마천루 숲을 이루는 상하이의 기반은 모두 주룽지가 닦은 셈이다.
1989년 베이징에서 벌어진 천안문 6.4 항쟁의 강경 진압과는 달리, 상하이의 소요 사태는 주룽지가 앞장서서 평화롭게 해결하여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천안문 항쟁을 전후하여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낙점해두었던 후야오방은 심장병으로 급사, 자오쯔양은 완전히 실각하면서, 장쩌민이 총서기에 등극하고, 결국 대권을 쥐게 된다.
상하이 서기로 업적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92년 10월, 1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국무원 상무부총리,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원래는 경제개혁에 회의적이던 원조 태자당 리펑이 총리로 있었기 때문에 주룽지의 개혁 드라이브에도 제약이 걸릴 상황이었으나, 리펑이 점차 힘을 확대해나가던 상하이방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심장마비까지 겹쳐 국무원 내 실권은 상무부총리 주룽지에게 돌아가게 된다. 덩샤오핑은 말년에 주룽지를 크게 총애했는데, 장쩌민이 천윈을 추종하면서 개혁개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분노한 덩샤오핑은 남순강화로 장쩌민에게 경고하는 한편, 주룽지로 총서기를 교체하는 방안까지 고려했으나 생존한 원로들의 반발로 철회한다. 어쨌거나 덩샤오핑의 지원사격 덕분에 주룽지는 실세로 확실히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된다.
2.4. 총리
1998년 장쩌민은 정년에 걸려 퇴임하는 리펑의 후임으로 상하이에 있던 주룽지를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로 발탁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이 퇴임하는 2003년까지 재직한다. 그는 엄정한 공직 기강을 강조하여 반 부패 운동으로 성과를 거두었고, 전임 리펑과는 달리 중국에서도 이미지는 좋은 편이다. 중국 민중들에선 장쩌민보다 주룽지가 더 존재감이 있었고 인기가 많았다. 장쩌민은 주룽지를 볼 때마다 약간의 심기가 불편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원집정부제의 책임총리나 다름 없었고, 경제분야의 차르나 황제라 불릴 정도다. 그래도 1980년대 중반부터 함께 일한 인연으로 주룽지를 발탁한 것은 바로 장쩌민이었고, 둘은 은퇴할때까지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정치적 동지로 살아왔다. 마오쩌둥에게 저우언라이가 있었다고 한다면, 장쩌민에게는 주룽지가 있었다.총리로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중국의 고속성장을 지휘하여 이해 매년 15%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2003년 75세에 이르자 정년에 걸려 장쩌민과 함께 동반퇴진하고 후임은 원자바오가 맡게 된다.
3. 기타
- 부인 라오안(劳安) 여사는 같은 칭화대학 전기공학과 출신으로 캠퍼스 커플이었다고 한다. 라오안도 기술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 자식은 둘이 있는데 장녀 주옌라이와 장남 주윈라이는 모두 금융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중국 정치상 이렇게 부모를 고관으로 둔 기업인은 꼭 잡음을 일으키기 마련인데[9], 주룽지의 자녀들은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 자녀들도 그렇지만 주룽지 본인이 부패에 정말로 혹독하게 엄격했다. "100개의 관을 준비해둬라. 그 중 하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는 주룽지의 대표적 어록 중 하나다.
- 2009년에 낸 회고록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2019년 10월 1일 열병식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서 건강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다. 당시 91세였다. 그러나 동갑인 전임 리펑과 후임 리커창이 연달아 별세하는 상황에서도 최고령 전직 총리로 있다.
- 홍콩에서는 홍콩민의연구소가 발표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정치 인물 평가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 1990년 상하이 서기 시절 주룽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외국인들은 그를 중국의 근본적 체제 개혁을 꾀하는 개혁가로 여겨 칭찬의 의미로 중국의 고르바초프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은 이를 심각한 모욕으로 여기고 '나는 중국의 고르바초프가 아니다. 나는 중국의 주룽지다'라며 반발하기도 했다.[10] 주룽지 본인도 자본주의를 지향한 경제적 개혁과 자유화는 지지했으나 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체제 붕괴에 대해서는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으므로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11]
- 경제활성화를 위해 교육과 부동산, 교육 부문을 부분 민영화하는 정책을 폈다. 우선 중앙정부의 세수를 늘리는 목적으로 지방세를 대폭 축소했고 이를 기존의 임대주택들을 대규모로 민간에 불하하고, 부동산 매각 대금으로 지방정부 재정을 충당시켜서 지방정부 세수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사립대 설립규제를 푼것이다. 이에 따라 부동산값 인상으로 주요 도시지역 주민들의 구매력이 크게 높아지면서 중국이 IMF 외환위기에서 큰 타격을 입는일 없이 엄청난 경제성장을 촉진시켰고,[12] 사립대 설립에 따라 대학 정원도 크게 늘어 중국인들의 학력수준을 증대시켰지만 이것이 나중에는 청년실업과 소득대비 과중한 부동산값, 지나치게 부동산 의존적인 지방정부 재정 등 중국이 겪고있는 사회문제들을 배양시켰다는 점에서 마냥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힘든 조치다.[13] 이러한 부동산 광풍문제는 이미 주룽지 총리 재임 말기에 불거져서 주룽지 자신의 퇴임사에도 부동산 거품이 문제점이라 언급할 정도였다.
[1] 원래 鎔(녹일 용, 거푸집 용)은 1955년 제1비 이체자 정리표(第一批异体字整理表)에서 熔(녹일 용)과 통합되었다. 그래서 鎔接(용접)을 중국에서는 熔接으로 쓴다.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을 적자고 1993년에 제1비 이체자 정리표를 수정해서 鎔을 熔에 통합한다는 규정을 없앴고, 이로 인해 镕이라는 간체자가 만들어졌다. 鎔 자는 명나라 황실 후손의 항렬자이다. 민장왕파는 訪-寬-鎔-喜 순으로 항렬자가 이어지는데 주룽지의 조부 주팡쉬(朱訪緖)와 부친 주콴수(朱寬澍), 그리고 주룽지 본인은 항렬자를 사용하였으나, 주룽지의 아들 주윈라이(朱雲來)는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았다(참조). 중국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게 되자 한국의 기레기가 이 소식을 보도하는데, 자세한 배경 설명은 제대로 안 해서 독자 입장에서 이게 왜 시끄러워졌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게 써놨고, 또 결정적으로 간체자용 부수 钅(정체자의 釒[쇠 금(金)\]에 해당)을 쇠 금이 아닌 온전할 전(全)이라고 잘못 표현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동음 대체로 인해 鎔이나 熔을 溶(녹일 용)으로 쓴다. 다만 사람 이름에 쓰인 글자까지 바꾸지는 않는다.[2] 마오쩌둥에게는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에게는 자오쯔양이 있었다면, 장쩌민에게는 주룽지가 있었다고 불릴만큼 세기말 중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저우언라이는 독재국가 인물로는 상상하기 힘들게, 마오쩌둥과 적대적인 미국 정부조차 인정하던 인격자였고, 자오쯔양 역시 천안문 사태때 국가 폭력을 최소화하려다가 덩샤오핑에게 찍혀서 잘렸을 만큼 윤리적 신념을 보인 인물인데, 주룽지 역시 꽤 괜찮은 총리였다. 이런 이미지는 후진타오 시대의 원자바오에게 이어진다. 중국 경제의 급속성장은 주룽지와 원자바오가 총리인 동안 이뤄졌던 것으로 그들의 가장 큰 업적이다. 참고로 원자바오는 원래 자오쯔양의 심복(정확히는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모두에게 총애받고 심복으로 뽑힌 것인데 후야오방이 일찍 죽은 것뿐이다. 그만큼 독보적으로 유능했다)이었다.[3] 삼국지에서 위연과 황충이 지키던 장사이다.[4] 이 때문에 가상역사를 다룬 매체나 드립에서 가끔씩 명나라 부활의 주역이나 구심점으로 등장되곤 한다.[5] 공산당 중군위 주석은 중국 인민해방군을 지배하는 실질적 권력 1위의 자리[6] 주룽지에 대한 덩샤오핑의 신임은 대단해 그가 부총리직에 있던 시절 확고한 개혁파라고 칭찬하면서 이런 인재가 한직에 머물러 있다고 상무위원들에게 타박했던 적이 있다.[7] 다만 장쩌민의 직계라기보다는 장쩌민과 함께 연립계파를 구성했다고 봐야 한다. 시진핑 이전의 중국에서는 무조건 총리가 총서기/주석의 아랫사람이라고 볼 수 없기도 했고 정치적 기반으로 상하이를 공유하지만, 철저히 자기 계파만을 챙겼던 장쩌민과는 달리 공청단 출신인 원자바오를 자신의 후임 총리로 밀고 자신과 함께 인민은행에서 일했고 나중에 상하이방을 탈탈 털어버리는 왕치산을 후원하는 등 기술관료를 대표하는 중립파로도 분류할 수 있다.[8] 중국은 무조건 공직보다 당직이 우선한다. 그래서 지방 핵심 성, 중요한 직할시에 경우에도 행정 책임자인 시장(공직)보다 지역 서기(당직)가 그 지방 1인자다. 그리고 상하이시 서기의 경우 지방 직할시중 중요성이 매우 높아서 24명만 임명받는 당직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동시의 임명받는다.[9] 전임 리펑 총리의 딸인 리샤오린은 재벌로 성장하여 떼돈을 벌었지만, 부패문제에 연루되어 물의를 일으켰고, 시진핑 정부의 압력때문에 모든 지위를 사임했다.[10] 당시 중국 정계에서는 동구권의 붕괴를 목도하고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급격한 개혁개방은 필연적으로 중국의 체제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런 사례를 남긴 대표격 인물인 고르바초프에 대해서는 평이 매우 나쁜 편이었다. 물론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하다.[11] 차라리 대만의 장징궈가 중국의 고르바초프라는 별명에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 전체를 민주화하지는 못했고 중국의 일부분만 민주화시켰지만 근데 장징궈는 나이가 고르바초프 삼촌뻘이다. 애당초 고르바초프는 서방에서나 평가가 높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는 나라를 말아먹은 실패한 정치인으로 보고 있고, 주룽지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런 실패한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12] 중국 대도시 주민들의 구매력은 이미 2010년대 초반에 선진국 수준에 달했다. 중국의 대도시들 급여수준이 그나마 하위권 선진국 수준이라도 다달은것은 이 보다 몇년 늦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부동산 값 상승으로 달성한 성과이다. 물론 그 대신 집값은 중국 서민들의 수십년치 급여 수준, 도심지는 수백년치 급여수준으로 올랐기 때문에 사회 초년생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를 당한 셈이 되기도 했다.[13] 이래서 2020년부터 시진핑는 다시 대학정원 수를 줄이고 있고, 대학 입시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많은 인문계 고교를 실업계로 전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