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턴 앨버트 프레더릭 스프레이그 Clifton Albert Frederick Sprague | |
출생 | 1896년 1월 8일 |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도체스터 | |
사망 | 1955년 4월 11일 (향년 55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최종 계급 | 미국 해군 중장 |
복무 기간 | 1914~1951 |
학력 | 록스버리 라틴학교 미국해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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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1902년 보스턴 도체스터구역에서 태어났고 1914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고 1차대전 당시 건보트 휠링 소속으로 대서양 호위 선단에 참가했다. 전후 구축함에서 근무하다가 전함 USS 테네시 소속으로 측면 함포장교로 복무했다.1920년 해군 항공 조종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1년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고 두달만에 편대장이 되었다. 이후 대서양 함대소속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1923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해군 조병창에서 테스트 파일럿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항공폭탄, 항공모함 개선에 기여했다.
1928년부터 29년까지 항공모함 USS 렉싱턴 소속이였으며 소령으로 진급한 후 해군사관학교에서 복무했다. 다시 파나마로 돌아가 편대장으로 복무했고 1934년 해군 최초로 하와이에서 미드웨이까지 왕복비행했다. 1936년 USS 요크타운에서 항공대장으로 복무했고 1939년 해군전쟁대학에서 수학했다.
1940년 수송함장이 되었고 1941년 진주만 공습당시 하와이에 있었는데 동축 기관포로 일본군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마이애미에 배치되어 U보트를 상대하다가 1943년부터 태평양 전선으로 배치되어 USS 와스프[1]의 항공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와스프의 함장으로 사이판 전투, 필리핀 탈환전에 참가했다.
레이테 만 해전당시 사미르 해전에서 태피3의 사령관으로 일본군 함대가 갑자기 돌격해오자 침착하게 원형진을 펼치고 구축함, 호위함으로 연막을 쳐 항공모함을 보호했다. 마침 내린 스콜을 활용해 연막을 스콜 주변에 뿌려서 목측식인 일본군 함선의 사격통제장치를 무력화시켰으며 호위 항모는 맞바람 여부를 따지지 말고 전 함재기를 긴급발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프레이그의 빠른 상황판단 덕분에 단시간 내에 함재기들은 한 기의 피해도 없이 전부 무사히 발함에 성공했다. 그리고 호위항모가 보유하고 있는 함재기용 무장은 유폭의 위험이 있으니 전부 바다에 버리라는 과감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 함대는 계속 돌격해왔고 이에 어니스트 에반스를 필두로 한 구축함 전대가 일본 함대에 돌격해 분전했고 4척 중 3척이 침몰되었지만 일본 함대의 피해는 컸고 이에 야마토 전함과 구리다 타케오는 주력함대로 오판해 퇴각을 결정했다.
이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서 근접항공지원을 맡았으며 이후 일본 전역에 폭격을 가하는 태스크 포스를 이끌었다.
종전 후 비키니 섬 핵실험에 참가했고 해군비행학교장으로 임명되었다.1950년 알래스카에 있는 항공대의 사령관을 맡았고 B-29로 북극 상공을 비행한 최초의 미군 장성이 되었다. 1951년 중장으로 퇴역했고 195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여담
- 부인은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여동생이다.
- 사관학교 동기이자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태스크포스 지휘관 중 한명이였던 토머스 L. 스프레이그완 성만 같을 뿐 혈연관계는 아니다.
[1] 과달카날 해전에서 침몰되어 새로 건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