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5:28:14

쑹스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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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새롭게 제정된 상장 군복을 입은 쑹스룬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6.25 전쟁2.3. 말년
3. 기타

1. 개요

宋时轮·宋時輪(송시륜) / Sòng Shílún (1907년 9월 10일 ~ 1991년 11월 29일)

중화인민공화국군인이다. 6.25 전쟁 시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후난성에서 태어나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다. 당대의 홍군 중에서는 장교로서 제대로 군사교육을 받은 몇 안되는 엘리트 중 하나였다. 쑹스룬은 임관하자마자 곧바로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대장정에 참가했다.

2.2. 6.25 전쟁

김일성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색이 짙어지자 중국 공산정권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인민지원군' 명목으로 병력을 파병했다. 당시 쑹스룬은 화동군구 산하 9병단 사령원으로 상해에 주둔하며 대만 침공을 준비했는데 한반도의 전황이 급해지자 9병단은 산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전선에 투입됐다. 인민지원군 총사령원 펑더화이에 이어 부사령원을 겸했다.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을 중심으로 한 UN군은 함경북도 청진시와 압록강 유역의 혜산진까지 진격했지만 9병단의 유인작전과 포위공세로 점령지역을 모두 포기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장진호 전투를 지휘하며 올리버 스미스가 이끄는 미 해병 1사단과 치열하게 교전했다..

당시 중공군은 평등을 지향했기 때문에 계급을 타파하고 직책으로만 지휘를 했다. 하지만 이런 체계로 실전을 치러보니 문제가 많았고 쑹스룬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6.25 전쟁 이후 1955년에 중공군은 계급을 만들었는데 쑹스룬은 직책에 맞게 상장(上將. 한국의 대장에 해당) 계급을 받았다. 마오쩌둥의 아들인 마오안잉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 마오안잉의 안전을 염려해 사령부에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전사하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걸로 마오쩌둥에게 문책당하지는 않았다. 이후 마오쩌둥이 펑더화이를 숙청할 때 마오안잉을 거론하는 과정에서도 쑹스룬까지 거론하지 않은 걸 보면 쑹스룬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여겼던 걸로 보인다.

2.3. 말년

1969년에 예편한 후, 1972년부터 13년 동안 인민해방군 산하의 군사과학원에서 2대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수의 저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중국 현대 군사전략의 이론적 향상,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특히 1980년 9월에는 마오쩌둥 시대 이래 중국 군사전략의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였던 '유적심입'(誘敵深入)[1][2] 을 삭제하고, '적극방어'(積極防禦)만을 명시하도록 하는 수정안을 관철시켰다. 전자가 미국, 소련 등 강대국과의 전면전쟁을 전제로 과거 중일전쟁, 국공내전처럼 약자로서 영토 내부에서 장기 저항을 감수한다는 개념이라면, 후자는 국경과 주변에서 최대한 외적의 침략을 격퇴한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중국의 소위 '적극방어'는 영토의 직접적인 공격이 발생하지 않아도, 단지 중국의 이익에 불리한 주변의 지정학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까지 도발로 간주하고, 이를 빌미로 선제 공격까지 불사하는 사실상의 대외 군사개입도 포함한다. 실질적으로 말하면 '영토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서도 공격할 수 있다' 수준이 아니라 '상대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원칙에 가깝다. 이는 6.25 참전을 포함하여 중국이 공산정권의 수립 이래 주변국과 벌였던 주요 무력분쟁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냉전 이후부터는 추축국 때문에 이런 개념이 매우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쑹스룬의 가치관도 긍정되지는 않는다.

단 21세기에 대만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방어를 하려고 해도 공포의 미국 해군과 엮이면서 좀 덜한 부분이 있다. 해군 핵전력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 사실상 "미군 빼고 적극방어"다. 인도나 베트남, 러시아 등에게는 계속 적극방어를 보인다. 하지만 미국이 대만에 (비공식 지원 말고) 공식동맹을 맺어서 일본의 요코스카 같이 핵전력을 가져다가 완전히 공식주둔을 한다면 적극방어가 다시 나올 가능성은 꽤 있다. 중국은 덩샤오핑 시대의 개방과 이후 우루과이 라운드(농산물 관세 협상), WTO 등 여러 국제경제적 사건을 거치면서 대만만큼은 미국이 안 건드리는걸 요구해 왔다. 물론 미국도 적당한 군사 긴장감만 원하지, 그 정도로 엄청나게 시비 걸 마음은 없기에 그럴 확률은 낮다.

이는 1년 전인 1979년 베트남과의 중월전쟁에서 드러난 중국의 현대전 수행 능력 부족에 따른 군사력 재정비의 필요성을 반영하고,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전면전쟁보다 주변국과의 소규모 국지전에 주력한다는 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대외 전략관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집권했던 1980년대의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개발에 주력하던 시기였고, 군사 부문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 감축을 단행하는 축소 지향적 정책을 펼쳤다. 오늘날 잘 알려진 연평균 10% 이상의 군사비 지출 증액, 신무기 대량 도입 등의 군사력 현대화는 덩샤오핑의 후임자 장쩌민이 집권한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노년에는 상하이시에서 거주하다 1991년 11월 29일에 죽었다. 향년 84세.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날은 17년 전 그와 함께 한국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을 이끌었던 펑더화이가 사망한 날이기도 했다.

3. 기타

  • 성격이 엄청 불같고 화가 나면 아무도 못말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때문에 쑹스룬의 부하들은 그가 분노하지 않기를 하늘에 바랐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에 참전해서는 다른 부대가 도망치거나 말거나 미 해병대를 아예 싹쓸이 하려고 했다. 마무리 부분에서 이렇게 이성을 잃은 작전에 의해, 그전까지의 장진호 전투 상황 속에서 중국군이 미군 상대로 올린 엄청난 전적에 비해 중국이 실질적으로 건지는 게 줄어들었다. 단 장진호 전투 직전까지는 꾸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엄청난 인내심을 보여줬다. 미군을 완전한 작전지역인 장진호 부근까지 계속 공격당하면서도 유도한 것은 그와 상관 펑더화이가 장진호에서의 "한방"을 위해 굉장히 힘들게 참아낸 성과였다. 깊게 유인할 수록 승리확률이 크다는걸 알고, 전투에서 인내의 가치를 보여주며 미군에 치명타를 안겼다.
  • 펑더화이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지만 초기 중공군 승전의 장본인이고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게는 사실상 생명의 은인격인 인물이나 다름없다. 반대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북진통일의 염원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분단을 고착화시킨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치적 행보로 인해 영욕을 겪었던 린뱌오, 펑더화이 등과는 달리 줄곧 전문 군인으로만 남아 모국의 군사력 발전에 기여했던 점, 천안문 6.4 항쟁 당시 계엄령 선포 및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그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요인이다.
  • 2021년 중국영화 장진호에서는 장한위가 연기했다. 장한위는 2007년에 나온 집결호에서도 한국전 참전 중공군 병사 구지디 역을 맡았다.


[1] "지는 척하면서 (자기 진영으로) 적을 깊게 들어오도록 유인한다"라는 뜻인데, 그런 뒤에 보급과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 역습하면 쉽게 적이 망하기 때문에 쓰는 전략이다. 전술적으로 유적심입을 가장 잘 구사한 사례가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었다. 중공군은 미군과 교전을 한 후 패하는 척 후퇴하여 미군을 자기 영역 깊숙히 유인했다.때문에 미군은 중공군의 전력을 오판하고 공세를 계속해서 보급선이 늘어지고 제대간 간격도 급격히 벌어졌다. 이 때 중공군은 위장술로 미군의 항공정찰을 피해 곳곳에 매복했고,하루에 수십km씩 야간 산악행군을 해서 적의 보급과 퇴로를 차단하고, 국지적인 병력우위를 바탕으로 포위 공격을 자주 했다. 이 때문에 국군과 UN군은 서부전선에서 급격히 무너지며 후퇴하다 서울을 다시 빼앗기기까지 했다.[2] 쑹스룬 자신은 장진호 전투에서 유적심입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피점령지를 되찾기는 했지만 국군과 UN군 전력이 비교적 온전히 퇴각했고 이들은 재편성 후에 금방 전선에 복귀했다. 반면 9병단은 막대한 전투력 상실로 한동안 전선에 투입되지 못했고,그 바람에 국군과 UN군은 동부전선에서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미군 포로를 대량으로 획득해서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던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