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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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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시위원회 제1서기
한문 饒漱石
한국식 독음 요수석
영문 Rao Shushi
출생 1903년 11월 23일 청나라 장시성 린촨현[1]
사망 1975년 3월 2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상하이대학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시기2.3. 국공내전 시기2.4. 가오강-라오수스 사건2.5. 문화대혁명과 사망
3. 사후 복권 시도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중화인민정부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조직 위원장을 역임했고 국공내전 이후 상하이 시위원회 제1서기 및 화동 군사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수차례의 투옥을 경험한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명망이 높았고 한때 상하이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54년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으로 제명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박해받다가 1975년 3월 2일 감옥에서 병사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라오수스는 1903년 11월 23일 청나라 장시성 린촨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라오쓰청(饶思诚)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운동가였고 1927년 난창 폭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장시성 부지사를 맡았다. 라오수스는 어린 시절 장시성의 중학교를 다녔고 1919년 5.4 운동 이후엔 난창에서 공부하면서 종종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22년 상하이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중국 사회주의 청년 연맹에 가입해 장시성 주장시의 지역 공산주의 단체조직의 제2지부 총무를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심광사(浔光社)>를 설립했고 '심광(浔光)'과 '강성보(江声报)' 등 여러 잡지를 출간했으며, '재봉사 노동조합'과 '여성 노동자 연합'을 조직했다. 그후 그는 상하이에서 열린 전국 학생연맹에 참석했고 1925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는 동시에 국민당원이 되었다.

라오수스는 상하이 서부 투쟁위원회의 당 비서를 맡아 상하이 면직 공장과 남양 담배회사 노동자들의 파업에 참여했고 5.30 운동에도 가담했다. 그리고 1926년 말부터 1927년 3월까지 천두슈저우언라이가 주도한 상하이 노동자 무장투쟁 특별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위원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백색 테러로 위축된 당 기구의 복원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해 상하이 노동자 운동의 리더가 되었으며 1927년 상하이 노동자 무장 봉기에 참가했으나 당국에게 진압되었고 장제스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자 상하이를 탈출했다.

1928년, 라오수스는 장시성 위원회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중국 동북부 지역의 공산당 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그는 중국 공산당 북동특별위원회의 장관과 공산청년 동맹의 절강성 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같은 해 12월, 라오수스는 상하이로 돌아가서 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후 1929년에는 중국 동북부 공산주의 청년동맹 북부 공산당 위원장이 되었고 뒤이어 만주 자치위원회 부장관이 되어 동북 당기구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로서 봉천 원사 공장 파업과 하얼빈 신발 공장 파업을 이끌었다.

1930년 4월, 라오수스는 소위 '만저우 철도 파괴 공작'에 연루되어 자오상즈(赵尚志) 30명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곧 총살형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만주의 군벌 장쉐량은 공산당과 협상한 후 형량을 감금형으로 낮추기로 했다. 라오수스는 옥중에서 각종 고문을 받았고 급섭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당당하게 처신했고 당지부 간사회를 열어 죄수들에게 공산주의를 설파하고 간수들을 상대로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대본영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만주를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류탸오후 사건) 이로 인해 만주가 대혼란에 빠지면서 감시체계가 흐트러진 틈을 타, 라오수스, 자오상즈 등 감옥에 투옥되었던 공산당원들은 당 조직에 의해 탈옥했다. 그후 라오수스는 1932년 초에 중국으로 돌아와 상하이에서 노동 조합 총재 및 당내 비서관, 상하이 국가 집행위원회 비서관을 역임하며 파업과 학생 운동을 이끌었다.

1933년 라오수스는 중국 전국노동조합 총연맹의 북중국 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8월엔 허베이성 지방 임시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그후 1935년엔 소련에 가서 중국 국제대표로 임명되었으며 왕밍과 함께 "중국인의 항일 투쟁에 관한 보고서"(일명 8.1 선언)를 공동 작성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영국 및 미국을 여행해 국제 공산주의 연합 결성 작업에 참여했고 전 세계의 화교들로부터 항일 투쟁을 위해 사용될 돈을 모금했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공산군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한 자금을 모아 옌안에 군용 병원을 설치하게 했다. 라오수스는 1936년부터 미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선봉보(先锋报)》, 《구국시보(救国时报)》, 《화교일보(华侨日报)》 등을 발간했다.

2.2. 중일전쟁 시기

1938년 2월, 라오수스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반침략대회에 참석해 자오젠성(赵建生)이란 필명으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중국 노동자계급(为自由和平而战的中国工人阶级)〉이란 글을 발표해 일본의 중국 침략을 성토하고 영국이 중국 인민을 위해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후 1939년 11월 중국으로 귀환해 중국 공산당 동남국 부서기를 맡았다. 그런데 환남사변이 벌어지고 있던 1941년 1월 9일, 신사군 부지휘관 샹잉(項英)과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이 국민혁명군의 공세로 위기에 처한 신사군 군영을 떠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라오수스와 예팅(葉挺)은 두 개의 전보를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한 전보는 "상황이 위급하니 국민당과 협상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또다른 전보는 라오수스가 샹잉을 대신해 신사군 부지휘관을 맡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1월 11일,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마오쩌둥은 신사군이 예팅과 라오수스의 명령에 복종해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신사군이 국민혁명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 희망이 보이지 않자, 라오수스는 예팅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 적과 담판을 벌여 신사군 장병들이 장쑤성 주둔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보라고 요구했다. 예팅은 처음엔 거부했다가 나중엔 강권에 못이겨 담판을 하려 국민당 진지로 내려갔다가 억류되었다. 그 후 국민혁명군은 1월 12일 총공세에 나섰고, 1월 14일에 전투를 마무리했다. 예팅을 비롯한 3천명의 신사군이 포로 신세가 되었고 최소 3천에서 최대 7천명이 살해되었다. 불과 2천명만 간신히 탈출해 장쑤성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중엔 라오수스도 있었다.

1942년 3월, 라오수스는 중부 중국 관리국 서기와 신사군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중부 지역의 공산당, 정부, 군대가 라오수스의 관할에 들어갔지만, 그는 자신이 전투 경험이 부족하고 리더십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중앙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저는 도덕적 측면에서 깨끗할 수는 있지만 유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군사적 재능과 도덕을 모두 갖춘 중앙 간부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에 중앙위원회는 천이(陳毅)를 파견해 라오수스와 함께 신사군의 군사 작전을 이끌게 했다. 또한 그는 옌안에서 정풍운동에 참여해 마오쩌둥의 독재 권력이 구축되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천이와 라오수스는 얼마 안가서 반목하기 시작했다. 천이는 군대를 이끌어본 경험이 일천하고 예팅더러 억지로 국민당과 담판을 짓게 하다가 포로가 되게 만들어버린 주제에 자신은 살아돌아온 라오수스를 경멸했고, 그가 신사군의 정치위원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어떻게든 축출하려 했다.

신사군이 황화당(黄花塘)에 주둔했을 때, 천이는 라오수스가 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정풍운동에 참가하러 옌안으로 간 틈을 타 장교들을 소집해 라오수스와 중부 중국 관리국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탄전린(谭震林), 뤄빙후이(罗炳辉), 쩡산(曾山), 장아이핑(张爱萍), 반한년(潘汉年) 등과 함께 중앙위원회에 라오수스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1943년 10월 16일 옌안에서 귀환한 라오수스는 천이가 자신을 음해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후 중부 중국 관리국과 장원이(张云逸), 라이촨주(赖传珠), 증생(曾生) 등 장교들은 중앙위원회에 1500자 전보를 보내 천이를 대신해 신사군의 군사적전을 주재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일부 간부들은 천이를 비판하기 위해 공동으로 중앙위원회에 전보를 보냈다. 라오수스는 자신의 관할하에 있는 간부들이 중앙위원회에 직소한 것에 대해 "그들의 행동을 왜 막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받자 "그들의 분노가 너무 강렬해 금지하고 수정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중앙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천이가 정치 책임자가 없을 때 장교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개인적으로 중앙정부에 그를 대체할 것을 요구한 것은 명백한 분란 행위라고 판단했다. 얼마 후, 중앙위원회는 천이를 옌안으로 소환해 제7차 전국대회에 참여하여 자아비판하게 했고 장원이를 신사군 사령관에 임명해 라오수스와 함께 신사군을 이끌게 했다. 또한 천이와 함께 라오수스를 공격했던 신사군 장교들은 공동으로 자아비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45년 6월, 라오수스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7번째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끝난 뒤 산둥 군사지역의 신사군 정치위원과 중국 산둥 공산당 대표를 역임했다. 또한 그는 1946년 초 베이징과 북동부 중국 공산군에 소속되어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군사조정 작업을 수행했다.

2.3. 국공내전 시기

1946년 말, 중앙위원회는 상하이 동 중국의 당, 정부 및 군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기 위해 라오수스를 파견했다. 이듬해 1월, 라오수스는 중화인민공화국 화동지국 당 및 군사 국장을 지냈으며, 동중국 군대의 지휘관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는 1947년 2월부터 7월까지 화둥 지역 공산군의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라이우(萊蕪) 전투, 멍량구(孟良崮) 전투, 바이타푸(白塔埠) 전투, 난마(南麻)-린취(臨朐)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진 않았지만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 상부의 명령을 일선 지휘관들에게 하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7년 8월 이후, 라오수스는 동중국 공산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설치된 중앙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라오수스는 화둥 공산군 사령관으로서 산둥과 교동 방위 전역, 유현(濰縣) 전투, 장저우 전투를 직접 감독해 산둥 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마오쩌둥의 칭찬을 받았다. 또한 1948년 7월엔 제남 전역을 이끌었고 1948년 10월에는 화이하이 전역을 지휘해 공산군의 승승장구에 기여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라오수스는 중화인민공화국 군사정치위원회 위원 및 비서관, 중앙인민 정부 위원, 중앙인민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뒤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인민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었다. 또한 화둥 군사 지역 및 제3야전군의 정치위원장을 맡음으로서 여전히 화둥 일대의 당, 정부,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또한 1952년엔 베이징으로 옮겨져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 부서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2.4. 가오강-라오수스 사건

1953년 2월, 라오수스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했다. 그후 그는 '동북왕' 가오강으로부터 "마오쩌둥이 류사오치를 숙청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가오강이 계획한 류사오치 실각 음모에 가담했다. 1953년 6월에서 8월까지 열린 국가재정 경제회의와 9월에서 10월까지 개최된 국가조직 업무회의에서, 가오강은 소위 "군당론"을 제기하고 류사오치가 보이보 등 여러 인사들과 손잡고 분당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라오수스는 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가오강이 자신의 권력욕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다 천윈에게 "부주석을 여러 개 신설하고 내가 그 중 하나를 맡고 당신이 다른 하나를 맡아라."는 위험 발언을 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천윈은 즉각 마오쩌둥에게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반당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소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1953년 12월 24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가오강 일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가오강, 라오수스, 류사오치 등에게 자아비판하게 했다.

1954년 2월, 중국 공산당 위원회는 제7차 중앙위원회 제4기본회의를 소집해 가오강과 라오수스의 반당 활동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당의 단일성 강화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2월 중순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의 위탁을 받아 가오강에 관한 좌담회를 열었다. 이 좌담회에 위원 37명과 주요 간부 40명이 참석해 가오강과 라오수스의 반당 음모 활동에 대한 사실을 더욱 폭로하고 검증했다. 이때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자아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이 권력 찬탈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러던 2월 17일, 가오강이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 병원에 후송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공산당은 가오강의 자살 시도는 당의 지침에 항거하고 배신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그해 4월, 덩샤오핑, 첸이, 탄젠린은 좌담회를 토대로 중앙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중앙정치국은 저우언라이의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반당 행위를 했다."는 결론과 덩샤오핑 등의 보고서를 채택했다. 그후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동북 지역 수석간부 회의와 동중국 관리국 확장회의를 개최했고 5월엔 산둥 지국 확장 회의를 열어 가오강과 라오수스의 반당 음모 활동을 폭로하고 그들에게 가담한 인사들을 비판했다.

1954년 8월 17일, 가오강이 수면제 과다 복용 방식으로 자살했다. 그래서 라오수스는 '가오강-라오수스 반당 음모 사건'의 피고인으로서 홀로 인민재판소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1955년 3월, 중국 공산당은 국가대표회의를 소집하고 "가오강 및 라오스스의 반당 동맹 결의안"을 통과시켜 가오강과 라오수스를 제명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1955년 4월 2일에 그의 부하였던 반한년이 새 상하이 시장으로 임명된 천이에게 라오수스가 1943년에 저지른 "반혁명" 행위를 밀고했다. 이보다 앞서, 라오수스는 1943년 여름에 왕징웨이 정권의 첩보 총지휘부 수장으로서 일본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리스췬(李士群)에 대항하기 위해 상하이로 잔입했다. 그가 난징에 도착했을 때, 리스췬은 왕징웨이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그의 부하로 위장한 반한년을 데리고 갔다. 반한년은 라오수스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고, 라오수스는 그에게 리스췬과 함께 왕징웨이와 만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라오수스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 찍힌 왕징웨이와 자신의 부하 반한년이 만나는 걸 허용한 걸 당 중앙이 알게 되면 그가 왕징웨이와 내통하고 있다는 오해를 살 게 두려워 중앙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반한년으로부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해들은 천이는 즉시 마오쩌둥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마오쩌둥은 천이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격노해 "라오수스의 죄는 가오강보다 작지 않다."고 말했다. 그후 라오수스는 1965년 8월 30일에 인민재판소로부터 "반역명 집단의 수괴"로 지목되고 14년 수감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1978년 하반기에 당 중앙 조사위원회의 제1비서가 된 천윈이 1943년 당 문서들을 조사한 결과, 반한년의 진술이 거짓이고 라오수스는 무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한년은 개인적으로 리스췬의 부하로 위장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고 리스췬이 왕징웨이를 보러 갈 때 반한년이 따라가는 것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는 라오수스의 보고서가 중앙위원회에게 제출되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중앙위원회는 반한년과 라오수스의 일을 잘 알고 있었고 반한년이 왕징웨이를 보는 걸 허락했다.

그럼에도 이게 후에 문제로 불거진 것은 장칭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장칭은 지난날 상하이에서 3류 배우로서 많은 수모를 겪었고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된 뒤 전향서를 제출한 뒤 풀려났는데 향간에서는 그녀가 간수들에게 몸을 파는 대가로 석방을 허락받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녀는 이러한 수치스러운 과거를 은페하기 위해 당시 상하이에 있었고 그때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라오수스를 해치우기 위해 반한년을 꼬드겨 가뜩이나 가오강 사건으로 위기에 봉착했던 라오수스를 더욱 궁지에 몰아간 것이다. 이에 공산당은 제11차 중앙위원회 제3기본 회의에서 라오수스의 혐의 중 '반한년의 일을 당에게 보고하지 않은 행위'와 관련된 혐의를 삭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가오강과 밀통해 반당행위를 했다는 혐의는 그대로 남겨졌다.

2.5. 문화대혁명과 사망

1965년 9월 23일, 라오수스는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1967년, 공안부는 중앙 문화혁명소조의 지시에 따라라오수스를 재구속했다. 그는 '가오강 사건'의 재수사를 받았고 또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75년 3월 2일, 그는 가슴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날 밤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항년 72세. 나중에 라오수스의 가족이 병원을 방문해 라오수스의 유골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유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3. 사후 복권 시도

1982년 8월 13일, 첸린장(陈麒章)은 당 중앙에 편지를 보내 라오수스 사건을 재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첸린장 동지는 중앙위원회에 요청합니다.

반한민와 양판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밝혀지고 그들의 신원이 복구되었으나 과거에 규정된 "라오수스, 반한민, 양판 반혁명 집단"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상하이 해방 이후 라오수스의 적에 대한 투쟁이 반혁명 범죄로 규정될 수 있는 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라오수스는 공산당 내외부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미래에 당의 역사를 쓸 때, 그는 필연적으로 언급될 것입니다. 그가 반혁명가이든 아니든간에, 혁명을 진실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이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저는 중앙당국에 관련부서에 라오수스 사건을 검토하고 가능한 빨리 결론을 내도록 지시할 것을 요청합니다.

라오수스는 1955년 4월 1일 반혁명 범죄로 체포되었습니다. 1955년 4월부터 1958년까지 공안부는 2년 넘게 수사를 담당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교도소에 오랫동안 구금되었습니다. 그는 1965년 전후에 최고 인민검찰원에게 양도되었고 1965년 8월 30일 최고 인민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았습니다. 판결문은 "피고인 라오수스는 심각한 반혁명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상하이에서 일하면서 중국 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의 첫 비서직과 동 중국 국의 첫 비서직을 역임하기 위해 반역자들을 재사용 할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특수 요원 인 후쥔을 상하이 공안국에 배치했다. 양판과 다른 사람들에 의한 스파이와 반혁명자의 사용문제가 밝혀진 후 중부 및 화둥 공안부는 반복해서 철저히 대처하도록 요청했으나 그는 여전히 이를 돌보지 않았다. 이 많은 수의 특수요원들이 반혁명적 요소로 5년 동안 반혁명 사보타주 활동을 수행하여 국민의 이익을 심각하게 위태롭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라오수스는 이에 따라 중화 인민 공화국 제 13 조 반혁명 규칙의 조항에 따라 14 년 형을 선고 받았고 10 년 형을 정치범으로 선고받았습니다. 그후 가석방이 결정되어 공안부서로 이전되었으나 문화혁명 기간 동안 다시 감옥에 수감되어 나중엔 그가 언제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반한민과 양판이 접촉한 자료들에 비춰볼 때, 상하이의 라오수스 문제에 대한 질적 분서에는 문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첫째, 공안부가 2년 이상 조사한 동안 라오수스의 역사적 중요성이 철저히 입증되었고 라오수스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결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후쥔의 기용에 대해서는 반한민에 대한 징계검사 중앙위원회의 보고서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보안 작업의 실수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특별한 반혁명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셋째, 라오수스가 한쥔과 다른 사람들을 기용하는 과정에서 상하이 공안국에 의해 만들어진 실수에 대해 직접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1951년 3월 이후, 화둥 공공 보안부서 주요 그릅의 정화팀은 상하이 공안국이 기용한 간첩들을 제거했습니다. 라오수스는 이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라오수스 동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미 재혼했습니다.... 저는 가족 구성원들의 재심사 요구 여부와 관련없이 당 중앙이 필요한 설명을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1년 4월, 루쿠이(陆璀)도 당 중앙에 서신을 보내 라오수스 사건을 재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저는 중국 공산당원 루쿠이입니다. 오랫동안 제 마음에 무거운 납과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라오수스의 문제입니다. 라오수스는 가오강 사건으로 비난받았고 1955년 3월에 반당 행위 혐의로 공산당에서 추방되었고 동년 4월에는 검거되어 라오수스, 반한민 및 양판 반혁명 그룹의 혐의로 선고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사건 처음부터, 특히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래 많은 동지들이 의심, 유보, 심지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동급생인 장윤은 저와 제 딸에게 "라오수스는 좋은 동지다."라고 말했습니다. 라오청쯔 동지도 제 딸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동지이며 나는 그를 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략) 가오강 반당동맹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면, 당신은 어찌하여 잘못을 바로잡는 결의안을 쓰지 않는가? 이것은 분명한 명예훼손이다." 그는 저와 제 딸에게 당에 호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거의 비서관 첸린장은 1982년 8월 13일 당 중앙위원회에게 요청했습니다. (중략) 저는 중화인민 공화국 창립 이래 많은 잘못된 사례가 복구되었으나 가오강-라오수스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 중앙위원회에 문제를 찾고 싶지 않습니다.
라오수스는무고로 인해 1955년에서 1965년까지, 그리고 1967년에서 1973년까지 7년 또는 8년 동안 두번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제 딸과 저, 다른 친척들도 오랫동안 이 사건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중략)

라오수스는 장시성 출신입니다. 그는 1903년에 태어났습니다.그는 1924 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 동맹에 합류하여 다음 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국내든 국외든 그는 혁명을 위해 일했고 당에 유용한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1930년에 그는 공산주의 청년 연맹의 만주 자치위원회 비서관을 지낸뒤 1931년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배신 행위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1941년 안후이 남부 지역에서, 그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중대한 위기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중앙 위원회에 전보를 보냈습니다. "나는 당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한다." 이 전보는 중앙 보관소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은 현재까지 라오수스를 반당분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의 제명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4. 참고 문헌


[1] 현 푸저우시 린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