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바트 R. 게이 Hobart R. Gay | |
본명 | 호바트 레이먼드 게이 Hobart Raymond Gay |
출생 | 1894년 5월 16일 |
미국 일리노이주 록포트 | |
사망 | 1983년 8월 19일 (향년 89세) |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중장 |
복무 기간 | 1917~1955 |
학력 | 녹스 칼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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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일리노이주 록포트에서 태어나 녹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1917년 제1차 대전에 미국이 개입하자 장교로 입대해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6개월 동안 서부전선에 있었고 중위로 진급했다. 전후 기병쪽에서 복무하다가 1934년 병참으로 전과했다. 1940년 중령으로 진급했다.1942년 제1기갑군단 조지 S. 패튼의 참모로 카사블랑카에서 활약해 은성훈장을 획득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이후로도 패튼을 따라 제7군 참모장, 제3군 참모장으로 활동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했고 육군수훈훈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 소장으로 진급해 종전을 맞이했고 패튼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동승했으나 다치진 않았다.
패튼 사후 제15군을 1개월간 대리지휘했고 제1기갑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제1기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6.25 전쟁 당시 한국으로 와 존 H. 마이켈리스가 이끄는 제27연대를 다부동 전투에 투입시켰고 인천 상륙 작전당시 상륙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중공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하자 운산에서 전투를 치렀고 중공군에게 포위된 제1군단장 프랭크 W. 밀번을 구출하기도 했다. 1951년 육군수훈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노근리 학살에 대해 비판받기도 했다.
그 해 귀국해 제6군단장으로 임명되었고 1954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제5군사령관을 끝으로 1955년 퇴역했다. 퇴역후 군사학 교수로 지내다가 1983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