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1 15:37:52

광서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중국의 지명 광서(广西)에 대한 내용은 광시 좡족 자치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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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宗 光緒帝
덕종 광서제
파일:813px-Emperor_Guangxu.jpg
묘호 덕종(德宗)
시호 만주어: 암발링우 황디(ᠠᠮᠪᠠᠯᡳᠩᡤᡡ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한호 바다랑아 도로 한(ᠪᠠᡩᠠᡵᠠᠩᡤᠠ ᡩᠣᡵᠣ ᡥᠠᠨ᠌)
칸호 바다르굴투 토로 칸(ᠪᠠᠳᠠᠷᠠᠭᠤᠯᠲᠤ ᠲᠥᠷᠥ ᠬᠠᠭᠠᠨ)[1]
연호 만주어: 바다랑아 도로
한자: 광서(光緒)
중국어: 아이신줴뤄 짜이톈(愛新覺羅 載湉)
만주어: 아이신교로 자이탼(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ᡯᠠᡳ ᡨᡳᠶᠠᠨ)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재첨
영문 Guangxu Emperor
출생 음력 1871년 8월 14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공왕부
사망 음력 1908년 11월 14일 청나라 직예성 순천부 중남해 영대 함원전
능묘 숭릉(崇陵)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재위기간 음력 1874년 2월 25일 ~ 1908년 11월 14일 (34년 263일)

1. 개요2. 생애
2.1. 즉위 배경2.2. 치세2.3. 사망
3. 평가4. 창작물에서

1. 개요

청나라 최초의 방계 혈통 황제.

2. 생애

2.1. 즉위 배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uangxu_Emperor.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Emperor_Guangxu.jpg
도광제(道光帝)의 일곱째 아들 순현친왕(醇賢親王, 혹은 순친왕) 아이신교로 혁현(愛新覺羅 奕譞)의 아들. 어머니가 서태후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모계로 보나 부계로 보나 동치제의 사촌동생이 된다.

청나라의 종법상 원래는 황제 계승 자격이 사실상 없었다. 황제 계승 원칙인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가 원칙이어서 전 황제인 동치제와 항렬이 같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그 다음 항렬인 부(溥)[2]인 사람이 제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정치적인 거나 혈통적인 거나 그가 즉위하는 게 자신에게 더 나으리라고 판단, 항렬을 무시하고 세 살의 어린 조카를 양자로 삼아 그를 황제로 세운다. 즉위한 후, 광서제는 평생 서태후의 횡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버지 순현친왕(1840년 ~ 1891년)은 공친왕과 함께 함풍제 사후의 동치제 정국을 이끌어간 양무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광서제를 서태후의 양자로 준 것도 그의 정치적 거래라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3] 그는 광서제가 즉위한 직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아들인 광서제의 교육에만 힘쓰고 있었지만, 공친왕의 계속된 삽질로 점차 실권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서태후 또한 국가 대사를 우선 그와 상의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순현친왕의 권력 뒤에는 서태후의 묵인이 있었다.

2.2. 치세

1881년, 동태후가 석연찮은 이유로 사망하면서 독살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순현친왕은 바짝 쫄아서 북양 해군 지휘권을 1885년에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891년에 죽을 때까지 서태후의 비위를 계속 맞추었다. 심지어는 이화원 건립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홍장에게 힘을 실어주어 1885년 11월, 독일로부터 정원과 진원을 입수하여 청불전쟁 중 박살난 복건함대를 대신하여 북양함대를 증강하는 등 대대적인 건함경쟁에 나섰다. 북양함대의 위세를 과시하는 과정에서 나가사키 청국수병 폭동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나마 좀 낫다는 아버지도 이러한 판국이니, 무늬만 황제였던 광서제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1887년, 광서제는 16살로 성년이 되었지만 서태후는 섭정을 계속 연장했다. 게다가 서태후의 강권으로 그녀의 조카인 융유황후 예허나라씨(隆裕皇后 葉赫那拉氏)[4]와 결혼해야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는데 광서제는 고집 세고 성격도 나쁜 황후를 싫어해서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애정을 주지 않았다.[5] 서태후를 모셨던 궁녀의 증언에 따르면, 문안 인사를 온 황후가 이제 나가보라는 광서제의 말을 듣고도 침전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격노한 광서제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침전 밖으로 끌어냈을 정도였는데, 이게 광서제가 붕어하기 10일 전의 일이었다.
파일:external/img.tv.cctv.com/IMAG1239844275894863.jpg
진비
결국 애정 없는 결혼에 지쳐가던 광서제는 후궁인 각순황귀비 타타라씨(恪顺皇贵妃 他他拉氏), 즉 진비(珍妃)를 총애하게 된다.[6] 진비는 처음엔 뛰어난 재능으로 서 태후의 총애를 받았지만[7], 광서제에게 강한 황제가 되라고 부추기는 등 서태후와 갈라지면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8] 하도 어른스러워서 "진비 할망구"라는 조롱을 서 태후에게 들었을 정도. 남장을 자주하는 여장부이기도 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으며, 황제가 외국어를 배우거나 개혁을 추진하는데도 많은 부분을 조언했다. 광서제는 그런 진비를 더욱 총애했고, 그녀에게 "천자인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라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고 한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 도중에 북경을 탈출하면서 우물에 던져졌다. 현실은 시궁창[9]

1894년 6월부터 1895년 5월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이홍장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 條約)을 끝으로 청의 완패로 끝났다. 청은 일본에게 1년 예산의 2.5배나 되는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 섬과 펑후(澎湖) 섬, 요동 등을 할양했다. 특히 북양함대가 전멸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양무 운동이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Guangxu-Emperor.jpg
이에 당시 막 성인이 된 광서제는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담사동(譚嗣同) 등의 소위 '변법파'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10] 일시적으로 서태후의 협력을 얻어 헌법 제정, 국회 개설, 과거제 개혁과 서양식 학교 설립, 산업의 보호/육성 등을 진행한 이 운동은 당연히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고, 서태후도 이를 인식하여 변법자강운동에 부정적이게 된다. 결국 궁지에 몰린 광서제는 강력한 힘을 가진 군벌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여서 보수파를 억누르려 했지만...

도리어 위안스카이가 X맨으로 드러났다.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에게 광서제가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밀어내려 한다고 밀고한 것이다. 변법자강운동은 좌절되었고, 광서제는 이후 죽을 때까지 자금성에 유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변법 자강 운동의 주도자인 담사동은 사형되었고, 강유위, 양계초 등은 국외로 망명했다. 이를 100일 천하라고 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서 태후는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부준을 황제로 옹립한다.

광서제는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열강 연합군이 베이징을 습격할 때 잠시 시안(西安)으로 탈출했지만, 그 사이에 진비가 서태후에게 주살된다.[11] 마침내 1901년, 열강 연합군과 의화단에 협력한 청나라 정부 사이에 화약 이라고 쓰고 항복 문서라고 읽는 이 성립되었고, 광서제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유폐 생활이 계속되었다.

2.3. 사망

1908년, 그는 37살의 나이로 붕어한다. 갑작스러운 급서를 두고 청나라 정부는 광서제가 오랫동안 앓아왔던 지병[12] 때문에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사망 당시부터 독살설이 널리 퍼졌고, 이후 백년이 지난 2008년에 중국에서 광서제의 능을 공식적으로 발굴해 광서제의 유골과 머리카락 일부를 X선 투과법으로 조사해 본 결과 다량의 비소 성분이 발견되어 최종적으로 독살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독살의 배후로는 서태후위안스카이가 유력하다.

어쨌든 광서제가 사망하자 서 태후는 광서제의 3살짜리 조카인 푸이를 다음 황제로 지목하고 이 아이가 선통제가 된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어린아이를[13] 황제로 만드는 무리수를 두면서 섭정을 계속 유지하려던 서태후도 아이러니하게 광서제가 죽은 뒤 이틀 후 급작스럽게 그를 따라 죽었다.

광서제는 붕어한 후 숭릉(崇陵)에 안장되었다. 후임 황제 선통제는 묘호[14]도 비공식적으로 받은 것이고, 능호 역시 없기에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묘호를 받고 황릉에 안장된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가 마지막이다.

광서제의 재위기간은 조선대한제국의 고종(高宗,1864~1907)과 순종(純宗,1907~1910)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3. 평가

서태후로 인해 인생 자체가 불행했던 인물이다. 무려 34년 간 청나라의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37년의 짧은 인생을 살고 요절했다. 특히 모든 것을 서태후에게 통제당하며 산데다 황제가 되었어도 실권을 서태후한테 거지반 다 빼앗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변법자강운동 외에는 없었다. 나중에는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평생을 갇혀살다가 죽었다. 게다가 그가 즉위할 때 그나마 눈꼽만큼이라도 가망이 있었던 청나라는 그가 죽을 무렵에는 사실상 멸망 직전에 놓이게 된다. 광서(光緒), 즉 '빛나는 후계'라는 연호가 무색할 정도이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 등을 보면 결코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지. 같은 꼭두각시여도 동치제와 다른 점은 그 부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청나라 개혁의 의지 때문에 사후를 걱정한 서태후에 의해 독살을 당한다.

물론 변법자강운동이 완벽한 근대화의 성공을 보장할 순 없었겠지만, 적어도 청나라의 멸망을 늦추고, 최소한 신해혁명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패배가 보여주었듯이, 강력한 보수파의 거두인 서태후가 살아있는 한, 청나라의 근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명줄만 처 길어가지고... 한 1주일만 먼저 뒈지지 그래봤자 먼저 독살당한다

또 비슷하게 비유되는 갑신정변이 그렇듯,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적은 인구를 가진 조선만 해도 극심한 반발과 혼란으로 나라가 요동쳤던 판인데, 다민족에다가 당시 이미 수억 명의 인구를 자랑한 청나라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서태후가 처음엔 지지했지만, 이후 철회한 것도 이런 무리한 개혁의 위험성과 실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며, 실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강제로 군주가 되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고 요절했다는 점에서 청나라판 철종이라고 볼 수 있는 황제다.

4. 창작물에서

신 중화일미 애니메이션에서는 고증에 맞지 않게 상당한 뚱뚱보에, 복식도 이전의 한족 왕조의 황제들이 입었던 한푸, 정확히는 곤복과 비슷한 옷과 면류관의 차림으로 등장한다.
  • 천공의 옥좌에서는 가상의 나라 덕나라의 황제가 나오는데 황태후의 양자가 되어 황제가 되고 충신들과 같이 황태후를 내치려다 주인공의 오라버니(환관)가 결정적 상황에서 배신을 하여 결국 유폐(자금성 중난하이)+강제결혼(황태후쪽사람)까지 하고 그 여파로 자유롭지 못하는데 광서제와 나라와 이름 성씨 태어난 과정, 그리고 어이없게도 허수아비인 상태라도 "국정 최종결정자" 이지만 의협 일지매로 나오면서 백성을 구하는 일을 제외하면 전개과정은 광서제와 똑같다.


[1] Badarɣultu Törö. 현대 몽골어로 Бадаргуулт төр хаан (Badarguult Tör Khaan)[2] 다음 황제인 선통제가 이 항렬이다.[3] 어떻게 보면 바로 12년 전에 있었던 이하응과 조 대비의 거래(이명복은 효명세자의 양자로서 즉위했다.)와도 흡사하다. 물론 역량은 12년 앞선 흥선대원군이 훨씬 컸다. 서태후보다 조 대비가 권력욕이 덜했던 탓도 있지만.[4] 1868년 ~ 1913년. 본명은 예허나라 징펀(葉赫那拉 靜芬). 서태후의 조카로, 광서제에게는 사촌 누나가 된다. 광서제 사후 태후로 봉해졌고 선통제 때 섭정을 맡았다.[5] 특히 융유황후는 후비들을 괴롭히고 남편인 광서제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기에 광서제가 더욱 미워했다.[6] 1876년 ~ 1900년. 본명은 타타라 서설(他他拉 瑞雪).[7] 애초부터 진비는 서태후가 정해준 후비였다.[8] 서 태후의 그녀에 대한 미움은 엄청나서, 조카인 융유 황후를 시켜 진비의 뺨을 서슴없이 때리는가 하면, 나중에는 아예 창문 하나 외에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 감금시켰다. 게다가 매달 초하루와 15일, 그리고 축제 분위기로 온통 들떠있는 명절 점심 시간에 태감들을 보내 그녀를 욕하고 괴롭혔다. 특히 진비를 증오하는 융유 황후도 같이 괴롭혔다.[9] 가족들이 그녀의 시신을 건져올릴 때도 광서제는 차마 나타나지 못했다(...). 진비가 생전에 썼던 낡은 휘장 하나를 슬쩍 가져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광서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10] 이 운동은 1898년(무술년)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무술변볍(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11] 이 때 진비 역시 유폐되어 있었는데, 서태후는 "너무 예뻐서 함께 탈출하다가 외적에게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진비에게 자결을 종용했다. 향년 24살. 일설에는 진비가 황제를 자금성에 남겨 연합군과 협상을 통해 서태후 일당을 일소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를 우려한 서태후가 "너 먼저 우물에 빠지면 나도 따라서 빠지 마"라고 설득한 다음 유유히 피난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말이 설득이지, 사실은 진비가 자살 강요를 거부하자 빡친 서태후가 쟤 죽여버리라며 고함을 지르자 반항하는 진비를 환관 최옥귀가 강제로 우물에 밀어넣어 죽였던 것. 후일 서태후는 "내가 화낸 건 맞지만 죽이라고 했던 건 아님'ㅅ' "이라며 딱 잡아뗀 뒤, 최옥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출궁시켰다(...).[12] 실제로 광서제는 몸이 약해서 그가 관련된 처방이 182개에 달할 정도로 잔병이 잦았다.[13] 실제 푸이의 아버지 순친왕은 1951년까지 살아남는다.[14]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憲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2004년에는 공종(恭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