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white>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Oliver Prince Smith | |
<colbgcolor=#003458> 출생 | 1893년 10월 26일 |
미국 텍사스주 메나드 시 | |
사망 | 1977년 12월 25일 (향년 84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알토스 | |
복무 | 미합중국 해병대 (1917년 ~ 1955년) |
최종 계급 | 해병 대장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
훈장 | 수훈십자상 해군 수훈십자상 육군 수훈십자상 은성 훈장 훈공장 (2) 동성훈장 항공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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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최종 계급은 미합중국 해병대 대장이다. 56세의 나이로 6.25 전쟁에 참여하여 미 해병대 1사단을 지휘하였다. 지적이고 말투가 부드러우며 외유내강형으로 알려져있다.장진호 전투 당시 상부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진군속도를 늦추고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는 등의 탁월한 판단을 통해 악조건 속에서 사상자를 최소화하였다. 당시 스미스의 상관으로 행정군인이지 야전 지휘관으로는 졸장이었던 에드워드 알몬드와는 달리 전장의 안개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닌 군사적 천재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행적
미 텍사스주 메나드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7세에 사망한 후 가족들과 미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일한 여동생이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는 등 비극적인 젊은 시절을 보냈다. UC 버클리에 진학한 후에는 정원가꾸기 따위의 할머니들이나 하는 이상한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대학 재학 중 방학에는 윈치 조작자로 일하고 산타크루즈 산맥의 벌목장에서 조장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과 함께 1917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스미스는 수줍은 많고 조용한 성격으로 창조과학과 신앙치료를 교리로 채택하여 이단으로 분류된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신도였다. 소위 임관 후에는 괌에서 소총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32년 미 육군 보병학교를 수료했다. 1934년 프랑스 육군의 지휘참모대학인 École supérieure de guerre에 입학하여 1936년 미 해병대 최초로 이 학교를 수료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1944년 미합중국 해병대 제1사단 5해병연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같은 해 4월 같은 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관티코와 캠프 펜들턴의 강의실에서 상륙작전에 대해 강의 하였으며 펠렐리우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성공적인 전술을 증명해보였고 이후 미국 내에서 상륙작전 전술, 실행 전문가로 인정받았다.[1]2.3. 6.25 전쟁에서의 활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고 1950년 8월 말 일본에서 맥아더와 함께 인천 상륙 작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2] 상륙작전에 능통했던 스미스는 인천의 악명 높은 조수 간만 차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3][4]찰스 윌러비와 에드워드 알몬드 등 예스맨 참모들을 곁에 두었던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무시한채 추격전처럼 미 제8군과 10군단을 따로 진격시키는 지휘 분할 전략을 세웠고 원산상륙작전이라는 희대의 뻘짓을 저질렀다.[5] 이후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의지와 여러 개입 증거를 경시하며 트루먼을 안심시켰고 10군단을 빠르게 압록강으로 전진시켰다.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맥아더의 호언장담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몬드는 스미스의 해병사단을 가능한 빨리 북쪽으로 올려보내길 원했고 흥남에서 태백산맥의 산길을 따라 장진호로 향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스미스는 고저차가 심하고 구불구불해 보급이 힘들고 포위에도 취약한 좁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에 분개하였고 이러한 계획을 세운 알몬드에게 따졌으나 무시당했다.[6]
스미스가 보기에 장진호를 뚫고 빠르게 북진하는 것은 과거 프랑스의 실패를 연상시켰고 알몬드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후방을 다지며 진격속도를 늦추었다.[7] 그 후 장진호 근방에 다다르자 각 도로들이 교차하는데다 활주로를 만들 정도로 넓직한 하갈우리를 전진기지로 선택하였다. 게다가 상술한 이유로 보급이 제 때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 스미스는 유사시 공중 보급이라도 잘 받을 수 있게 모든 수단을 동원, 호숫가의 언 땅을 평탄화 해 야전 활주로[8]를 건설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야전 활주로는 이후 탄약, 연료, 식량 등을 수송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성공적인 철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9]
1951년 5월 미 캘리포니아 주 펜들턴 해병대 기지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아 한국을 떠났다.
2.4. 전쟁 이후
1953년 7월 미 해병대 중장으로 진급한 후 미 대서양함대 함대해병대(FMF)사령관을 지냈으며, 1955년 9월 1일 대장 계급으로 퇴역하였다. 이후 1977년 12월 25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 평가
흔히 미 해병대에도 깔려있는 안되면 되게하라, 까라면 까의 정신이 전혀 없는 매우 냉정하고 침착한 지휘관으로 해병대에서도 프로페서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기여하였고 미국이 장진호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달성하는데 막대한 역할을 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의 극동사령부가 근거없는 낙관주의에 빠져 무모한 추격전을 시도할때도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철저한 안전지향의 진군으로 중공군의 반격에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스미스가 알몬드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면 보급도 받지 못 한 채 장진호에 매복 중이었던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에게 포위섬멸 당했을 것이다.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과의 교전경험을 풍부히 쌓아 동양인들의 전투의지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당히 넓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경험은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에 잘 상륙할 수 있도록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장진호 전투에서도 중공군이 황초령 수문교를 정석대로 폭파하지 않고 북쪽으로 사라지자 이를 함정이라고 정확히 판단하는 등 부관과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상당히 탁월하다.
4. 기타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는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퇴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진격 중이라는 명언을 남겼다.[10] 질서정연한 철수와 패퇴는 그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임을 잘 나타낸다.파이프 담배 애호가였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담배잎은 월터 롤리 경.
프랑스어를 훌륭하게 구사했으며 술도 적게 마시고 장미를 키우는 등 온화하고 지적인 성격으로 인해 "교수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1]
2021년 11월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선정되었다. https://edu.mpva.go.kr/notice/human/war625Detail.do
5. 둘러보기
[1] 상륙작전은 계획, 실행, 타이밍의 측면에서 매우 높은 수준을 요구하기에 난이도가 매우 어렵기로 알려져있다.[2] 이때 원수지간으로 발달할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를 만나게 되었다.[3] 사실 스미스는 인천 상륙 작전을 반대했었다. 경기도 평택의 포승면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기각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극악한 난이도를 뚫고 작전계획을 전문가답게 성공적으로 수립하였다.[4]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스미스는 타임지의 표지인물에 선정되었고 이에 알몬드는 상당한 질투심을 표했다고 한다.[5]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했을 땐 이미 미 제8군이 원산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올라간 이후였다.[6] 알몬드는 스미스가 명령을 실행하는데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비난했다.[7] 역시나 맥아더의 진격 명령에 회의적이었던 서부전선의 월튼 워커보다도 더한 명령 불복종 수준의 느린 진격이었다. 게다가 중공군이 의도적으로 패주하는 척 깊숙히 북진시키려 유도하였으나 쉽게 낚여주지 않았다.[8] 비행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땅을 평평하게 다졌을 뿐인 '활주로' 이다. 통상적인 비행장에 포함되는 관제 시설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고, 항공기와 통신이 가능한 무전기를 탑재한 지프를 세워둬 관제탑(?)을 대신하게 한 정도다. 거리도 목표했던 1km를 다 못채우고 가동해서, C-47이 적재량을 줄여서 아슬아슬하게 이착륙이 되는 정도였다.[9] 한편 알몬드는 활주로를 건설하는 것 또한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스미스가 곧 막대하게 발생할 사상자를 대형 항공기로 후송한다고 말하자 "무슨 사상자?"라며 의아해했다고 한다.[10] Retreat, Hell! We'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후퇴라니, 얼어죽을! 우린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일 뿐이오!)[11] 하지만 적에 대해서는 전혀 온화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적을 체계적으로 파괴시키고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시키는 자비없는 효율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