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4:50:02

팔레즈 포위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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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독일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의 공군 및 지상군.

1. 개요2. 배경
2.1. 오버로드 작전2.2. 뤼티히 작전2.3. 토털라이즈 작전
3. 전개
3.1. 트렉터블 작전
4. 의의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Falaise pocket

오버로드 작전 기간 중인, 1944년 8월 12일~21일까지 팔레즈 계곡에서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로 인해 독일군은 10,000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50,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다수의 기갑사단을 상실하게 되어 북프랑스에서 패배해 물러나게 되었다. 동시에 이는 노르망디 상륙에서부터 시작된 연합군의 절대군주 작전(Operation Overlord)에 마침표를 찍는 승리였고,[1] 더 나아가 연합군에 의한 파리 해방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후에 진행된 용기병 작전(Operation Dragoon)과 함께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을 해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2.1.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자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수개월 전부터 이어진 기만 작전으로 독일군은 상륙 지점을 오판했고, 또 연합군의 기습적이고 대대적인 상륙으로 독일군은 혼란을 빚고 있었다. 노르망디에서의 상륙이 연합군의 주공임을 독일군의 지휘관들이 깨닫게 될 즈음에는, 효과적이고 즉각적인 상륙지점에 대한 반격을 통해 해안교두보를 걷어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3일만에 들어선 멀베리항은 연합군의 보급선을 두껍게 유지시켰고, 이미 그 주변은 요새화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었다. 제공권은 확고하여 독일 기갑군의 기동을 크게 제한시켰고 동시에 그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힌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황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상륙 시점인 1944년 6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연합군은 북프랑스 특유의 지형인 보카쥬(bocage)와 생목울타리(hedgerow), 그리고 이를 이용한 독일군의 방어 및 지연전술 말려들어 상륙지점 인근 내륙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으며,[2] 1개월을 조금 넘는 기간동안 사상자는 12만명에 이르고 있었다. 독일군의 사상자도 비슷하기는 했으나 이는 그다지 위안거리가 되지 못했다. 어찌됐든 연합군은 해안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이에 연합군은 하나의 타개책을 구상한다. 코브라 작전(Operation Cobra, 25-31 July 1944)은 독일군의 방어선 우측 끝단을 영국/캐나다군이 굿우드 작전을 통한 힘겨운 진격을 통해 밀어내고 도시 캉(Caen)의 일부 지역을 확보한 점을 이용하여,[3] 독일군을 그쪽으로 한차례 끌어낸 뒤, 오마 브래들리 지휘하의 미 제 1군이 안 그래도 얇아진 데다가 또 연합군의 집중된 항공폭격으로 너덜너덜해진 독일군 방어선의 좌익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코브라 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드디어 상륙지점을 중심으로 고작 수마일 뻗어 있었던 일종의 포켓을 탈출하여, 북프랑스 지역을 해방시킬 실질적인 교두보를 확보하게된다. 7월 30일, 미군은 패튼이 곧 펼치게 될 프랑스 횡단의 시작점인 아브랑슈(Avranches)[4]를 점령함으로써 좌측의 브로타뉴 반도와 우측의 중부 프랑스로의 공격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2.2. 뤼티히 작전

파일:Location_map_of_Cotentin.svg.png
코탕탱(Cotentin) 반도의 주요 도시. 모르탱(Mortain)은 비르(Vire) 남쪽 24km지점 정도에 위치한다.[5]

코브라 작전과 스프링 작전(Operation Spring),[6] 그리고 그 직후에 이루어진 블루코트 작전(Operation Bluecoat)[7] 으로 노르망디의 독일군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단지 몇 개의 SS 사단 만이 버티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대대적인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이 한창이었다. 노르망디로의 보충은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미군의 선봉을 강력한 기갑부대로 몰아쳐 바다로 밀어내기를 원했다. 구체적으로는, 코브라 작전으로 미 제 1군에 의해 상실한 아브랑슈를 포함한 지역을 회복하여, 브르타뉴(Brittany)까지 진출한 패튼의 제 3군을 포위ㆍ섬멸하기를 바랬다. 이에 1944년 8월 2일, 히틀러는 클루게에게 모르탱부터 아브랑슈까지의 즉각적인 반격을 명령한다. 클루게는 그 공격은 가망이 없으니 대신 캉 남쪽의 온전한 방어선을 중심으로 센강까지 노르망디의 독일군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 4일, 히틀러는 다시금 공격을 명령했고 이는 확고하여 거스를 수 없었다. 히틀러는 클루게에게 공격에 필요한 모든 전차와 야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지만,[8]상황이 날이 갈수록 악화됨을 느낀 클루게는 더 나빠지기 전 가능한 이른 시기에 공격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8월 7일, 뤼티히 작전(Operation Lüttich)이 시작된다. 계획대로라면 당시 노르망디에 있었던 9개의 기갑사단중 8개가 동원되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야 했는데, 시간을 맞춘 것은 고작 4개 뿐이었고 결국 이들만을 이용해 공세에 나선 것이다.[9] 이들의 목적은 모르탱부터 아브랑슈까지의 적을 섬멸하여 코탕탱 반도의 서해안까지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로서 해당 진격루트의 남쪽에 위치한 미 제 3군은 고립되고, 코브라 작전과 그 이후의 작전에서의 성과는 없던 것이 된다.[10] 공세는 8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에 시작되었고, 이윽고 날이 밝아온다. 울트라 작전으로 공세정보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던 연합군의 공습과 사전조치로, 공세 자체는 13일까지 이어졌음에도 뤼티히 작전은 사실상 시동 이후 24시간 이내에 실패하고 만다. 이로서 미 제 1군에 의해 독일군의 가장 강력한 잔존 병력이 궤멸당하고, 독일군의 상황은 절망적으로만 흘러가게 된다.

2.3. 토털라이즈 작전

파일:Totalize.jpg
캉(Caen)부터 Quesnay 까지는 대략 22km, Quesnay 부터 팔레즈까지는 대략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토털라이즈 작전은 캐나다 제 1군(First Canadian Army)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팔레즈 갭에 대한 공격으로, 성공 여부는 다소 말이 갈린다. 우선 해당 문서가 주로 참고하는 영문 위키에서는 캐나다군의 목표가 "캉 남쪽의 독일군의 방어를 뚫고 내려가 팔레즈 북쪽의 고지를 점령하여 포위망을 좁힌다" 로 서술하는데, 일각에서는 이들의 목적을 "팔레즈를 넘어 남하, 아젱탕(Argentan)까지 진출하여 포켓 남쪽에서 아젱탕을 향하는 미군의 15군단(XV Corps)과 합류하여 포위망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말한다.[11] 전자를 따를 시 해당 공세는 성공적으로 포위망을 좁히고 이후의 트렉터블 작전(Operation Tractable)에 있어서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 작전이었고, 후자를 따른다면 연합군으로부터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를 시몬스(Guy Granville Simonds) 등의 캐나다군 지휘관은 이런저런 지혜를 짜내며 임했으나[12] 결국 독일군의 기동방어에[13] 좌절되고 포위망은 동쪽으로 후퇴, 더 많은 독일군이 포켓을 빠져나갈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한 작전이었다.

어느쪽이든지 연합군은, 캐나다군의 기계화보병을 앞세운 8월 7일의 토털라이즈 작전으로 에서부터 팔레즈 방향으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캐나다군과 자유 폴란드군이 주축이 된 이 작전으로 2개 기갑사단이 독일군의 배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위치까지 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곳을 방어하던 독일군은 10여 개 사단이었으나, 7월부터 지속적인 연합군의 공세[14]로 탈탈 털린 상태라 기동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위치도 좋지 못했다. 참고로 이 캉-팔레즈 방향 공세에서 전차 에이스미하엘 비트만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15] 그래도 독일군은 방어자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압도적인 열세에서 연합군을 상태로 잘 버티고 있었으나 이 공세작전으로 간간히 버티던 독일군의 군세를 꺾는데는 충분했다.

히틀러의 망상과는 달리 갭 안쪽의 독일 제 7군은 연합군의 포위망이 닫히고 있음을 즉시 알아챘다. 갭 남쪽에서는 조지 S. 패튼의 3군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귄터 폰 클루게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이 처한 위험을 알리려고 했지만, 전술했듯이 불과 3주 전의 히틀러 암살 미수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던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태였다. 8월 15일, 클루게는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연락이 하루 종일 두절되었는데 히틀러는 그가 B 집단군을 이끌고 항복을 한다고 의심하여 발터 모델로 사령관을 교체하고, 클루게는 결국 음독자살했다. 심지어 롬멜은 이전부터 히틀러와의 면담을 금지당했고, 더군다나 후퇴 및 연합국과의 협상을 권고하는 전문 모두 총통 비서실장이었던 보어만에 의해 전부 잘렸다.

파일:ZKEw6xr.jpg

3. 전개

3.1. 트렉터블 작전

파일:Operation_Tractable.svg(1).png

이 와중에 독일군은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개 사단 중 이미 8개 사단은 사실상 해체 상태였으며 무장친위대 4개 기갑사단의 전차를 전부 합쳐도 100대도 못 채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패튼의 3군단은 아래서부터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팔레즈 포켓 안에 고립된 독일군은 항공기들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는데, 이는 포위망에 갇히자 방공부대들의 보존을 위해 이들을 먼저 빼버린 이유도 컸다.

남은 건 후퇴였다. 제12 히틀러 유겐트 기갑사단이 21일까지 퇴로를 열어두는 동안 독일군 30,000여명이 간신히 탈출했다.[16] 하지만 10,000명을 넘는 사망자와 남은 50,000에 육박하는 독일군은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후퇴의 어려움엔 빈약한 도로 사정도 한몫 했다. 포위망 자체가 좁혀지면서 우회로가 막혀 한정된 길에 병력들이 모이는 병목 현상이 빚어진데다가, 그 한정된 길도 간신히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오솔길이 대부분이었다. 위의 기록화처럼 하천을 건너는 다리가 자그마한 돌다리 수준인 경우도 많았다. 좁은 길에 많은 병력이 몰리면서 타이푼선더볼트 등의 연합 항공기들의 좋은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4. 의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이 작전까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잃은 전차는 1,300여 대나 되었으며, 56개 보병사단 중 15개 사단이 증발했다. 특히 서부전선의 부대들은 팔쉬름예거, SS기갑척탄사단 등 지휘부의 혼란속에서 2개월 넘게 압도적인 연합군을 저지하고 있었던 최정예 사단들이었으나 이 팔레즈 포위전에서 최정예 부대들은 궤멸하고 탈출에 성공한 부대들도 갈갈이 찢겨 조직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영국해협 항구들을 사수하라는 무리수는 서부전선의 숙련된 병사들과 많은 기갑장비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이후 독일군은 마켓 가든 작전때까지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신병들의 1선화와 동시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이 포위전에서 무려 70,000명의 정예군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독일군은 발터 모델이 동부전선의 정예부대를 긁어모으는 마켓가든 작전 때까지 전력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북아프리카에서 130,000명의 정예병이 히틀러의 고집으로 삭제된 것의 재탕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40년의 프랑스 전격전과는 달리 전차는 더 이상 독자적인 공격 수단이 되지 못함이 명백해졌다. 보병들은 전차를 보고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았으며, 독일군의 기갑사단들은 연합군의 보병 및 전차 간의 연계[17]를 뚫지 못했다. 역으로 조지 S. 패튼은 이 공세에서 마치 전격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기동을 선보였고, 성공시켰다.

5. 대중매체에서

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캠페인의 마지막 미션에서 미군 시점으로 독일군을 포위하고 확장팩인 테일즈 오브 밸러의 캠페인에선 독일군의 시점으로 탈출을 엄호한다. 콜 오브 듀티 3에서는 아예 캠페인 전체가 팔레즈 포위전을 다룬다.

서든 스트라이크 4의 연합군과 독일군 캠페인에서 다룬다. 연합군은 캐나다군 기갑사단 시점으로 탈출하려는 독일군의 측면을 박살내며 포로 노획 및 수색섬멸 작전을 펼치는 미션이고[18] 독일군 시점 캠페인은 연합군의 우주방어 라인에 틈을 만들어 추후 말 그대로 떼같이 바글바글 플레이어의 병력들을 잔혹하게 분쇄시키고 남김없이 찢어버리고 유린하기 위해 저 너머 맵 양방향에서 몰려오는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막을 수도 없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무지막지한 떼물량의 끝도 없는 영연방군, 폴란드 서부군, 미군 기갑사단의 공포의 해일과 공중에서 심심하면 내리꽂아오며 기총과 로켓, 융단폭격을 마구마구 쏴제끼는 강철비의 지옥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공포의 화신이자 저승사자같은 지긋지긋한 야보와 폭격기(연합군 호출 공격기인 호커 타이푼/연합군 호출 폭격기인 아브로 랭커스터)들을 피해 단 하나뿐인 북쪽 지역의 탈출로로 보병이든 기갑이든 연합군의 물량을 막기 위해 운용했던 티거, 판터, 티거 2, 4호 전차, sd,kfz.251 등의 무거운 차량을 내던져버리고 실제 역사적 고증처럼 맨몸으로 부리나케 걸음아 나 살려라 하는 마인드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잘못해서 뻘짓하다 잡았다 요놈을 시전하며 무지막지한 화력을 퍼붓는 맹수와도 같은 연합군 병력 앞의 양으로 전락시키지 말고 쌔빠지게 얌전히 몸만 내달려야 한다.[19]


[1] 작전의 종결 자체는 파리 해방을 기점으로 하나 팔레즈에서의 전투가 사실상 독일군의 최후의 저항이었기 때문이다.[2] 이론상으로 독일군은 전차 한 대와 약간의 보병 및 대전차포로 구성된 진지만 있다면, 한 줄로 진격해야만 하는 난점을 지닌 연합군의 전차를 몇 대든 막아낼 수 있었다. 진격로는 곧 대전차화력과 대보병 자동화기의 킬 존으로 변했고, 연합군은 소규모 보병부대로 하여금 생목울타리를 뚫어서 우회하어 잡목에 의해 차단되는 시야를 이용해 전차의 측후면으로 접근, 격파시키도록 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극복 시도는 항공폭격과 야포에 의한 화력지원을 통해 이루어졌고 , 이들은 독일 기갑군의 이동을 제한하는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엄폐된 진지를 상대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기에, 진격은 느려졌고 피해는 커져만 갔다.[3] 사실 이 Operation Goodwood를 포함한 캉 전투(Battle for Caen)는 이렇게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의 대대적인 공세였다. Operation Perch, Operation Epsom, Operation Charnwood, Operation Goodwood의 일련의 작전은 캉에서의 독일군을 밀어내고, 전략적 요충지였던 캉을 점령하기 위한 연합군의 혈전이었다. 캉으로 흘러들어오고, 또 뻗어나가는 도로 네트워크들은 향후의 북프랑스에서의 연합군의 진격의 핏줄이 되어줄 것이었고, 그 주변은 가설 비행장으로서 적절했다. 비록 코브라 작전에서는 조공의 성격이 강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순서상 그리 된 것이지 이쪽도 엄연한 주공 중 하나였다는 얘기다.[4] 당시 독일의 서부전구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미군이 아브랑슈를 점령하게 되면 그들이 덤불(보카주 지대)로부터 빠져나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다고 경고했다. -《타임라이프 2차 대전》 전집에서 발췌[5] 정남쪽은 아니고 살짝 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6] 코브라 작전에 대한 양동으로서 캉 방면의 독일군을 강하게 압박하여 코브라 작전이 시행될 독일군 방어선 좌익단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기 위한 캐나다군의 공세였다. 자체적으로 Verrières Ridge와 해당 능선(ridge) 남쪽의 마을을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양동으로서는 성공적이었으나 작전 자체는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는 식으로 종결되었다.[7] 코브라 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독일군은 방어병력의 일부를 빼돌려 이들의 성취를 없던 것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뤼티히 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코브라 작전으로 생긴 돌파구를 뚫고 내려와 브르타뉴로 진격하는 미 제 3군을 코탕탱 반도에 위치한 미 제1군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다수의 기갑사단이 공세 병력으로서 차출되고, 방어선은 상대적으로 느슨해진다. 독일군 제 2기갑사단 또한 이들 공세의 주축 중 하나였는데, 해당 사단이 전선에서 차출되어 생긴 구멍을 신속히 치고 들어가 전략적인 가치를 지니는 지형인, 비르로 이어지는 교차로와 Mont Pinçon 고지를 점령하고자 이루어진 공격이었다.[8] 히틀러는 공격을 진행하기 전에 3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한다고 했는데, 클루게가 이 작전을 믿어야 하고, 그가 노르망디의 각 전선에서 전차를 끌어모아 효과적인 타격군을 구성할 수 있어야하고, 작전은 철저한 기습공격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디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9] 이들은 각각 제116기갑군단, 제2기갑사단, SS 2기갑사단, 그리고 SS 1기갑사단의 일부병력이었다.[10] 일단은 이후의 플랜도 있기는 했는데, 방향을 북쪽으로 전환, 코탱탕 반도의 미 제 1군을 섬멸하며 노르망디 해안 교두보(beachhead)까지 진출,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낸다는 것이 그 계획이었다. 이를 두고 P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Battlefield>에서는 '범죄적으로 야심찬 공세(criminally ambitious offensive)'라고 평한다.[11] 여담으로 공세가 8월 7일에서 8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작전시기를 8월 8일부터 9일까지로 서술하는 곳도 있고 7일부터 9일까지로 서술하는 곳도 있다.[12] 스프링 작전에서의 보병과 야포지원만으로 이루어진 공세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봤고, 굿우드 작전으로부터는 대규모의 항공폭격이라도 전선 뒷쪽에서 간접사격을 통해 지원하는 독일군의 포병을 갈아버리기에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행군속도가 느린 일반 보병은 전차부대의 진격을 따라가지 못해 그들을 지원하지도, 그들이 뚫어낸 돌파구를 온존ㆍ확대시키기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전훈을 끌어내 '기계화 보병(mechanized infantry)' 주도의 공세안을 구상해낸다.[13] 여기서는 전략 측면의 본 의미가 아닌, 작전술 측면에서의 빠른 진지 변환등을 통한 방어를 의미한다.[14] 굿우드 작전, 블루코트 작전, 코브라 작전 등[15] 누가 비트만을 잡았는지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영국군 또는 캐나다군의 파이어플라이의 공격으로 인해 전사했다는 설이 정설이다.[16]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후미를 지키면서 연합군의 공세를 지연시켰다. 이 와중에 캐나다 육군 포로를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을 지휘한 쿠르트 마이어 장군은 "포로들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밝혀져 이 일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17] 보전합동전술, 더 큰 차원에선 제병협동술이라고 부르며 현대의 모든 군대는 당연히 주기적으로 훈련을 하고 있다. 다만 그동안 기술과 교리 발전으로 제2차 세계 대전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18] 이 미션에서 처칠 전차크롬웰 전차, 연합군 미션 2 파트인 헤지로우 전투에서 미군 기갑사단에 2기가 지원왔던 셔먼 파이어플라이 전차를 사용해 볼 수 있다. 각각 몸빵용, 탱커+보병 처리용, 전차전용 포지션으로 공수주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다용도용, 전차전용, 중전차 저격용이라 생각하고 적재적소에 잘 굴리고 컨트롤해가며 잘 무장된 차량화보병진과 함께 운용하며 독일군을 격파해나가자.[19] 이 미션에서 처음 시작하면 몆 번 정신없이 움직이면 연료가 간당간당하는 티거 1대와 판터 1대, 몆줌 없는 기갑척탄병 분대들이 기본 시작 병력으로 등장한다. 시작부터 잘 정비된 보병전차(중전차) 와 순항전차, 대전차자주포 부대로 구성된 기갑부대들과 대전차화기와 박격포까지 충실하게 갖춘 중무장한 M3 하프트랙에 탑승한 차량화보병으로 이루어진 캐나다군의 제병협동 부대를 빵빵하게 주는 연합군 시점 미션과는 다른 현실고증 그 자체인 초라한 병력 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