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그리스월드 Oscar Griswold | |
본명 | 오스카 울버턴 그리스월드 Oscar Woolverton Griswold |
출생 | 1886년 10월 22일 |
미국 네바다 준주 루비밸리 | |
사망 | 1959년 9월 28일 (향년 72세) |
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 스프링스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910 ~ 1947 |
학력 | 네바다 대학교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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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네바다 준주 루비밸리에서 태어났고 네바다 대학교를 2년간 다니다가 중퇴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10년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 1차 대전 당시 미국 원정군 제84보병사단 소속으로 뫼즈-아르곤 공세에서 공을 세워 전시계급 중령까지 올랐다.전후 지휘참모학교,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하고 1929년부터 전쟁부 참모로 복무했고 육군 항공단에서도 복무했다. 1939년 대령으로 진급해 제29보병연대장[2][3]으로 있었고 당시 새로 창설될 공수부대 장비 시험 연대로 포트베닝에서 공수훈련을 받고 장비를 시험했다.
1940년 준장으로 진급했고 캠프 크로프트의 보병 훈련소장으로 임명되읬다. 1941년 8월 전시계급 소장으로 진급해 제4보병사단장이 되었다가 곧이어 제4군단장으로 승진한다. 1943년 4월 그리스월드는 제14군단장으로 보직되어[4][5]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고 뉴조지아 전역, 부건빌 전역, 필리핀 탈환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고 해군수훈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 4월에 전시계급 중장으로 진급했고[6][7][8]마닐라 전투를 지휘했다. 예하 부대인 제1기병사단, 제37보병사단, 제11공수사단이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으나 마닐라를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오키나와 전투 지휘관이였던 사이먼 버크너가 전사해 더글러스 맥아더는 그리스월드를 총지휘관에 추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후 일본의 항복과 블랙리스트 작전이 발동되고 군단을 이끌고 혼슈 북부에 상륙, 현지의 군정책임자[9]의 잠시 지내다 곧 본토로 귀국, 본토의 근무사령부 (Service Command) 의 사령관[10] 을 중임했다.
전후 원 계급 준장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안 가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7군을 담당하다가 1947년 중장으로 진급 후 퇴역했다. 1959년 자택에서 사망했다.
[1] 동기는 존 밀리킨, 오스카 솔버트, 에밀 F. 라인하르트, 아이라 T. 와치, 어니스트 J. 돌리, 루이스 버튼 등이 있다.[2] 제29연대는 1919년 이래로 전간기 동안 육군보병학교의 교육/시범 부대의 역할을 맡아 신규 교리를 실험하고, 보병학교 입소생들을 훈련시켰고 미군의 초기 공수부대가 창설될 때 기간장병을 제공했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전투부대로 잠시 전환해 유럽과 한국에 파병되어 참전했지만 2024년 현재까지의 나머지 역사에선 여전히 보병학교의 교육부대로 기능 중이다.[3] 당시 제임스 밴플리트 (중령) 가 휘하 대대장으로 있었고 그리스월드와의 친분이 깊었는지 먼 훗날 한국전쟁 후반인 1953년 연초에 밴플리트 (대장) 가 퇴역을 위해 본토로 복귀했을 때 서로 만나서 담회를 나누는 모습의 사진이 구글링에 있다.[4] 당시 태평양 전선에 먼저 배치된 2개의 육군 군단 중 하나로 남태평양해역군 (헐시 제독) 에 배속된 부대였다. 다른 1개는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해역군의 휘하로 있던 제1군단 (아이켈버거)이다. 당시에 태평양의 타 권역 (Ex: 하와이) 에도 복수의 사단이 포진했으나 지역 사령부에서 직할로 통제했다.[5] 전임자가 과달카날 전투를 지휘한 알렉산더 패치 소장으로 건강문제로 본토로 소환되어 잠시 요양 후 제4군단장으로 44년 봄까지 지낸다. 즉 두 사람은 보직을 맞교환했다.[6] 1945년 시점에서 태평양 전선의 현직 군단장 (제1, 9, 10, 11, 14, 24군단) 들 중 가장 먼저 3성장군이 되었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미 육군 중장은 기본적으로 야전군 사령관에 임명될 수 있는 계급이고 (전간기엔 미군의 육군중장 계급이 사문화된 상태였고 1차대전 이후 야전군의 상설화가 1930년대부터 기능해서 소장이 맡다가 2차대전 발발부터 중장급이 담당) 군단장은 대개 소장의 2, 3차 보직으로 대개 사단장을 재임, 중임한 고참 소장이 보직 승진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2차대전 말기부터 주요 지휘관들의 일부가 그간 쌓아온 전공과 위상을 감안해 포상 차원에서 보직을 유지하면서 1계급 씩 진급한 면이 있지만 진급한 계급에 걸맞는 역할과 책임을 할 수 있음이 참작한 면도 있었고 적정 계급의 상향화가 현재까지 이뤄졌다.[7] 한국 전쟁에서 야전군 사령관은 워커를 제외한 리지웨이, 밴플리트와 테일러는 중장 계급에서 임명되어 한국 현지에서 대장으로 진급했고, 군단장들은 임명 시점에선 소장이나 한국에서 중장으로 진급한 사례가 일부 있었고 전쟁 이후 중장급의 고정보직으로 되었다. 냉전기엔 제7군, 제8군 같은 해외에 파병된 야전군들이 미 육군의 전구 사령부와 일체화되어 대장급이 겸임했으나 냉전 종식 후 군축 및 분리개편과 역할 감소 등으로 지휘관이 중장급으로 격하됐다. (현재 야전군으로 존재하는건 미국 본토의 제1군과 한국의 제8군으로 다른 야전군들은 각 전구의 육군 사령부와 육군의 기타 고위 사령부에 일체화 된 상태로 부대의 역사 상으로 계승된 후신 격 조직으로 인식 중이다.) - 걸프전에서 슈워츠코프는 중부사령관으로 본래 전구 지휘를 담당했지만 지상 영역에서 지휘권을 많이 행사해서 그의 활약에 대해 매스컴을 탔으나 미군의 지휘체계 상으로 미군 중부사령부의 지상군 사령부와 일체화 된 미 육군 제3군이 있었고 지휘관 (중부사령부의 육군 사령관)으로 중장 1명이 따로 있었고 그는 현지에 배치된 2개 군단장 (제7군단, 제18공수군단) 의 상급자였다.[8] 그리스월드는 현지의 군단장 중 경력과 활약상으로도 제일 고참이었기 때문에(태평양 전선에서 맥아더 아래로 배치된 미 육군의 고위 야전지휘관들 중 배치 시기와 연공서열 둘 다 3위로, 1위는 월터 크루거 (대장/제6군 사령관, 전구 부임 시점은 1943년 3월), 2위는 로버트 아이첼버거 (중장/제8군 사령관, 전구 부임 시점은 1942년 8월) 이다.)후술되듯이 차기 야전군 사령관 후보로 인식되었다.[9] 1945년 10월 경의 모습으로 아이켈버거와 함께 아오모리 현에 진주한 제81보병사단을 시찰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https://youtu.be/zNjyWUkPMc4?si=FzWTLpMGjPCzFFZJ[10] 전간기 시절 존재한 육군의 군단 관구(Corps Area)를 승계한 체계로 2차대전 중엔 육군 근무군 사령부(Army Service Forces) 의 예하부대로 미 본토를 9개의 구역으로 나눠 구역별 행정/보급을 총괄한 지역별 본부 (군단급)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