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3 04:23:58

영월합작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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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28일~5월 5일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만주사변의 발생과 장제스의 대응3.2. 광동 측의 대응3.3. 장제스와 후한민의 협상3.4. 1차 회담3.5. 후한민 석방3.6. 상하이 회담3.7. 장제스의 하야
4. 결과5. 참고문헌
5.1. 저서5.2. 논문
6. 관련문서

1. 개요

1932년 1월 1일, 탕산 사건1차 양광사변으로 분열되었던 난징 국민정부와 광저우 국민정부가 만주사변을 계기로 완전히 통합된 일을 뜻한다.

2. 배경

1931년 2월, 약법 제정 문제를 놓고 입법원장 후한민과 갈등하던 국민정부 주석 겸 행정원장 장제스는 대화로 후한민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여겨 후한민을 강제로 유폐시키는 탕산 사건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후한민을 비롯한 당권파들을 힘없는 서생들로 여겨서 이들이 자신에게 저항할 수 없으리라 여겼지만 중원대전 이후 겨우 진정되었던 국민정부 정계는 다시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고 린썬을 비롯하여 국민정부에 합류한 서산회의파들까지도 장제스 탄핵안을 내놓는 등 사태는 급박해져만 갔다.

급기야 그간 장제스를 지지해왔던 천지탕을 비롯한 월계군벌들이 계계군벌, 개조동지회, 서산회의파의 잔여 세력과 힘을 합쳐서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2차례에 걸쳐 난징을 공격하기 위한 북벌을 시도했으나 제3차 초공작전에 매진 중이던 장제스의 상황과 더불어 천밍수, 장광나이, 차이팅카이를 비롯한 일부 월계군벌과 상계군벌 허젠이 장제스를 지지하고 있던 상황이라서 군사적 대치는 소극적인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장제스는 광동 측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자신의 하야 카드를 꺼내서 설득해본 다음에 그래도 광동 측이 말을 듣지 않으면 군사적으로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 전개

3.1. 만주사변의 발생과 장제스의 대응

하지만 장제스의 이러한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도 전에 관동군의 이시와라 간지 대좌를 비롯한 일부 군인들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구실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당시 베이핑에 있던 장쉐량이 만주사변의 소식을 난징에 알렸으며 대혼란에 빠진 국민정부 측은 난창에서 초공을 지휘하고 있던 장제스에게 중앙으로 복귀해달라고 요청했다. 난징 정부는 평화통일 없이 일본의 침략에 맞설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고 9월 19일, 장쥐, 리스쩡, 우톄청의 연명으로 광저우에 내전 중지와 공동으로 국난 타개를 호소하였다. 이날 쑨커와 마초준(馬超俊) 역시 광저우 국민정부에 난징과 합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9월 20일, 광저우 정부는 우톄청에게 9월 19일의 연명전보에 대해 찬성한다는 전보를 보냄으로 합작의 의사가 있음을 표시했다.

만주사변의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내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외교문제를 소홀히 다뤄서 일본에게 침략의 기회를 제공하였음을 인정하고 이를 반성하면서 "국난의 위기 상황에서 여전히 내쟁을 그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양해하지 않을 것이며, 우방도 중화민국에 대한 열정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생각컨데 광동측 요인들도 천하의 지적을 견뎌가며 군사행동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중앙당부 명의로 광저우 측에 분쟁종식을 위한 협상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9월 21일 오후, 난징에 도착한 장제스는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하였는데 참석자들은 광동에 난징 정부가 진심으로 합작을 원한다는 뜻을 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차이위안페이, 천밍수, 장쥐 세 사람이 난징 측의 회담 대표로 선정되어 영국령 홍콩에서 광동 측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3.2. 광동 측의 대응

일본군의 거침없는 진격 소식을 들은 광동 측 역시 난징의 요청을 놓고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리쭝런은 난징을 함락시키고 여세를 몰아 중국 공산당일본 제국을 모두 쓸어버리자는 황당한 주장을 내놓았으나 쑨커는 국난시기에 분열행동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왕징웨이는 "당연히 화평에 향응(響應)해야 하고, 항일에도 나서야 하며 공산당 토벌도 해야 하지만, 모든 것은 장제스가 하야하면 일시에 해결될 수 있다."면서 장제스의 하야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참가자들이 왕징웨이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구잉펀의 명의로 장쥐에게 전보를 보내 난징 측에서 대표를 보내 평화를 모색하자고 청하였다.

9월 21일, 광저우 국민정부 명의의 전보가 난징에 도착했다. 광저우 정부는 시국해결을 위해 장제스 하야, 광저우 국민정부 취소, 통일회의에서 통일정부 출범 논의를 제시하였다. 이 전보에 대해 장제스는 천밍수, 장쥐와 상의한 후 자신이 하야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비치며 천밍수에게 광저우로 가서 협상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장제스 자신도 협상을 위한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1. 광동측 동지들이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중앙의 동지들도 모든 것을 양보할 의향이 있다. 이 경우 광동의 모든 동지들은 난징으로 들어와 정부를 개조하라. 중정 개인의 하야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광동 방면의 동지들이 책임 있는 행동을 약속하고 난징으로 들어온다면 중정은 그 즉시 하야를 발표할 것이다.
  • 2. 광동 동지들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중앙에 모든 것을 맡겨라. 이 경우 광동정부는 스스로 취소를 선언하고 광동 동지들은 수도에 모두 모여 함께 국난을 극복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다.
  • 3. 각 방면이 합작한다면 중정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단 이 경우도 필히 먼저 상하이에서 얼굴을 맞대고 흉금을 터놓고 난관을 극복할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광동측이 장제스, 후한민, 왕징웨이 세 사람의 합작을 원한다면 기꺼이 응할 것이다.

또한 장제스는 천밍수에게 왕징웨이, 쑨커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었는데 이 친서에서 장제스는 이전의 시비곡직은 모두 자신이 떠안을 것이니 여러 동지들이 당과 나라를 위해 진정으로 화담에 임해줄 것을 두 사람에 간곡히 부탁했다.

3.3. 장제스와 후한민의 협상

9월 25일, 천밍수, 차이위안페이, 장쥐, 장런제, 리스쩡이 상하이를 출발하여 홍콩으로 떠나자 장제스는 다이지타오, 우징헝, 샤오위안충과 함께 문제를 논의하였고 우선 제네바에 파견된 중국 대표 스자오지를 통해 국제연맹에 만주사변의 추가적인 확대를 저지해줄 것을 요청하며 후한민의 복귀를 설득하여 화평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한편 후한민은 이 소식을 듣고 "이번 사태는 일본 군부의 극소수 강경파가 주도한 것으로 전체 일본의 뜻은 아닐 것이다. 외교 역량을 효과적으로 운용한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비추며 외교부장 왕정팅과 동북변방사령 장쉐량을 본분을 지키지 못한 죄로 징계하고 외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일본에 파견하여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의 요청을 받은 다이지타오 등이 후한민을 방문하여 업무 복귀를 청하였으나 후한민은 당원이자 국민된 도리로서 국난의 시기에 힘이 닿는대로 당과 국가를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답하면서도 당장은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선에 복귀하기를 거절하였다. 후한민의 밀당에 다급해진 장제스는 <난징전체당원항일구국대회>, <수도반일구국대회> 등의 단체들을 동원하여 이들에게 후한민을 설득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의 방문에도 후한민은 여전히 일선 복귀를 거절하였고 난징의 요인들은 후한민의 이러한 모습이 몸값 올리기와 같다고 불만스러워하였으며 우징헝은 만약 장제스가 왕징웨이와 손잡으면 후한민도 합작하려 들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3.4. 1차 회담

그 시각, 여러 파벌로 갈라져 있던 광저우 측은 장제스의 화해 의사를 놓고 분열 상태에 빠졌다. 장제스와 큰 원한이 없던 천지탕은 장제스가 하야하면 일본과 교섭할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장제스와 화해하자고 주장했지만 리쭝런과 왕징웨이는 천지탕과 구잉펀을 비롯한 온건파가 자신들을 물먹이고 장제스와 손을 잡을까봐 우려하여 여전히 강경론을 고수하였다. 왕징웨이가 전국의 역량을 모으기 위해서는 민주정치를 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장제스 하야를 계쏙 강력하게 주장하자 구잉펀은 난징 대표를 만나 난징의 의도를 먼저 확인한 후에 장제스의 하야를 요청하자고 그를 설득했다. 이에 자신의 측근들의 광저우 입성조차 불허하는 천지탕과 구잉펀의 텃세에 질려있던 왕징웨이도 동의하여 쑨커, 이문범(李文範)과 함께 홍콩으로 갔다.

9월 28일, 영월 대표들이 첫 회담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총 6차례 회담을 가졌다. 천밍수는 장제스의 친서와 장제스의 3원칙을 왕징웨이에게 제시하였다. 왕징웨이는 9월 21일자 전보에서 보낸 자신들의 방법을 재확인하였으나 장제스의 친서나 3원칙에 장제스의 구체적인 하야 얘기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다시 장제스 하야를 요구했다. 또한 국민정부 주석의 자격을 제한할 것, 군인은 주석에 임명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할 것, 주석은 정치에 간여하지 않을 것, 육해공 총사령관 직위를 폐지할 것, 군인은 오원의 원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또한 장쉐량의 하야도 요구하였다. 차이위안페이와 장런제는 이러한 요구에 반발하였고 베이핑의 장쉐량도 28일에 비밀리에 난징을 방문, 장제스에게 현직에 머물러주기를 호소하였다.

당연히 장제스 하야를 자기 맘대로 논할 수 없던 천밍수는 9월 29일,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 경호위수사령을 교체하여 광저우 정부 측 인물들이 안심하고 상경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장제스 하야, 광저우 국민정부 철폐의 통전을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 광저우 측의 요구사항임을 전달했다. 이에 장제스는 광동 측을 안심시키기 위해 천밍수를 수도위수사령 겸 경호경비사령에 임명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하야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으나 광동이 상하이에 대표를 파견해 성의를 보여줄 것을 청하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9월 30일, 천밍수는 경호위수사령관 겸 송호경비사령관 대리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광저우 측이 일본인들에겐 굴복하면서 자신에게만 큰 소리를 치는 사실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두고 어린애 장난 같은 유치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3.5. 후한민 석방

장제스의 조건부 하야 의사를 확인한 왕징웨이는 난징 대표들에게 광저우에서 추가 담판을 해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조건부 하야에 대해서 온건파와 강경파의 입장이 바뀌어, 구잉펀, 소불성 등의 광동파들은 왕징웨이와 쑨커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며 선하야, 후화평회의를 주장했다. 그리고 10월 5일에 장제스가 하야통전을 발표해야 하며 장제스가 이 조건을 수락해야만 회담대표를 파견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리쭝런도 장제스가 광서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고 천지탕도 후한민, 리지선 석방을 조건으로 추가로 내걸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확인한 차이위안페이장쥐는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 10월 5일 반드시 하야통전을 발표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장제스는 "왜구들에게는 사사건건 양보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안으로는 고압적 자세를 취한다"라며 크게 분통을 터트렸으나 별다른 수가 없었음으로 자신이 무턱대고 하야하면 광동파가 권력을 승계하기 전까지는 중국이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며 이 사이에 사변이 일어난다면 자신과 광동파가 모두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하야통전을 발표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자신이 제시한 3원칙을 따르는 것 외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으며 이를 전제로 추가 협상을 할 것을 차이위안페이에게 주문했다. 하지만 협상 결렬의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광동의 인사들 모두가 상하이에 오거나, 왕징웨이와 쑨커 등 일부 대표만이라도 난징에 오면 즉시 하야통전을 발표할 수 있다고 추가하였다.

한편 10월 11일, 상하이로 돌아온 천밍수는 10월 12일, 경호위수사령장관 겸 송호경비사령에 취임하였으며 차이팅카이, 장광나이의 19로군을 경호일대에 배치하여 광동파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10월 13일 오후, 장제스는 사태의 발단인 후한민을 방문하여 당과 국가를 위해 이전의 잘잘못을 묻어버리기를 청했으며 10월 14일 아침, 그를 다시 방문하여 자신이 모든 책임과 비난을 떠안겠다고 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장제스의 성의에 후한민도 움직여 마침내 그는 장제스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광동에 전보를 보내 대표를 상하이에 파견해줄 것을 청한 후 자신도 천밍수, 우톄청과 함께 상하이로 떠났다.

3.6. 상하이 회담

후한민의 전보를 받은 광저우 정부는 장제스의 하야 의사도 확인했겠다 후한민이 난징을 떠나면 대표를 보내고 상하이 회담에서 가시적 성과가 나오면 광동인사 전원이 입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왕징웨이, 쑨커, 이문범, 우차오수를 대표로 선정하여 차이위안페이, 장쥐와 함께 상하이로 보냈다. 이때 장제스는 천밍수를 통해 왕징웨이에게 국난을 헤쳐 나가기 위해 의연히 북상해달라고 청하는 비밀전보를 보냄으로 왕징웨이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결탁에 대해 우려를 느낀 구잉펀이 왕징웨이의 상하이 행을 저지하려 하자 왕징웨이는 자신도 후한민 석방을 전제조건으로 동의한다고 밝히고 겨우 상하이로 갈 수 있었다.

10월 21일, 광저우 측 대표들이 상하이에 도착했으며 10월 22일, 장제스가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가 이들을 영접했다. 하지만 장제스, 왕징웨이, 후한민 3자 회담에서 왕징웨이와 후한민의 강경한 주장으로 회담은 순탄치 않았다. 후한민은 국민정부 주석, 육해공총사령의 폐지를 비롯한 국민정부 개조를 요구했으며 또한 장제스의 하야도 요구했다. 쑨커 역시 난징으로 회담 장소를 옮기자는 리스쩡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등 강경한 반응을 보여 장제스의 불만을 샀다. 장기간의 회담 후 장제스는 난징으로 돌아갔고 장제스가 없는 상황에서 회담이 계속되었다. 10월 23일, 차이위안페이, 장쥐가 회담 결과를 서면으로 정리하여 장제스에게 보고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1. 당무는 1,2,3기 중앙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해결방안을 강구하고, 여기에서 제4차 전국대표대회 개최를 논의한다.
  • 2. 육해공군총사령직을 폐지한다.
  • 3. 국민정부 주석은 연륜있고 덕이 높은 당내 인물이 맡도록 한다.

이는 장제스의 정권과 군권을 박탈하고 은퇴시키겠다는 매우 강경한 요구나 다름없었으며 장제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11월 4일, 치치하얼을 수비하던 마잔산 부대를 일본군이 공격하는 눈강 전투가 벌어지는 등 일본의 침략이 계속되는 와중에 장제스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3.7. 장제스의 하야

나라가 위험에 빠지고 내가 홀로 역경에 직면한 이 순간에, 이 사람들은 책임을 떠맡을 용기도 없어 내게 짐을 짊어지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내가 굴복할 것을 기대한다. 줏대도 없을 뿐더러 나라를 구하기 위한 그럴듯한 계획은 하나도 내놓지 못했음에도, 그들은 모두의 이익에는 개의치 않고 분란을 일으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해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당과 나라에 봉사하리라 맹세했으므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만분의 일의 활률일지라도 구원의 길을 찾을 것을 바라면서, 치욕을 감내하고 견디는 것 뿐이다.
1931년 10월 30일 장제스의 일기

1931년 10월 27일부터 11월 7일에 걸쳐 7차례 행해진 화평통일회의는 최종적 타협에 도달했다.
  • 1. 난징과 광저우는 각기 별도로 국민당의 4전대회를 연다.
  • 2. 그 대회에서 쌍방 공히 24명의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고 각각 서로 승인한다.
  • 3. 선출된 중앙위원은 난징에 모여서 전체회의를 열고 정부조직의 개혁을 결정한다.

이에 따라 11월 12일부터 11월 23일까지 난징에서 4전대회가 소집되었으며 장제스는 4전대회에 출석, 당의 단결을 촉구했다. 난징 측의 4전대회는 "장제스 동지에게 일본과 대항할 책임을 부여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광저우에서도 11월 18일부터 12월 5일까지 4전대회가 소집되었는데 실질적인 대회 일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후한민 등이 연명으로 장제스의 하야를 연일 촉구하며 장제스가 하야하지 않으면 북상하지 않겠다고 난징 측을 압박하였다. 이에 광저우 측 4전대회는 주석의 하야가 우선이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관동군의 진저우 위협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외교부장 구웨이쥔이 영불미의 보증을 전제로 진저우 중립화론을 제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학생들이 난징에 상경하여 매우 강경한 반일,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이때 차이위안페이천밍수가 외교부로 난입한 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광저우 측이 다시 장제스의 하야를 독촉하자 결국 장제스는 12월 15일, 자신보다 유능한 인물에게 자리를 내어주겠단 구실로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 국민혁명군 육해공 총사령관직에서 사퇴하고 12월 22일 쑹메이링과 함께 중산릉을 참배한 후 고향인 봉화현으로 낙향했다.

장제스가 하야함으로 12월 21일, 난징에서 국민당 4기 1중전회가 개최되었으며 12월 28일의 마지막 회의에서 전 입법원장 린썬을 신임 정부주석으로, 전 철도부장 쑨커를 신임 행정원장에, 천밍수를 부원장에 추대하였다. 또한 전 외교부장 우차오수를 사법원장에, 쥐정을 사법원 부원장에, 장쥐를 입법원장에, 위유런을 감찰원장에, 정유분을 감찰원 부원장에, 다이지타오를 고시원장에 추대하였다. 그리고 혁명외교를 영도하였던 천유런을 외교부장, 뤄원간을 사법, 행정부장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탕사오이 등 33명을 국민정부위원으로 추대하였으며 장제스, 왕징웨이, 후한민을 중앙정치회의 상무위원으로, 장제스, 후한민, 왕징웨이, 위유런, 엽초창, 구멍위, 쥐정, 쑨커, 천궈푸를 중앙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상무위원 자리를 반려했으며 후한민은 건강 상의 이유로 공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왕징웨이는 광동파에게 삐져서(...) 뻗대고 있었다.

신 정부는 반달 안에 국난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의 재난을 구하는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1932년 1월 1일, 광동파와 개조파의 요인들이 난징으로 이동하여 취임함으로 영월분열은 완전히 봉합되었다. 1월 5일 광저우 국민정부의 취소가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4. 결과

하지만 쑨커의 새 정부는 장제스가 사라진 이후 그동안 장제스가 조달해오던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 큰 난관에 빠졌고 후한민도 궁지에 빠져 광저우로 떠나야 했다. 장쉐량은 멘탈이 나가서 장제스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징징대다가 진저우 침공을 맞이하여 무기력하게 진저우를 내주고 하북성으로 도주해야 했다. 쑨커는 허겁지겁 장제스의 복직을 청했으나 이미 중국 전체가 분열되려는 상황이었고 쑨커는 결국 제1차 상하이 사변 와중에 임기를 한달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1932년 1월 장제스와 왕징웨이는 항저우 회담을 통해 장왕합작에 동의했고 1932년 1월 28일 왕징웨이가 행정원장, 2월 8일 장제스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됨으로 권좌에 복귀하게 된다.

5. 참고문헌

5.1. 저서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5.2. 논문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중국학연구회.
  • 영월분쟁 시기의 중앙과 지방, 김영신, 한중관계연구 제2권 2호,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