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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초대 회장 조선일보 제9대 사장 방응모 方應謨 | Bang Eung-mo | |
<colbgcolor=#ed333b> 자 / 호 | 형원(亨元) / 계초(啓礎) |
출생 | 1883년 9월 29일 |
평안도 정주목 신안통 안흥리[1] (現 평안북도 정주시 독장리) | |
사망 | 1950년 9월 28일 (향년 66세) |
경기도 개성시 서흥동 송악산 부근(추정)[2] | |
묘소 | 북한 개성시 서흥동 부근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선영[3] |
본관 | 온양 방씨[4] |
부모 | 아버지 방계준, 어머니 밀양 박씨 |
형제자매 | 형 방응곤 |
배우자 | 4명 |
자녀 | 양자(조카) 방재윤 (1901 ~ 1940) 친자 방재선 (1944 ~ ) |
자손 | 양손자 방일영, 방우영 양증손자 방상훈, 방용훈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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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5] 1933년 3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제9대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했다.2. 생애
1883년 9월 29일 평안도 정주목 신안통 안흥리(現 평안북도 정주시 독장리)에서 아버지 방계준(方啓畯, 1857. 5. 6 ~ 1921. 1. 1)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이천(朴利天)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다가 대차게 말아먹고, 대신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에 뛰어들어, 교동광산에서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2.1. 언론인 방응모
1933년에 공금횡령사건과 자금난으로 어려워진 조선일보를 조만식[6]으로부터 인수했고, 항일 민족지 성향의 조선일보를 친일 신문으로 바꿔버렸다. 이때 김성수가 소유한 동아일보,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와 경쟁하면서 조선일보 사옥을 증축하고 신문지면을 확대하고 1935년에 《조광(朝光)》을 창간하는 등 조선일보를 번창하도록 하는데에 주력하였다. 1936년에는 동방문화학원을 설립했다.2.2. 친일 행적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거나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등의 다양한 친일 행위를 하였다. 1942년 6월에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되었다. 그나마 같은 언론인 친일파였던 김성수는 변절 전에는 독립유공자이기도 했고 친일파였을 때도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였으나 방응모는 처음부터 포탄에 맞아죽는 순간까지 반민족행위자였다.2.3.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후 8월 말과 9월 초에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 건준 활동은 안재홍의 권유로 활동한 거다.)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1월 조선일보를 복간했고, 귀국한 김구를 적극 후원하면서 1946년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맡아 아주 잠깐 활동했다.[7] 1946년 8월 25일에 게재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개최에는 방응모(方應謨)의 이름이 있다.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유해봉환 사업을 후원[8]하기도 했고 김구의 반탁운동을 지원하여 반탁운동단체의 간부와 독립촉성회의 부장을 지내기도 했다.이때, 1946년 겨울, 그가 운영한 동방문화학원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동인 곳의 대규모 부동산을 헐 값에 구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땅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였다. 그래서 미군정청이 인가한 몇 안되는 학교 중 하나인 "숭문상업학교"를 구입해 지금의 성동구 금호동에 있었던 "숭문상업학교"를 이곳 대흥동으로 이전시키고 땅을 관리하게 하였고, 몇 개월 후 학교를 6년제로 바꾸면서 명문학교로 개선 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학교가 현재의 숭문중고등학교가 되었으며,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이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 김구가 노선을 바꾸어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면서 그를 지지하던 우익 세력이 떨어져 나가자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직접 나서서 "김구 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구와의 결별 이후 한국독립당을 탈당해 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49년 김구의 장례식 때는 상무위원을 맡았다. #
2.4. 정치 행적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경기도 양주군 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사회당 조시원 후보에 밀려 2위로 낙선했다.2.5. 최후
6.25 전쟁이 일어난 뒤 북한으로 끌려가던 중 1950년 9월 28일 경기도 개성시 서흥동 송악산 부근에서 트럭에 실려 수송되던 도중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하였고, 시신은 서흥동 부근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9]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 기간만료로 실종처리되었다.
한편, 방응모와 함께 납북되었다 탈출한 계광순 전 국회의원은 방응모와 평양까지 같이 끌려가 수감되었으나, 방응모는 병환[10]으로 거동을 못해 타 수용소에 이감되지 못한 채 헤어졌다고 하며, 이 때문에 정황상 평양 수용소에서 옥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여 다른 주장을 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측은 1970년 방우영이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1면 판권지에 방응모 명의를 빼지 않았다.
3. 여담
한편 환갑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방재윤을 양자로 삼았는데, 환갑이 지난 1944년에서야 친아들 방재선을 보았다. 그러나 납북 당시 방재선의 나이는 불과 7세, 양손자 방일영은 28세였고, 양자인 방재윤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결국 조선일보 경영권은 방일영 측으로 넘어가 지금에 이르렀고 양자와 친자 집안 사이에는 소유권 분쟁까지 일어나기도 했다.만해 한용운, 벽초 홍명희와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만해가 심우장에서 살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준 적도 있다.
시인 백석의 일본 유학 자금을 후원했다. 백석의 부친은 한때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정주 동향 사람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방응모와 백석의 밀접한 관계는 시 <고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
2015년작 영화 암살에서 이경영이 연기한 강인국의 실제모델 중 하나라고 한다. # 나머지는 박흥식이다.
4. 방응모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과 반론
방일영이 사망했을 때도 조선일보 계열은 역시나 방응모의 아들. 독립운동가인데 억울하게 인정을 못 받는다고 주장했다.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을 때, 방응모의 손자인 방우영과 조선일보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소송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0년 12월,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라며 판결했다. 이어 재판부는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은 극동 평화를 확립시키려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적극적으로 활동 했다.'고 인정했다.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는 걸 덮고, 북한에게 고문받아 죽었다면서 졸지에 항일 운동가에 반공 투사라고 주장한 적도 있다. 그러자 동아일보도 언론인으로서 긍지를 버렸다라고 주장했다.[11]
방재윤이 죽을 때에도 독립운동가 방응모 선생 아들이라고 자랑하던 것들이니. 앞서 말했듯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던것에 대해서는, 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신창균이 정지환 기자와 인터뷰했을 때도 방응모가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에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 이유는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한쪽에 기반을 둔 조선일보가 기반이 무너지게 되니까 김구의 한독당에 접근한 것. 거기다 동아일보 김성수가 이승만에 접근한 상황이라. 물론 한독당이 미군정의 탄압을 받자 1~2달 만에 나가버렸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자리가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성격이었으며 조선일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방응모가 무슨 한독당 재정부장인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어 신창균은 '조선일보는 방응모와 김구를 엮지 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친아들인 방재선은 안티 조선일보 시민단체들이 벌인 조선일보 반민족행각 민간 모의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해 아버지의 반민족행각을 인정하고 사죄하였다. 때문에 방일영이 죽자[12] 빈소에 문상하러 갔다가 가문 사람들과 조선일보 사원들에 의해 조문을 거부당하고 쫓겨났다. 방상훈은 방재선한테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가 친일했다는 헛소리를 내뱉을 수가 있느냐?! 아버지가 친일했다는 헛소리를 내뱉은 것을 사죄하면 조문을 허락하겠다"며 방응모의 반민족행각 발언을 사죄하라고 말했고, 방재선은 방상훈한테 "친일한 것은 친일한 것이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방재선이 방상훈을 상대로 탈세,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고소한 일도 있었으나 무죄로 드러났다.
5.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조선일보/오너 일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경기도 양주군 갑) | 무소속 | 낙선 (2위) |
[1] #[2] 6.25 전쟁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 조선일보 일가 선영인 이곳에 가묘(假墓)가 조성되어 있다. 실종되어 사망 처리되었으니 당연히 시신은 없다.[4] 판서공파(判書公派) 36세 응(應) 항렬.[5] 해방 직후 백범 김구의 친일파 살생부 263명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 목록에 방응모와 함께 들어간 유명한 친일파로는 윤치호(실제 해방직후 괴한에게 피습은 당했으나, 성공적인 피습이 아니었기에 큰 부상을 안 당해서 죽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지병이 도져서 몇개월 뒤 사망)가 대표적이다.[6] 당시 조만식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었으나,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만 지냈던 그는 본사가 있는 서울에서 적응하면서 지내기 힘들어했다. 결국 지역감정과 적응을 못한 조만식은 1년 만에 사장직에서 퇴사를 결정했고, 동향(同鄕)의 신흥 재력가인 방응모에게 인수를 부탁했다.[7] 일부에서는 '방응모가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김구의 비서직을 지냈던 선우진翁(2009년 작고)과 한독당 출신인 신창균翁(2005년 작고)이 살아생전 전면부정했다.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은 '방응모가 재정부장 활동했다는거 들어본 적 없다.'고 아예 일축해버렸고, 신창균翁은 '방응모는 재정부장을 직접 한 사람이 아니다.'고 전면부정했다. 이어 신창균翁은 '방응모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독당 중앙상무위원으로 3~4달 있었던 게 전부'라고 증언했다. 참고로 신창균 옹(당시 인터뷰에 응하실 때가 무려 95세! 사찰요람에서도 그는 한국독립당 간부로 적혀있었다.)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이다. 참조[8] 참조[9]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 참조.#[10] 조선일보 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방응모는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어서 거동이 힘들었다.[11] 그러나 사실 동아일보 역시 자기네의 창업주였던 인촌 김성수의 친일반민족행위를 부정하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다만 그나마 인촌은 친일 변절 전까지는 독립운동에도 힘을 보탠 적이 있으므로 아니라고 최소한의 긍정 평가 여지도 없지는 않다.[12] 참고로 방일영은 이 사람의 조카이긴 한데, 막상 방재선보다 20살 이상 많다. 방재선은 방일영의 장남인 방상훈보다 겨우 4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