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4:38:13

카이로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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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미국 영국 중화민국
영어 Cairo Conference
중국어 開羅會議

1. 개요2. 배경
2.1. 연합군의 승기와 루스벨트의 4강 체제 구상2.2. 태평양 전역의 종결작전 구상의 필요성2.3. 일본의 대동아회의 개최
3. 사전 진행
3.1. 미중 사전 교섭3.2. 미소 사전 교섭3.3. 회담 예비 의안의 작성3.4. 3국 수뇌들의 도착
4. 회담 진행
4.1. 11월 22일4.2. 11월 23일4.3. 11월 24일4.4. 11월 25일4.5. 11월 26일4.6. 11월 27일
5. 반응과 결과6. 영향7. 여담8. 참고 문헌9. 관련 문서
9.1. 참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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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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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의 장소인 메나하우스 호텔의 현재 모습

1943년 11월 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있었던 미국, 영국, 중화민국 등 주요 3개 연합국 수뇌들의 회의. 이집트 왕국카이로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독립이 결정지어진 회담으로 한국에서도 그 연구와 논의가 활발하다. 여기에서 나온 선언이 바로 카이로 선언이다.

2. 배경

2.1. 연합군의 승기와 루스벨트의 4강 체제 구상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5월 아프리카 방면에서의 승리, 9월의 이탈리아 항복으로 1943년부터 연합국의 승리가 차차 점쳐지게 됨으로 미국에선 전후 처리 문제와 대일 작전을 놓고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의 연합을 구상하게 되었다.

1943년 8월 퀘벡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미영소중 4개국이 중심이 된 전후 국제평화기구의 수립을 처칠에게 건의하여 그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소련은 9월 헐 국무장관이 루스벨트의 4강 체제를 전달하자 몰로토프 외상이 즉석에서 중국은 4강의 하나로 나서는 것이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헐은 중국의 6년 간의 항일 실적을 지적하면서 '전후 중국은 아시아에 있어 중요한 강국이 될 것이다. 긴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중소 양국이 평등한 지위에 서면 양국 상호관계는 반드시 개선될 것이다'라고 설득했으나 소련은 요지부동이었다. 10월 19일 전후 유럽 문제 논의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회담이 개최되자 미국은 여전히 4강 체제론을 고집했고 이를 위해서는 3국 외상회의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해도 하는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섰다. 영국의 이든 외상도 미국의 전후 국제조직 설립을 위한 4강 선언 구상에 동의했고 중국도 차후에 이를 보고받고 동의했으나 소련은 여전히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의 중국배제론에 극력 반대하고 4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회의의 무산도 감수하겠다고 나서자 결국 몰로토프도 10월 26일 중국의 참가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물러섰고 10월 30일 4강 선언이 채택되기에 이르면서 전후에 미영소중 4개국을 중심으로 하는 루스벨트의 전후 구상은 열강의 합의를 얻기에 이르렀다.

2.2. 태평양 전역의 종결작전 구상의 필요성

전후처리와 별개로 태평양 전략의 필요성도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 이후 미국은 Twin Axis 전략이라 불리는 전략을 채택했는데 이는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남서 태평양 사령부에 주력하여 뉴기니에서 필리핀으로 나가는 전략과 미합중국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어니스트 킹 제독이 주장한 대만과 필리핀에 대한 해상공격을 공격을 통해 중태평양을 통제하여 일본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전략이 대립하자 루스벨트가 양자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둘다를 채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 등에서 연합군이 모두 승기를 잡은 반면 중국 전선은 버마에서 조지프 스틸웰 장군이 패퇴한 후 진전되는 양상이 없었고 유일한 육로인 버마 루트의 단절로 험프라 불리는 공중 항로에 의존하는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험프 로드는 일본 항공기의 공격과 기상조건의 험난함으로 인해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고 이러한 위험 요인을 배제하더라도 공수 자체가 대량 물자 지원에 적합한 수단은 아닌지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북버마의 육상 보급로 개통이 필연적으로 여겨졌으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의 거점으로 중국이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인도로의 개통을 통한 중국에 대한 물자 공급이 필요했다.

문제는 이러한 버마 루트 개통의 방법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는 점이다. 스틸웰은 1942년 7월 버마 전역의 탈환을 제안했고 중미영 3국은 이에 대한 협의를 이어나갔다. 1943년 1월 모로코 카사블랑카 회의에서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과 해군작전부장 킹 제독이 영국에 랭군의 상륙작전을 포함한 애나킴 작전의 실행을 요구했다. 영국은 이에 대해 유럽공략계획에 필요한 주정이 부족하다고 반대했으나 미국은 태평양 전역의 상륙용 주정을 사용하면 된다고 반박함에 따라 1943년 11월 15일 버마 반격의 개시가 결정되었지만1943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트라이던트 회의에서 영국 군부는 애나킴 작전에 반대하면서 1944년 겨울이나 1945년 봄에 유럽 전역이 종결되면 시행할 것을 제시했다. 미국은 1943년 안에 버마 작전을 개시하고자 했으나 카사블랑카 회담 때보다 입장이 후퇴하였다. 미국 14항공대 지휘관 클레어 셰놀트는 중국 지상군보다는 전략공군을 건설해 일본군을 공격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루스벨트가 셰놀트에게 동조하면서 합참에 공중수송을 지시하였다. 스틸웰은 북버마 육로의 개설과 중국 본토의 일본 육군 축출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트라이덴트 회의는 랭군 상륙작전 등이 빠진 북버마에 대한 지상작전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작전은 1943년 우기에 실행되기로 하였다.

버마에 대한 영미의 확실한 군사개입을 주장하곤 했던 장제스는 이러한 결론에 만족하지 않았고 쑹쯔원은 루스벨트에게 "랭군에 대한 작전이 실시되지 않고 중국을 구원하기 위한 작전이 아니라면 장제스는 버마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달했다. 1943년 8월 중순 처칠과 루스벨트는 중국으로 이어지는 지상도로의 확보와 공중항로를 개선시킨다는 원론적인 합의에는 도달하였으나 구체적인 작전을 위한 어떤 합의도 도출하지 않았다. 결국 구체적인 종결 전략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버마 작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도 카이로 회담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2.3. 일본의 대동아회의 개최

이것은 중국에게 적용되었던 문제에 해당한다. 1943년 11월 6일 시게미쓰 마모루 신임 외상의 주도 하에 일본은 일본의 동맹이라 쓰고 괴뢰국이라 읽는 대표들을 도쿄에 모아 대동아 회의를 개최했다. 시게미쓰는 미국과 영국이 1941년에 발표한 대서양 헌장을 의식하여 이에 대항하는 전쟁 이념을 세우기 위해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권의 대표, 태국, 필리핀, 버마, 인도 임시정부 대표들을 초청하였지만 태국은 불참했고 어전회의 결과를 통해 제국 영토로 결의된 인도네시아 대표는 처음부터 초대받지 못했다. 이 대동아회의에서 대동아공동선언이란 것이 채택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미국과 영국은 자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타 국가와 타 민족을 억압하고 특히 대동아에 대해서는 마음껏 침략과 착취를 행하여 대동아 예속화의 야망을 키워 결국에는 대동아의 안정을 근저부터 뒤집으려고 했다. 대동아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대동아 각국은 서로 연계하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미영의 질곡에서 해방시켜 그 자존자위를 완전하게 하고 대동아를 건설하여 세계 평화의 확립에 기여할 것을 기약하는 바이다.

대동아 건설의 강령으로 공존공영의 질서, 자주독립, 호조돈목의 대동아 친화, 인종적 차별 철폐가 열거되었지만 말만 그렇고 일본은 연합국을 쫓아내고 차지한 아시아 점령 지역을 지배하고 수탈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서양 헌장 첫머리에서 제창된 바가 있는 영토 불확대라는 원칙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미국이나 영국은 일본이 뭔 삽질을 하든 관심 없었으나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대표가 참석했단 이유로 대동아회의에 대적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3. 사전 진행

3.1. 미중 사전 교섭

루스벨트가 장제스를 직접 만나고 싶어한 것은 카이로 회담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올라갔다. 1942년 10월 26일 루스벨트는 쑹메이링을 미국으로 초청하면서 장제스의 방문도 희망한다고 전했다. 11월 16일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자신과 만나는 것처럼 만나 솔직담백하게 외교문제를 논의해 달라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1943년 5월 19일 미국을 방문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미국 국회 연설에서 루스벨트와 함께 스탈린, 장제스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연합국 수뇌들 간의 회담 가능성이 차차 점쳐지기 시작했다. 1943년 6월 4일 루스벨트는 쑹쯔원 외교부장과 버마작전에 관한 회의를 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연합국 4대 강국 회의를 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앞서 장제스와 단독으로 회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상당히 만족스러워했지만 6월 7일의 전보를 통해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이는 아직까지 일본과 완전히 결렬하지 않은 스탈린을 만나는 것이 껄끄러웠을 뿐더러 지금껏 미국과의 외교를 쑹쯔원과 쑹메이링에게 의존해온 터라 자료가 부족하여 미국의 의도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3년 6월 30일 루스벨트는 중국국민정부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 장제스 앞으로 직접 전보를 보내 '이번 가을'에 만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면서 '두 나라 수도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 장제스는 7월 4일에 이 전보를 받았고 귀국한 쑹메이링에게서 상세한 보고를 받음으로 미국의 의도에 대해 확신하여 7월 8일 루스벨트의 회담 요청을 수락하기에 이른다.

7월 8일 장제스는 '9월 이후'에 만나면 좋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보냈고 회담을 앞당길 필요가 있을 때에는 중국 측이 중국을 떠나기 2주 전에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7월 21일 장제스는 쑹쯔원에게 전보를 보내 '9월 이후'가 적합하다고 한 기존 입장을 번복하진 않겠으나 만약 루스벨트가 8월과 9월 사이에 회담할 계획이 있다면 이를 15일 전에만 알려주면 수용할 수 있다고 함과 동시에 알래스카에서 회담하자고 한 제의를 거부했다. 이는 알래스카에 가기 위해서는 시베리아를 경유해야 하는데 스탈린과 미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고 소련을 경유하는 것은 '국제간에 불리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제스의 의도를 쑹쯔원은 해리 홉킨스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에게 전달했다. 1943년 8월 14일부터 8월 24일에 걸친 퀘벡 회담이 열리자 홉킨스는 쑹쯔원에게 "만약 대통령이 아프리카로 가서 위원장과 회담을 못하게 되면 위원장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회담할 수 있느냐"라고 문의했다. 장제스는 8월 21일 전보를 통해 '대국적으로 이로울 것이 없으며 손해를 입는 것'이라는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으며 루스벨트와 이미 아프리카에서 회담하기로 결정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10월 13일 루스벨트는 특사 패트릭 헐리를 파견하여 장제스에게 '중국과 영국은 동아시아에 관한 자신들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들의 정책을 토론에 부칠 수 있다. 미국은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큰 감동을 받아 루스벨트를 '성실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며 '기사도와 고귀함이 숭고함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칭송했다. 이와 별개로 장제스는 소련의 태도를 문제삼으면서 소련이 장기적으로 중국의 적화와 병탄을 기도하여 경계심을 풀 수 없다며 이를 루스벨트에게 전달해 달라고 헐리에게 요청했다. 헐리는 스탈린이 이미 세계적화라는 기본정책을 포기했다면서 장제스를 안심시키려 했다. 헐리는 6시간 동안 장제스와 회담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고했다.
  1. 장 주석과 중국 인민은 민주, 자유라는 원칙에 찬동하고 있다.
  2. 장 주석과 중국 인민은 공산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3. 장 주석은 루스벨트는 당연히 민주와 자유에 찬동하고 있으나 연합작전을 위해서는 잠정적으로 제국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와도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다.
  4. 장 주석은 장래의 연합국의 합작과 단결은 서로 다른 사상을 지닌 국가를 함께 이끌고 나갈 루스벨트의 능력에 달려 있으며 루스벨트는 자유로운 활동 속에서 4강이 일치하여 동의할 원칙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한편 스탈린과의 교섭에 실패한 루스벨트는 10월 28일 장제스에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11월 20일에서 11월 25일 사이에 만나자고 통보했으며 10월 30일 처칠과의 논의 끝에 장제스에게 다시 전보를 보내 11월 26일 카이로 근처에서 처칠과 만날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11월 1일에 전보를 받은 장제스는 11월 2일 답전을 보내 이를 수락했다. 이 시기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미영소 3국 외상회담에서 미국은 중국 대표가 포함된 3국 선언이 발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국을 기쁘게 했고 덕분에 미영중 3국 회담의 논의는 더욱 급진전되었다. 1943년 11월 8일 루스벨트가 회담 일정을 최종 통보하였다. 장제스에게 자신이 2~3일 안에 북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며 11월 22일 카이로에서 처칠과 함께 만날 것을 제안했고 자신이 스탈린과는 별개로 만날 것도 알렸는데 장제스는 11월 9일 답전으로 스탈린보다 자신을 먼저 만나 달라고 요구했다. 11월 10일에 루스벨트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3.2. 미소 사전 교섭

한편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제의를 하기에 앞서 스탈린에게도 제의를 보냈다. 루스벨트가 구상한 것은 중국과의 단독 교섭이 아닌 미중영소를 아우르는 4대 강국 회담이었기 때문이었으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축을 담당하는 스탈린과도 회담하여 전쟁의 진행 방향에 대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1942년 12월 루스벨트는 그와 처칠과 북아프리카에서 함께 만나고 싶다고 처음으로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12월 6일 전쟁 지휘를 위해 소련을 떠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1943년 5월 5일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회담을 또다시 제의했지만 스탈린은 회담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전쟁 지휘를 구실로 거절했다. 퀘벡 회담이 끝난 후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다시 스탈린에게 3자 회담이 필요하단 전보를 보냈으나 스탈린은 회담의 중요성에 찬성하나 국가를 떠날 순 없다고 다시 답장했다.

1943년 9월 4일 루스벨트는 11월 15일부터 12월 15일 사이에서 북아프리카에서 처칠과 함께 회담하자고 제의했고 스탈린은 9월 8일 회담시기는 동의하지만 이란에서 회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역제안했다. 9월 9일 루스벨트는 회담 시기는 11월 말로, 장소는 테헤란보다 가까운 이집트를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자신에게 안전한 테헤란을 고집했다. 이에 관해 루스벨트는 쑹쯔원을 통해 장제스에게 3가지 사항을 질의했다.
  1. 이 기회에 중국은 소련과 회담할 용의가 없는가?
  2. 소련이 만일 대일작전에 참가하면 중국은 그와 합작할 수 있는가?
  3. 미국의 태평양정책과 '징검다리 전술'에 대해 중국은 찬성하는가?

장제스는 1번은 시기미숙이며 2번은 군사상 합작할 용의가 있고 3번은 찬성한다고 대답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중소 회담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스탈린이 테헤란을 고집하고 장제스가 스탈린과의 회담을 거듭 거부하면서 결국 스탈린, 장제스가 함께 모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10월 14일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헌법상 대통령이 상시연락이 되지 않는 장소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카이로에서 회담하자고 제안했다.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 회담이 열렸는데 미국은 쿠릴 열도의 소련 할양을 제안하며 소련의 대일 참전을 요구했으나 몰로토프는 회답을 유보했고 10월 30일에 이르러서야 대일 참전을 헐 국무장관에게 전했다. 한편 스탈린은 회담 장소에 대해서는 10월 19일 테헤란 외에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10월 25일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전보를 보내 스탈린의 고집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면서 "만일 가 (테헤란을) 고집한다면, 귀하본인은 북아프리카 혹은 피라미드에서 소수의 막료를 동반해 회합을 하고 우리들의 회담이 끝날 무렵 3일간 장제스 위원장과 회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결국 스탈린을 카이로 회담에 데려오는 것을 포기하고 3국 정상회담으로 양분했다. 스탈린과는 별개의 회담인 테헤란 회담에서 만나는 것이 확정되었고 루스벨트는 11월 8일 스탈린에게 11월 26일이나 27일 테헤란에 가서 처칠과 회담하기로 결정했다고 전보를 보냈고 스탈린은 11월 10일에 이를 수락했다.

3.3. 회담 예비 의안의 작성

각국의 이익 확보에 관여된 문제이니만큼 각각의 입장이 대변된 여러 예비 초안이 작성되었다. 먼저 미국은 카이로로 가는 전함 아이오와에서 11월 12일부터 11월 20일까지 회담 준비에 착수하여 유럽전선과 대일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11월 15일과 19일 양차에 걸쳐 실시된 합동참모회의에서 중영소 3국과 협의할 의제가 정해졌고 11월 15일의 회의에서는 처칠과 회담하기에 앞서 장제스와의 단독 회담이 열리기로 결정되었다. 11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의 의제가 협상국별로 나뉘어 토론되었는데 대중국 의제로 소련의 대일전 참여에 대한 태도, 북버마 작전에 대한 중국 지원의 중요성, 전후 중국의 일본 점령에 대한 참여 문제, 군사 및 해군기지의 상호원조에 관한 사항이 있었으며 영국 의제로는 동지중해, 발칸 전선 참여여부, 소련 의제로는 미군의 소련기지 사용을 포함한 전략폭격 협력이 논의되었는데 중국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중국 역시 큰 기대감을 품고 상세한 예비의안을 작성했다. 중국은 1943년 11월 14일 본격적으로 회담에 착수, 군사위원회, 국방최고위원회, 스틸웰 휘하의 중국군구가 각각 의안을 작성했다. 국방최고위원회와 군사위원회는 전후처리 문제를 다루었고 스틸웰이 대일작전문제를 다루었다. 군사위원회는 대일반정전략 설비 및 극동의 여러 문제에 관한 토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 접수해야 하는 조항, 전후의 중요문제를 다루었다. 이중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관련하여 군사, 정치, 경제, 기타 방면의 문제가 논의되었고 전후 중요문제로는 세계평화유지 문제가 포함되었는데 일본의 무조건 항복 조건으로 바로 중국의 영토 반환과 한국의 독립이 포함되었다. 국방최고위원회는 전시군사합작, 전시정치합작, 전후중미경제합작을 요구했다. 이후 전시정치합작에서 역시 한국과 인도의 독립보장과 전후 연합국의 협력 유지가 언급되었다. 다만 중국 영토 반환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스틸웰은 카이로 회담에 앞서 <향후 회담에 관한 군사방면의 건의안>을 장제스에게 제출했는데 이는 중국군을 90개 사단을 축소하여 정예화시키자는 주장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자신만만했지만 중국의 사정상 불가능했고 이미 독일 고문들에게 비슷한 제의를 받아 실시해보고자 했던 장제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어쨌거나 중국의 관심은 오로지 대일작전에 관한 것이었다. 중국의 제반 문제들은 다음과 같았다.
갑: 전략방면 제안
1. 버마 반격에 있어서의 해, 육군 동시 출동의 총 계획.
2. 중미영 3국 연합참모회의의 설립.
을: 정치방면 제안
1. 동북, 대만, 팽호의 중국으로의 반환.
2. 한국의 전후 독립 보증.
3. 태국 독립의 보증과 인도네시아 반도 각국 및 화교의 지위.
병: 전후에 있어서의 유력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준비한다.
정: 일본의 투항 및 처리에 관한 계획안.
무: 중미 경제합작 제의.
기: 미국에 대한 대여물자에 관한 제안.

추가로 홍콩, 구룡, 티벳 등 영중 영토문제의 현안을 거론하는 것을 회피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영국은 11월 10일과 11월 18일 두차례에 걸쳐 참모회의를 개최했는데 소위 오버로드 작전이라 불리는 유럽대륙의 상륙작전 수행 문제가 그 핵심이었다. 중국이 대일작전에 관심을 기울였듯이 영국도 유럽작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후일 영국은 미국, 중국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다.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장제스의 참석으로 우리가 우려했던 일이 지금 실제로 일어났다. 슬프게도 영국과 미국 참모들의 대화가, 길고 복잡할 뿐 중요하지도 않은 중국 이야기 때문에 산만해져 버렸다. 더구나, 나중에 알게 되듯이 인도-중국 지역에 대해 과장된 견해를 취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곧 장제스 총통과의 지루한 대화에 갇혀 버렸다. 우리가 테헤란에서 돌아올 때까지 '장제스와 그의 아내를 설득하여 그들이 피라미드 관광이나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하려는 모든 희망이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 카이로에서는 중국 문제가 가장 말단이 아니라 가장 우선적인 지위를 차지해 버렸다."

3.4. 3국 수뇌들의 도착

회담 준비를 전적으로 준비했던 영국은 카이로에서 회담하는 것이 결정되자 주 이집트 영국대사관을 통해 구체적인 회담 장소 물색에 들어갔다. 회담 장소는 카이로 시내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메나하우스 호텔로 결정되었고 호텔 본관에서 회담이 진행하기로 되었다. 각국 정상과 그 수행원들은 주변 별장에서 투숙하기로 결정되었다. 메나하우스 호텔 수비를 위해 보병 1개 여단과 500개의 대공포가 준비되었다. 루이스 홀리스가 접대와 경계 업무를 맡았다. 1943년 11월 11일, 미국 측이 가장 먼저 출발했으며 가장 늦은 11월 22일 오전 9시에 도착했다. 영국은 11월 12일 출발해 11월 21일 오후 3시에 도착하였다. 중국 측은 가장 늦은 11월 18일 출발했는데 이는 국민정부 주석 린썬이 사망함으로 11월 17일에 린썬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장제스가 거기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가장 빠른 11월 21일 오전 7시에 카이로에 도착하였다. 회담 직전, 루스벨트가 독일군의 공습을 우려하여 회담 장소를 카이로에서 수단의 카르툼으로 교체하는 것이 어떻냐고 처칠에게 제안하였으나 처칠은 회담 장소에 대한 영국의 방위를 확신했으므로 11월 21일에 카이로에서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회답했다.

제일 먼저 카이로에 도착해 휴식하던 장제스에게 주 이집트 영국 대사가 찾아와 처칠이 카이로에 도착했으며 5시 30분에 그를 방문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이에 장제스는 주인이 손님을 찾는게 아니라 손님이 주인을 찾는 것이 예의라고 고집하여 직접 처칠을 만나러 갔다. 처칠과 장제스의 회견은 30분 동안 지속되었고 서로 여행 경로와 소요 시간을 적은 쪽지를 교환했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이집트의 역사는 6천년인데 중국의 역사는 어느 정도 되냐고 물었다. 장제스는 4600년이라고 대답했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스탈린을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장제스는 없다고 했다. 이어 처칠이 소련이 곧 대일전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는데 장제스에게 이에 대해 찬성하냐고 물었고 장제스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처칠은 이번엔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약화되고 있는 조짐이 보이느냐고 하자 장제스는 공중전에서는 그렇다고 했다. 장제스가 던진 질문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독일에서 내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였다. 처칠은 이에 대해 보수적으로 추정하며 게슈타포는 효율적이고 나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도 답변했으나 연합국의 공습으로 독일인들의 생활 여건이 열악해졌다고 했다. 처칠은 장제스와의 회견에서 '이번에 나는 장제스를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그의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한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고 장제스는 '처칠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일찍이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보다 좋았다.'고 1943년 11월 21일자 일기에 썼다. 11월 22일 처칠이 장제스를 답방했고 쑹메이링의 안질에 대해 문안하며 자신의 주치의를 보내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처칠은 자신의 대표단에 400명의 전문가가 있으며 중국은 물론 인도에 관해서도 광범위한 주제로 토론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처칠은 자신의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서 장제스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침착하고, 겸손하며, 유능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로서는 그때가 권력과 명성을 최고로 누리던 시점이었다. 미국인들의 눈에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비쳤다. 그는 "새 아시아"의 투사였다. 일본 침략에 맞선 견고한 방패였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미국 정계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가 세계 네번째 열강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전망과 평가는 훗날 모든 사람들이 내팽개쳐버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장제스의 권력이나 중국의 장래성 평가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당시 중국의 총통이 그와 같은 자신에 대한 광범위한 명성을 드높이게 된 공동의 대의에 대해서 여전히 공헌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뒤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조국에서 쫓겨났다. 아주 애석한 일이었다. 이제 총통그의 아내는 이전에 그를 찬미했던 자들로부터 부정부패의 반동주의자로 간주되지만, 나는 그 기념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4. 회담 진행

4.1. 11월 22일

회담의 첫 일정은 오후 3시 메나하우스에서 미영 2개국 연합참모회의, 오후에 루스벨트 숙소인 알렉산더 커크 주 이집트 미국 대사의 별장에서 3개국 정상회의, 8시에 미영 정상들의 만찬회동, 9시에 미영 정상이 배석한 미영 예비회의였다. 미국은 중국 측도 참석하길 기대했으나 중국 측은 루스벨트 숙소에서 장제스와 루스벨트의 역사적 첫 만남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곤 참석하지 않았다. 이유는 장제스가 22일 오후 9시에 조지프 스틸웰 장군과의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스틸웰은 장제스와의 약속을 생까버리고 혼자서 예비회의에 참석해버렸다(...). 결국 22일의 예비회의에서 중국의 입장은 배제된 상태로 미영의 의견대로 회의의 일정이 결정되었다. 결정 사항은 11시에 중국 측에 통보되었다.

4.2. 11월 23일

11월 23일 오전 11시, 루스벨트의 숙소에서 3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미영중 본회의가 열렸다. 맨 먼저 루스벨트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면서 중국의 참가 의의에 대해 강조했다. 이어 마운트배튼이 버마 작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처칠과 장제스가 자신의 의견에 대해 개진함으로 본격적으로 카이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당연히 중요 문제인 군사 문제가 거론되었다. 주로 동남아시아의 대일작전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이 버마 작전이었다. 장제스는 일본의 주요 작전 지역은 버마, 화북, 만주라면서 버마 작전이 중요하다고 주장, 육해군의 공동작전이 버마 작전의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버마 작전에 관심이 없던 처칠이 장제스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둘간의 마찰이 벌어졌다. 처칠은 육군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버마 전역의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으며 영국의 해군병력이 버마로 집결하는 시기에 대해서도 회피했다. 마운트배튼은 대놓고 장제스 때문에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일기에서 비난했다. 루스벨트는 이중에서 장제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장제스에게 2,3개월 안에 벵골만에서 응분의 육해공 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외에 유럽 전선 문제도 부차적으로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그날 공식일정에 따라 오후 1시 30분에 미영 2개국 정상의 오찬회동, 2시 30분에 메나하우스에서 미영중 3개국 연합참모회의, 저녁 8시에 미중 2개국 정상의 만찬회동이 열렸다. 장제스와 루스벨트는 11시까지 토론을 계속했고 이는 처칠이 표현한 '대화에 갇힌 시간'이었다. 이날의 주요 주제는 정치문제였다. 장제스는 미영소중 4개국 또는 연합국의 기구 설립에 관한 문제, 과도 기간의 국제 안전에 관한 문제, 독일의 투항에 관한 문제, 극동에 관한 문제 이렇게 4가지 주제를 염두에 두고 루스벨트를 만났다. 장제스는 먼저 루스벨트에게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제안해달라고 제의했다. 이에 루스벨트와 장제스는 '원만한 대화'를 해나갔고 3가지 사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일본이 약탈한 만주, 타이완, 팽호 제도 등의 중국 영토의 반환, 일본이 강점한 태평양 영토의 독립, 그리고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중국 공사(公私)산업의 중국 접수였다. 이 중에서 중국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중국 공사산업을 접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루스벨트는 즉각적으로 동의했으나 한국의 자유와 독립 재건 문제에 관해선 어떻게 할 것인지 차후에 중미 양국이 조율하여 '한국 인민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외에도 두 사람은 여러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는데, 장제스는 일기에서 자신이 전후 일본인들이 전후 자국의 국가체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자고 루스벨트를 설득했다고 한다. 루스벨트는 천황제의 폐지 여부에 대해 장제스에게 물었고 장제스는 일본 국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즉 일본의 천황제 존치 여부를 일본인들의 손에 맡기자고 주장했고, 그것을 루스벨트가 수용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소련 공산주의 문제는 장제스 자신이 '소련 사람들을 깊이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보적인 입장을 드러냈음에도 루스벨트의 의견을 자신이 수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오키나와는 추후 국제적 신탁통치 하에 두기로 했으며 조선과 더불어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추구했다. 그리고 뤼순 항구의 경우에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중이 공동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의 전쟁배상금 문제[1], 신장성 문제,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 중미 연합 참모본부 등의 의제가 다뤄졌다. 한편으로 루스벨트는 중국에 더 지도적인 위치를 주문했지만 장제스는 그런 위치는 미국이 맡아야 한다고 거부함으로 둘의 대화는 이상한 교착 상태에 빠졌었던 모양이다. 회담 이후 장제스는 회담에 대해 11월 23일의 일기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장제스와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지만, 그와 만나곤 기대했던 이미지와 달라 실망했던 모양이었다. 11월 24일 아침 앨리엇 루스벨트가 카이로에 도착해 아버지를 찾아보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침대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앨리엇 루스벨트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루스벨트는 흥분하여 '많은 일이 있었다'고 두 번 반복했다. 그는 피라미드와 테헤란 회담 개최를 확인하는 스탈린의 전문을 말했으나 장제스에 대해서는 장제스와 만났다고 할 뿐이었다. 앨리엇이 장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루스벨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고 한다. 레이 황 교수는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실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의 실망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장제스 총통은 가까운 거리에서 볼 때 카리스마가 거의 없었다. 그에 대한 전설은 주로, 오랜 역사의 나라와 거대한 민중을 이끌어 위대한 모험에 나서도록 하고 고달프고 지루한 인내의 시험을 통과하도록 만든 그의 초인적인 의지력으로부터 생성된 것이었다. 이것을 제외하면 그는 아무런 마법적인 힘도 갖고 있지 않았고 어떠한 기적을 낳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루스벨트 대통령이야말로 장제스의 기적이었다. 장제스의 위대함을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람을 역사의 전체 맥락 속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 맥락에서 벗어난다면 그의 존재와 그의 지적 능력 -힘 있고 진솔하지만 폭이 좁은- 은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할 것이다.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와 무미건조한 어휘는 그가 새로운 친구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딱딱한 태도는 타오를 것같은 열정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던 루스벨트에게 거의 매력이 없었다. 다른 한편, 장제스 총통은 자신의 모든 말을 쑹메이링에게 전달시켜야만 했는데 이는 그에게 거의 이익이 되질 못했다. 이미 루스벨트는 그녀를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372~373페이지.

이와 별개로 처칠과 마셜 간의 만찬이 저녁에 거행되었는데 자세한 시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제스와 루스벨트의 회담이 끝난 후 루스벨트는 만찬에 동석했던 해리 홉킨스 특별보좌관에게 장제스와 합의를 본 사안을 반영하여 즉시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그 덕분에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와 중국의 영토 반환이 거론되게 되었다.

4.3. 11월 24일

오전 11시 미영 2개국 정상이 배석한 가운데 미영 연합참모회의가 거행되었다. 미영 연합참모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영국 측과 논의하며 중국이 "의심할 여지 없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야망을 갖고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미영은 카이로 선언에 3국에 영토 야심이 없다는 구절을 넣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안은 다음날 중국 측에 전달되었다.

12시 30분에는 장제스와 마셜의 오찬 회동이 있었고 2시 30분 메나하우스에서 미영중 3개국 연합참모회의가 열렸다. 장제스는 마셜, 마운트배튼 등과 회담했고 처칠과도 만났다. 오찬 전에 처칠은 장제스를 데리고 지도실을 구경시켜주며 버마 공격의 시간과 전함 및 상륙선의 대체적 숫자에 대해 알려주었다. 장제스는 처칠에게 상륙작전이 언제 있을 것인가를 물었고 처칠은 5월까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장제스는 대단히 실망했다. 오찬 이후 처칠은 다시 장제스를 데리고 여러 전구의 육해공 작전에 대해 설명했는데 장제스는 이에 대해 '새로울 것이 없었다'고 했지만 열성적으로 대화했다. 처칠은 버마의 수륙공동작전을 펼칠 목표 지점이 대화 주제에 오르자 더 이상 정확하게 말하려 하지 않았고 이에 장제스도 더 이상 묻지 않으며 처칠을 '앵글로색슨 혈통의 성격을 완벽하게 갖춘, 영국식 교육을 받은 실용주의 정치가'라고 평가하며 '그의 깊은 사고와 넓은 비전은 신중함, 확고부동한 신념과 함께 오늘날 정치가들 가운데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이날 장제스는 루스벨트와 오랜 시간 '비공식적 토론'을 하였고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서 매우 솔직하게, 모든 것을 쏟아냈던 모양이다. 루스벨트는 중국전구에 대해 연합참모회의에서 가진 4시간의 회의에서보다 더 많은 걸 알았다고 했다. 장제스가 자신의 의도를 어떻게 전달했는진 모르지만 루스벨트는 다음날 앨리엇에게 "장제스의 군대는 전혀 싸우고 있지 않다. 신문에 인쇄되는 보도와 달리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장제스의 변명이 이해는 가지만 군대에 필요한 훈련을 하는데 스틸웰을 밀쳐낼 이유도 없고 공산당에 대항하여 서북에서 대규모 전부 부대를 유지할 이유도 없다고 불평했다. 레이 황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상식적으로 볼때, 중국군에 대한 사실 그대로의 설명은, 쑹쯔원이 전달했든 아니면 장제스가 직접 설명했든, 그토록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또한 최선을 다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주려는 계산에서 나왔음에 틀림이 없다. "전혀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가 말하려던 것이었을 수는 없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상황을 잘못 설명했음에 틀림이 없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374~375페이지.

그리고 24일 오후부터 카이로 선언의 초안이 본격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의 숙소에서 해리 홉킨스가 어떠한 참고서류도 가지지 않은 상태로 초안을 구술했는데 이는 그가 전날 저녁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회동 때 논의된 사항을 숙지하고 있어서 가능했다. 홉킨스가 구술하면 앨버트 코넬리어스 육군 준위가 이를 타이프라이터로 받아적었고 이렇게 홉킨스 초안이라 하는 공동성명 초안이 완성되었다. 홉킨스는 이를 루스벨트에게 제출하여 그의 감수를 받은 다음에 11월 24일 오후 4시, 루스벨트 수정안이라 하는 수정안을 중국 측에 전달했다. 홉킨스는 먼저 쑹메이링을 만난 다음에 왕충후이와 선언문 내용을 논의하였다. 홉킨스는 왕충후이에게 수정 의견이 있으면 다음날 아침 회의 때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왕충후이는 밤에 이를 중국어로 번역, 장제스에게 제출했다. 장제스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펑후 열도로 수정해야 한다는 것 등의 내용을 지적한 다음에 선언문 초안의 전문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장제스가 지적한 오가사와라 제도 이야기는 홉킨스 초안이나 루스벨트 수정안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왕충후이의 번역문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선언문 채택 과정 등에 있어서 중국과 미국 측의 기술이 차이를 보이는 점이 여럿 있다. 당장 위에 나온 처칠-장제스 오찬 얘기만 봐도.... 일단 아래는 홉킨스의 초안이다.
우리는 우리의 잔인한 적(brutal enemy)에게 바다, 육지, 상공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할 결의를 가지고 있다. 이 압력은 이미 진행 중에 있다. 이 지역에서 우리가 공동공격을 개시할 때, 장소와 규모는 지금 밝힐 수 없지만 일본은 그 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점령해 온 태평양의 여러 섬은 일본에서 영구히 빼앗고 일본이 중국에게 신뢰를 저버리고 훔친(so treacherously stolen) 만주, 대만과 같은 영토는 당연히 중화민국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결단했다. 우리는 한국 인민들을 기만하는 예속(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에 유의하고 일본의 항복 후 최대한 빠른 시점에 한국이 독립하고 자유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결단했다.
우리는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격렬하고 결연한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 세 나라는 일본의 무조건 항목을 얻어내기까지 함께 싸워나갈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홉킨스 초안, 와다 하루키의 카이로 선언과 일본의 영토문제에서 재인용.

4.4. 11월 25일

이날은 추수감사절이었다. 하지만 미국 측 대표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날 오전 홉킨스는 루스벨트의 첨삭을 받아 2차 초안을 구술했다. 루스벨트의 지적으로 '이 지역에서~지금 밝힐 수 없지만'이란 문장은 삭제되고 '일본에게서 영구히 빼앗고'란 문장은 '영구히 빼앗겠다고 결단했다'라고 수정되었다. 또한 '일본인이 폭력과 탐욕으로(by violence and greed) 취한 모든 정복지(conquered territory)는 그들의 마수(clutches)로부터 해방된다'는 문장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에서 '적당한 때에(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되었다.

10시 반에 캐도건이 홉킨스로부터 루스벨트 수정안을 받았고 중국 측에 이것이 먼저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캐도건은 '문장은 나쁘지만 내용은 괜찮아 보였다'고 평가한 다음에 이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2] 중국과 달리 영국은 초안에 불만이 많았는데 이는 초안에 온통 아시아 얘기만 있을 뿐, 영국에 이득이 되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at the proper moment가 in due course(적절한 절차)로 수정되고 '일본인이 폭력과 탐욕으로 취한 모든 정복지는 그들의 마수로부터 해방된다'는 문장이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으로 취한 다른 모든 영토에서 추방된다'로 바꾸었다.

정오에 루스벨트 숙소에서 미영중 삼국 정상의 사진 촬영이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장제스와 루스벨트는 다시 30분 간 의논하였다. 촬영이 끝난 직후 왕충후이는 홉킨스를 만나 전날 받은 루스벨트 수정안의 내용에 동의하면서 오가사와라 제도를 펑후 열도로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홉킨스는 이를 수락하며 미국 측의 의견을 전달했는데 세 나라의 영토 야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홉킨스는 이미 영국이 동의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는 전날의 영미 회담에서 논의된 사안이었다. 왕충후이는 동의를 밝혔다.

1시 반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레더스 간의 오찬회동이 있었고 2시 반에 메나하우스에서 미영 2개국 합동참모회의가 있었다. 5시에는 장제스의 숙소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있었다. 장제스와 루스벨트는 1시간 30분간 논의하며 중미 연합 참모본부, 두 나라의 정치협의회, 버마의 수륙공동작전의 조기 실행에 대해 루스벨트가 확인해줄 필요성, 회담 공식 선언 발표 준비, 소위 z군이라 불리는 30개 사단의 장비에 대해 논의했는데 장제스는 일기에서 얘기한 주제만 열거했지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미국 측에선 앨리엇 루스벨트가 당시 대화에 동석하여 기록을 남겼는데 쑹메이링이 중국의 문맹 퇴치를 위한 아이디어를 냈다고만 되어 있지 장제스가 언급한 주제에 대해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외엔 중국 공산당의 수용 문제에 대해 루스벨트와 장제스가 합의했으며 두 사람이 만족스러워했단 기록이 있다. 장제스는 그날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회담 후, 는 내게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문제는, 그것도 가장 성가신 문제는, 처칠의 문제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영국은 중국이 강력한 나라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따름입니다.'"

앨리엇 루스벨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날 루스벨트는 스틸웰과 독대하며 그의 입장을 들었고 한시간이나 그의 옆에 앉아 있었으며 작별할 때 그가 '동방에서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에 대해 동정을 표했다고 한다.

4.5.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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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촬영된 공식 사진,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쑹메이링.[3]

이날의 공식 일정은 오전 11시 30분 장제스 숙소에서 장제스와 미국 장성들의 회의, 메나하우스에서 미영 회의, 정오에 장제스와 어니스트 킹 제독의 오찬회동, 2시 반에 메나하우스에서 미영 연합참모회의, 4시 반에 루스벨트 숙소에서 미영중 정상회의, 8시에 장제스 숙소에서 장제스, 홉킨스의 만찬회동이었다.

아침에 장제스는 헨리 아놀드 장군과 회담하여 한달에 1만톤의 공수물자가 필요하며 총공격이 전개될 때 남부 버마에 연합군을 상륙시킨다는 확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11시에 장제스가 연합군 조종사들을 만나는 동안 쑹메이링은 그 자리를 빠져나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고, 그에게 10억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 루스벨트가 너무 선선히 수락하자 장제스 부부는 무척이나 기뻐했고 오후 3시에 루스벨트를 다시 찾아 감사를 표했으며 외몽골과 티베트 문제, 버마 수륙공동작전을 논의했다.

오후 3시 반에 윌리엄 해리먼 주 소련 미국 대사, 영국의 앤서니 이든과 알렉산더 캐도건, 중국의 왕충후이가 한자리에 모여 선언문 채택을 위한 토론에 들어갔다. 캐도건은 해리만이 영국 측의 개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썼다. 4시에 처칠이 보낸 수정안이 도착함으로 해리만과 캐도건은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영국은 초안 원안 첫째 단락의 '군사장관'이란 표현의 수정, 수정안 셋째 단락의 '중국에 영토를 반환한다'는 대목을 '일본이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 초안 원안 다섯째 단락의 '(한국이) 하나의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되도록 한다'는 것은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초안 원안 다섯째 단락 아래 부분의 '우리의 작전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스스로 조금도 바라는 바가 없으며 영토 확장의 뜻도 없다.'는 문구 추가를 요청했다. 중국은 첫 번째와 네 번째 요구는 받아들였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해서는 영국과 대립했다. 영국의 주장에 왕충후이는 '원래 문장이 좋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이것은 원안대로 가기로 하였다.

비슷한 시간, 루스벨트 숙소에서 선언문 채택을 위한 마지막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미 합의된 선언문을 가지고 모인 정상들은 합의된 선언문을 한번 낭독한 후 통과시키기로 결정함으로 카이로 회담이 확정되었다. 앤서니 이든이 초안을 읽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이를 구두로 인가했으며 스탈린에게 내용을 알리기 전까지 선언을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날 저녁 확정된 카이로 선언이 각국에 전달되었고 공포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지 않았으나 각국이 같은날 동시에 발표하며 발표 전에 각국에 통지하기로 한 것은 합의되었다.[4] 구체적 일정이 잡히지 못한 이유는 스탈린의 협의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1월 30일 스탈린은 카이로 선언에 대해 동의하였고 12월 1일 발표되게 된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에게 최고의 공을 돌리며 아내를 극찬했다.
"오늘 11시에 경제 문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한 후, 여사는 홉킨스가 떠날 때까지 열 시간 동안 거의 한순간도 쉬지 못했다. 또한 열 시간 동안 매 순간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단 한 마디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때문에 10시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이처럼 녹초가 된 걸 본 적이 없다.
1943년 11월 26일 장제스의 일기.

4.6. 11월 27일

미국과 영국 참가자들은 오전 소련과의 회담을 위해 테헤란으로 떠났고 11월 28일 오후부터 테헤란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미영으로부터 카이로 선언 성명문을 받은 소련 측은 몰로토프 외상을 통해 "스탈린 원수는 (...) 회의의 성명문 내용을 인지했다. 스탈린 원수는 정보에 감사하며 이 성명문에 관한 어떠한 견해도 없다고 말했다."라고 회답했다. 11월 30일 처칠이 스탈린에게 카이로 회담의 성명문을 읽었느냐고 묻자 스탈린은 읽었다면서 "자신은 어떠한 관여도 할 수 없지만 성명문과 그 모든 내용을 전면적으로 승인한다.", "조선은 독립해야 하고 만주, 대만, 펑후제도는 중국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은 옳다."라며 승인의 의사를 밝혔다.

아침에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아이젠하워 장군과 만난 후 인도로 떠나기 직전에 처칠이 제안한 바가 있던 피라미드와 카이로 구 시가지 관광을 하였다. 11월 28일 장제스는 중국 조종사들을 위한 캠프가 있는 카라치를 시찰하다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번에 카이로에 7일 동안 머물렀다. 이 동안 정치 문제에서의 성과가 가장 훌륭했고, 군사 문제에서 거둔 성공이 그 뒤를 따르며, 그 다음엔 경제 문제였다. 모든 분야에서 성과가 있었다. 이번 달에 주의력과 에너지 대부분을 회담과 제안의 기회에 쏟아부었다. 철저히 심의되었고 아무런 결점도 없이 분석되었다. 그리하여 회담 동안의 여러 협상이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혁명경력에서 중요한 성취다. 그녀의 도움 또한 대단한 공헌을 했다.

충칭에 돌아온 장제스는 쑹메이링에게 청천백일장을 수여했다.

5. 반응과 결과

회담의 결과에 따라 1943년 12월 1일 밤, 미영중 3개국의 수도에서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카이로선언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이승만을 통하여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3년 12월 2일, 임시정부공보 호외를 발행하여 카이로 선언에 포함된 한국 독립 조항을 크게 환영했다. 김구는 합중통신사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카이로에서 개최된 삼국 회의에서 일본을 타도한 후 한국의 독립 자유를 보증한다는 공보가 발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유쾌는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나는 삼천만 동포를 대표하여 삼국의 수뇌에게 마음가득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할 때까지 동맹국의 승리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까지 공동 분투할 것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하지만 12월 5일, 로이터 통신 등이 카이로 선언과 관련하여 전후 한국 독립 이후 일정 기간 동안 국제적 감호가 있을 것이라고 보도하자 임시정부는 크게 긴장하였다. 임시정부 선전위원 엄항섭은 1944년 8월의 논설문에서 이러한 보도들이 충격적이라면서 4대 열강의 진의가 아닐 것이라 기대하며 연합국에게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과 공동 군사작전에 참여시킬 것을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적당한 시기>라는 문구를 즉각 독립으로 고쳐달라고 중국 측에 공식 요청하기도 했으며, 즉각 독립과 임시정부 승인을 두고 선전 운동을 해나갔다.

중국공산당 역시 정확한 선언이라고 카이로 선언을 환영했다.

1943년 12월 8일, 도조 히데키 총리는 카이로, 테헤란 두 회담에 대한 반론을 단파 방송에 대해 발표했다.
"대동아 10억 민족의 견고한 공동결의는 지난번 대동아회의로 더욱더 견고해졌다. 적 미국, 영국의 지도자는 입으로 정의, 인도, 박애, 인의를 외치면서 그행하는 바는 표리상반된다. 특히 동아에 대해서는 문호개방 기회균등을 주장하면서 자국 영토 내에서는 동아 여러 민족에 대하여 불평등한 대우를 하고 결국 그들이 동아민족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구한 예속화다."
"최근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는 마음대로 동아의 처우를 논하고 제국을 삼류국가로 비하하여 호언하고 있다. 게다가 오랫동안 그들이 약취해 온 전 세계에 걸친 영역과 압박받는 민족의 해방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또한 인도도 아니다. 구태의연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타민족 착취다. 카이로 회담이야말로 참으로 이러한 분수에 넘치는 희망을 내외에 폭로하며 그들의 궁극적인 전쟁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스스로 세계에 공언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후 카이로 선언은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인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에서 8항 '카이로 선언의 조건[5]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국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및 시코쿠와 우리가 결정하는 여러 작은 섬에 국한되어야 한다'[6]는 조항으로 재확인되었다.

6. 영향

상기 3대 강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 상태가 될 것을 결의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중화민국의 연합국 4대 강국으로의 지위가 확정되었으며, 전후 일본 제국의 해체와 무엇보다도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한국에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7]

그러나 이승만은 카이로 선언에서의 이 「적절한 시기」 문구에 대해 영미국의 친소적인 노선으로 인해 한국 임시정부를 바로 승인하여 즉각적인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가하게 됨에 따라 삼팔선으로 분단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아래는 1945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이승만이 보낸 성명이다.
나는 조셉 스탈린이 실제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카이로 회담에서 보이지 않는 그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 태평양 방면에 대한 소련의 야망은 전면적인 고려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또한 영국이 동양에 있어서의 권익과 현상유지를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1941년의 버마 로드(Burma Road) 폐쇄[8]를 인도한 영국의 편의주의와 타협 정신이 극동 아시아에 관해서도 같은 가혹한 정책을 취하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되는 바입니다.

나는 미국 국무성의 문이 나의 임시정부 승인의 호소에 대하여 카이로 회담 이전과 같이 굳게 닫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유엔의 회원 국가가 되고 무기대여법이 적용될 가치가 있는 동맹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하여 반복된 시도는 조금도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차후 결정에 맡기기 위하여 카이로 회담이 고의로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 것과 이 애매한 표현의 주요 이유가 아시아에서 소련의 입장이 결정되지 않았던 때문인 것도 명백합니다.

나는 아시아에 관하여서는 물론 유럽에 대해서도 그 국제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왔습니다. 나의 유럽 여행은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이해를 강하게 하였습니다. 동남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릴라는 명백히 공산 계열과 비공산 계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유럽 대륙에 대한 상륙 작전을 세울 때에 발칸 반도를 경유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동 지역을 소련 세력에 맡기기로 합의한 것을 뚜렷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를 원조하려는 영국의 필사적 노력은 이와같은 한정된 정책에 의한 것으로서 그리스 안에 친영 정부를 유지하고 지중해의 생명선을 확보하려는 영국의 다급한 필요성을 확실하게 의미하고 있습니다.[9] 그러나 그 지역이나 그 외의 지역에 있어서 발생한 공산당 문제를 토의할 수는 없었으므로 ㅡ 소련의 감정을 해치지 않기 위하여 ㅡ 동남부 유럽 안전에 관한 정책을 세우는 것은 저해되었던 것입니다. 북유럽에 있어서 핀란드는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독일과 협력하여 소련과 싸웠으므로 그 나라의 입장만을 불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동부 폴란드 점령이 공산주의 확대 계획을 유리하게 하였습니다.

유럽에서 서서히 전개되고 있던 사태가 중국에서는 훨씬 공공연히 또한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연합국은 중국의 국민정부가 공산주의자 ㅡ 정부에 대하여 공공연한 반감을 품으며 독립된 군대와 조직을 가지고 있는 ㅡ 에 대하여 대립적 행동을 중지하고 타협하에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결정한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정책은 명백히 소련의 제국주의적 행동에 대한 연합국의 묵인 정책과 병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종말에 가까와졌을 때, 나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만이 소련의 한국 약탈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한국 임시정부는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으므로 한국 민족을 대표할 수 없었습니다. 종전 후 우리가 신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할 수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대하여 우리는 한국이 해방됨과 동시에 즉시로 연합국 감시 밑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양해하에만 가승인되는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와같은 견해는 국무성과의 회담이나 신문 기자와의 회견 석상에서 또한 방송이나 잡지를 통하여 그리고 나와 친우들에 의하여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고위 당국이 이 견해를 고려하고 있는 기색이 없자 나는 부득이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한국이 형식적으로 정부를 가진다해도 사실상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배하에 둘 것이라고 결정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10]

7. 여담

  • 장제스는 카이로에 있으면서 평소처럼 매일 5시에 기상하여 오후 6시까지 집무를 보고 쑹메이링과 별장의 화원을 산책했다.
  • 앨런 브룩은 장제스를 "분명히 더 큰 각도로 전쟁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이익을 얻으려고 작정했다. 영리하지만 도량이 협소한 남자로 미국인들을 현혹하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는 담비와 족제비의 잡종을 떠올리게 한다."고 일기장에 썼다. 쑹메이링에 대해선 '그 자체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고 성별과 정치력이 인격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듯 하며 이 두가지를 가리지 않고 개별적으로 통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는데 운용하는 기묘한 인물'이며 장제스의 '정신적 영수'로 평가했다. 쑹메이링이 남편의 말을 통역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고 장제스의 말을 중단시키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영미의 고위 인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다.
  • 윈스턴 처칠쑹메이링을 만나 '범상치 않으면서도 매력적'이라고 평가했고 자신을 더 많은 식민지를 약탈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자로 여기지 않느냐 물었다. 쑹메이링은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할거라고 확신하시나요?'라고 대답했다.
  • 앞의 단락에서 언급했듯이 중화민국 입장에서 쑹메이링의 하드캐리가 매우 큰 공을 세웠는데 쑹메이링은 노란색 국화꽃 무늬를 새긴 검은색 새틴 치파오와 검은색 윗옷을 입고 면사포와 스타킹, 놋쇠 못이 박힌 검정 가죽 구두를 신고 영미의 여러 주요 인물들에게 자신의 다리를[11] 보여주면서 유혹했다고 한다[12]. 앨런 브룩이 덧붙이길 '이때 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었고 나는 젊은 참석자들 몇몇이 낸 억눌린 말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해럴드 맥밀런은 쑹메이링이 '매우 기이한 종류의 안경'을 썼다고 했고 쑹메이링은 카이로의 미국 의료센터를 방문해 처칠의 주치의 등의 진료를 받았다. 이런 쑹메이링의 패션 외교(?)가 언제나 통한 것은 아니라서 루스벨트는 쑹메이링을 요부라고 여겨서 그녀 곁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 스틸웰은 이 회담에서 완전히 절망하여 '나의 짧은 국제 정치 경력은 차라리 내가 쓰레기차를 운전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 조지 C. 마셜은 중국 측의 여러 요구에 "이제 제가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은 이 문제를 놓고 당신들의 '권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의' 비행기, '미국의' 요원, 그리고 '미국의' 물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이러저러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 한국의 독립이 결정된 첫 회담이니만큼 한국에서 연구와 논의가 매우 활발하다. 때문인지 세계사적으로 엄청 중요한 테헤란 회담은 한국 학계에서 관심을 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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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주 이집트 미국 대사, 영국 대사, 중국 대사와 정광균 주 이집트 한국 대사
  • 한국-이집트 수교 20주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2015년 10월 2일 카이로 선언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저기 있는 이유는 자신이 당시 중화민국을 승계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국제적으로 당시 중화민국의 지위 계승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중화민국(대만)은 사진에 찍힌 나라들과 외교관계가 하나도 없다.

8. 참고 문헌

  • 카이로회담 교섭과 진행에 관한 연구, 조덕천, 단국대학교.
  •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문제와 장개석, 배경한, 신라대학교.
  •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정병준, 역사비평사.
  • 카이로선언과 일본의 영토문제, 와다 하루키 저, 박은진 역, 동북아역사재단.
  • 카이로회담과 한중관계, 배경한, 신라대학교.
  • 송미령과 전시미중외교, 박명희, 단국대학교.
  • 태평양전쟁시기 미국의 종결전략과 중국, 기세찬, 국방대학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 함께.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9. 관련 문서

9.1. 참여 인물



카이로 회담의 참석 인물들은 회담 당사국인 미영중 3국의 정상과 고위급 간부들이 중심이 되었다. 위에 적힌 링크를 제외하더라도 왕충후이 국방최고위원회 위원과 해리 홉킨스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이 각각 장제스와 루스벨트의 비서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 엘리엇 루스벨트, 처칠 수상의 딸 사라 처칠도 부관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또한 참모총장급의 주요 인물이 대거 참석함으로 일반적인 정상회담이 아닌 전시 회담으로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외 인물로는 영국의 알렉산더 캐도건, 앨런 브룩, 찰스 포탈, 루이 마운트배튼과 중국의 상전, 린웨이, 저우지러우 등이 있다.

회담에 참석한 인물들은 1943년 12월 중국 류쯔친의 저술에 따르면 188명으로 영국이 100여 명, 미국이 60여 명, 중국이 20여 명으로 영국인이 가장 많았다 한다. 기타 수행원들을 고려하면 최대 500여 명까지도 늘어난다.


[1] 장제스는 일본이 배상을 지불해야 하며 이는 산업설비, 함선, 철도차량 등의 현물의 형태라도 좋다고 했다. 루스벨트는 이에 동의했다.[2] 이를 캐도건은 '몇 가지 결함과 누락된 한 부분을 수정했다'고 평가했다.[3] 인쇄용 사진이다보니 화질이 떨어지고 덧칠을 하였다.[4] 하지만 발표 32시간 전 로이터 통신이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폭로했다 한다.[5] 일본은 term을 조항으로 번역했으나 조건, 요구로 번역하는 게 맞다.[6] The terms of the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7] 그리고 이는 '한국은 일본의 지배 하에 내부적인 저항이 없었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카이로 회담 선언 중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천명하고 있는데다, 한국이 식민 지배에 저항도 하지않고 독립을 호소하지도 않는데 열강이 특별히 '한국'의 독립을 약속할 리가 없기 때문.[8] 중국의 생존을 위한 장개석 총통의 투쟁이 중대한 시기에 이르렀을 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수물자 보급이 크게 두절되었다.[9] 결국 후에 영미와 소련이 그리스에서 충돌하여 그리스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이로인해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 초에 발표되는 원인이 되었다.[10]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2015, 조선뉴스프레스[11] 앨런 브룩은 쑹메이링의 다리를 '가장 날씬하게 균형 잡힌 다리'라고 평가했다.[12] 쑹메이링은 이때 4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