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제프 전투 Ржевская битва Die Schlachten um Rschew Battles of Rzhev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날짜 | 1942년 1월 8일 ~ 1943년 3월 31일 | ||
장소 | 소련 러시아 SFSR 르제프와 벨리키예루키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이반 코네프| ]] [[틀:깃발| ]][[틀:깃발| ]][[바실리 소콜롭스키| ]] [[틀:깃발| ]][[틀:깃발| ]][[막심 푸르카예프| ]] | ]][[틀:깃발| ]][[게오르기 주코프|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귄터 폰 클루게| ]] | ]][[틀:깃발| ]][[발터 모델| ]]|
결과 | 나치 독일의 전술적인 대승. 중부전선 안정화[1] | ||
전력 | 210만 명 | 70만 명 | |
피해규모 | 120만 명 사상 | 40만 명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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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2년 1월부터 1943년 3월까지 르제프 및 시쵸프카 전역에서 벌어진 약 14개월에 걸친 거대한 공방전이다. 실제로 르제프는 인구수도 적고 면적도 그리 넓지 않으나, 통칭 르제프 전역은 한반도 남한 영토에 버금갔고, 전선의 최대폭은 450km에 달했다.2. 배경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MG34를 점검하는 소련군
독일 국방군은 1942년, 로스토프 전투와 모스크바 공방전의 패배 이후 공세를 중지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상태를 본 강철의 대원수는 이대로 소련에서 독일 국방군을 모두 내쫓아낸다는 원대한 구상을 했다. 보통의 사령부라면 휴식과 재편성을 명령했겠지만, 소련군 최고사령부 어느 누구도 승리에 도취된 강철의 대원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북서전선군(Северо-Западный фронт), 칼리닌 전선군(Калининский фронт), 서부전선군(Западный фронт), 브랸스크 전선군(Брянский фронт) 등 4개 전선군으로 구성된 200만 명의 대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사실 이 전선군들은 후방에서 신편 또는 재편된 병력이 아닌 기존에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투입된 병력이었다. 즉, 이들은 모스크바 공방전 종료 바로 그 다음날 다시 전투에 동원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대들의 소모도 매우 심했던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전차 215대 분량의 전차 사단에 실제론 15대의 전차 밖에 배속되지 않았으며, 보병 사단 인원도 3,000명에 미치지 않았다.
3. 전개
3.1. 제1차 르제프-뱌지마 공세와 자이들리츠 작전
칼리닌 전선군을 선봉으로 지옥의 전선이 문을 열었다. 칼리닌 전선군은 볼가 강 도하 이후 시쵸프카를 거쳐 브야즈마를 돌파했다. 동시에 서부 전선군이 모자이스크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나머지 북서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또한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모스크바 전투 이후 재정비에 여념이 없었던 독일군의 방어선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 결과 칼리닌 전선군은 비텝스크 일대까지 100km를 돌파해 들어가는 눈부신 전공을 달성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제9군과 제4기갑군에 의해서 소련 제29, 30, 31군이 격퇴당하면서 공세의 동력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는데, 소련군은 진격을 이어가려 했지만 곧 돈좌되어 결국 해당 돌출부를 따라 진지를 건설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독일군 9군과 4군의 일부를 포위하고 있었기에 그 이후로도 독일군 후방에 공수부대까지 투입하여 포위 섬멸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2년 1월 말 소련군의 공세는 한계에 도달했고, 결국 전선이 고착되고 만다.
이런 전황은 후퇴를 요청[2]한 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 상급대장이 해임되고, 신임 사령관으로 발터 모델 기갑대장이, 참모장으로 한스 크렙스 대령이 부임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모델은 다수의 방어진지를 구축해 1차적으로 공세를 버티는 사이, 종심에 있는 최정예 예비대를 신속 투입하는 공세적 방어기동을 구사했다.
그리고 기상 악화로 인해 소련군에 보급 문제가 발생하면서 소련의 공세는 완전히 중지되었다. 2월, 이 상황에서 독일군은 올레니노의 소련 제39군을 압박했다. 이 때문에 29군과의 연결이 단절되면서 39군이 고립되었다. 동시에 유흐노프 일대에 배치된 소련 제33군까지 고립되면서 전황은 소련에게 극도로 불리해졌다. 스타프카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2개 야전군을 구원하려고 했으나 후방교란에 그치고 말았고, 4월에는 33군이 완전히 포위당했다. 항공 탈출을 명령받은 33군 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프는 이를 거절하고 자결을 택했으며, 33군은 완전히 섬멸되었다.
작전의 성공에 고무된 발터 모델은 지금까지의 공세적 방어기동전략에서 나아가 공세를 통한 섬멸을 준비하는데, 이것이 자이들리츠 작전(Operation Seydlitz)이었다. 다만 5월 23일, 파르티잔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은 발터 모델은 수술 후에도 목숨이 위험했으나, 고비를 넘긴 후 6월 16일부터 자택에서 요양하게 되었고 그동안 9군 사령관 대리인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기갑대장이 자이들리츠 작전에서 9군을 지휘했다.
작전의 목표는 올레니노 일대에 위치한 소련 제39군이었다. 당시 39군은 제11기병군단의 분전으로 가까스로 고립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독일 제23군단이 39군의 북부로 치고 들어가면서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후 제2기갑사단이 39군의 우익[3]을 강타하고, 동시에 제46깁갑군단이 레니노로 쇄도해 39군의 남쪽 연결로를 봉쇄해버렸다. 그러면서 독일 제2기갑사단이 소련군의 이동을 완전 차단하면서 소련 제39군은 다시 포위당했고, 결국 7월 12일에 전멸했다.[4]
이로써 6개월간 진행된 소련군의 동계-추계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독일은 병력운용에 약간의 숨통이 틔어 9군의 주력 기갑부대였던 제6기갑사단을 후방인 프랑스 지역으로 돌려서 5호 전차 판터 훈련에 임하게 할 만큼 여유있게 추계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3.2. 르제프-시쵸프카 공세
실선 화살표가 전부 독일군의 공격. 화살표 사이로 소련 제39군이 보인다.6월말, 독일이 청색 작전으로 러시아 남부 전선에 대대적인 공세를 실시하나, 스탈린은 이를 모스크바에 대한 2차 공세로 판단했다. 그래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모스크바와 180여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르제프 지역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7월 30일, 소련의 칼리닌 전선군, 서부전선군의 50만여 명의 병력, 1,700여 대의 전차, 1,000여 기의 작전기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제1차 르제프-시쵸프카 공세를 개시했다. 작전은 칼리닌 전선군이 돌출부의 전면에 조공을 펼치는 사이, 서부전선군이 시쵸프카로 쇄도해 돌출부와 후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칼리닌 전선군의 제30군은 전면을 돌파해 들어가 5km를 전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진격은 둔화되었고, 이 상황에서 폭우까지 내리자 교통이 악화되어 선봉군과 후속군의 간극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돌파 임무를 맡은 소련의 3개 사단이 역으로 고립되는 등 반격을 받게 되자 시쵸프카로 가야했을 서부전선군은 칼리닌 전선군 지원으로 목표가 바뀌게 된다.
8월 5일, 소련의 서부전선군은 독일 제46장갑군단이 지키고 있었던 곳을 돌파하여, 전차군단이 바주자 강 동안까지 진격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 총 10km를 전진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사전 보급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 충분한 도하 장비가 없었던 소련군은 데르자 강에서 멈춰야 했다. 이 도하를 준비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이러는 동안 독일군에게 마침 수히니치에서 온 증원군이 도착했다. 사실 이는 히틀러가 수히니치 공략을 위한 회오리 작전에 투입할 병력이었지만 르제프 일대가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작전을 취소해 르제프에 증원했다. 스탈린만큼이나 히틀러 또한 추후 만약 모스크바를 다시 공격했을 때 그 최선두가 될 수 있는 르제프를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제5전차사단은 소련 제 6, 8전차사단에 공격을 가했고 같은날 증원된 독일 제2전차사단은 카르마노프 부근에서 소련 제20군을 격퇴했다. 독일의 기갑전력에 포위당한 경험이 수없이 많았던 소련군은 갑자기 증원된 전차 사단 앞에서 상당히 위축되었고, 독일의 비팅호프도 역공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바주자 강을 중심으로 전선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었다.
하지만 게오르기 주코프의 눈에 독일 제5전차사단과 제2전차사단의 간극이 벌어진 것이 포착되었고, 공세를 준비시켰다. 그는 예비대인 제5군에게 제8전차 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을 지원하고 해당 공백으로 공세를 펼치라고 지시했다. 8월 6일, 이들은 추가로 5km를 더 전진할 수 있었지만 공세는 다시 한 번 독일 제1기갑사단에게 가로막혔고, 워낙 독일군의 요새화가 철저한 탓에 결국 주코프는 공세를 중단했다. 이 무렵 발터 모델이 부상치료를 마치고 9군 사령관에 복귀했다. 소련군은 소모전 끝에 카르마노프를 점령했으나 피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편, 주코프가 군 총사령관 대리로 영전하면서 이반 코네프가 신임 서부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코네프는 스타프카에 병력과 물자 지원을 요청하면서 2차 공세를 준비했다. 코네프는 작전을 수정해 돌출부의 분리가 아닌 돌출부의 직접 타격을 계획했다. 중앙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코네프는 29, 30, 31군으로 하여금 르제프 전면으로 진입해 포위하도록 하는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강화된 독일군의 방어선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소련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간신히 동부 줍초프와 카르마노프를 연결하는 선을 되찾는데 그쳤다. 결국 10월 1일, 코네프는 공세를 중단했다.
여담으로 이 공세에서 스탈린은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웬델 윌키를 참관시켰다. 영•미연합군으로 하여금 제2전선의 개전을 요구하기 위한 시도였던 만큼 병력과 물량을 대거 쏟아부었으나, 여전히 제병합동전술에 미숙한 면모를 보인 소련군은 30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3.3. 화성 작전
모스크바에서 불과 180km 떨어진 르제프의 독일 제9군을 제거하려다가 선두 부대가 포위당해 괴멸당한 작전으로 소련군은 약 400,000명, 독일군은 약 40,000명의 인적 손실을 입었다. 독일군이 상당히 제한적인 자원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과를 연이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독일 제9군 사령관이었던 발터 모델의 공이 컸다. 그는 상술했듯 "공세적 방어"라는 전술을 즐겨 썼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공세를 벌이는 쪽의 취약한 측면이나 후방에 전력을 집중시켜 역으로 상대를 포위하는 전략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델은 당시 소련군에 의한 화성 작전으로 독일군의 방어선 중 점점 허물어지는 거점이 있으면 즉시 그 부대에 증원을 하는 방식[5]으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효과적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화성 작전은 같은 기간 설계된 천왕성 작전에서 영감을 얻어 주코프의 주도로 이뤄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작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천왕성 작전의 양동 작전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여러 자료들이 공개된 이후에야 이 작전이 비슷한 시기 시행되었던 바실렙스키의 천왕성 작전과는 별개의 작전이었다는 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700,000명의 대병력과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어 양동 공격이라고 하기에는 활용 전력이 터무니 없이 많았다. 그리고 르제프는 양동작전을 펼치기에는 스탈린그라드와 물리적인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양동작전이라고 해도 볼가 강 인근에 진을 치고 있는 B집단군 및 여타 추축군의 전력이 르제프에 투입되지도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살펴 봤을 때 아마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정리함과 동시에 모스크바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르제프 돌출부도 노렸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마디로 천왕성 작전과 화성 작전의 실체는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전 전선에 걸쳐서 대반격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화성 작전은 실패했지만 천왕성 작전이 성공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스탈린 뿐만 아니라 주코프, 바실렙스키와 같은 소련의 명장들도 지나친 낙관론에 빠져 코카서스에 진을 치고 있었던 독일 A 집단군 전체를 포위 섬멸하려고 하다가 독일군의 뛰어난 기동방어와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전선은 한번 더 소강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스탈린은 절대 르제프에 관심이 없지 않았다. 당시 소련의 선전매체에서는 스탈린이 항상 일선에서 장성들과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처럼 나왔지만 그는 항상 모스크바의 크렘린에 있었고, 독일이 모스크바를 다시 치려고 할 때 공세 시작 1순위가 될 것이 자명했던 르제프 돌출부는 그야말로 이 크렘린의 독재자에게 눈엣가시였다. 실제로 소련군은 모스크바 전투 이후 쉴새없이 르제프를 몰아쳤고, 청색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독일의 주력이 남쪽의 코카서스 지방을 향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다시 노릴 것으로 판단하며 그 공세의 시발점이 르제프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리고 여담으로 당시 스탈린은 영•미 연합군에게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열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던 때였는데 이때 미국과 영국의 외교관들 및 여러 기자들을 데리고 르제프를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스탈린이나 스타프카에게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화성 작전은 소련의 진심이 담긴 공격이었을 공산이 매우 높다.
1942년 9월과 10월에 걸쳐, 스탈린그라드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르제프 방면 소련군의 대공세에 관하여 독일군은 정보 기관마다 그 예측이 다르고, 내용이 몇 번이나 번복되는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발터 모델과 9군 정보참모 분트록 중령은 감청과 항공 정찰, 소련군 포로의 진술 등을 통해 11월 25일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하지 못하자 모델은 무한궤도 군용 바이크로 매일 최전선을 오가며 주요 방어 진지를 보강하고,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이를 기반으로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 물자를 요청했다.
11월 25일 새벽,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 방면에서 동시에 진격하면서 화성 작전(Операция Марс)이 개시되었다. 서부전선군의 20군과 31군이 르제프 남부로 돌입하고, 칼리닌 전선군 중 39군이 르제프 전면을 강타하며 진입했다.이들 3개 군은 시쵸프카에서 집결한 이후 뱌즈마까지 진격해 나갔다. 그런데 눈과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상실한 소련군 20군 포병대의 서전 포격은 아군의 진격에 방해가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은 반면,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후방 진지로 물러나있었고, 독일군 포병과 라이플은 방어 진지에 의해 제한된 소련군의 돌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 전선군은 첫날에만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2개의 전차여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
칼리닌 전선군의 22군과 41군은 벨리에 위치한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며 쇄도해 들어갔으나 41기갑군단장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선봉 부대들의 합류를 저지했고, 통신이 두절되자 발터 모델은 직접 벨리 전선으로 와서 지친 전투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하는 동시에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12, 19, 20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 이에 힘입어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 부대들을 각개 포위하여 섬멸시켰다.
주코프와 코네프는 공세를 강행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이들은 모델의 주특기인 포병 집중 운용(HArko 307- Higher Artillery Command 307)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여기에 모델이 직접 지시한 슈투카 폭격까지 더해지며 20군과도 단절되어, 고립되고 말았다. 아르님은 증원 기갑 부대가 도착한 11월 29일에 이미 공세로 전환하여,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했다.
마침내 12월 14일 늦은 밤, 주코프가 정식으로 작전 중지를 지시하여 소련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간신히 확보한 탈출구에서도 HArko의 집중 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예하 기갑척탄병의 맹공이 가해졌다. 결국 화성 작전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40,000명을 기록했으나 소련군은 8배가 넘는 33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정예 전차군단 6개가 와해되었으며, 85%의 전차 손실(1852대)에다가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해야만 했다.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천왕성 작전과 유사한 계획이었음에도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은 미끼 역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왕성 작전의 경우 제62군이 말도 안되는 선전을 보이면서 독일 제6군을 스탈린그라드 도심에 붙잡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화성 작전의 경우, 미끼 역할을 할 대상을 설정하지 않고 병력만 쏟아 부은 것이었다. 게다가 1년 이상 유지된 전선 상황으로 독일군의 방어선이 너무나도 두터웠고, 결국 소련군의 전진은 멈추고 말았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히며 현대 전사학계에서 르제프 공방전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3.4. 들소 작전과 종결
이러한 제9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국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해야 했다. 소련이 다시 공세를 시작해서가 아니라 장장 200여 일간 펼쳐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엄청난 소모와 참패에 의해 독일군 수뇌부는 전선을 단축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고, 현지 사수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히틀러조차 군부의 제안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만큼 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독일군에 대한 충격이 컸던 것이다. 실제로 그때의 상황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상황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력이 약화된 상황이었고, 당시 자신들의 역량을 벗어난 무리한 공세를 시도한 스탈린과 스타브카가 상황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볼 만큼 전선의 균형추가 소련에게 급격히 기울어진 상황이었다.1942년 가을부터 르제프 돌출부에서의 철수를 주장해왔던 발터 모델은 휘하의 독일군 350,000명과, 독일군에 협조적이었던 현지 주민 60,000명을 200km 후방에 구축될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시켰다. 소련군에게 자신들의 철수 사실을 모르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명령은 유선 전화기를 통해 전하거나 구두로만 전했다.[6]
들소 작전은 1943년 3월 1일에 개시되었으며, 3주 동안 대규모로 후방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며, 후에 눈치채고 르제프에 도달했을 때는 독일군이 미리 설치해둔 온갖 부비트랩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독일 중부집단군은 500km에 달하는 울퉁불퉁한 전선을 300km로 대폭 축소시킴과 동시에 20여 개의 사단을 예비대로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의 대패 이후 급격히 소련 측으로 기울어져 가던 전황을 어느 정도 반전시킬 수 있었지만 훗날 히틀러는 이 병력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하다가 패배하므로 사실상 전쟁의 승패가 이미 결정나게 되었다. 총 인원 약 500,000명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옮긴 이 들소 작전은 현대전에서 가장 훌륭한 철수작전으로 뽑히기도 한다. 지금도 독일연방군 사관학교에서는 이 들소 작전을 사관생도들에게 가르친다.
4. 결과/영향
쌍방 병력 300만명이 넘고, 사상자만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부전선을 중점적으로 다룬 전사 서적을 제외하고는 종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전투이다. 러시아는 21세기에 이른 현재에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문서를 외국인 학자들에게 비공개하고 있다. 르제프 전투의 패장인 주코프 또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고, 단지 천왕성 작전을 위한 양동 작전이었다는 식으로 서술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전후 기간 내내 르제프 전투의 참전 용사들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지금도 르제프 전투를 중점적으로 다룬 서적은 많지 않다.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의 패퇴 이후 독일의 주공이 중부집단군에서 남부집단군으로 바뀌면서 전사상 남부 전선에만 집중하는 면이 적지 않았으며, 소련 입장에서도 모스크바 공방전처럼 히틀러의 주공이었으며, 전쟁에서 조국을 지켜낸 결정적인 전투가 그득그득한 남부 전선을 더 많이 홍보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하지만 르제프 전역은 1941년에 가혹한 패배를 맛본 독일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분쇄하고, 1943년 중순까지 전선을 굳건히 유지했다는 점에서 매우 그 가치가 높다. 르제프 방어전이 실패했다면 독일군은 1942년에 남부가 아닌 중부에서 돌파구로 밀고 오는 소련군에 대한 저지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전사학자인 데이비드 글랜츠가 지적했듯이 소련군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중장비와 압도적인 병력, 베테랑 장군들이 대거 포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주코프가 1년에 걸쳐서 패전을 거듭했기 때문에,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르제프 전투는 널리 알려지지 못하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전사학계에서도 재조명되고 있다. 반면 당시 소련군 참전 군인들에게 르제프는 르제프 고기분쇄기로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악몽 같은 전투였다. 이 표현은 현대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결국 르제프는 2007년, '명예 군사 도시'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르제프에서 위대한 방어를 펼친 업적으로'라는 표현에 르제프 전투의 생존자들과 후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전쟁 당시 독일군 9군 예하 제6보병사단장이었던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이 1962년에 발표한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는 1년 여의 르제프 전투에 관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본 서적에서 그로스만 장군은 서문에서부터
독일군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탁월한 지휘력과 헌신이 방어전의 승리를 이끌었다.
고 서술했으며, 본문 또한 사령관으로서의 모델의 지휘를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들소 작전까지 마무리지은 뒤 최종장에 <Generalfeldmarschall Model>이라는 제목으로 모델의 군 경력 및 르제프에서의 다양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르제프 전투에서 발터 모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예이다.5. 미디어
상술하듯 르제프 전투는 규모와 중요도에 비해 동시기 다른 전투보다 인지도가 낮아 오랫동안 매체에서 다루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러시아에서 르제프 이고르 카피로프 감독의 영화 <르제프>[7]가 2019년 12월 5일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1942: 언노운 배틀>이라는 이름으로 2020년 7월 29일 개봉했다.#[1] 단 이 르제프 전역의 완승은 독일 국방군 중부집단군으로 하여금 러시아 내부로 깊게 치고 들어가는 등의 전황을 크게 바꾸는 역할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독일 입장에서는 방어작전이었고,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서 공세의 형태를 빌린 것이니 만큼 그다지 유효한 지적은 아니다.[2] 사실 후퇴해 전선을 정비하는게 올바른 선택이었다.[3] 지도상으로는 남쪽[4] 산발적인 저항은 7월 말까지 이어졌다.[5] 심지어는 최정예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조차 갈기갈기 찢어 전략적 거점에 투입했을 정도로 유연한 전술을 구사했다.[6] 나중에 발터 모델은 이런 방식으로 아르덴 대공세때, 동부전선 방어에 투입된 최정예 전력 200,000명을 연합군 몰래 집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오마 브래들리 장군조차 처음에는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했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을 정도였다.[7] Рже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