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2:49:36

리처드 서덜랜드

리처드 커런스 서덜랜드
Richard Kerens Sutherland
파일:1000128271.jpg
출생 1893년 11월 27일
미국 메릴랜드주 핸콕
사망 1966년 6월 25일 (향년 72세)
미국 워싱턴 D.C.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중장
복무 기간 1916~1946
학력 데이비스&엘킨스 칼리지
필립스 대학교
예일 대학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메릴랜드주 핸콕에서 이후 웨스트버지니아 상원의원이 되는 하워드 서덜랜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웨스트버지니아주 엘킨스에서 성장했고 데이비스&엘킨스 칼리지, 필립스 대학교를 거쳐 예일 대학교 ROTC로 1916년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하지마자 멕시코 국경 원정군에 참가했고 이후 보병으로 전과했다. 1917년 대위로 진급했다. 1차대전 당시 제2보병사단 소속으로 영국 전차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전후 보병학교에서 전술학교관을 맡았으며 지휘참모학교, 전쟁대학을 수료해 전쟁부 참모로 일했으며 1937년엔 중국 톈진에 있는 대대의 대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소령에서 더이상 진급이 막힌 상황이였다. 하지만 더글러스 맥아더가 있는 필리핀 사령부의 참모로 임명되면서 중령으로 진급했고 이후 맥아더의 주요 참모로 활동한다.

이후 빠른속도로 진급하며 1941년 12월 소장까지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필리핀에서 공방전을 벌이자 코레히도르 요새로 옮기고 바탄 전선에서 장병들을 지휘했으나 일본군의 파상공세에 서서히 무너지며 결국은 맥아더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조나단 웨인라이트를 두고 필리핀을 탈출했다.

이후로도 맥아더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했으나 맥아더만을 위한 태도로 인해 타군, 특히 호주군과 육군 항공대에서 불만이 상당했다.[1] 태평양 육군 항공대 사령관 조지 브렛과 상당한 갈등을 일으켰다. 후임으로 온 조지 케니도 서덜랜드의 태도에 상당히 힘들어 했다.[2] 맥아더의 의도를 파악해 공식석상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했으며 이후로도 1943년 케니와 함께 대통령 후보로 기용해달라고 홍보하기도 했다. 서부전선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참모장인 월터 베델 스미스가 중장으로 진급하자 맥아더가 서덜랜드 역시 같은 계급으로 진급해달육군본부에 요청해 중장으로 진급했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이 불만을 품을 정도였고 맥아더에게 붙이려다 만 편지에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부족하다. 자신만 모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혹평을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맥아더와의 사이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호주에 있던시절 영국군 장성의 부인 일레인 클라크와의 불륜으로[3] 맥아더가 대노해 클라크를 쫒아냈고 이에 맥아더에게 말다툼을 했다.

결국 이런 태도로 인해 결국 공공의 적이 되었고 종전 선언당시 미주리함에 있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1946년 중장으로 퇴역했다. 이후 부인에게 불륜을 털어놨고 화해했다. 1954년 부인이 사망하자 재혼했으며 1966년 사망했다.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 전쟁 전부터 맥아더와 육군 항공대와 공군으로의 독립과 관련해 갈등이 있어 사이가 좋지 못했다.[2] 하지만 케니는 맥아더에 의해 적극적으로 기용되면서 친맥아더파로 변모했다.[3] 공식적으로 미군 사병입대는 미국시민으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장교의 규정에는 없었고 이를 이용해 당시 호주 총리 존 커틴의 허락을 받고 클라크를 여군 장교로 임관해 부관으로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했다. 하지만 부사령관 조지프 맥나니에의해 기각되었다. 하지만 편법으로 부관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