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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위안페이

파일:chai.jpg
난징 국민정부 초대 감찰원장
중화민국 초대 중앙연구원장
한문 蔡元培
한국식 독음 채원배
영문 Cai Yuanpei
학경(鶴卿) ·민우(民友)
혈민(孑民)
출생 1868년 1월 11일
청나라 저장성 소흥부 산음현
사망 1940년 3월 5일 (향년 72세)
영국령 홍콩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한림원 편수
직업 정치인, 교육인, 철학자

1. 개요2. 생애
2.1. 신해혁명 이전2.2. 신해혁명 시기2.3. 베이징대학 총장2.4. 국민정부의 관료2.5. 말년
3. 사상
3.1. 미육론3.2. 유교 비판
4. 가족5. 기타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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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 초대 교육총장, 난징 국민정부 감찰원장. 신해혁명 이전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해 구시대적 관습에 얶매인 중국 여성들의 교육 참여를 독려했고 신해혁명 이후 베이징대학 총장을 지내며 근대 교육제도 도입과 유교의 교조화 비판 운동을 전개했으며 '미육론(美育論)'으로 대표되는 교육 사상을 전파했다. 국민정부가 난징을 수도로 정한 후 중화민국 중앙연구원을 설립해 교육 및 학술 체제 개혁을 주도했고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중앙연구원장을 역임하며 중국의 교육 시스템 진보에 기여했다.

2. 생애

2.1. 신해혁명 이전

차이위안페이는 1868년 1월 11일 저장성 소흥부 산음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채가모(蔡嘉謨)는 현지의 거상으로, 7명의 자식을 두었다. 맏아들 채광보(蔡光普)는 자는 요산(耀山)으로, 소흥부의 유학자였다. 그는 주씨와 결혼하여 아버지처럼 7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차이위안페이는 그중 4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유년 시절은 유복했다. 그는 5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서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익혔고 부친이 초빙한 가정교사에게 글을 배웠다. 그러다가 11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자, 그는 이모의 집에 의탁하며 <사기>, <한서>, <문사통의> 등을 익혔다.

1883년, 차이위안페이는 만 15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재(秀才)가 되었다. 이후 1886년부터 1889년까지 3년간 장서가 서수란(徐樹蘭)의 서재에 머무르며 다양한 책들을 섭렵했고 1889년 8월 21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0년, 차이위안페이는 베이징에 상경하여 회시(會試)에 응시했다. 회시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나누어 치른다. 그는 초시를 치른 뒤 자신이 생각만큼 잘하지 못해 낙방했다고 여기고 실망한 나머지 결과 통보도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초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재차 베이징에 가서 복시를 치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결국 그는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1892년, 차이위안폐이는 2년만에 복시에 응시해 "서강의 지리적 위치"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전체 37위의 성적을 거둬 합격 통보를 받고 24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뒤이어 한림원에 배속되었다. 이후 1894년, 차이위안페이는 한림원 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한림원 편수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전세가 불리하자, 청 조정 내에서 일본과 화평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졌다. 이에 차이위안페이는 강화조약 체결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는 상주문을 직접 작성해 조정에 건의했다.
"굴욕적인 화약을 맺으면 국가는 기필코 다시는 떨쳐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손자병법'에도 선전하다 패하면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패인을 분석하고 교훈을 도출하여 승리할 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패전의 대가로 땅을 떼어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백성의 고혈을 갖다 바치는 것이요, 조상대대로 내려온 기업을 줄어들게 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하책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전세는 더욱 악화되어 1895년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하여 북양군 해군기지인 웨이하이가 함락되고 북양 해군이 전멸했다. 결국 청 조정은 이홍장을 일본에 급파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차이위안페이는 그해 4월 17일 <잡기(雜記)>에 울분을 가득 담은 기록을 남겼다.
"청조가 마침내 왜와 화약을 맺었다. 대만, 봉천(심양), 요동 동쪽의 영토를 떼 준다고 한다. 남으로 여순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중략) 하루에 100리 씩 쪼그라들고 날마다 재앙의 기회가 잠복해 있으니, 한(韓)나라와 위(魏)나라가 진나라를 대할 때나, 송나라가 금나라를 대할 때도 이보다 심하지 않았으리라! 왜인에게 급료를 주고 왜군에게 기름진 고기와 술과 음식을 다 갖다 바치니, 이러고서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 (중략) 변경의 신하들이 날뛰어도 정부는 졸렬하고 우둔하여 외우내환이 겹치니 애통할 뿐이다. 부뚜막에 불이 붙어서야 계책을 내니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구나."

1898년,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던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이 광서제의 지원하에 서태후를 연금하고 조정 내 수구파들을 숙청하려 했다가 위안스카이가 이를 서태후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오히려 그들이 숙청되고 광서제는 연금되는, 이른바 무술정변이 발발했다. 차이위안페이는 이때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남아서 당당하게 처형된 탄스퉁(譚嗣同)을 높게 평가하며 변법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공공연히 청조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표출했다. 이에 서동(徐桐)이 "난신적자 한 놈이 있으니 모두가 힘을 합쳐 그 놈을 주살해야 한다."며 맹비난을 퍼붓자, 차이위안페이는 1898년 9월 하순 가족들을 데리고 베이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차이위안페이는 고향에서 잠시 중서학당 책임자로 일하다가 일부 교원들로부터 "변법파를 지지한 패역한 신하"라는 비난을 받자 사직한 후 저장성 승현에 위치한 섬산서원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적극 제창하며 적극적으로 강연했고 <섬산서원 규약>을 재정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서원이 어려움에 처하자, 그는 1년 만에 섬산서원을 떠나 임안현에 가서 농민을 위해 소학교를 열었고 1901년 9월 상하이에서 난양공학의 교경제특과반 총교습관으로 초빙되었다.

난양공학은 성쉬인화이(盛宣懷)가 청조에 헌신할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광서제의 허락을 받고 창설한 학교였다. 특별반 학생들은 경전에 능통한 수재 또는 거인 출신으로서, 졸업 후 조정에 출사하고자 하는 당대의 지식 계층이었다. 차이위안페이는 매일 저녁 두, 세명의 학생들을 연구실이나 숙소로 불러 토론을 벌이면서 학생들이 급변하는 국내와 외세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지도했다. 한편, 그는 학생들의 사유 및 언어능력 배양을 중시했다. 사회를 이끌고 군중을 계도하려면 말을 잘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변론회나 연설회 같은 소조를 설립하여 연설과 변론방법 등을 가르쳤다. 아울러 방언 사용을 지양하고 표준어인 보통화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난양공학 시절 그의 애제자였던 황옌페이는 차이위안페이의 난양공학에서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차이위안페이 선생의 1차 변론주제는 ‘세계 진화에 따라 도덕도 증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등이었다. 그가 출제한 작문의 주제는 ‘춘추전국시대의 애국 사례를 들고 논하라’ 등이었다. 이 같은 주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차이위안페이는 그의 지나친 진보적 성향에 불만을 품은 학교 당국과 갈등을 빚어 결국 1년만에 난양공학을 떠났다. 그가 난양공학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02년 11월에 벌어진 '잉크병 사건(墨水甁事件)'이었다. 평소 권위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억눌렀던 곽진영(郭鎭瀛)이란 교사가 자신의 교탁 위에 잉크병이 놓여 있다는 이유로[1] 무고한 학생을 퇴학시킨 이 사건에 화가 난 학생 200여 명이 동맹 자퇴를 감행했고, 차이위안페이 역시 이 일로 학교 측에 강한 불만을 느껴 사직했다.

그후 그는 장즈유(蒋智由)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중국 교육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중국교육회 창립 취지에 대해 "청년들에게 교육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국가 관념을 증진시켜 장차 국권회복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 있다."라고 설명하며 교과서 편집 및 인쇄, 교육신보 발간, 남녀공학 학당 개교 준비, 상점, 공장, 회사 설립 및 운영 등 여러 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애국학사를 설립하여 난양공학에서 동맹자퇴한 200여 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 차이위안페이는 여성 교육으로 관심을 돌렸다. 사실 그보다 전인 1898년 량치차오, 강광인(康廣仁), 경원선(經元善), ․정관응(鄭觀應) 등 변법파가 상하이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립 여학교[2]인 경정여학을 설립했다. 경정여학은 후에 정식 명칭을 중국여학당으로 바꿨으며 설립 취지를 “변하지 않는 도덕을 근본으로 하여, 지혜를 계발하고 덕성을 함양하며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장래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기초를 육성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여학당은 양가규수를 가려뽑아 집안에서 내조와 양육을 더욱 현명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여성을 육성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여학당은 서구적 신식학당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교사가 집안 어른의 역할을 대신하여 전통식 가정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도 지역 불량배들이 중국여학당을 둘러싸서 위협을 가하고, 학당 안으로 벽돌과 돌멩이를 던지는 행패를 부리는 등 세간의 반발이 심했고 청 조정의 무성의한 운영 때문에 결국 1900년에 폐교되었다.

차이위안페이는 중국여학당의 폐교로 명맥이 끊긴 여성 교육체계를 재정비하고자 1902년 9월 장관운(蔣觀雲), ․황종앙(黃宗仰), ․임소천(林少泉), 진몽파(陳蒙坡) 등과 함께 애국여학을 상하이에 세웠다. 애국여학은 사범, 소학, 중학의 3부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발기인 일가의 여성 10여 명이 학생의 전부였지만, 다음해에는 학생 모집의 범위를 확대했고 여권과 남녀 평등을 주장하고 봉건예교를 반대하는 동시에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뛰어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차이위안페이는 애국여학의 설립 취지와 교육 목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 정신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제창해야 한다. 혁명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폭동이고 다른 하나는 암살이다. 애국학사에서는 군사훈련을 통해 폭동의 씨앗을 심고, 암살은 여자에게 적합하기에 애국여학에서는 암살의 씨앗을 준비하려 했다."

차이위안페이가 ‘폭동’과 ‘암살’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입에 올린 것에서 알 수 있듯, 애국여학은 다분히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남존여비의 관념이 아직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당시 중국에는 여학교의 설립을 “풍속과 교화를 크게 손상시키고(大傷風化)”, “예교를 타락시키는(敗亂禮敎)” 행위로 간주하는 인식이 여전히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부모가 딸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청 정부의 수구파가 여학교를 “도의와 경서를 배반하는(叛道離經)” 곳으로 몰아 폐쇄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했다.[3] 이러한 상황 하에서 혁명을 꾀하는 여학교를 설립한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애국여학의 교육은 문, 리 양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문과의 과목으로는 윤리, 심리, 논리, 교육, 도화, 체조가 있었고, 이과에는 윤리, 교육, 국문, 외국어, 산학, 박물, 물리, 화학, 가사, 수공, 재봉, 음악, 도화, 체조 등의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한편 애국여학은 이러한 보통교육 외에도 프랑스 혁명사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를 강의했고 폭탄제조 훈련의 예비단계로써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으며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수공전습소를 부설해 수공(手工)을 가르쳤다.

1903년 4월, 광서성 순무 왕지춘(王之春)이 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철도 및 광산의 이권을 프랑스에게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프랑스 군대에게 봉기 진압을 요청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일본에 유학가 있던 중국 학생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에 대한 항거 운동이 일어났다. 얼마 후 러시아가 의화단 운동 때 점령했던 봉천, 길림, 흑룡강에서의 철수를 거부한 채 오히려 몽골과 중국 북방 지역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 하자, 중국 전역에서 러시아에 대한 항거운동이 벌어졌다.이때 차이위안페이가 조직한 중국 교육회, 애국학사, 그리고 애국여학의 교원과 학생들은 상하이 장원에서 집회를 열고 중국인들의 항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차이위안페이는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외세의 침략은 전국 인민들의 일이며 한두 개 성의 일이 아니다. (중략) 광서성의 인민들이 먼저 현지에서 이 일을 저지하고 상하이 및 각지에서 성원을 보내야 한다."

또한 그는 의용대 조직을 요구하는 도쿄 유학생들의 뜻에 동조하여 학생들의 의용대 조직과 군사 훈련 참가를 적극 독려하고 자신도 머리를 자르고 제복으로 갈아입은 후 학생들과 함께 군사 훈련에 참가했다. 이러한 차이위안페이의 혁명 사상에 감화된 많은 여국여학 학생들은 동맹회 비밀조직에 가담해 혁명운동에 동참했다. 또한 차이위안페이는 혼인이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결정되어야지 집안이 억지로 결혼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견해를 피력했다.
"남자 측 조건이 우월하면 남자 측이 혼사를 총괄하고 여자 측이 보좌하여 시집을 가면 되는 것이고, 여자 측이 우월하면 남자 측이 보좌 역할을 하여 장가를 들면 되는 것이다. 데릴사위 같은 것이 그것이다."

차이위안페이는 이 외에도 각종 불합리한 봉건주의적 관념과 악습으로부터 인권 침해 및 남녀 불평등의 요소를 발견하고 이에 대해 단호히 비판했다. 그는 몸을 보전하기 위해 전족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축첩 행위에 대해서는 "첩이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의 여식들이 몸을 팔기 위한 것이다. 똑같은 사람인데 물건처럼 취급하면 마음이 편안한가?"라고 물으며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는 기생제도에 대한 폐해도 지적했다.
"기생들은 대체로 젊고 가난한 여인들로서, 사람들의 유혹을 받고 억눌림을 당하여 할 수 없이 이를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인데 사회에서는 그녀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차이위안페이 본인은 첫째 부인 왕씨와 1900년 6월 사별한 후 1년 뒤 주위의 권유로 재혼할 때 다음 다섯가지 혼인 조건을 내세웠다.
1. 전족을 하지 않아야 한다.
2. 글을 알아야 한다.
3. 남편은 첩을 두지 않아야 한다.
4. 남편이 사망한 후 부인은 재가할 수 있다.
5. 부부가 서로 잘 맞지 않을 경우 이혼할 수 있다.

차이위안페이는 중국의 전통적 봉건사회에서 부녀자들이 남성의 권위에 짓눌려 압박과 무시를 당하며 남성의 부속품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성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라 분석했다. 또한 여성이 교육을 받지 않으면 남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겨 그의 사업을 망치게 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습관이 자녀들에게 유전되어 자녀들의 품성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전 국민의 반수를 차지하는 여자가 공부를 하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국민 지력과 생산력에 있어 크나큰 손실이라며 국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그는 중국의 전통적인 남녀 불평등 현상의 불합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부일처제에 가까워지지만, 아직도 시첩을 두는 경우가 있으며, 이른바 정조는 전적으로 부녀자의 의무이지 남자에게는 부여되지 않는다. 이른바 부녀자의 도덕이란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투기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중략) 과부의재가는 정절을 잃는 것이라고 간주하며, 굶어죽는 것은 사소한 일이지만 정절을 잃는 것은 큰일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부녀자들은 더욱 의지할 곳 없는 지위로 타락하게 된다."

1903년, 청조는 애국학사와 애국여학의 수상한 움직임에 경계심을 품고 조사를 명령했다. 이에 차이위안페이는 칭다오, 상하이, 일본 등지를 방랑하며 청 당국의 수배를 피하는 한편 독일으로의 유학을 준비했다. 또한 그는 러시아가 중국 북방 영토를 넘보는 것에 항거하기 위해 상하이 반청혁명지사와 대러시아 동지회 명의로 러시아사경문(후에 <경종일보>로 개칭)을 새웠다. 그리고 1904년에 상하이에 광복회향회를 세워 혁명 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차이위안페이는 광복회양회 회원들과 함께 쑨원이 설립한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고 동맹회 상하이지회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1907년 5월, 차이위안페이는 독일 주재 청 공사의 도움을 받고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심리학, 미학, 철학을 수강했다. 그는 해외에서 4년간 유학생활을 보내며 탕사오이의 조카를 가르쳤고 <중국 윤리학사> 등 학술 서적을 편찬했다.

2.2. 신해혁명 시기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던 차이위안페이는 천치메이로부터 혁명이 일어났으니 속히 중국으로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고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돌아왔다. 1912년 1월, 쑨원은 난징 임시정부를 조직했고 차이위안페이는 사흘만에 교육부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2월, 위안스카이는 난징 임시정부와 협상한 끝에 자신이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되는 대가로 청나라를 멸망시켜주기로 합의하고 무력을 동원해 자금성의 청 조정을 압박해 선통제의 퇴위와 청나라의 멸망을 공식화했다. 차이위안페이는 임시정부 특사로서 위안스카이를 찾아갔다가 그와 함께 난징으로 가서 정식으로 중화민국 원전사에 부임한 후 탕사오이, 류관씨옹(劉冠雄), 정영건(鈕永建), 쑹자오런, 증소문(曾昭文), 황개원(黃愷元), 왕정팅, 왕징웨이 등 8인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다.

차이위안페이는 2월 27일 베이징에 도착해 위안스카이와 면대했고, 위안스카이는 다음날 다과회를 열어 그를 초청하고는 자신이 곧 난징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알렸다. 그런데 2월 29일 밤, 베이징에 주둔하던 차오쿤 휘하 육군 제3진에서 군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각 집을 약탈했으며 차이위안페이 등 주재원들도 개별적으로 강도를 당해 수하물 일부를 잃어버렸다. 차이위안페이는 다음날 아침 6개국 호텔로 이주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후 난징 임시정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함께 베이징으로 간 동료들 전원이 무사함을 알리고 쑨원에게 관련상황을 보고하고 난징으로 돌아가 모든 지시 상황을 직접 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해 4월, 차이위안페이와 왕징웨이 등은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를 발족시키고 자신들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금일의 공화 초기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국민을 만들려면 해외 유학만 필요하지 않으며 선진국 사람들의 지혜에 따라갈 수 있도록 민의를 모아야 한다. 법률이 집행하는 사회를 조직하고 각박한 풍습을 익혀 문제 해결의 실천을 촉진하는 것은 동지들에게 달려 있다."

그는 이와 동시에 프랑스 유학을 위한 예비학교를 베이징에 설립했으며, 탕사오이 내각의 교육총장에 임명되어 경서독경 폐지 등 일련의 개혁 조치를 제시하고 서구 자본주의 교육제도를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국 근대 교육 정책 및 규정의 기본 원칙을 마련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와 여러 차례 마찰을 빚은 탕사오이가 1912년 6월 15일 총리직을 사퇴하자, 차이위안페이를 비롯한 내각 임원들도 7월 14일 동반 사퇴했다. 이후 그는 1912년 9월에 독일로 연수를 떠났다가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을 계기로 귀국해 국사에 참여했지만 뒤이은 계축전쟁에서 국민당의 군대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벌군에게 참패하자 1913년 9월 북양정부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갔다.

차이위안페이는 프랑스에서 3년간 거주하면서 교육학, 철학, 법학, 미학을 공부했다. 그는 왕징웨이의 이웃집에서 살았고,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며 상대를 높게 평가했다. 1915년 왕징웨이가 귀국했을 때 자신의 자녀를 차이위안페이에게 맡기기도 했다. 한편 차이위안페이는 리옹에 중법대학을 세우고 프랑스로 유학 온 중국인 학생들에게 국제법을 가르쳤다. 또한 1915년 리스쩡 등과 함께 '유법근검학회'를 조직했고 이듬해에는 우위장(吳玉章) 등과 함께 '화법교육회'를 설립하여 유학생들의 민족 의식 고취와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 규탄운동을 전개했다.

2.3. 베이징대학 총장

1916년 북경정부 교육청장 판위안롄(范源濂)의 전보를 받고 12월에 귀국한 차이위안페이는 1917년 1월 베이징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전문학자들을 초빙하여 자유주의와 과학을 가르치게 했고 진덕회(進德會)를 조직하여 구습 타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이 시기에 수많은 인재를 초빙했다. 그가 초빙한 천두슈, 후스, 루쉰 등은 후에 신문화 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청년 화가 쉬베이훙(徐悲鴻)은 차이위안페이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베이징대학 화법연구회 지도 강사로 부임해 훗날 베이징 예술학원원장, 중앙 미술학원 원장을 역임하며 중국 미술계의 거목이 되었다. 또한 영국에서 철학, 윤리학 등을 연구했으며 민주, 과학을 적극 제창했던 양창지(楊昌濟)[4]는 차이위안페이의 부름을 받고 베이징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저명한 경제학자 겸 인류학자 마인추, 지질학자 리스꽝(李思光)도 베이징대학 교수로서 활동했다. 차이위안페이는 심지어 군주제 복귀를 외치는 구체제 신봉자였던 구훙밍(睾鴻銘)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빙하여 영국 문학을 가르치게 했다.

차이위안페이가 이 시기 인재를 모으는 데 얼마나 절치부심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 하나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차이위안페이는 1916년 어느날 <동방잡지>에 실린 만 24세의 청년학자 량수밍(梁漱溟)의 논문 <구원결의론>을 읽고 그를 강단에 세우려 했다. 당시엔 북경 대학 학생 중에는 량수밍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기에, 량수밍은 자신이 나이가 어리고 강의 능력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차이위안페이는 직접 설득에 나섰고, 급기야 그에게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했다. 량수밍은 1921년에 <동서 문화와 그 철학(東西文化及其哲)>을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유교를 포함한 중국의 전통문화가 서구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논지를 편 것으로, 당시의 신사조에 역행하는 논문이었다. 량수밍은 북경대학에서 7년을 몸담았으며, 이 기간에 학자로서의 자질과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차이위안페이는 과거 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혁명 운동 가담을 호소했던 것과는 달리 베이징대학 총장으로서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하기를 희망했으며 데모와 수업거부, 일본 상품보이콧, 가두시위, 가두연설 등 일련의 정치적 행동에 반대했다. 또한 그는 폭력이나 혁명적 방법을 수단으로 삼아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반대하며 교육을 통한 구국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람들은 그가 쑨원과 중국 국민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주당 인사라고 여기고 있었고 그가 쑨원을 대신하여 베이징에서 쑨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차이위안페이는 오히려 돤치루이를 적극 지지하며 슝시링, 장젠(張謇) 등 24인과 함께 평화기성회(和平期成會)를 조직해 남북대치 국면의 종식을 전국에 호소하고 쑨원의 호법투쟁을 비판하고 쑨원과 적대관계인 돤치루이의 대독참전 주장을 지지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차이위안페이는 국민외교후원회 강연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의 전쟁을 협력과 강권의 전쟁, 도덕과 부도덕의 전쟁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은 정의의 연합국 측에 서야 한다.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당파의 견해에 따라 바른 뜻을 버릴 수 없는 문제다. 국민당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옳지 않다. 한 나라 안에서 내부문제로 의견이 갈려 안정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국외의 문제가 발생하면 일치하여 외부의 문제 해결에 힘써야 한다."

또한 차이위안페이는 쑨원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 북양정부와 대적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유럽전쟁이 끝났고 국내가 화평해야 된다는 소리가 남북에 울려 퍼집니다. 대세에 따라야 합니다. 결코 소수인이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중략) 실업과 교육의 양 면에서 확실한 성과를 볼 수 있다면, 사회의 신용을 넓힐 수 있고, 민치의 기초를 세울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 의석을 몇 개 차지하는 것에 비해도, 국무원 의원 몇 명을 확보하는 것에 비해도 그 성과가 훨씬 큽니다."

쑨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금일 국민이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다만 국민이 소망하는 평화는 법에 의한 평화이고, 법률의 보장을 받는 평화여야 합니다. 근래 소수의 평화를 도모하자는 사람들이 국회를 희생시키고 무인과 협력하려고 합니다. 무릇 국회란 민국의 기초이고 법치의 기구인데, 이를 폐지할 수 있다면 민국은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법률을 멸시하고 권세를 좇는다면, 이것은 구차스럽게 투안(偸安)하는 것이고, 부연하여 말한다면 미봉하는 것입니다. 비록 억지로 단석(旦夕)은 지탱할 수 있겠지만, 무인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니, 법률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고, 민권은 보장 받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정치는 진화하지 못합니다."

또한 쑨원은 북양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호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투쟁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쑨원을 따르는 이들은 차이위안페이가 혁명을 저버리고 돤치루이에게 영합했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차이위안페이가 쑨원과 갈라서게 된 데에는 그의 정치적 견해가 쑨원의 혁명방략과 일치하지 않은데서 비롯되었다.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차이위안페이는 노공신성(勞工神聖) 구호를 외치며 지식인들이 노동자계급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고 사상의 자유의 시각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일종의 학파이고, 그래서 그것의 존재를 용인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의 용인 하에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단체가 북경대학에서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술토론도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북경대학의 수업과 강연, 그리고 간행물 등에서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 학설이 선전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초기 공산주의운동의 계몽자들이 모여들었고, 중국공산당 창립도 이들이 담당했다.

이렇듯 그는 어떤 학파나 이론도 그것이 합리적이라면 그것을 주장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며 자연 도태되지 않았다면 설령 상반되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 사상이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볼때, '제2의 혁명'을 부르짖으며 북양군벌 타도를 촉구하면서 정작 군사력을 갖추지 못해 남방 군벌과 연합 정권을 수립했다가 그들에게 쫓겨나기 일쑤인 쑨원은 탐탁지 않은 존재였다. 차이위안페이는 교육을 통해 중국인들을 개화시켜서 평화적으로 민주정치를 실현시키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무력으로 군벌을 제압하려는 쑨원의 주장에 반대했다.

1918년 11월15일, 차이위안페이는 베이징 천안문에서 거행된 연합국 승리경축식에 참석해 긴 연설을 가졌다. 그는 연합국의 승리를 축하하고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 평화원칙에 고무되었음을 표시하면서 "국제간에 모든 불평등한 암흑주의는 소멸되어야 하고 광명으로 그것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에 반대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가졌던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희망했으며, 각국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서의 세력범위의 소멸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중국이 연합국에 참전했던 만큼 이 기회를 이용해 중국의 권익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파리 강화회의는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일본의 산동반도에서의 권익을 포함한 21개조 요구를 그대로 승인했다. 이에 격분한 중국 민중들은 5.4 운동을 전개해 매국노 처벌과 일본과 맺은 21개조 파기를 요구했다. 한편 북양군벌은 차이위안페이의 베이징대학에서의 활동에 극단적인 적대감을 표시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학술자유 사상을 '과격주의 고취', '홍수', 맹수'라고 규탄하고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 차이위안페이를 위협했다. 베이징 경찰총감 주심편(朱深便)은 차이위안페이의 위험성에 대해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군은 차이위안페이를 서생으로 봐서는 안된다. 10만의 숫사자로 봐야 한다. 우리가 모두 무장하여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북양정부는 국가예산의 많은 부분을 군비로 사용하면서 교육 경비엔 국가예산의 75분의 1만 책정하고 그나마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으며, 교육계를 화근으로 여겨 자금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베이징대학의 경영난이 심각해지자, 베이징 8개교는 '교육경비확보', '급료받기' 운동을 전개해 시위를 벌엿으나 군벌에게 강제진압되었다. 차이위안페이는 이러한 현실과 자신의 교육 이상을 반영하여, 교육 경비와 교육행정을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킨다는 새로운 모델을 구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에는 실현불가능한 주장이었고, 교육계는 여전히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던 1922년 5월 초 직계군벌의 수장 우페이푸가 베이징 정부를 장악했다. 우페이푸는 5·4운동 시기 학생운동을 지지했고 북양정부 수장 돤치루이의 친일정책에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여론은 그를 ‘모범군인’, ‘애국군인’, ‘민주주의를 반대하지 않는 군인‘으로 평가했고, 시국의 어려움을 해결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차이위안페이 역시 우페이푸의 집권에 희망을 품고 쑨원이 군사 행동을 포기한다면 남북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6.3참안 기념회에서 200여 명의 교육인들의 서명을 받고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 하야를 촉구했다.
"여러분들의 호법의 공은 영원히 불멸할 것이다. 이미 국민에게 공인된 바다. 지금 북경의 불법 총통이 이미 퇴직했고, 전에 국회를 해산하라고 명령했던 총통이 6년간의 불법명령을 취소하고 국회를 회복했다, 호법의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남북이 일치하니 더 이상 무력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쑨원 영도 하의 광동정부는 우페이푸의 북양정부에 대해서도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했다. 북경에 중국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북경정부는 하나의 계파일 뿐인데, 임시로 이전 중앙정부가 했던 사무, 지점, 당안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허구의 외교적 승인을 얻은 것으로 보았다. 차이위안페이는 이후에도 쑨원에게 북벌운동을 중지하고 우페이푸 정권을 따를 것을 촉구했으나 우페이푸가 내각을 자신의 심복들로 채우고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것에 실망하고 1922년 11월 뤄원간 사건이 발생한 것을 기점으로 북양정부에 대한 불인정을 선언하고 1923년 1월 베이징대학 총작 직에서 물러났고 그해 7월 유럽으로 출국했다. 천두슈는 차이위안페이의 결정에 대해 비민중적이라고 비판했으나 후스를 비롯한 다른 지식인들이나 중국국민당은 이를 두고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 불복종운동에 비견된다고 높이 평가했다.

2.4. 국민정부의 관료

차이위안페이는 유럽으로 출국한 뒤 독일에서 1924년 11월부터 1926년까지 유학생활을 하며 민족학을 전공했다. 그는 1924년 광저우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불참했지만 쑨원은 그가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 위원을 계속 맡게 해줬다. 비록 최근 몇년간 공화혁명 수립을 위한 방식 차이 때문에 마찰을 빛긴 했지만, 쑨원이 여전히 그를 중요한 인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쑨원 사망 후인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차이위안페이는 중앙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중국으로 돌아와 저장서 항저우에서 저장성 군벌 쑨촨팡을 규탄하는 정치운동을 전개하다가 쑨촨팡이 체포령을 내리자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추적을 회피했다.

1927년 3월,그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3월 24일부터 4월 9일까지 상하이에서 여러차례 열린 회의에 참석했고 3월 28일에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그는 우징헝이 제기한 공산당 탄핵에 적극 찬성하며 "공산당인의 국민당 당적 폐지"를 주장했다. 이후 그는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적극 지지하고 국민당의 공산당원 숙청운동인 '청당 운동'을 적극 지지했으며 난징 정부 수립 후 처음 2년동안 장제스 편에 서서 공산당 숙청을 적극 지지했다.

베이징대학 총장 시절 공산주의를 학문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고 공산주의 성향의 학자들이 대학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배려했던 그가 반공주의자로 변모한 이유에 대해 "유럽을 유람하는 동안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꿰뚫어봤다.", "나이가 들면서 보신주의자가 되어 최고 권력자 장제스에게 빌붙었다"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다른 청당 실행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반대했다. 그는 여러 공산당원과 공산주의 청년단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중단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했고 국민당 당국에 쑨원의 고상한 인격을 계승해 참살을 중지하라고 권고했다.

1928년, 차이위안페이는 중앙연구원 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후 항저우 시쯔후(西子湖) 인근에 중국 최초의 미술학부인 국립예술원을 설립했다. 린핑옌(林風眠)이 초대원장 겸 교수에 초빙되었고 판텐소우(潘天壽), 방건민(方幹民), 우다위(吳大羽) 등이 예술원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 학부는 외국 미술대학의 모델을 참고하여 중국화, 서화, 조각, 도안의 4개 학과와 연구부 및 예과를 신설했고 건축, 음악 전공을 증설했다. 차이위안페이는 1928년 4월 9일 개학식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앴다.
"대학원은 서호에 예술원을 설립함으로서 미를 창조하고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미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짐으로서 진정으로 인간의 생활을 완성하게 하였다. 미육자(美育者)는 미학의 이론을 응용하여 교육하고, 감정을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이다."

또한 차이위안페이는 '국립예술대학 창설 제안 요약'을 대학원에서 제정해 국민정부에게 다음과 같이 청원했다.
"미육은 근대 교육의 근간이다. 미육의 실시는 직접 예술을 교육으로 삼아 미의 창조와 감상에 대한 지식을 배양하고, 사회적으로 보급할 수 있다. 동서 각국은 국립 미술전문학교, 음악원, 국립극장 등을 설립하여 고도의 예술인재를 양성하고 미육의 시리와 보급을 도모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도 베이징에 7년만에 국립예술학교를 설립하게 된 점을 감안해 장강 유역에도 국립예술대학을 설립해야 한다."

1930년 11월 16일, 차이위안페이는 후스, 양싱포(楊杏佛), 예궁춰(葉恭綽) 등 14인과 함께 '중국필회(中國筆會)를 설립하고 자신이 초대 이사장에 부임했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항일 투쟁을 제창했고 1932년 12월 쑹칭링, 루쉰, 양싱포 등과 함께 국민권보장동맹을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출된 뒤 국민정부의 비밀경찰제도에 반대하고 애국민주 항일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국공합작을 옹호했다. 1933년 3월 14일, 차이위안페이는 상하이에서 타오싱즈(陶行知), 리궁푸 등과 100여 명과 함께 카를 마르크스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를 열어 마르크스에 경의를 표하며 중국 국민당의 문화 전제정치를 비판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차이위안페이는 후위즈(胡愈之) 등 상하이 문화계 명사들과 함께 상하이 문화계 구망협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또한 전국 주요 대학의 회장 및 교수들과 함께 항일구국대학을 설립하고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대내외에 폭로하기 위해 긴 성명서를 발표하며 전세계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1938년, 그는 국제 침략방지회의 중국지회 명예회장에 선출되었다.

2.5. 말년

1937년 11월 27일, 차이위안페이는 일본의 침략을 피해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홍콩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미술관에 종종 초대되어 미학에 대해 연설했다. 그러던 1940년 3월 3일, 차이위안페이는 집에서 계단을 오르던 도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는 다음날 홍콩 양화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월 5일에 사망했다. 향년 72세. 그의 시신은 홍콩에 묻혔다.

3. 사상

3.1. 미육론

차이위안페이는 중국의 계몽과 근대화의 가장 효과적이고 포괄적인 도구로 미육(美育)을 제시했다. 그는 미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육의 범위에 관해서 말하자면, 예술보다 범위가 훨씬 크다. 일체의 음악, 문학, 연극, 영화, 공원, 자그만한 정원의 배치, 번화한 도시, 조용한 농촌 등등. 그 외에도 개인의 행동거지, 사회의 조직과 학술단체, 산수의 이용 및 기타 여러 사회현상들. 이 모두가 미화(美化)의 대상이다. 미육은 넓은 의미의 것이고 예술은 그 의의가 아주 협소하다."

또한 그는 미육의 방법론에 대해 "미육이라는 것은 미학의 이론을 교육에 응용하여 감정을 도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며 중국이 살 길은 오직 미육의 추구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중화민국 초대 교육총장 시절인 1912년에 <신교육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서 현실에 맞지 않는 충군(忠君), 존공(尊孔)을 배제하고 이를 세계관 교육과 미육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독일 유학 시절 임마누엘 칸트의 이원론적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세계를 '현상'과 '실체'의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현상 세계는 현실 세계이며 실체세계는 관념의 세계다. 차이위안페이는 현상세계는 상대적이면서 인과율에 둘러싸여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반면, 실체세계는 절대적이면서 인과율을 초월하고 전적으로 직관에 의지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나와 타인 사이에는 층하(層下)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차별할 수 있다는 편견이 생겨나고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현상세계와 실체세계를 연결할 수 없는 장애가 생긴다며, 이는 자유, 평등, 박애가 바탕이 된 의(義), 서(恕), 인(仁)의 공민도덕교육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므로 미육을 통해 현상세계의 편견을 제거하고 중국인들로 하여금 인류의 큰 이상을 품을 수 있는 실체세계로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미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이점으로 다음 세 가지 사안을 설명했다.
1. 도덕성을 함양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상세계에서의 사랑, 슬픔 등의 감정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생사의 관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미감을 형성하면 현상세게를 벗어난 실체세계와의 접촉이 가능하게 되므로 자유의지가 있는 초월적인 인간정신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미감은 아름다움과 존엄함을 의미하며, 중국인들이 이를 체험한다면 낙후된 정신을 계몽하고 궁극적으로 고상한 인격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봤다.
2. 에술적 감정을 고취할 수 있다: 그는 중국 전통의 예악교화(禮樂敎化)를 바탕으로, 국민들이 현상세계에서의 좌절과 한계를 넘어서서 정신세계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중국적 특색을 갖는 창조정신을 발휘하기를 희망했다. 즉, 그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일상에서의 심미적 체험을 통한 예술적 감흥의 향유를 기대했다. 그는 1931년에 출판한 <미육과 인생>에서 경제활동 후 남은 시간에는 문학이나 음악, 미술관 등을 접하여 지식과 감정의 조화를 이뤄야 인생의 가치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 그는 미육은 종교보다 자유롭고 진보적이며 보급할 수 있으며, 종교는 강제적이고 보수적이며 한계가 있으므로 미육으로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과거 종교로만 설명할 수 있었던 현상들이 이제는 과학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종교만이 할 수 있었던 역할도 과학으로 대체되고 있는 만큼 시대에 뒤쳐진 종교에서 탈피해 과학을 수용하고 미육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이위안페이는 1922년 교육잡지에 <미육 실시의 방법>을 개재해 미육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인 가정미육, 학교 미육, 사회미육에 대해 설명했다. 가정미육은 태아와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차이위안페이는 교육의 기점을 태교로 보고 관심을 쏟았다. 그는 산모들이 제대로 된 태교를 할 수 있고 영아들이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정의 기능을 대신하는 '공립태교원'의 설립을 주장했으며, 산모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공공육영원'으로 옮기고 아동이 만 3세가 되면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과도기적 기관인 '유치원'에 가도록 권장했다.

학교미육은 아동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만 6세부터 대학에 입학하는 시기의 미육을 말한다. 학교미육은 초등학교부터 중, 고등학교의 교육을 받는 '보통학교의 미육'과 대학과 예술전문학교의 '전문학교의 미육'으로 나뉘는데,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학교 미육을 이렇듯 둘로 나눈 것은 연령에 따른 학문과 식견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차이위안페이는 본인이 서구의 유학생활에서 학습했던 것을 토대로 베이징대학에 미학과를 개설하고 미학 교재를 저술하고 미학을 강의했으며 북대음학연구회와 북대화법연구회 등 여러 단체를 지원해 대학생들의 미육 습득을 유도했다.

사회미육은 대학 졸업부터 사망때까지의 시기의 미육을 말한다. 그는 사회 미육을 크게 '미육 기관의 건립'과 '장소의 미화'의 두 범주로 나눈다. 미육기관의 건립이란 전문적 기능을 가진 미술관, 미술전람회, 음악회, 극장, 영화관, 역사박물관, 고물학 진열소, 인류학 박물관, 박물학 진열소와 식물원, 동물원 등 아홉 종류의 기관을 통해 미육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반해 장소의 미화는 보편적 설비를 갖출 수 있는 환경개선의 측면에서 미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도로, 건축, 공원, 명승지, 고적의 보존, 공동묘지 등 여섯 가지를 다룬다.

차이위안페이는 사람들이 미육을 통해 감정의 정도롤 강화하여 '위대하고 고상한 행위'를 할 것을 기대했다. 여기서 위대하고 고상한 행위는 당시의 시대적 난관을 해쳐나갈 수 있는 열사나 의사들의 '영웅적 행위'를 일컫는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신의 생명을 버리고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를 원하는 것, 일신의 이익을 버리고 여러 사람의 피해를 막는 것, 나와 남의 구별과 일신의 생사 이해관계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이런 위대하고 고상한 행위들은 완전히 감정에서 발동하는 것이다."

그는 멸사봉공의 사회개혁정신은 '감정'에서 비롯되고, 감정을 도양하는 것이 '미육'의 목표이며, 감정을 도양하는 도구가 바로 미적대상이라고 여겼으며, 미적대상들이 이러한 작용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미적대상들이 가진 미의 보편성과 초월성 때문이라는 논리를 제시했다. 우선, 그는 미적대상의 보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 바가지의 물을 한 사람이 마셔버리면 다른 사람은 목을 축일 수 없게 되고 한 뼘의 땅을 한 사람이 차지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함께 설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함께 나눌 수 없다고 예를 든 것들은, 나와 남의 구별을 조장하고 사사롭고 이기적인 계산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하지만 눈을 돌려 미적대상들을 살펴보면 이와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무릇 미각, 후각, 촉각의 성질과 관계가 있는 것들은 모두 '미'라는 말로 논할 수 없는 것들이다. 미감의 발동은 영상이나 음파를 전환하여 전달하는 시각과 청각에 한정된다. 따라서 순수하게 천하위공의 뜻이 있는 것이다. 명산대천은 사람들마다 가서 유람할 수 있고, 석양명월도 사람들마다 보고 즐길 수 있다. 공원에 있는 조각상들이나 미술관의 그림도 사람들마다 실컷 볼 수 있다. 제나라 선왕이 했던 '혼자서 즐기는 음악은 사람들과 즐기는 것만 못하고' '몇몇 사람과 즐기는 음악은 여러 사람들과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한 말고, 도연명이 했던 '훌륭한 문장은 만인이 즐긴다'고 한 말은 모두 미의 보편성에 대한 증명이 된다."

한편, 그는 미적대상이 실질적이고 직접적으로 생활에 이용되지 않아 실용적인 것들과 구분됨으로 인해 실용의 범위를 초월했으니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식물의 꽃은 과실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매실, 복숭아, 살구, 자두 등에 대해서 시인들이 읊는 것은 주로 그 꽃들이다. 보고 즐기기 위해 준비된 꽃은 사람의 선택으로 인해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 동물의 털과 새의 깃털은 추위를 막기 위한 것이지만, 사람은 그것으로 털옷을 만들고 직물을 짜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백로의 깃털이나 공작의 꼬리 깃은 오로지 장식에만 쓰인다. 집은 비바람을 피하면 족한 것인데,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기물과 기구는 사용에 적합하면 그만인데, 도안을 넣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언어는 뜻을 전달하면 되는 것인데 특별히 음조와 시가를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이로써 미의 작용이 실용의 범위를 초월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위안페이의 '미육론'은 당대에도 다분히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차이위안페이 본인 역시 말년에 미적대상의 보편성에 대해 "동일한 대상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추하다고 하니 보편적이라 하기 어렵다."라며 회의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이론이 현재에 당면한 문제 해결에 당장 도움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과학만능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과학이 종교의 모든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섣불리 주장했지만, 종교는 현재까지도 수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과학 만능론은 1,2차 세계대전의 참극과 환경 파괴 등의 문제를 양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에 미학을 처음 소개하고 미적 대상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함으로서 중국인들에게 예술의 필요성을 널리 인식시킨 점은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2. 유교 비판

1912년 7월 10일부터 8월 10일까지 개최된 '전국임시교육회의'에서, 중화민국 초대 교육 총장 차이위안페이는 '청학당 관리 통칙'의 '배공 예식(拜孔儀式)'에 대해 비판하면서 학교불배공자안(學校不拜孔子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공자는 종교가가 아닌데 종교 의식으로 그를 모시는 것은 불합리하다.
2. 교육과 종교는 각각 목적이 다른데, 종교적 의식을 학교에서 거행하는 것은 교육 목적에 위배된다.
3. 입헌국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데, 학교에서 공자를 모시기 때문에 타 종교 자제들이 입학하려 하지 않으므로 교육 보급에 장애가 된다.

이후 그는 공개적으로 유교 비판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중국에서 2천여 년간 숭앙되는 공자의 학설이 정치,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폐해를 조성했다고 여겼다. 특히 유교에 의해 조성된 중국의 전통 문화 중에서 충(군), 효, 예를 현대에 부합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각 학교에 공자 배례를 금지하고 '소학 독경 폐지', '청학부가 반포한 교과서 사용 금지'를 실시해 2천여 년간 중국을 지배했던 공자 학습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민간에 뿌리내린 유교적 가치는 견고했다. 중국인에게는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됐다는 국체 변경은 아직 피안의 이상이었다. 그들에게 공화제는 군주가 없는 국가였다. 군주 1인만의 교체였을 뿐 민주의 정체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피안의 이상이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이 되자, 정치에서 황제를 부인했듯이, 교육과 학문의 영역에서도 만세 사표인 孔子를 끌어내리는 작업이 진행돼 갔다.

보수파 지식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전국적으로 공교회(孔敎會)를 결성해 정객, 군인, 일반인까지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차이위안페이를 비난했다. 쓰촨성 교육회, 낙국낙 원감(駱國駱曾鑒) 등 공자를 숭상하는 단체 회원 299인은 연명으로 유교를 예전처럼 각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들은 독경 폐지를 "도덕을 스스로 폐지하고 나라를 스스로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차이위안페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부었다.
"국교론이 일어난 까닭은 그 원인이 민국 초대 임시 총장이던 차이위안페이 때문이다. 그는 편벽된 마음을 드러내어, 사람을 놀라게 할 창거와 공언을 하고자 폐공을 말했다. 폐공이란 정제를 거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학교에서는 공자를 모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학전과 학산은 관에서 몰수하고, 중국 수천 년 동안 존경하던 지성 선사를 음사요묘와 같이 취급하여 여지없이 금절하였다. 현가 소리 끊기고 일무의 자취가 없어진 지 2년, 당시의 선비는 모두 마음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그러나 정부의 위엄이 두려워 노했지만 감히 발언하지 못했다."

1916년 8월, 공교회의 지도자 천후안장(陳煥章) 등은 국회에 "공교를 국교로 정하라"고 청원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종교로 지정하자는 시위가 벌어졌고 여러 언론에서 이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설을 실었다. 이에 대해 차이위안페이는 1916년 12월 23일 베이징 중앙 공원에서 열린 "언교의 자유" 연설회에서 공교 운동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공자 학설은 교육일 뿐이고, 정치일 뿐이고, 도덕일 뿐이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길 수 없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죽음에 대해서 묻자 '아직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것은 공자 자신이 스스로 종교에 대하여 이미 한계를 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반드시 그 교주가 하늘의 사자(使者)임을 자칭하고 의식을 만들고 이단을 공격하는 것을 유일한 의무로 해야 하는데, 공자에게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공자는 공자이고, 종교는 종교이다. 양자는 상관이 없다."

차이위안페이는 1917년 초 베이징대학 총장에 부임, 베이징대학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대학 개혁의 원칙으로 '학술 자유, 겸용병호'를 천명하며 학문의 자세에서는 공자의 학문만을 숭상하는 것을 반대했고 사상의 자유와 대학의 학문 발전을 위해 신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교원으로 초빙했다. 또 실용의 목적으로 백화문이 성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항상 백화문을 사용하고, 백화문 사용을 고취했다. 그러나 대학 내의 보수파들은 독존적 지위였던 경서 강의가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백화문 사용을 반대했으며 차이위안페이의 대학 개혁 조치를 "공맹을 뒤엎고 유학을 파괴하고" "고서를 다 없애고 비속한 말을 문자로 쓴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대학 강의 중 중국 철학사에서 공맹을 가르친다. 이미 출판된 책은 후스가 쓴 "중국 상고 철학사 대강"이 있는데, "공맹을 뒤엎는" 주장이 있는지 상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특별 강연을 출판한 것으로는 최혜근(崔惠瑾) 군의 "논어 족정기", "춘추복시"가 있다. 철학 연구회의 량수밍(梁漱溟) 군이 제출한 '공자와 맹자의 차이 문제'와 호호청(胡黙靑) 군이 제출한 '공자 윤리학의 연구 문제'에는 존공의 대목이 많다. 어찌 공자를 뒤엎는다고 말하는가?"

차이위안페이는 대학에서 충분히 공맹의 학을 존중하여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만 <신청년> 잡지에 공자 학설에 대한 비평이 있는 것은 공교회 등이 공자 학설을 빙자해 신학설을 공격했기 때문이지, 처음부터 직접 공자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백화문 사용에 대해서 결코 문언을 폐기하는 것이 아님을 사례를 들어 밝혔다.
"대학 예과에 국문과 한 과가 있다. 기본 교과서는 모범문, 학술문 모두 고문이며, 거기에서 연습하는 글도 모두 문언이다. 본과의 중국 문학사, 서양 문학사, 중국 고대 문학, 중고 문학, 근세 문학, 또 본과 예과 모두 문자학이 있는데, 강의를 편성 인쇄한 것이 모두 문언이다. 베이징대학 월간에도 문언으로 된 작품이 많다."

이렇듯 공자를 숭배하고 유교를 종교로서 대접하는 풍토에 대해 극렬하게 비판했지만, 차이위안페이 역시 유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송대의 성리학에 심취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중시했다. 그는 공자에 대해서도 대단히 존경하는 태도를 나타내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자가 처한 환경과 2천 년 후인 오늘의 차이는 크다. 우리는 공자의 언어가 오늘에도 구구절절 가치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또한 공자의 행위는 오늘날에도 갖가지를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정신생활의 개략을 추상적으로 성, 인, 용의 범위에서 제시했는데, 종교적 미신이 없고 음악에 대한 소양이 있다. 이 점은 완전히 사표라고 할 만하다."

차이위안페이는 공자가 주창한 삶의 성분을 대체적으로 지, 인, 용으로 분석하고 칭송했다. 그는 먼저 지(智)에 관하여 공자의 학문에 대한 자세와 성실함을 칭찬했다.
"공자는 지를 사랑하는 자다. 일찍이 말하기를(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이 있는 데도 일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많이 듣고 선을 택하여 그것을 따랐고, 많이 보고 알았다’고 말했다. 또 ‘많이 들으면 의심이 없고, 많이 보면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다. 또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애지를 알 수 있는데, 조금도 흐리멍텅하지 않고, 결코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차이위안페이는 공자의 인을 단게별로 분석하여 '기점은 친애, 출발점은 많은 사람을 두루 사랑하는 친인, 실행은 '용서'로 한다면서 공자 사상의 인을 '위대함'으로 칭송했다.
"소극적으로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가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서게 해주고, 자기가 달성하려고 하면 남을 달성하게 해주는 것’이다. 공자의 보편적 요구는 '군자는 밥 한 끼 먹을 짧은 시간에도 인을 위배해서는 안 되고, 눈 깜빡할 사이에도 인에 있어야 하고, 발을 헛딛고 아차 넘어지는 순간에도 인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최고점은 ‘백이숙제는 고대의 성인으로,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지사와 인을 가진 사람은 살기를 구하여 인을 해치지 않는다. 살인(신)하여 인을 이룬다’는 것이니,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한편, 차이위안페이는 공자의 청빈과 절제, 의로운 삶에 대한 추구에 대해 '용'이라고 하여 칭송하면서 공자는 용에 대해서는 때때로 절제를 말했다고 한다.
‘작은 데서 참지 못하면 큰일을 망친다’,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을 망치고 육친에게까지 미치니 미혹함이 아닌가?’, ‘용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문란해진다는 것.’ ‘군자가 용기 있고 의가 없으면 문란해지고, 소인이 용기가 있고 의가 없으면 도둑이 된다’, ‘범을 맨손으로 쳐서 죽이고, 황허강을 걸어서 건너면서 죽어도 후회가 없는 자와는 나는 함께하지 않는다. 반드시 일에 임해서 두려워하고 일을 도모하기를 좋아하고 성공하는 자라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얼마나 삼가고 신중한가?

하지만 차이위안페이는 공자에게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공자의 명분 질서 중시를 비판했다. 명분 질서란 서열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공자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려지는 자'를 명백히 구분했다. 또 백성은 임금의 정치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 천경지의라고 생각했으며 백성은 따르도록 해야 하고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중시하는 위정자의 인덕은 위에서 아래에게 주는 은덕의 의미를 지녔다.

역대 중국의 위정자들은 바로 공자의 이 가르침을 백성에게 학습시켜 체제에 순응하도록 해 통치를 용이하게 했다. 따라서 유가 사상은 수양에서는 구구절절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지만, 정치에 이르면 '예'라는 이름으로 상하 관계를 조장하고 우민 정치를 펼치게 한다. 따라서 민국 교육 개혁에서 유교 사상 중 민주 공화 시대에 적응할 수 없는 충군, 존공 등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차이위안페이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차이위안페이의 유교 비판은 신문화운동에 가담한 중국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2천년간 중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유교는 지배윤리로서의 위치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차이위안페이 본인이 유교를 개인적으로 호평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인들은 유교 자체가 중국이 서양보다 뒤떨어지게 만든 원흉이라고 인식했고 급기야 문화대혁명 시기 유교가 심각한 박해를 당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4. 가족

아내들이 일찍 사망해서 차이위안페이는 3번의 결혼을 했다.

베이징대 총장을 맡고 있던 54세 때 33세의 여성과 마지막 결혼을 했다.

첫째부인의 아들 차이우지는 프랑스에서 수의학을 공부했다. 5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둘째부인의 아들 차이바이링은 벨기에 ,프랑스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셋째부인의 딸 차이쑤이앙은 상하이교통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6~8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5. 기타

채식주의자였다고 한다.

6. 참고 문헌


[1] 학생들은 곽 교사가 흉무점묵(胸無點墨: 교양과 지식이 없다.)하다고 조롱하기 위해 잉크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듯하다.[2] 중국 최초의 여학교는 '동방여학촉진회' 회원인 선교사 마리 알더시가 영파(寧波)에 설립한 알더시여자학교(艾迪綏女塾)이다.[3] 실제로 1904년 9월에 호남제일여학당과 숙신여학당이 폐쇄되었고 1907년 2월에는 광동의 철쟁여학이 폐쇄되었다.[4] 마오쩌둥의 두번째 아내인 양카이후이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