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앤드루 윌로비 Charles Andrew Willoughby | |
출생명 | 아돌프 카를 바이덴바흐 Adolph Karl Weidenbach |
출생 | 1892년 3월 8일 |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하이델베르크) | |
사망 | 1972년 10월 25일 (향년 80세) |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910~1951 |
학력 |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중퇴 소르본 대학교중퇴 게티즈버그 칼리지 캔자스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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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독일 제국 하이델베르크에서 셰페바이데바흐 남작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출신의 엠마 윌로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남작과의 로맨스가 시들해진 엠마는 열여덟살 된 아들 윌로비와 함께 미국 볼티모어로 돌아왔다. 윌로비는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미군에 징집되었으며, 이후 중사까지 진급했다. 1913년 민간인 신분으로 복귀한 윌로비는 게티스버그 칼리지에 등록해 학위를 취득했으며 1914년에 졸업했다.[1] 이후 교사로 일했다.1916년 장교로 군에 재입대해 1916년부터 멕시코 베라크루스 원정대에 참가하여 판초비야를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1917년 대위로 진급해 1차 대전 유럽원정대 소속으로 서부전선에서 항공 지원대에 지원해 조종사 과정을 수료하고 프랑스 항공대에 배속되어 근무했다.
전쟁 이후에는 항공대를 떠나 지상직으로 복귀했고 포트 베닝에서 기관총 전술교괸으로 있다. 이후 몇 년 동안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주재 미국 대사관의 군무관으로 복무했다. 독일어 악센트가 강하게 섞인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1940년 포트 리벤워스에 있누 지휘참모학교를 졸업한 후 마닐라로 파견되어 맥아더의 병참담당 참모차장이 되었다. 그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는 필리핀 주둔 미군 야전사령관이었다.
필리핀의 맥아더 휘하에서 군수 업무를 담당하는 G-4를 맡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필리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1942년 초 맥아더, 리처드 서덜랜드등 여러 참모들과 호주로 후퇴했고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G-2 책임자가 되어 정보참모가 되었다. 일본 포로를 심문하고 일본계들을 활용한 번역통역국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특수작전까지 일임했다.
문제는 미군 역사상 그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정보 능력이 떨어졌다. 윌로비의 부하였던 연합국번역통역국장 시드니 매시버 대령은 "정보장교로서 윌로비는 없느니만 못했다."라는 평을 하였고, 맥아더도 역시 그의 정보장교로서의 역량을 낮게 보았다. 특작임무까지 못 미더워해 자신의 지인인 코트니 휘트니에게 특작임무를 맡겼다. 이에 윌로비는 항의했고 맥아더는 달래기위해 그를 장성으로 진급시켜줬다.
정보 참모로서의 능력은 꽝이었지만 맥아더에게 숭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아첨을 잘했다. 그에게 정보는 맥아더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이후로도 맥아더가 활동하는 전장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고 전후로도 맥아더의 극동사령부 정보부 소속으로 있었다.
6.25 전쟁당시 도쿄에 에서 참모임무를 수행하며 KLO를 세우는데 기여했으나 장진호 전투를 입안하기도 했다. 1951년 퇴역했으며 1972년 사망했다.
3. 비판 및 논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맥아더의 정보 책임자였던 그는 맥아더에게 사랑스러운 파시스트라 자주 불렸는데, 실제로 윌로비는 매우 인종주의자이면서, 프랑코를 매우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윌로비는 1951년 이후 ‘빌리 제임스 해지스 크루세이드’같은 극우 단체와 긴밀하고 공개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인종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윌로비는 소련 진영을 황인종-범슬라브주의의 역사적 연속이라고 봤으며, 동양과 열대지역의 우글거리는 수백만 명이 연발총을 손에 넣는다면, 러디어드 키플링이 말한 백인은 몰락할 것이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또한 그는 이런 인종주의적 편견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참전을 무식한 중국인 노동자들이 미군 병사를 전멸시키는 전쟁을 수행한다고 인식하며, 백인은 값비싸고 귀하다는 말과 더불어 개탄했다. 더 나아가 1960년대 내내 베트남 전쟁에서 다양한 대량 살상 무기를 베트남인들에게 사용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윌로비는 맥아더와 더불어 숭배했던 인물이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였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23년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랑코가 리프족에 대한 군사작전을 수행할 때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미국의 일본 점령 기간 그는 프랑코의 군사작전을 다룬 개인 소장용 저서인 『바일렌 전투와 스페인의 교두보(Bailen and the Spanish Bridge-head)』를 세금으로 출간했으며, 이를 권장했다. 그리고 맥아더와 함께 도쿄 주재 스페인 및 포르투갈 대사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전쟁 동안 윌로비는 세균전을 자행한 전범인 이시이 시로를 비롯해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비밀리에 계속 접촉했으며, 1950~1960년대 그는 냉전 기간 동안 미국 정보기관에 고용돼 있던 라인하르트 겔렌을 비롯한 전직 나치 장교들과 가까운 관계였다. 맥아더가 해임된 뒤 윌로비는 스페인을 자주 방문했고 미군 기지와 관련해 프랑코와의 협상에 관여했다고 스스로 주장했는데,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ite) 라는 일종의 우익 국제 조직을 만들어 텍사스의 헌트 형제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독일 우익 세력 및 빌리 제임스 해지스 크루세이드 등과 연결시켰다. 윌로비는 헌트 오일의 대리인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모잠비크 연안의 석유 채굴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4. 여담
-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에 능통했으며 독일 억양이 쌘 편이였으나 스페인어 활용으로 필리핀에서 일할 수 있었다.
[1] 이전에 소르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나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중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