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4 22:30:56

치치하얼 전투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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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치치하얼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28일~5월 5일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강교 전투(江桥战役)3.2. 관동군의 방어선 돌파와 동북군의 퇴각
4. 결말5. 사적6. 관련문서

1. 개요

치치하얼 전투()는 만주사변 당시 일본 관동군과 중국 동북군이 치치하얼 타이라이현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다. 최종적으로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만주 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치치하얼을 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장차오 항전이라고도 부른다.

2. 배경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후 사건을 구실로 만주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9월 19일, 선양이 일본군에 점령되고,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은 직접적인 저항 없이 베이핑으로 철수한다. 그 틈을 타, 일본군은 단둥(丹东), 창춘(长春), 선양(沈阳) 등의 주요 도시를 신속히 점령해버렸다. 이에 따라 동북군 일부 잔존 세력이 마잔산을 중심으로 치치하얼에서 일본군에 저항하게 된다.

3. 전개

3.1. 강교 전투(江桥战役)

동북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없자, 일본군은 서부 만주 지역으로 진격을 준비했고 마잔산은 치치하얼과 넌장강 일대를 방어하면서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하려 했다. 넌장강은 치치하얼 북부를 흐르는 강으로 넌장강을 이용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며, 넌장 대교를 전략적 요충지로 삼아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중국 동북군 잔존 병력을 규합하여 넌장강 강교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강교는 치치하얼로 가는 주요한 다리로 일본군이 반드시 넘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본군은 11월 초부터 치치하얼 진격을 시작했으나, 넌장강에서 중국군의 저항을 받았다. 11월 4일, 마잔산은 넌장 대교를 폭파하여 일본군의 기동을 방해하고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하였고 일본군은 다리 재건을 시도하는 동시에, 하천을 따라 우회 공격을 준비했다.

11월 15일, 일본 관동군은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善通)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전차, 기갑차량, 항공기, 중포 등을 동원해 치치하얼 방어선을 공격했다. 마잔산은 야간 기습과 매복 전술로 일본군을 교란했으나, 화력 열세로 인해 방어가 어려워져 위기에 몰렸다. 당시 마잔산 휘하의 작전참모였던 이범석은 장갑차의 급소는 포탑 회전부이니 용감하고 날랜 병사를 선발해 이 포탑 회전부에 철 공구 등 쇠붙이를 끼워 포탑을 돌지 못하게 하면 공격하기 쉽다고 조언했다. 중국군은 이범석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를 실전에 적용해 큰 효과를 봤다. 동북군은 이러한 방어전으로 일본군 2천여 명을 섬멸하였다.

3.2. 관동군의 방어선 돌파와 동북군의 퇴각

일본군은 다리를 복구하는 대신, 강을 직접 도하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일부 일본군이 우회하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면서 마잔산의 측면이 위협받기 시작하였고 마잔산은 기병대를 이용해 반격했으나, 일본군의 기계화 부대에 밀리기 시작한다. 11월 16일, 일본군이 강을 완전히 건너고, 동북군의 방어선이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11월 17일, 일본군은 치치하얼 외곽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도심으로 진격했다. 중국군은 시가전과 야간 기습을 감행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기갑부대와 항공기 지원을 통해 우세를 점했다.

11월 19일, 일본군은 마잔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치치하얼 시내로 진입했다. 중국군 수만 명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중동철도 서부 종점인 만주리를 경유해 소련령인 다후리로 탈출했다. 같은 날 일본군이 치치하얼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전투가 종료된다.

4. 결말

일본군은 만주 서부 지역의 핵심 거점인 치치하얼을 장악, 이후 하얼빈 등 북부 지역으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천진사변으로 푸이를 옹립한 일본군은 이후에도 진저우 침공 등으로 만주 전체를 장악한다. 마잔산은 후퇴하여 게릴라전과 항일 활동을 전개했으나 1932년 초 국민정부 지역으로 철수한다.

5. 사적

현 중국 헤이룽장성에 치치하얼 전투를 기리는 장차오(江橋)항전기념관이 존재한다.

6.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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