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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로버트 아이첼버거 | 제2대 월튼 워커 | 제3대 매튜 리지웨이 | 제4대 제임스 밴 플리트 | 제5대 맥스웰 테일러 | |
제6대 리먼 렘니처 | 제7대 아이작 D. 화이트 | 제8대 조지 데커 | 제9대 카터 매그루더 | 제10대 가이 S. 멜로이 | |
제11대 해밀턴 하우즈 | 제12대 드와이트 E. 비치 | 제13대 찰스 H. 본스틸 3세 | 제14대 존 H. 마이켈리스 | 제15대 도널드 V. 베넷 | |
제16대 리처드 G. 스틸웰 | 제17대 존 베시 | 제18대 존 위컴 | 제19대 로버트 W. 세네월드 | 제20대 윌리엄 J. 리브시 | |
제21대 루이스 C. 메네트리 | 제22대 로버트 W. 리스카시 | 제23대 윌리엄 클라우치 | 제24대 리처드 티몬스 | 제25대 랜돌프 하우스 | |
제26대 대니얼 페트로스키 | 제27대 대니얼 자니니 | 제28대 찰스 캠벨 | 제29대 데이비드 밸코트 | 제30대 조셉 필 2세 | |
제31대 존 존슨 | 제32대 버나드 샴포 | 제33대 토머스 밴달 | 제34대 마이클 빌스 | 제35대 윌러드 벌러슨 | |
제36대 크리스토퍼 라니브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colbgcolor=#DF0000><colcolor=#fff> 미합중국 초대 제8군 사령관 로버트 아이첼버거 Robert Eichelberger | |||
본명 | 로버트 로렌스 아이첼버거 Robert Lawrence Eichelberger | ||
출생 | 1886년 3월 9일 | ||
오하이오 어바나 | |||
사망 | 1961년 9월 26일 (향년 75세) | ||
노스캐롤라이나 애시빌 |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제8군 사령관 | ||
1944년 6월 1일 ~ 1948년 8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F0000><colcolor=#ffffff> 학력 | 어바나 고등학교 미국육군사관학교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09년 ~ 1948년 |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수훈십자장 (2회) 육군수훈훈장 (4회) 해군수훈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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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190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 제25보병사단에서 초임을 시작했고 1909년 제10보병사단에서 복무했다. 판초 비야를 잡기위해 존 조지프 퍼싱 휘하의 멕시코 원정대에 참가했고 이후 파나마 운하에서 근무하기도 했다.1915년 미국으로 돌아와 복무했고 1916년 중위로 진급해 미시시피주 분빌에 있는 캠퍼 군사학교에서 전술학교관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가하자 제20보병사단을 거쳐 제43보병사단에 수석교관으로 있었고 1918년 2월부터 전쟁부에서 복무했다. 6월 전시 소령으로 진급했다.
러시아 내전당시 윌리엄 S. 그레이브스가 이끄는 시베리아 원정군 소속으로 파견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 노비츠카야 인근 다리를 파르티잔의 공격에서 잘 막아내 수훈십자장을 수여받고 1919년에 전시 중령으로 진급했다.
1920년에 정규 소령으로 원복했고, 1921년에 필리핀, 베이징에 파견되었다가 미국으로 복귀했고 1925년부터 전쟁부에서 근무했다.
미국으로 복귀했을 때 아이첼버거는 보병 병과에서의 경력과 진급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판단이 섰고 상관의 권유로 부관 병과 (Adjutant General) 로 전직했고, 전간기 내내 관련 보직에 종사하다, 대령으로 진급하기 직전에 보병으로 원복하면서 보병장교 속성 훈련을 수료했다.
이후 지휘참모학교를 수료하고 전쟁부로 복귀하고 육군본부에서 참모직을 수행했다. 1938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제30보병연대장으로 2년 근무했다.[2]
1940년 전시 준장으로 진급해 제7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임명되어[3] 조지 C. 마셜의 권고로 미군의 전시 확장에 대비해 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을 크게 개선했고 1941년 전시 소장으로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야전으로 복귀를 요청해 제77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제1군단장으로 승진해 횃불 작전에 참가할 부대를 훈련시켰고, 그도 작전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4]
1942년 8월에 돌연히 아이켈버거와 그의 참모들, 제1군단 본부는 맥아더의 요청으로 태평양 전선으로 전속해 호주로 이동했다. 호주 대륙 방어의 일익을 담당하고, 현지 미군 사단들 (제32, 41 보병사단) 을 행정적으로 통제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을 맡았는데 호주군과 함께 뉴기니의 부나-고나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고 뉴기니 전역에서 공을 세웠고 아이첼버거는 1942년 10월에 전시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4년 여름에 새로 편성된 제8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필리핀 탈환전에도 참가해 루존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러 마닐라를 해방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필리핀 남부의 여러 섬에서 일본군 잔존병력을 소탕하는데에도 기여했다.
종전 후 일본에 진주했으며 1948년 중장으로 전역했다. 1952년에 호주의 전쟁 10주년 기념행사에 방문했으며[5], 1954년 미국 의회의 결의로 예비역 대장으로 진급했고 1961년 사망했다.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여담
일본의 재무장을 주장했고, 민정국과 극동위원회와 대립했다. 재임 중에 재무장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해상보안청의 창설을 실현시킨다.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대립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고생한 정황들이 꽤 있었고 전후 맥아더를 신랄하게 비판한 일기가 남아있다.1947년, 지방순행 중인 쇼와 덴노를 태운 전용열차와 아이첼버거를 태운 연합군 전용열차가 우스이 고개에서 교행을 하게 되었고, RTO의 명령에 따라 덴노전용 열차 측이 5분간 물러나 피해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1] 당시 동기는 제이콥 데버스, 조지 S. 패튼, 윌리엄 H. 심슨, 존 C. H. 리, 에드윈 F. 하딩이였다.[2] 원래 제안된 보직은 보병학교의 교육부대였던 제29보병연대장이었는데 중간에 전과해서 보병 경력이 짧았던 아이켈버거는 다른 장교들의 시기와 질투가 비치는 것을 부담스러워 사양했고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3] 당시엔 준장 보직이었으나 아이첼버거의 재임 시점부터 소장 보직으로 격상했고, 냉전기에 중장 보직으로 격상해 현재까지 오고 있다. 아이켈버거 자신은 교장 직을 한직으로 여겼는지 진급 가능성을 희박하게 봤는데 그를 눈여겨본 상부의 주목으로 소장으로 진급한다.[4] 정황상 제1군단 본부가 태평양 전선으로 배치되면서 이를 대신해 로이드 프레덴달이 지휘하는 제2군단 본부가 횃불 작전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론이지만 만약 아이켈버거가 북아프리카 전선에 참가했다면 원 역사에서 부나 - 고나 전투, 비아크 섬 전투에서 보여준 지휘력을 감안할 때 (부대를 수습해 승리로 이끈 능력) 카세린 협곡 전투와 같은 패배나 작전 초기의 미군이 벌인 삽질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5] 태평양전쟁 중에 여러 호주군 장성들과 친분을 쌓았고 전후에도 서로 편지를 보내고 가족들이 현지에 방문하는 식의 교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