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후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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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륭제의 후궁 숙가황귀비 | 淑嘉皇貴妃 | ||||
생몰년도 | <colbgcolor=#fff,#1f2023>1713년 9월 14일 ~ 1755년 11월 17일(42세) | |||
시호 |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 | |||
지위 | 격격⇒귀인⇒가(嘉)빈⇒가비⇒가귀비 | |||
성 | 김(金)씨⇒금가(金佳)씨[1] | |||
가계 | 고조부 김덕운(金德雲) 증조부 김삼달리(金三達理) 조부 김상명(金尙明) 아버지 김삼보(金三保) | |||
부군 | 건륭제 | |||
자녀 | 황4자, 황8자, 황9자, 황11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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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가황귀비 김씨(淑嘉皇貴妃 金氏) 혹은 금가씨(金佳氏)는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의 황귀비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4황자 영성(永珹), 8황자 영선(永璇), 9황자 영유(永瑜), 11황자 영성(永瑆) 네 아들을 낳았으며, 사후 효현순황후 부찰씨, 효의순황후 위가씨, 혜현황귀비 고가씨, 철민황귀비 부찰씨와 함께 건륭제의 능인 유릉에 합장되었다.2. 생애
건륭제가 청나라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보친왕(寶親王) 시절 왕부에 격격(格格)으로 입궁하였고 건륭제가 즉위하자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건륭 2년, 1737년 6월 8일 귀인에서 빈(嬪)으로 진급하였는데, 이때 내각 전적청에서 봉호로 영(令),[2] 완(婉), 가(嘉), 수(粹) 네 글자를 올렸는데 건륭제는 이 중 가(嘉)를 선택했다고 한다.1739년(건륭 4년) 정월 14일에 건륭제의 제4황자 영성이 태어났다. 1741년 2월 13일 숭경황태후 뇨후루씨의 의지를 받들어 가비(嘉妃)로 책봉됐다. 같은 해 2월 16일, 정3품 무비원경(武備院卿)이었던 김삼보가 가빈봉지책립(嘉嬪奉旨冊立)을 위한 사은절을 올렸고, 가비를 그의 장녀로 언급했다.
1746년(건륭 11년) 7월 15일 오후, 제8황자 영선을 낳았다.
1748년(건륭 13년) 7월 초하루에 건륭제는 출산을 앞둔 가비를 귀비(貴妃)로 진봉하였다. 같은 해 7월 9일에 제9황자 영유가 태어났다. 1749년(건륭 14년) 4월 5일에 정식으로 가귀비로 책봉되었다. 예부는 원래 혜현황귀비(慧贤皇贵妃) 고가씨(高佳氏)의 초봉귀비례에 따라 예물을 받을 계획이었으나, 건륭제는 가귀비가 건륭 10년의 현귀비와 순귀비인 진봉 귀비의 예우에 따르도록 하였다.
1752년(건륭 17년) 2월에 황제의 11남 영성을 낳았고, 7월 25일에 가귀비 사십천추에 예은대로 물품 팔십점을 하사하였다. 같은 해 10월 17일, 계황후 휘발나랍씨, 유릉지궁을 순시했다. 가귀비의 아들은 황위 계승자 명단에 들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55년(건륭 20년) 11월 15일 가귀비 김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건륭제는 그녀를 황귀비로 추서하고, 11월 17일 숙가황귀비로 시호를 내렸으며, 관은 잠시 정안장 빈궁에 안치하였다.
후에 가경제는 가귀비 김씨의 소속을 만주 상삼기(양황기인지 정황기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음)의 기분 니루로 변경하고 '금가'(金佳)라는 만주 성씨를 하사하였다. 일가의 기적 변경은 가귀비의 세 아들들이 모두 화석친왕과 다라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명색에 친왕인 그들의 외가를 포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3. 가계
숙가황귀비의 증조부 삼달리는 조선 의주 출신으로 정묘호란 때 의주가 후금군에 함락되어 포로로 붙잡히자 후금으로 귀화하였다고 한다. 조부인 김상명은 조선 경종 시기 연잉군의 세제 책봉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형제인 김간(金簡)은 건륭제의 중신으로 이부상서를 지냈고, 본인의 조선혈통을 활용하여 대(對)조선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4. 대중매체에서
- 여의전에서 신지뢰가 연기하였다. 여의전 초중반부의 보스이다. 자신의 황자를 황위에 올리려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여의전의 소설판에서 조선이 바친 공녀로 각색되었는데[6], 드라마에서는 북국 출신으로 바뀌었다. 성씨 역시 만주족 성씨인 금가씨가 아니라 김씨로 나온다. 자세한 건 김옥연 문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