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초 비야[1] Pancho Villa | |
출생명 | 호세 도로테오 아랑고 아람불라 José Doroteo Arango Arámbula |
개명 | 프란시스코 비야 Francisco Villa |
출생 | 1878년 6월 5일 |
멕시코 두랑고주 산후안델리오 | |
사망 | 1923년 7월 20일 (향년 45세) |
멕시코 치와와주 파랄 | |
직업 | 혁명가 |
배우자 | 마리아 루즈 코랄 (1911년 ~ 1923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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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술은 마시되 취하지 말고, 사랑을 하되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훔치되 부자들의 것만 건드려라.
멕시코의 혁명가. 판초 비야의 멕시코 내의 이미지는 멕시코의 의적, 농민의 친구, 멕시코 혁명의 영웅이다.2. 생애
1878년 6월 5일 멕시코의 두랑고주 산후안델리오에 위치한 라 코요타다 아시엔다에서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호세 도로테오 아랑고 아람불라(José Doroteo Arango Arámbula)였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농장의 노동자로 살아가던 도중 누이를 죽인 농장주를 죽이고 산적이 되었다. 이때 그의 이름을 프란시스코 비야로 바꾸었다. 1910년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일으킨 멕시코 혁명에 가담해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일약 영웅이 된다. 멕시코시티 입성 후 찍은 기념사진. 판초 비야는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으며,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비야 왼쪽에 앉아 솜브레로를 잡았다.[2] |
프란시스코 마데로 대통령이 암살된 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와 같은 반(反) 혁명 세력에 맞서 싸웠으며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함께 멕시코시티에 입성했으나 끝내 셀라야 전투에서 알바로 오브레곤에 패한 후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를 정식 대통령으로 인정한 미국 뉴멕시코주의 콜럼버스를 공격했고, 멕시코 국경 근처의 미국인들이 공격받게 되어 98명의 사상자[3]를 내게된다. 이에 분노한 미국은 비야를 잡기 위해 존 조지프 퍼싱을 비롯해 1만 2천 명의 병사를 멕시코로 보냈다. 카란사와 멕시코 정부는 미국의 파병에 항의했고 멕시코 전체가 반미 감정으로 들끓었으나 미국이 두렵다 보니 비난만 하는 데서 그쳤다. 멕시코의 카리잘에서는 멕시코군이 미군을 공격하여 저지하려고 했으나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한 멕시코 정부가 급히 연락하여 멕시코군의 공격을 금지했다.
비야는 미군과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웠으나 멕시코 정부군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한 미군을 당해낼수 없었고 미군은 그의 게릴라 전술을 파악하고 잘 대응하여 싸웠기에 결국 모든 병력과 휘하 간부들을 잃고 도망다니게 된다. 하지만 정작 두목인 비야는 미군이 잡으러 올 때마다 잘 빠져나가 미군은 그렇게 추적을 했지만 잡지 못했다. 그러다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1년 뒤 미국은 군대를 철수한다. 미군의 철수 후 비야는 군대를 다시 조직하여 카란사 정부에 저항했다. 1920년 오브레곤은 카란사를 사살하고 지도자가 되었지만 사파타와 달리 비야는 따르는 사람이 많아 무력으로는 제압하기 어려웠고 이에 오브레곤은 비야에게 은퇴를 하면 치와와에 대농장을 주고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비야는 은퇴하게 된다.
그 후 비야는 한가롭게 살다가 1923년 7월 20일 암살된다. 그의 암살은 계획된 것이었는데, 비야가 경호원 없이 외출한다는 것을 알고 아이스크림 장수로 위장한 암살자가 그를 향해 암살 신호를 보내기 위해 "비야 만세!"라고 외쳤다. 이에 그가 답례로 손을 흔든 순간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그에게 총을 쏘았다.
그의 죽음은 배후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 배후자를 비야가 대통령에 출마하면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리라 여긴 플루타르코 카예스(Plutarco Calles)의 소행이라 여겼다. 이와 같은 여론을 반영해, 라 임페르알 지(紙)에 한 사람이 "누가 비야를 죽였지?"라고 하자, 다른 사람이 "입 닥치게, 친구(Calle...se, amigo)"라고 말하는 신문 만평이 실리기도 했다.[4]
비야의 장지(葬地)는 치와와주 파랄(Parral) 시 묘지에 있었다. 이후 1976년 멕시코시티의 혁명기념탑으로 이장하였다. 1926년 비야의 두개골이 도난당했다.
3. 미디어
1968년 미국 영화 《풍운아 판초 빌라(Villa Rides)》(1968)가 있다. 파라마운트에서 배급한 이 영화는 당시 엄청난 제작비를 들였고 율 브리너(판초 비야), 찰스 브론슨[5], 로버트 미첨 같은 호화 캐스팅으로 만들어졌다. 미국 영화인지라 미국이 당시 멕시코에 저지른 더러운 짓은 죄다 생략되었지만 그래도 비야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다. 마지막에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다는 자막과 같이 영화는 비야에 대한 비극적 마무리를 보여주지 않고 끝났다.1969년 한국 제목은 《풍운아 판초 비라》로 서울 관객 집계 16만 7,320명을 기록해 외화 흥행 9위로 꽤 흥행했다. 1992년 1월 2일 새해특선 오후 2시 55분에 방영한 MBC 방영 제목은 《풍운아 판초 빌라》. 양지운 성우가 율 브리너, 로버트 미첨은 김기현 성우가 맡았다.
《인디아나 존스》의 스핀오프 시리즈인 《영 인디아나 존스》에도 잠깐 등장한다. 미국 입장이 상당히 반영되어서 그런진 몰라도, 작중에 등장하는 비야는 취급이 상당히 나쁘다. 그야말로 비야는 명예와 오만에 찌든 부패한 인물로 표현되며, 휘하 혁명군도 말로는 독립을 외치면서도 힘없는 민중을 수탈하는 도적 떼들로 나온다. 아예 작품 속에 수탈당한 한 노인의 입을 통해 "비야나 다른 멕시코 혁명가나 알고보면 다 그게 그놈이다."라는 식으로 묘사된다. 결국 같이 알고 지내던 동료가 작전 수행 중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친구의 복수도 끝낸 인디아나가 동료 레미와 탈출하면서 해당 화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인디아나가 판초 비야 손에서 탈출한 얘기는 훗날 크리스탈 해골을 찾으러 페루에 왔을 때 "스페인어와 잉카 방언을 어디서 배웠냐?"고 묻는 머트한테 들려준다. 물론 머트는 "개소리."라면서 안 믿었다.
2003년에 HBO에서 TV 영화로 제작한 적이 있다. 제목은《And Starring Pancho Villa as Himself》. 판초 비야 역으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등장한다.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 멕시코의 급진사회주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에 사파타처럼 살아 있는 상태로 등장하며, 사파타가 암살당하면 집권시킬 수 있다.
4. 여담
멕시코 혁명의 와중에 지어진 유명한 민요 라쿠카라차에서 판초 비야가 등장한다. 그만큼 판초 비야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걸로 볼 수 있겠다. 멕시코 혁명 당시 토레온 시에서 중국계 이민자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유언비어다. 실제 학살 주동자는 반(反) 혁명파 게릴라 지휘관이었던 벤야민 아르구메도의 만행이다. 비야 본인의 전속 요리사들은 중국인이었고, 황화론과도 거리가 멀었다.다만 나미키파 마을에서 벌어진 집단 강간 범죄를 비롯한 민간인 학살 범죄를 자행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몇몇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런 일들은 반(反) 혁명파에서 날조된 프로파간다라고 하는데, 아무튼 위의 인종 학살 범죄 만큼은 그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미국 작가 앰브로스 비어스는 1913년 판초 비야의 군대에 옵서버 역할로 들어갔다가 실종되었다. 일설에는 스파이 혐의로 판초 비야에게 총살당했다는 얘기가 있다.
[1] 멕시코 스페인어는 'll'을 /j/가 아닌 /ʒ/에 가깝게 발음하므로 판초 비자라 발음하기도 한다.[2] 멕시코 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두 혁명가의 표정이 다르며 관련 일화가 있다.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뒤 비야는 사진에 나온 자리에 앉아 본 후 사파타에게 앉아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사파타는 "나는 이 자리를 원한 게 아니라 토지를 얻기 위해 싸웠다. 우리는 모든 야심을 없애기 위해 그 의자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3] 미국인 18명[4] 출처: 백종국의 멕시코 혁명사[5] 비야의 부하인 실존 인물 로돌포 피에로 (1880년 ~ 1915년)를 연기했다. 영화에서 과격파다운 실존 인물을 잘 연기했다. 정부군 장교 하나가 우물로 달아나자 무표정하게 두레박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밑으로 내려버린다. 잠시 뒤에 으아아아! 소리와 같이 펑 터지면서 물이 잔뜩 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