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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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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14기 국무원 부총리 허리펑 何立峰 | He Lifeng | |
이름 | 한문: 何立峰 (병음: Hé Lìfēng) 한국 한자음: 하입봉 |
국적 | 중화인민공화국 |
출생 | 1955년 2월 4일 ([age(1955-02-04)]세)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메이저우시 싱닝시 |
학력 | 샤먼대학 (경제학 / 학사) 샤먼대학 (경제학 / 석사) 샤먼대학 (경제학 / 박사) |
정당 | |
현직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
주요 이력 | 샤먼시 재무국장 취안저우시장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주임 톈진시 정치협상회의 주석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13기 부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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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리펑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중국 국무원의 부총리이자 재정 전담 관료이다.2. 상세
1955년, 광둥성 메이저우시에서 태어났다. 다만 상당수의 일생을 푸젠성에서 살았다. 본래 푸젠성 안딩현에 있었던 스샹탄 수력발전소에서 노동자로 근무하였으며,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샤먼대학에서 경제학을 수학한 이후에 공직에 들어간다.당시에는 중국이 막 개혁개방을 하던 시기였고,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자신이 거주하던 샤먼시가 경제특구로 지정되자 사면시 산하 경제연구소에 들어가서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얼마안가 1984년 말, 샤먼시정부 판공실로 들어간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샤먼시 재무국 부국장직을 맡았으며, 1990년까지 재무국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1992년부터 샤먼시 부시장에 임명되며, 1995년까지 부시장직을 맡다가 1998년까지 샤먼시 인근의 취안저우시의 시장으로 임명되어 시장직을 맡았다.
이후 2000년까지 중국공산당 취안저우시위원회 서기직을 맡았고,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중국공산당 푸젠성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2007년부터는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주석직도 겸임하였다. 시진핑은 85년부터 2002년까지 푸젠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허리펑과 근무기간이 거의 겹치고, 그 중 85년부터 88년까지는 샤먼시 부시장직을 역임하며 허리펑의 상관이었던지라 훗날 최측근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시진핑과의 인연 역시 이 시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허리펑은 당시 펑리위안과의 결혼식에 참석한 몇 안 되는 하객 중 한 명이었다고 하며, 리잔수처럼 인연이 소싯적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태자당 출신들을 제외하면 차이치, 왕샤오훙와 함께 시진핑과의 인연이 가장 오래된 푸젠 출신 측근그룹의 선두주자에 속한다.
2009년부터 기반을 톈진시로 옮겨서 중국공산당 빈하이신구위원회 서기 및 탕구구위원회 서기직을 겸임하였으며, 탕구구위원회 서기직은 얼마안가 내려놓고 빈하이신구위원회 서기직은 2013년까지 담당한다. 그러나 부성급(차관급)에서 멈춰 있던 허리펑의 경력은 2012년 시진핑이 총서기직에 취임하고 측근이 될 인사들을 불러모으면서 추월차선을 타게 된다. 우선 허리펑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톈진시 정치협상회의 주석직을 맡으며 드디어 장관급으로 승진하게 된다. (다만 당내 서열은 중앙위 후보위원급)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국무원의 핵심 부서인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직을 맡게 되어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고, 2017년 2월 24일부터 주임직으로 승진하며 2017년 말 드디어 중앙위원회에 입성하고 2018년 1월 24일부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직을 겸임하게 된다.
허리펑은 소국무원이라 불리며 정부의 재정지출을 총괄하는 발개위 부주임과 주임직에서 일대일로 정책을 설계하며 시진핑의 핵심 책사 중 한 명으로 분류되고 있다. 때문에 외교분야에서도 활약하며 시진핑의 대외 일정마다 비서실장 격의 중앙판공청 주임인 딩쉐샹과 함께 시진핑을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다. 장관급인 발개위 주임 직책을 맡으면서도 부총리급 의전을 받는 정협 부주석직을 겸임해 위세가 오른 것 역시 시진핑의 신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때문에 나이가 67세로 많기는 해도, 류허의 부총리직을 이어받거나, 심지어 정치국 상무위원 직책에도 도전해볼 수 있는 다크호스 중 한 명으로 지목받고 있다.
결국 20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다. 더불어 류허가 은퇴하면서 그의 부총리직을 물려받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경제학 박사로서 중국 경제학계 최고상인 쑨예팡상을 수상했던 리커창과는 달리, 내년 3월 총리 등극이 확실시되는 리창은 정통 지방관료로서 경제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국 내에는 허리펑의 영역을 넘볼 사람이 아예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시진핑과의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허리펑은 류허보다도 더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은 셈인데, 그러면서 미중무역전쟁과 반도체 전쟁 등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도 같이 떠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