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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州郡 / Ŭiju County
일제강점기 의주시가지의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모습 | 일제강점기 의주시가지의 모습[1] |
의주군 義州郡 / Uiju County[2] | ||
국가 | 북한 | |
광복 당시 면적 | 1,677㎢ | |
현재 면적 | 420㎢ | |
광역시도 | 평안북도 | |
광복 당시 행정구역 | 1읍 12면 | |
인구 | 110,018 명 | |
시간대 | UTC+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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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주읍성의 사실상 유일한 흔적인 의주남문 '장변루'의 모습 |
평안북도 서북쪽에 위치한 군. 한 때는 평안도 3대 도시 중 하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 직후까지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흥했던 조선 제1의 무역도시였다. 별칭은 만부(灣府).[3]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이웃한 국경지대이며 역사적으로도 지금도 북한과 중국 사이의 주 무역통로 중 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2. 역사
예로부터 한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중요했던 요충지이다. 고려시대에도 압록강의 검동도(黔同島)에 요충지인 내원성(來遠城)이 위치해 있었다. 내원성은 삼국시대 고구려부터 존재하였던 성이었으며 남북국시대에는 발해의 관할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후 고려 대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요나라에 속하게 되었다.제1차 여요전쟁 때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가 고려에 속하게 되었지만, 내원성까지 차지하지는 못하고 내원성보다 남쪽에 위치한 흥화진(의주군 위원면)이 강동 6주의 북쪽 경계였다. 내원성은 여진족과 북송의 통교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요나라가 관할하고 있다가, 금나라가 요를 멸망시킬 때 쯤에야 고려가 점령하게 된다.[4] 또 여요전쟁 당시 요는 강동 6주 탈취를 위해 내원성에서 압록강 건너 압록강 좌안에 보주성(保州城)[5]을 쌓았는데, 역시 운명은 내원성과 같았다. 그리고 요를 멸망시키고 세운 여진족의 금은 사대를 조건으로 고려가 두 성을 점유하는 걸 인정하면서 의주 일대가 확실하게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의주목으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머물렀다는 이유 등으로 '부'로 승격되어 1910년 경술국치 당시까지 의주부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 제1관문, 해동제일관 의주성(영상)
위치 특성상 여몽전쟁, 정묘호란 등 북방민족에게 침략당했던 전쟁에선 제일 먼저 점령당했다. 반면 조선 선조 시절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는 최후방이었고, 선조가 피난간 지역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군사적 요충성과 무역거점으로 융성했던 것으로 인해 국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지방행정 단위였던 부(府)[6]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관찰사와 동급이었던 종2품 부윤(府尹)이 관할하였다.
과거에는 신의주시까지 포함하였던 지방이다. 전통적으로 의주읍은 중국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해 왔으나,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의선이 놓이게 되면서 신의주-단둥시 간 교통로가 발달하며 관문 역할은 신의주에게 내주고 오히려 신의주의 위성도시 역할로 변모했다. 2008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의주군의 인구는 약 11만명으로, 군 단위 지역치고는 인구가 적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번성했던 역사에 비하면 현대의 의주는 확실히 쇠락했다.[7]
3. 기타
교통은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덕현선만 지나간다. (신의주가 떨어진 이후에도 백마선이 지나갔으나 북한의 조정으로 피현에 떨어져 나갔다.) 덕현선은 압록강을 따라가지만 평북선과 접속되지 않는다.의주 지역의 유적으로는, 관서팔경 중 하나인 '통군정'과 '의주읍성 남문'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는 의주읍 일대에 수백채의 한옥들과 의주행궁, 그리고 관아들이 남아있었지만 6.25 전쟁 당시 의주폭격으로 모조리 불타서 사라졌다.
서울특별시의 의주로(義州路)는 이 곳의 이름을 딴 길이다.
의외로 양반의 고을이다. 논어, 맹자 등 옛 경전을 운율에 맞춰 성독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사투리가 의주 지역의 사투리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이상적인 사투리는 안동 사투리(동남 방언)라고 한다.
2017년 국가직 9급 한국사 과목에서 의주사(史)에 관한 단독 문제가 나왔다.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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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내면의 병합 시기와 관련해 견해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조선총독부령 297호에 의해 병합되었다고 하는데,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조선총독부령 297호를 찾아보면 조선해운조합령 시행규칙이 나와 실제 기록을 확인해보기가 어렵다. 한편 조선향토대백과에서는 광복 직후 주내면에 병합된 것으로 나온다.
광복 당시 면적 1,677㎢, 1읍 12면이었다. 압록강에 면한 읍면은 *표시한다.
- 의주읍(義州邑)*
- 관할 동 : 동부(東部), 서부(西部), 향교(鄕校), 구성(舊城), 남문(南門), 동외(東外), 서호(西湖), 원화(元化), 청전(靑田), 홍북(弘北), 홍서(弘西), 홍남(弘南), 다지(多智), 어적(於赤)
- 군청 소재지는 향교동, 읍소재지는 동부동이다. 원래 의주면과 주내면(州內面)으로 나뉘어 있었다가, 1931년 의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43년 주내면이 병합됐다. 광복 직후 면으로 강등되었으나 이북5도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했던 곳이며, 1907년~1921년 사이에는 평안북도 도청소재지이기도 했었다. 의주 남대문, 통군정(統軍亭) 등의 고적, 구 양실학교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 압록강의 하중도인 검동도(행정구역상 다지리. 북한명 다지도), 어적도 또한 의주읍 소속으로서 관할하고 있었다.
- 가산면(加山面)*
- 관할 동 : 옥강(玉江), 도령(都嶺), 방산(方山), 이송(梨松), 천감(泉甘), 추(楸)
- 고관면(古館面)
- 관할 동 : 관(館), 관북(館北), 남산(藍山), 남창(南昌), 노(蘆), 동(東), 동상(東上), 상고(上古), 상단(上端), 서하(西下), 용화(龍化), 이화(梨花), 중고(中古), 중단(中端), 춘곡(春谷), 하단(下端)
- 2000년대 동상동 부근에 삼교천(三橋川, 일명 書狀江)을 막은 댐이 만들어져 그 상류 용화동·상고동 등 일부지역이 수몰되었다.
- 고령삭면(古寧朔面)
- 고성면(古城面)*
- 관할 동 : 인하(烟下), 가로(加老), 대산(臺山), 용문(龍門), 용산(龍山), 인상(烟上), 정주(正州)
- 의주읍과 신의주시 사이에 위치한다.
- 광평면(廣坪面)*
- 관할 동 : 청성(淸城), 부평(富坪), 불정(黻汀), 상광(上廣), 판막(板幕), 하광(下廣)
- 북한 행정구역상 한때 존재했던 청성군 소재지.
- 비현면(枇峴面)
- 관할 동 : 체마(替馬), 광상(廣上), 광중(廣中), 광하(廣下), 구룡(龜龍), 기봉(岐峰), 노남(蘆南), 노북(蘆北), 노중(蘆中), 당후(堂後), 도봉(道峰), 마산(馬山), 산대(山臺), 영평(永平), 원(院), 장생(長生), 정산(亭山), 홍희(弘希)
- 북한 행정구역상 피현군 소재지.
- 송장면(松長面)
- 관할 동 : 금광(金光), 강정(江井), 남산(南山), 대문(大門), 사산(社山), 설매(雪梅), 소수(小水), 송산(松山), 연무(燕武), 영달(永達), 운천(雲川), 창원(昌元)
- 수진면과의 경계에 있는 금강산(524m, 일명 석승산, 석숭산(石崇山))은 의주금강이라 불리며, 건립연대 미상인 금광사(金光寺, 일명 금강사)가 지금도 남아 있다.
- 수진면(水鎭面)*
- 옥상면(玉尙面)
- 관할 동 : 당목(棠木), 남사(南社), 내옥(內玉), 북사(北社), 삼상(三上), 삼하(三下), 상경(上庚), 어상(於上), 어중(於中), 좌(佐), 하경(下庚)
- 면 동부 산지에서 발원하는 당목천(棠木川)이 가산면으로 흐른다.
- 월화면(月華面)
- 관할 동 : 취봉(鷲峰), 마룡(馬龍), 마흥(麻興), 우천(牛川), 운천(雲川), 월하(月下), 장무(長武), 정산(亭山), 주음(奏音), 추(楸), 화하(化下), 화합상(化合上), 화합하(化合下), 회상(檜上), 회하(檜下)
- 위원면(威遠面)
- 위화면(威化面)
고진면(古津面)- 신의주시 동부에 있던 면. 1941년 신의주부에 편입돼 폐지됐다.
광성면(光城面)
5. 출신 인물
- 고병간(평안북도 의주군)
- 고병국(평안북도 의주군)
- 김득황(평안북도 의주군)
- 김묵(평안북도 의주군)
- 김승학(평안북도 의주군)
- 김신재(평안북도 의주군)
- 김창순(평안북도 의주군)
- 박승준(평안북도 의주군)
- 백철(평안북도 의주군)
- 신언한(평안북도 의주군)
- 유창근(평안북도 의주군)
- 이기건(평안북도 의주군)
- 이봉수(기업인)(평안북도 의주군) [8]
- 이세웅(평안북도 의주군) [9]
- 이정선(평안북도 의주군)
- 장덕창(평안북도 의주군)
- 장준하(평안북도 의주군)
- 장철(평안북도 의주군)
- 최창봉(평안북도 의주군)
[1] 현재의 의주군과 비교하면 전성기 시절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속 일제강점기의 의주는 외국문물이 활발하게 들어오며 기와집들이 빽빽히 들어서있던 번영하는 도시였다. 그러나 의주의 이런 전성기는 일제강점기 초 신의주의 성립으로 인해 사실상 종식되었다.[2] 과거 19세기 경에는 "Wiju"라는 표기도 통용되었다.[3] 여기서 따온 이름이 의주부 상인을 일컫는 만상이다. 개성부의 송상, 평양부의 유상, 동래부의 내상, 한성부 경강상인과 더불어 한국사 단골 출제 문제다.[4] 참고로 성을 점령한 경위가 좀 웃긴데, 고려 예종대에 성을 지키고 있던 요나라의 통군(統軍) 야율녕(耶律寧)과 내원성자사(來遠城刺史) 상효손(常孝孫)이 금나라의 공세가 심해지자 고려에 "성을 잠시 맡길 테니 나중에 다시 돌려달라"고 당부하고 나서 바닷길로 탈출했고, 고려는 주인이 없는 성을 그대로 접수했다. 물론 요나라가 내원성을 돌려받을 일은 영원히 없었다(...).[5] 후의 포주성(抱州城)[6] 평양과 동급이었다(!).[7] 사실 원래 의주의 중심지는 신의주 지역이였던 만큼 옛날 중심지로 돌아갔다고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신의주도 행정구역상으로만 별개이지 의주 권역에 속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권역 자체로 보면 아직도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는게 맞다.[8] 李奉守, 1916~2000년 5월 14일 소천 신일고등학교 설립자, 아들 이세웅(李世雄)은 제16대 평안북도지사 역임[9] 이북5도위원회 제16대 평안북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