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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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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州市
Jŏngju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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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재지 <colbgcolor=#fff,#000000> 미상[1]
지역 관서
면적 473.2㎢
하위 행정구역
14동 18리
인구 189,742명[A]
인구밀도 명/㎢
책임비서 파일:wpk.jpg
인민위원장 파일:wpk.jpg

1. 개요2. 역사3. 여담4. 북한 기준 행정구역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5.1. 옛 정주목(정주군) 지역5.2. 옛 곽산군 지역
6. 출신 인물

[clearfix]

1. 개요

정주, 2012년초[3]

평안북도 서남부 해안에 있는 시. 면적은 473.2㎢에 총 14동 18리로 이루어져 있으며[4], 곽산군, 구성시, 태천군, 운전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총 189,742명으로, 도시부에 102,659명, 농촌부에 87,083명이 거주했다.

정주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해안은 갯벌과 섬이 많다.

평양시, 선천군과 함께 개신교 특히 장로회의 세력이 강했으며, 근대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를 설립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오산중고등학교는 서울 용산구에 있다.

한편 경의선, 평북선이 지나가며, 정주역은 경의선과 평북선이 갈라지는 역이자 서울에서 출발하는 국제열차가 정차하는 주요역이기도 했었다. 남북통일 이후 경의고속철도 정차역이 들어서기로 계획돼 있어, 신의주시에 이은 평북 제2의 도시로 성장이 기대된다.

2. 역사

고구려 만년군, 발해 서경압록부에 속했다.[5] 그 후 이민족이 점거하다가 다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초 서희가 설정한 강동6주 중 한 곳이 곽주로, 정주군 곽산면 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북계(北界)에 속하였고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등극 전 봉지가 정주였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평안도에 속했다. 정주성은 홍경래의 난 때 홍경래군의 최후 거점이기도 했으나 1812년 4월 19일 진압되었다. 1895년 23부제 시절에는 의주부에 속했고,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평안북도 관찰부(도청)가 설치되어 도청 소재지이기도 했으나, 1897년 영변[6]으로 이전했다.[7]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교통 요지가 되었다. 1931년 4월 1일 정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 정주읍을 묘사한 소설 구절이 있다.
읍내 한 오백 호 중에 이백 호 가량은 일본 사람이요, 면장도 일본 사람이었다. 읍내에 들어서면서 제일 높은 등성이에 있는 양철지붕 한 집이 아사히라는 창루다. 이것은 숭이가 어렸을 적부터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 담에 큰 집은 군청, 경찰서, 우편국, 금융조합, 요릿집 등이었다. 보통 조선 사람 민가는 태반이나 초가집이었다. 그래도 전등도 있고 전화도 있고, 수도도 공사중이다. 전화 칠십 개 중에 조선인의 것이 십칠이라고 한다.
이광수, 《》 중[8]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곽산군을 흡수통합하였는데, 8.15 광복 이후 1952년북한에서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다시 곽산군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북5도위원회는 해방 당시의 행정구역을 따르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광복 당시 정주군은 1읍 12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광복 직후 정주읍이 정주면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광복 후 소련군정을 거쳐 북한 치하로 들어갔다. 1950년 10월 31일 유엔군대한민국 국군이 탈환했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11월 26일 다시 함락되었다. 북한 치하에서 정주군은 1994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3. 여담

아래 출신 인물 문단에서도 보듯, 예로부터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작은 서울"이라는 별칭이 있었다.(#1 #2)

개신교 신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한반도 내에서 가장 높았던 평안도 안에서 특이하게도 가톨릭 신자들도 꽤 많았던 고장이기도 하다. 장준하 선생의 아내 김희숙 여사가 남편과는 달리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9], 정주 지방의 가톨릭교 분위기는 현재와는 다르게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타 종교 신자와 결혼하면 배교한 걸로 치부되어 지탄을 많이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희숙 여사 본인도 개신교 신자인 장준하 선생과 결혼한 탓에 실제로 1년동안 모친이 성당 출석을 금지까지 당했을 정도였다고. 그 밖에 정주 출신 엘리트이자 오랫동안 사상계 핵심 주필로 활동했던 신상초 또한 가톨릭 신자였다. 물론 지금은 국가 무신론 국가인 북한답게 명목상으로만 남아있는 정도로 종교를 막론하고 탄압 중이다.

4. 북한 기준 행정구역

총 14동 18리로 이루어져 있다.
  • 동: 성남동(城南洞), 북장동(北將洞), 역전동(驛前洞), 달천동(獺川洞), 서주동(西州洞), 삼마동(三馬洞), 상단동(上端洞), 신천동(新川洞), 오산동(五山洞), 오룡동(五龍洞), 고현동(高峴洞), 룡포동(龍浦洞), 애도동(艾島洞), 남철동(南鐵洞)
  • 리: 서호리(西湖里), 보산리(寶山里), 남호리(南湖里), 남양리(南陽里), 월양리(月陽里), 침향리(沈香里), 신봉리(新峯里), 세마리(細馬里), 일해리(逸海里), 흑록리(黑麓里), 대산리(大山里), 석산리(石山里), 오성리(五星里), 원봉리(圓峯里), 대송리(大松里), 신안리(新安里), 암두리(岩頭里), 독장리(獨將里)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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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 도청소재지 : 신의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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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군
定州郡
Jeongju 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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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4223F><colcolor=#ffffff> 군청 소재지 정주읍 성내동
상위 행정구역 평안북도
하위 행정구역 1 12
면적 827.71km²
인구 189,742명(2008년)
인구밀도 1,996.37/㎢(2008년)
명예 군수 승인호 (제22대)
명예 읍면장 13석
홈페이지 이북5도위원회 정주군 소개




파일:정주군.jpg

5.1. 옛 정주목(정주군) 지역

  • 정주읍(定州邑)
    • 관할 동 : 성내(城內), 덕산(德山), 서주(西州), 성외(城外)
    • 1914년 동부면(東部面)과 서부면(西部面)을 병합하여 읍부면(邑部面)을 신설하였고, 1918년에 정주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1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배후지인 산에는 정주읍성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철도로는 경의선 정주역이 있다.
  • 갈산면(葛山面)
    • 관할 동 : 정양(鼎陽), 광동(光東), 서남(瑞南), 용흥(龍興), 익성(益城), 일해(逸海), 흥록(興麓), 애도(島)
    • 1914년 갈지면(葛池面)과 오산면(五山面), 가산군 군내면 애도리로 신설되었다.경의선 고읍역[10]이 있으며, 해안 평야지대로 그 앞바다엔 애도, 윤소리도, 붕배도, 운무도 등의 섬이 있다. 애도는 북한 치하에서 노동자구로 승격되다 정주시가지에 포함되며 애도동으로 격하(로동자구 참조)될 정도로, 위성사진으로 보아도 민가가 많다.
    • 제석산, 자성산 등 5개의 산(국민일보 정철훈 기자에 따르면 독장산, 봉명산, 묘두산, 임해산 등이 있다고...)이 있으며 지금 서울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의 발상지다.
    • 익성동은 독립운동가 이승훈과 시인 백석의 고향이다.
  • 고덕면(古德面)
    • 관할 동 : 월훈(月暈), 갈현(葛峴), 관해(觀海), 덕원(德元), 운평(雲坪), 일신(日新)
    • 본래 고읍면(古邑面)으로 조선 초 정주읍 지역으로 관아가 이동하기 전까지 정주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1914년 덕암면(德巖面)을 병합하였고 1931년 고덕면으로 개칭되었다.
  • 고안면(高案面)
    • 관할 동 : 소암(小巖), 대양(大陽), 독장(獨將), 봉명(鳳鳴), 송정(松亭), 송포(松浦), 심천(深川), 안흥(安興), 어호(漁湖), 연봉(延鳳), 용포(龍浦), 탄우(灘隅)
    • 1931년 고현면(高峴面), 신안면(新安面), 동주면(東州面)을 병합하여 고안면이 되었다. 군의 북동쪽 끝에 있으며 평북선 철도와 국도로 구성군으로 통한다. 명승지로 봉명동의 심원사, 봉명저수지가 있다.
  • 남서면(南西面)
    • 관할 동 : 남양(南陽), 남호(南湖), 보산(寶山), 상단(上端), 서호(西湖), 하단(下端), 화산(華山)
    • 1931년 남면(南面)과 서면(西面)을 병합하여 남서면이 되었다. 남쪽으로 황해와 접한다. 철도는 경의선 하단역이 있다.
  • 대전면(大田面)
    • 관할 동 : 운전(雲田), 강서(江西), 대흥(大興), 운산(雲山), 운학(雲鶴), 운흥(雲興)
    • 1914년 대명면(大明面)과 운전면(雲田面)을 병합하여 대전면이 되었다. 북한 행정구역상 운전군 옛 소재지.[11] 박천군 방면으로 경의선이 통한다. 참고로 한자가 대전광역시와 같다.
  • 덕언면(德彦面)
    • 관할 동 : 대성(大成), 대산(大山), 덕성(德星), 방천(防川), 석산(石山), 신창(新倉), 원봉(圓峰), 육성(六星), 증봉(甑峰), 침향(沈香)
    • 1931년 덕달면(德達面), 이언면(伊彦面), 아이포면(阿耳浦面)을 병합하여 덕언면이 되었다. 서남쪽 일부 지역은 황해와 접한다.
  • 마산면(馬山面)
    • 관할 동 : 청정(淸亭), 동창(東倉), 신오(新五), 옥야(玉野), 원동(院東), 원서(院西), 춘산(春山)
    • 1914년 서원면(西院面)을 편입하였다. 면소재지 청정동에 있는 납청(納淸)시장이 유명했는데, 방짜 유기(鍮器)로 유명했고 한편으로 이곳 국수는 잘 쳐서 질겼다고 한다. 그래서 되게 얻어맞거나 눌려 납작해진 사람이나 물건을 납청장으로 비유하기도 했으며 국어사전에까지 올랐다. 참고로 한자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과 같다.

5.2. 옛 곽산군 지역

  • 곽산면(郭山面)
    • 관할 동 : 염호(鹽湖), 남단(南端), 석(石), 조산(造山)
    • 본래 곽산군 군면(郡面)으로 1914년 정주군 편입 당시 곽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및 북한 행정구역상 곽산군 소재지. 명승지로 능한산(421m)[12] 기슭에 있는 능한산성이 있다.
  • 관주면(觀舟面)
    • 관할 동 : 초장(草庄), 관삽(觀揷), 근담(近潭), 주학(舟鶴)
    • 본래 곽산군 관면(館面)과 우면(雩面)으로 1914년 정주군 편입 당시 관주면이 되었다
  • 안흥면(安興面)
    • 관할 동 : 안의(安義), 삼단(三端), 암죽(巖竹), 임암(林巖), 호현(好峴)
    • 군의 서쪽 끝이며 동래강을 경계로 선천군과 접한다. 본래 곽산군 남면과 서면 지역이었다.
  • 옥천면(玉泉面)
    • 관할 동 : 문인(文仁), 군산(君山), 당하(堂下), 상단(上端), 월옥(月玉)
    • 본래 곽산군 북면으로 1914년 정주군 편입 당시 옥천면으로 개칭되었다. 군의 서북쪽에 있다. 동래강을 경계로 선천군과 접한다.
  • 임포면(臨浦面)
    • 관할 동 : 원단(元端), 고성(古盛), 동로(東路), 염호(濂湖), 원포(遠浦), 원하(元下), 천태(天台), 장도(獐島)
    • 1931년 임해면(臨海面)과 해산면(海山面)을 병합하여 임포면이 되었다. 남쪽으로 황해가 있는 해안 평야 지대이며 이후 해안을 간척하였다.
    • 앞바다에는 내장도, 외장도, 장도, 관도, 달양도, 대간도 등등의 섬이 많다. 광복 당시와 해안선이 상당히 달라져 현재 구글 어스 위성사진으로 보면 내장도와 외장도는 하나의 섬이 되었고, 내·외장도와 달양도를 잇는 선 이북의 섬들은 모두 육지와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도 섬인 것은 대간도 이남의 섬들.

6. 출신 인물


[1] 조선향토대백과는 구 정주읍에 '성남동, 북장동, 역전동, 달천동, 남철동'이 설치되었다고 언급한다.[A] 통계청 북한통계(2008년).[3] 제목은 '안주'의 근처라고 하나 33초 부근에 '정주시직매장'이라는 상점이 보인다. 사실 안주시와 정주시 간 거리도 그리 멀지는 않고, 이북5도 기준으로는 서한만을 사이로 두고 접해 있다.[4] 광복 당시 면적 828㎢, 1읍 12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 신라 말 대호족 유천궁이 할거한 정주(貞州)는 이곳과 한자가 다르고, 지금의 개풍군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6] 1908년 의주군, 1927년 신의주로 재이전[7] http://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2126051365[8] 작중에는 어디라고 딱히 나오지는 않지만... 정황상 100% 여기다. 작가인 이광수가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니기도 했고.[9] 다만 장준하도 죽기 며칠앞두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는 한다.[10] 하지만 원래 고읍은 고덕면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일제 때 역사가 갈산면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갈산면 지역을 '고읍'이라 부르게 되었다.[11] 현 운전읍은 박천군 양가면에 해당된다.[12] 위 지도에는 준한산(...)으로 되어있는데 凌과 浚을 헷갈린듯하다.[13] 선천군에서 태어났으나, 정주군에서 자랐고, 정주역에서 철도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했다.[14] 김소월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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