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21:38:15

조선건국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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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주요 민족: 예맥 · 삼한 · 한민족}}}}}}}}}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朝鮮建國準備委員會
Committee for the Prep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파일:조선인민공화국 제2국기.png
국기
파일:한반도 위치.svg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명목상 영토
1945년 8월 15일 ~ 1945년 10월 6일
(52일)
성립 이전해체 이후
조선건국동맹 조선인민공화국
일제강점기
위치한반도
수도경성(서울)
위원장여운형
부위원장안재홍
정치체제민주공화제
언어한국어
민족한민족
1. 개요2. 설립 배경
2.1. 여운형(건국동맹) 측의 주장2.2. 총독부 측의 주장2.3. 한민당 측의 주장2.4. 종합
3. 출범 이후
3.1. 해방 직후의 움직임3.2. 건준의 본격적 출범과 확대3.3. 건국준비위원회 선언 및 강령3.4. 건준의 개편
3.4.1. 건준의 1차 개편3.4.2. 건준의 2차 개편3.4.3. 건준의 3차 개편
4. 평가
4.1. 의의4.2. 한계
5. 여담6. 관련 인물
6.1. 역대 위원장
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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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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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을 환영하는 인천 제물포 지부 건국준비위원회 회원들 YMCA에서 열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모습 (1945년 8월 17일)[1]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 주도 하에 좌우합작 및 자주국가 수립을 목표로 설립한 정치조직이다. 일제강점기 말, 여운형이 조직한 지하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중심으로 8.15 광복 직후 출범하여 약 두 달간 존속되었다.

약칭은 건준 혹은 건준위이며, 영어 명칭은 Committee for the Prep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혹은 CPKI이다.[2]

2. 설립 배경

1945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 수뇌부는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이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종전이 되는 즉시 소련군이 기차를 통해 남하하여 조선인 정치범들을 석방해 적색정권을 수립할 것이라 생각했다. 총독부는 이러한 상황이 전개될 경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 폭행 등 조선인들의 과격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우려했다. 이에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는 종전 결정과 동시에 우선적으로 조선인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하고, 치안유지를 조선인의 손에 맡겨 과격한 움직임을 최대한 방지한다는 대책을 제안한다.[3]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 또한 니시히로가 제안한 방책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총독부의 치안유지 권한을 이양할, 즉 명목상 조선인 대표로 세울 인물의 후보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당시 총독부에서 치안유지를 맡길 수 있는 인물 후보에 둔 이들은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의 세 명이었다. 허나 모종의 이유로 총독부는 안재홍 측에 접촉하지 않았으며, 송진우 측에는 접촉하였으나 송진우가 교섭을 거부하였고, 결론적으로 총독부와 해방 이전 교섭을 진행한 것은 여운형이 유일했다. [4]

여운형 및 타 인물들과 총독부 간의 교섭 과정 및 그 기간,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주장이 존재한다.

2.1. 여운형(건국동맹) 측의 주장

여운형건국동맹 측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로부터 1945년 8월 15일, ‘치안유지’ 건에 대한 교섭을 최종적으로 제안받았으며, 여운형이 다섯 가지의 조건을 내걸어 수락을 얻어낸 후 건준을 발족했다고 주장한다.

즉, 건준이 조선총독부와의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단체임은 사실이나, 이는 주체적 입장에서 타협한 것으로 총독부 측의 초기 제안인 ‘과도기적 치안유지’라는 틀에서 벗어나 민족이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해방 직전의 교섭 흐름은 다음과 같다.

우선, 여운형은 해방 후 정세를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1. 일본 항복 후 일본인은 곧 조선에서 일반행정 및 치안에서 손을 뗄 것
2. 일본 항복 후 연합군과 대표자가 곧 국내로 들어와 서울에서 대표들이 모일 것
3. 위의 사항이 빨리 실현될 것
4. 소련군이 먼저 북한에서 그러하듯 미군 또한 남한에서 행정일체를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이러한 예상을 바탕으로, 여운형은 1945년 8월 10일 경부터 건국 준비 활동을 시작했다. 그 시작으로 8월 10일 여운형은 이천추를 불러내 해방 후 세울 조직의 인사명단 정리를 함께했다. [5]이즈음부터 총독부가 여운형 측에 조금씩 접촉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천추에 따르면, 8월 10일부터 8월 15일까지 여운형과 엔도는 수차례 만남을 가졌고, 여러 논점에 대한 협의를 거친 뒤 여운형이 해당 내용들을 건국동맹의 동지에게 전달하여 직접 행동으로 옮길 준비를 했다.

그 중 14일 오후 11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천항 조서의 원고가 도메이통신 경성지국에 전화로 통보되었고, 니시히로와 엔도는 경성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 유조에게 전화해 다음 날 6시에 여운형과 함께 관저로 올 것을 요구한다. 이에 15일 오전 6시 반, 나가사키는 여운형과 통역 백윤화 판사와 동행하여 총독부 관저로 향했다. 이 날의 교섭 내용에 대해서 건국동맹총독부의 주장이 조금씩 엇갈린다.

건국동맹의 주장은 이렇다. 우선 여운형이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모인 군중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는데,
조선 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 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해서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을 하였다. 즉,

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인만치 식량이 제일 문제이니 8월, 9월, 10월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 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 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 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린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는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6]

여운형의 연설과 이만규의 증언[7]에 기초할 때,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여운형이 미리 준비해둔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엔도 정무총감이 이를 수용했다.
2. 엔도는 여운형에게 '치안을 맡아가라'고 하여 치안유지 권한을 이양했다.

결국 여운형 측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 직전 총독부와 엔도는 패전을 예상하고 상당한 저자세로 교섭에 임했으며, 여운형은 이러한 분위기를 최대한 이용해 해방 정국에서 조선인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냈다.

2.2. 총독부 측의 주장

허나 총독부 측의 주장은 건국동맹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 다음은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증언에 따른 모리타 요시오의 설명이다.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제2면회실로 안내했다.


"오늘 12시 포츠담 선언' 을 수락하는 천황의 조칙이 내릴 것이오. 그리고 늦어도 17일 오후 2시경까지는 소련군이 서울에 입성할 것 같소. 먼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형무소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이오. 이렇게 되면 두 민족의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소. 우리는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사상범이나 정치범을 미리 석방하고 싶소.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유지는 총독부가 맡겠지만 측면에서 협력해주길 바라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이때 방에 들어온 니시히로 경무국장도 참석해서, 석방을 하기 전에 사상범과 정치범에게 망동하지 말아달라는 것과 민중 가운데 특히 청년과 학생이 폭동의 중심이 될까 우려하여 이들에게 냉정을 유지하라고 설득해줄 것을 여운형 씨에게 의뢰했다. 또한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 씨로부터 안재홍 씨에 대해 "함께 치안유지에 협력해달라"는 전언을 의뢰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다음에 니시히로 경무국장은 여운형 씨에게 "치안유지 협력에 필요하면, 조선인 경찰관을 당신 밑으로 옮겨도 좋다"고 했다. 여운형 씨로부터 식량 문제에 대해 질문이 있자, 니시히로 경무국장은 "10월까지는 괜찮다"고 답했다. 또한 "치안유지법에 걸러 경찰서, 헌병대에 유치되어 있는 사람들을 석방하고 싶다"는 요구에 "그것은 물론이다 형무소에 있는 사람조차 석방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집회의 금지를 풀어쳤으면 한다"는 여운형 씨의 말에 니시히로 경무국장은 집회의 자유를 약속했다. 또한 여운형 씨는 "석방자에 대해 성실하게 건국에 노력하도록 나 자신이 한마디 말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회담을 마치면서, 여운형 씨는 니시히로 경무국장에게 건강을 기원한다"며 악수를 나눴다.[8]

위 내용은 건국동맹 측의 주장과 다음의 주요한 차이를 보이는데,

첫째로, 조선인 정치범과 사상범의 석방이 엔도 등 총독부의 대책으로 처음 구상되었다는 주장이다. 여운형의 제안이었다는 건국동맹 측 주장과 달리, 모리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니시히로 경무국장이 생각한 대책이었다. 소련군이 남한까지 밀고 내려와 적색정권을 세우면 당연히 정치범과 사상범이 석방될 것이므로, 총독부가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는 것이다.[9]

다만 이만규에 따르면, 여운형이 엔도 정무총감에게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엔도는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두겠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하며, 이를 번복하게 만든 것이 여운형의 공로라고 말한다. 또한, 본래 니시히로는 복역 중인 이들의 석방만을 생각했으나, 여운형의 강력한 주장으로 경찰 및 헌병대에 구금되어 조사받는 모든 인사들의 석방을 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양측의 주장은 다르나, 과정과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조선인 정치범과 사상범의 석방은 이루어졌고 이는 건준의 첫 공로로 여겨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 공로가 건준이 치안유지 협력기관에서 주체적 정권기관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둘째로, 엔도는 여운형에게 “치안을 맡아가라”고 한 것이 아닌, 치안 보조의 역할을 주문했다는 주장이다. 여운형 측 주장에 따르면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치안유지에 대한 권한을 해방 직후 일체 위임한 것으로 나타나나, 모리타의 설명에 따르면 총독부는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유지는 총독부가 맡겠으나, 측면에서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허나 총독부의 계산과는 달리, 일제의 항복이 선언되고 패망이 확실시된 순간, 거의 모든 한국인 경찰이 출근하지 않고 숨어버린 탓에 일제의 경찰과 행정력이 전국적으로 일시에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러한 가운데 여운형이 조직한 건준 치안대가 치안을 맡아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다른 조직들이 합세하여 행정기관과 적산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주장은 다르나, 결국 총독부가 건준의 치안 권한에 대해 일부건 전권이건 허가 및 승인을 내어준 것은 사실이며, 그로서 해방 직후 발생한 치안 권한의 이양 과정에 대해 총독부가 저지하거나 통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과정에 대한 주장은 여운형 및 건국동맹 측과 총독부 측의 설명이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이들은 교섭에서 합의에 이르렀고, 해방 직후 정국이 흘러가는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주요한 맺음을 지었다.

2.3. 한민당 측의 주장

한민당 측은 해방 이후 꾸준히 건준을 비방하고 무고하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된 계기는 8월 12일과 13일 이틀에 걸쳐 벌어진 여운형 측과의 비밀 교섭 결렬이 결정적으로 여겨진다. 여운형 측은 총독부와 교섭을 진행하면서 온전한 좌우 합작을 위해 송진우 및 한민당 계열의 포섭 또한 시도하였는데[10], 이 때 여운형 측과 송진우 측의 해방 정국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발생한다.[11]
여운형 측의 생각
1. 일제는 이미 포츠담 선언에 의하여 무조건 항복이 결정되었으므로 조선 인민이 자주, 자위적으로 당면한 보안 및 민생 문제를 위시하여 주권 확립에 매진할 것
2. 국내에서 적에 대항하여 항쟁했던 인민 대중의 혁명 역량을 중심으로 대내외 혁명 단체를 총망라하여 독립 정부를 세울 것
한민당 측의 생각
1. 왜정이 완전히 철폐될 때까지 그대로 참고 있을 것. 총독부가 연합군에게 조선의 정권을 인도하기 전까지는 독립정권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적과 투쟁할 수 없음
2. 중경의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

즉, 일제의 포츠담 선언 수락 및 항복설이 퍼진 이후 건국에 대한 준비에 착수한 여운형 측과 달리, 송진우 및 한민당 계열은 일본의 완전 붕괴 이전에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사태를 지켜보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태도와 시각의 차이로 인해 두 세력 간의 교섭은 결렬되었고, 한민당 측이 건준을 반목하는 형국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송진우를 비롯한 한민당 측은 8월 10일~15일 사이 진행된 여운형과 총독부 사이 회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그 결과로 이들은 해방 직후 정국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들은 건준이 주도하는 해방 정국이 확실해지고, 총독부를 매개로 한 한민당 세력 주도의 치안유지회 참가가 무산되자 여운형 및 건준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민당 측은 여운형뿐 아닌 송진우, 김준연, 장덕수가 총독부 측으로부터 ‘정권 인수’에 대한 사전교섭을 제의받았으나, 친일의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서 교섭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김준연의 주장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송진우가 일본측 인사를 만나 '행정위원회' 조직을 의탁받았으나 거절했고, 11일과 12일의 동일한 내용의 교섭을 거부했으며, 8월 14일에 경기도지사와 경찰부장의 최종 교섭마저도 완고히 거절했다고 한다.[12] 다만 이 주장에는 문제점이 상당수 존재한다.[13]

우선, 한민당에서 주장한 ‘정권 인수’ 교섭이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총독부 측이 항복하고 정권을 이양할 대상은 한국인이 아닌 연합군이었으며, 총독부의 교섭 목표는 ‘종전 후 과도기의 치안유지’였기 때문이다.

또, 1945년 10월 양근환의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서 송진우는 총독부 사무관, 일본군 참모, 경기도지사 등과 교섭했으나 설사병을 핑계로 불응했다고 밝혔는데[14], 송진우가 밝힌 교섭 인사들의 직위로 미루어 볼 때 본격적인 교섭이 진행되었더라도 ‘정권 인수’ 급의 사안이 논의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한민당 계열 인사들에게 실제로 '정권 인수'에 대한 교섭이 전달되었다 한들, 그들은 해방 직후 정국을 주도적으로 움직일 조직적 뒷받침이나 정책적 구상 등 어느 면에서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15]

어찌되었건 결론적으로 송진우를 비롯한 한민당 계열 인사들은 총독부와의 치안유지 논의에 주류인사로서 참여하지 못했고, 여운형을 필두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방 직후 주요한 권력으로 부상하는 것에 반발을 가졌다. 고로 이들이 주장하는 ‘정권 인수’ 에 대한 이야기가 여운형에 대한 친일 매도 및 정치적 타격을 가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4. 종합

위 세력들의 주장과 여러 연구들을 종합할 때, 1945년 8월 10일에서 8월 15일까지 이어졌던 총독부와 여운형, 그리고 송진우 측의 교섭 흐름은 다음과 같다고 여겨진다.

우선 조선 총독부포츠담 선언 이후 1945년 8월 10일, 일제의 패전이 확정되었음을 전달받는다. 이후 총독부는 패전 직후 찾아올 혼란과 입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조선 독립운동의 주요 인사들에게 접근하여 치안유지 등 행정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총독부가 후보로 여긴 인사는 여운형, 송진우, 안재홍의 셋이나, 안재홍과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으며, 송진우에게는 접촉했으나 교섭을 거절당했다. 엔도 정무총감에 따르면 이후 안재홍과 송진우에게의 총독부의 접촉은 일절 없었으며[16], 총독부는 10일부로 여운형 측과의 교섭을 진행하게 된다.

여운형 측은 총독부와의 교섭 중인 12일과 13일, 송진우 및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에게 접근해 좌우합작을 이뤄내고자 하였으나 해방 이후 정국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교섭은 무산되었고, 이후 총독부와의 치안관리 권한 등 논의는 여운형 및 건국동맹 측만이 진행하게 된다.

진행된 교섭의 끝에 8월 15일, 전체 한국인 수형자의 석방, 서울의 3개월치 식량 확보, 치안유지에 대한 협력,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등 내용을 포함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여운형은 이러한 합의 내용을 바탕으로 실질적 주요 행정권의 이양을 받아냄으로서 해방 직후 정국에서의 주도권과 함께 민족을 위한 나라의 건국을 준비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출범하게 된다.

3. 출범 이후

3.1. 해방 직후의 움직임

여운형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건국동맹원들이 소집되었으며, 운니동을 거점으로 하여[17] 건준의 체계화를 빠르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장권이 치안대를 준비하고, 이정구가 식량대책위원을 소집했으며, 이여성, 김세용, 이강국, 이상백 등의 인사들이 집합하여 머리를 모았다.

해방 직후 건준의 주요 결정 사항은 치안유지 단체를 넘어 정치활동을 병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해방 후 열화와 같이 일어날 정치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치안대 성격으로는 부족하며, 이전과 같은 지하운동 뿐 아닌 정치운동을 병행해야만이 해방 직후 정국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치안유지 성격의 단체는 시민 전체를 동원해야 하는데, 이 경우 친일분자들의 배제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8]

이러한 결정 속에 여운형은 총독부의 석방 약속 시일인 8월 15일 오후 4시, 다수의 건국동맹원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다만 법무적 절차로 인해 석방이 하루가 미뤄졌고, 여운형은 이튿날 오전 9시 다시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강당에 모인 석방자들에게 조선 민족의 해방이 날이 왔음을 강연하며,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19]

서대문형무소의 문이 열린 직후, 독립투사들을 향해 민중이 몰려들면서 완전한 해방 정국의 맞이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린 가운데, 약 5000여 명의 인파가 여운형을 만나기 위해 휘문중학교로 향했고, 여운형은 그들 앞에서 민중을 격려함과 동시에 "항복한 일본인에게 아량을 보이자"라는 연설을 진행한다.

이후 건준 명의로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는 전단이 서울 시내에 살포되었으며[20], 이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라는 공식 조직이 출범했음을 알리는 첫 행보였다.

3.2. 건준의 본격적 출범과 확대

1945년 8월 16일 오후 3시 10분부터 약 20분 간, 건준 준비위원 직을 맡은 안재홍이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라디오 연설을 진행했다.

안재홍은 연설을 통해 건준의 사명을 발표했는데, 이 때 설명한 건준의 사명은 다음과 같았다.[21]
1. 건준 소속으로 학생, 청년대, 경관대로 구성된 '경위대'를 결성해 일반 질서를 정리하며, 추후 정규군에 해당하는 무위대를 창설할 것.
2. 식량 확보에 노력할 것.
3. 경향 각지의 기결, 미결수 총 1100여 명의 청소년, 학생, 정치범 등을 석방할 것.

연설을 들은 각지의 한국인들은 열띤 반응을 보였다. 안재홍의 연설은 총독부가 해소되었고, 일본군이 무력을 포기했으며, 치안대와 정규군이 창설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라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느낌으로 전국의 국민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총독부와의 교섭 내용이자 건준의 사명으로서 진행된 수형자들의 석방은 8월 16일부터 전국 28개 형무소에서 진행되었다. 약 2만 여명의 운동가, 학생 등이 석방되었고[22], 이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자생적인 치안위원회 자치위원회, 치안대, 보안대 등을 조직하며 전국에 동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가령 부산부에서는 1945년 8월 17일 노백용을 위원장으로 건준 경남본부가 결성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직이 꾸려졌다. 이렇게 조직된 위원회들은 건준의 지방 지부로서 재편성되었고,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의 지부가 설립됐다.

3.3. 건국준비위원회 선언 및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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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기국 9월 2일 발표 선언문
인류는 평화를 갈망하고 역사는 발전을 지향한다. 인류사상의 공전적참사인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하에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유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36년간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왔다. 이 자유 발전의 길을 열려는 모든 운동과 투쟁은 제국주의와 및 그와 결탁한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세력에 의하여 완강히 거부되어왔다.

전후 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기반(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의 해방은 다난한 운동사상에 있어 겨우 새로운 일보를 내딛었음에 불과하나니 완전한 독립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으며 새 국가의 건설을 위한 중대한 과업은 우리의 전도에 놓여 있다. 그러면 차제에 우리의 당면임무는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 있다. 일시적으로 국제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다.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자유 발전의 길을 열기 위한 모든 진보적 투쟁은 전국적으고 전개되었고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나니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우리의 건국준비위원회는 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각계에 완전히 해방된 통일전선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적 반동세력에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어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고 금후에도 그들은 해방 전 조선과 같이 그 건설도중에서 방해할 가능성이 있나니 이러한 반동세력, 즉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싸워 이것을 극복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구성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해방운동에 투신하여온 혁명전사와 그 결집체에 대하여서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전심적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조선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세운다.
강령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1.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 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1.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1945년 8월 28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사무국 편, 『조선해방』, 문우인서관, 1946>

3.4. 건준의 개편

3.4.1. 건준의 1차 개편

1945년 8월 15일 건준이 출범한 이후, 초기 치안유지 협력 명목으로 시작된 건준은 총독부로부터 실질적 행정권을 이양받으며 실질적인 정부의 준비로 나아갔다. 8월 16일, 명칭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정하고, 대부분 국민이 이들을 한반도에 들어선 새로운 자주 정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건준은 현실적이고 내용적인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8월 17일, 건준은 간단하고 임기응변적으로 기존의 건국동맹원을 필두로 제1차 부서를 결정한다. 위원장에는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 부서는 총 여섯 개로 총무부, 재무부, 조직부, 선전부, 무경부가 있으며 각각 총무부장에 최근우, 재무무장에 이규갑, 조직부장에 정백, 선전부장에 조동호, 최동달, 그리고 무경부장에는 권태석이 임명되었다.[23]

다만, 말했듯 제1차 부서는 매우 임기응변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지도층과 대중이 서로 괴리되는 문제'가 발생함을 이유로 중앙조직의 확대 요구와 함께 건준의 2차 개편이 진행되었다.

3.4.2. 건준의 2차 개편

1945년 8월 22일, 건준 중앙위원회의 확충 및 12부 1국제를 채택을 포함한 건준의 2차 개편이 진행되었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그대로 두고, 타 부서의 인물들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 최근우
조직부: 정백, 윤형식
선전부: 권태석, 홍기문
재정부: 이규갑, 정순용
식량부: 김교영, 이광
교통부: 이승복, 권태휘
건설부: 이강국, 양재하
기획부: 김준연, 박문규
후생부: 이용설, 이의식
조사부: 최익한, 김약수
서기국: 고경흠, 이동화, 이상도, 최성환, 정화준

개편된 2차 간부 진영에는 좌우파가 모두 망라되었는데, 정병준의 분류에 따르면 이들은 여운형계, 장안파, 재건파, 안재홍계, 한민당계로 나뉜다.[24] 이에 따르면 여운형을 비롯한 비공산주의적 좌파, 장안파 및 재건파의 공산주의 세력, 안재홍 포함의 중도우파 세력, 그리고 한민당 계열의 우익세력 등 다섯 세력의 연합으로서 겉보기에는 좌우 합작의 형태를 띈 건준이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2차 개편 상황에는 문제가 여럿 존재했다. 우선, 여운형이 8월 18일에 테러를 당해 8월 25일까지 정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2차 개편 상황을 주도한 것은 여운형이 아닌 부위원장 안재홍이었다. 또, 이로 인해서 건준에게는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안재홍이 한민당 계열에 대해 타협적이고 순응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점이다.

상술했듯, 송진우를 비롯한 한민당 계열은 여운형의 합작 요청을 여러 차례 거절한 바 있다. 허나, 해방 직후 정국 상황에서 건준이 주도하고 한민당 계열이 주류에서 배제되는 흐름이 나타나자, 우익의 김병로, 김약수, 백관수 등은 해방 직후 현실 정치의 중심인 건준을 장악하고 본인들 입맛에 맞게 개조하고자 하는 뜻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병로와 백관수는 여운형을 대신해 건준을 지휘하던 안재홍과의 교섭을 진행하였고, 안재홍은 여운형을 비롯한 비공산계 및 공산계 좌익 간부들과의 상의 없이 한민당 계열을 건준의 중심 간부로 내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연히 여운형 및 좌익계 인사들은 이를 가만 두고보지 않았고, 여운형은 안재홍이 맺은 한민당과의 교섭을 부인하는 연사와 함께 안재홍과의 대립을 표면화한다. 결국 좌익 인사들의 큰 반발로 인해 2차 개편안은 건준 내부적으로 확고히 부정당한다.

3.4.3. 건준의 3차 개편

2차 개편 당시 일어났던 내부적인 분열, 그리고 총독부의 공작과 한민당의 공격 등 외부적인 문제, 그리고 테러는 여운형을 쇠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1945년 8월 31일, 여운형은 건준의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사직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 중에서도 여운형이 사직 의사를 표하도록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안재홍을 매개로 한 한민당 계열의 건준 장악 시도와 이에 맞서는 공산당원들의 갈등이었다. 이러한 좌우간의 분열은 우익 세력의 고루하고 정적인 사상과 좌익 세력의 소아병적인 사상 간의 극단적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상호 간의 불신과 혐오는 오래 전부터 쌓여왔기에 원만한 합작이란 사실상 불가능했다.[25] 결국 9월 4일의 이전까지 건준 측은 한민당과의 교섭을 통해 마지막 좌우 합작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이해 관계의 상충으로 인해 둘 사이의 교섭은 결렬되었고, 건준 내부의 분열마저 깊어졌다.

건준 간부들 또한 책임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총사직을 선언하고, 안재홍도 사표를 제출했다. 이후 9월 4일, 건준의 확대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다만 우익 측의 인사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출석 의원은 과반수가 넘어 회의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여운형 및 안재홍의 사퇴 건이었는데, 회의에서 두 사람은 급박한 정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중책을 맡았으나, 책임을 감당할 힘이 없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사임을 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토의 결과 여운형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절대적이므로 사임 수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과반수가 넘어[26] 결국 유임하는 대신, 부위원장 한 명을 증원하여 돕도록 하기로 결정해 허헌을 추가 부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확대 위원회가 끝난 이틀 뒤, 9월 6일 건준의 집행부는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새로운 인민위원들로 구성된 제3차 건준 개편안을 공개하였다. 변경된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허헌
총무부: 최근우, 전규홍
조직부: 이강국, 이상도
선전부: 이여성, 양재하
재정부: 김세용, 오재일
서기국: 최성환, 정처묵, 정화준
교통부: 김형선, 권태휘
건설부: 윤형식, 박용칠
기획부: 이순근, 박문규
후생부: 정구충, 이경봉
조사부: 최익한, 고경흠
치안부: 최용달, 유석현, 정의식, 장권, 이병학
문화부: 함병업, 이종수
양정부: 이광, 이정구

이 때, 3차 개편 시기 유임한 여운형과 달리, 안재홍은 개편안의 발표 이후 건준과 정계를 은퇴한다는 성명서와 함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점차 변질되어가는 건준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제2차 위원회에서 3차 위원회로 개편되면서 한민당 및 안재홍계 인사들이 대거 배제되고, 그 자리에 공산당 계열과 여운형계 일부가 들어섰다. 특히 공산당계 인사들의 경우 부위원장, 재정부장 등 요직에 앉으면서 조직의 중심에 더욱 가까워졌다. 또한 계열을 떠나서, 3차 위원회의 구성원 면면을 살펴보면 1차 위원회에서 3분의 2가량이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불과 2주도 안되어서 조직 간부의 3분의 2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리 좋지 않은 신호였다.

이러한 급격한 조직의 변동은 건준의 기반과 구심점이 취약하며, 이로 인해 내부 요인과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드러냈다. 건준 중앙은 3차 개편 시점에서 중도우파와 우파, 좌파 일부가 배제된 형태를 띔으로서 스스로 자부했던, 초창기 선포한 좌우 합작에 근거한 '통일 전선'이라는 기초가 근간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의 임시 정부가 출범하며, 건준은 이에 흡수되듯 발전적 해체 수순을 밟았고, 산하의 조직들 또한 인민위원회로 재편되며 건준의 짧은 역사는 막을 내린다.

4. 평가

4.1. 의의

건준은 남북과 좌우를 망라하여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였으며, 후에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화되면서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8.15 광복 이후 공백된 행정과 치안을 안정시키고, 연합군 주둔 전까지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여운형 등 당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운영하여 민족에게 광복을 체감케 하였다.

이러한 건준의 설립·발족과 엔도 정무총감과의 권력 이양 교섭, 그에 따른 독립운동가들의 정치활동 등은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광복절과 국권 회복일을 건준 설립일인 1945년 8월 15일로 설정하는 데에서 알아볼 수 있듯 현재에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독립 당대에도 1945년 8월 15일을 독립일로 받아들인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미군정 시기의 광복절 1주년 경축식 행사도 1946년 8월 15일에 열렸다.

무엇보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가장 와닿을 만한 중요한 의의는, 현재 미수복지역이북 5도의 행정구역은 북한 당국이 개편한 행정구역이 아닌,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목적으로 일부 수정한 행정구역에 기초하여 설정되어 있으며, 관할기관인 이북5도위원회 역시 이 건준이 해방 당시 설정한 행정구역에 따라 명예 도지사·시장·군수·읍장·면장·동장·이장을 임명한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건준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높게 평가하였다.
해방 후 건준 같은 조직이 돼 있지 않았으면 굉장한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해외에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해외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기 전부터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파 계열들이 중심으로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그래서 해방이 되는 날부터 건준이 조직되어 활동하였기 때문에 안정이 어느 정도 되었다. 우선, 치안과 행정같은 주요 업무를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27]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에드거 스노우 기자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뒤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에드거 스노 자서전>, 에드거 스노우 저. -제 4부 냉전- 문단 인용[28]

4.2. 한계

크게 외부적인 한계와 건준 자체의 내부 분열이 꼽힌다. 우선 외부적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의 행정권 이양이 제대로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의 신변 보장 문제로 행정·치안권 이양을 받아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8월 말경 미군이 38선 이남은 자신들이 상륙할 때까지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유지하라는 포고령을 내리게 되면서 일본 제국 본국에서 행정권을 연합국 주둔 후 미군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 지방의 경우 그래도 건준이 행정권과 치안권을 대부분 쥐고 있었지만 청사 소재지인 경성부 같은 경우는 조선군 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38선 이남[29]에서는 건준과 총독부의 사실상 2중정부 체제가 이어져 오다 결국 공식적인 행정권 이양은 미군의 공식 주둔 후 총독부로부터 미군정으로 이양되었다.
인공 수립 당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최고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며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9

미군 주둔이 가까워지자 건준은 조선을 대표하는 단체로 인정받기 위해 국가 설립을 서둘렀다. 때문에 9월 3일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9월 7일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에 얼마 가지 않아 실권이 없는 조선인민공화국은 와해됐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승인받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임시정부나 조선인민공화국과 같은 여타의 독립운동 단체 및 자칭 정부들은 당시 국민들의 보통선거와 같은 공식적 정부 수립 절차를 갖추지 않아 이들이 국민들을 대표한다는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독립 운동 단체들을 공식 정부로서 승인하게 된다면 해방 후 조선 국민들이 직접 참정권을 행사하여 정부의 형태와 인적 구성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침해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공은 처음부터 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전국적 총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하려 하자 미군정은 선거를 방해했다.
인공은 10월 3일 총선거를 통한 제2회 전국인민대표회의를 46년 1월 소집한다는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곧 전국적인 총선거를 통해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함으로써 인공의 대중적 지지와 대표성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물론 1945년 9월 6일의 제1회 인민대표자회의에서도 인공이 전 인민의 광범한 민주주의적 선거로 선출되지 못하였으므로 '임시혁명정부'이며 "혁명시기에 대응하는 과도적 존재"라는 입장에서 "늦어도 2년 이내로 될 수 있는 빠른 기간 내에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결의"하였다.
(중략)
인공주도세력에게 1946년 3월 1일 제2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회의의 선거는 인민의 총의를 물어 완전한 정부의 실현, 또는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인공은 선거에 실패한다면 승리한 정당에게 정권을 내어주고,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면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비장한 입장을 밝혔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86~87
미군정은 인공이 수립되어 활동하자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공식 성명을 통해 38선 이남에는 오직 미군정이라는 한 정부만 있을 뿐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은 권위와 세력과 실체가 전연없는 것이며, 인공지도자들을 "괴뢰극의 막후에서 연극을 조정하는 사기한"이라고 비난하고 해체를 명령하였다.
(중략)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일반대중에게 신임과 지지를 획득하는 방법으로 신임총투표, 일반국민선거를 제안, 확정하고 새로운 주권의 확립을 기도하였다

미군정은 아놀드장관의 성명을 통해 인공의 이러한 시도를 허위선거라고 규정하고, 선거는 "대중을 유도하는 자칭 정치가의 유희물"이 되기에는 너무도 신성한 것(중략)"이라고 비난하고, 선거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70~71

일제의 항복 직후 정세를 관망하던 우익세력들은 점차 결집하기 시작하였으며, 반면에 일사불란해 보이던 건국준비위원회는 내부적 균열을 겪게 되었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 등을 포함한 중도 우파 세력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초계급적 협조정신으로 명실상부한 과도기적 기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좌경화되어 간다”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게다가 김성수, 송진우 등은 '임시정부 봉대(奉戴, 받들어 추대함)'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초기와는 달리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결국 조선공산당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건준의 결성 초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친분관계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운홍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에 엔도를 만난 뒤 정백과 함께 돌아와 단독으로 담소를 나누었으여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졌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략) 이에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1

건준 위원장을 지냈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 과정에 대해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형님(여운형)에게는 박헌영 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건준이 좌경화되어 이용당한 것이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견들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여운형#
그러나 인공의 수립이 조공의 일방적인 독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의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개회사와 격려사에서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발표를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인공 대표대회에서 인사도 했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에 전 정무총감인 엔도가 조선인민의 대표들을 불러 “4~5일 후면 서울에 붉은 군대 선발대가 도착할 것이며,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장해제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월 15일 오후 서울에는 붉은 군대가 서울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붉은 군대를 조용히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실망했으며, 38선이 획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더욱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로마넨꼬: 당신은 우리의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며, 우리는 명령받은 바로 그 지역까지만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운형: 나는 38선 이남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범들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신은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가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이 미군이 진주한 남조선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5. 여담

  •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은 명목상 남아있었다. 건준 조직 내에서는 미군정과의 교섭을 위해 건준을 남겨놓자는 의견과 해체하자는 의견이 대립했는데, 여운형은 남겨놓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10월 6일 개최된 건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해체 의견이 다수를 이뤄 이 날 정식으로 건준은 해산되었다.(출처 : 심지연, ‘인민당연구)

6. 관련 인물

파일:1945-08-26-매일신보-건준위원명단.jpg
1945년 8월 26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건준위원 명단

6.1. 역대 위원장

파일:조선인민공화국 국장.svg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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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직무대행
여운형 안재홍
임시정부 수반 · 군정사령관 · 북한 내각수상 · 대한민국 대통령 }}}}}}}}}}}}
  • 초대 위원장: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 위원장 직무대리(건준위 제1부위원장): 안재홍 (1945년 9월 3일 ~ 1945년 9월 6일)
  • 위원장 직무대행 임시서리(건준위 제2부위원장): 양재하 (1945년 9월 6일 ~ 1945년 9월 7일)

    건준은 각 시도마다 지부를 두었으며 각 지부는 8.15 광복 이후 공백기 동안 각 지방의 행정·치안을 담당하였다. 건준 해체 및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이후로는 각 시도 인민위원회로 개편하였다.
  • 평남 건준 초대 위원장: 조만식 (1945년 8월 15일 ~ 1945년 8월 27일)
    이후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을 만나 민족계열 위주의 건준에 동수의 공산주의자도 넣어 새로 조직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평남 건준은 8월 27일에 민족계열과 공산당측 각 16인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平安南道 人民政治委員會)로 개편된다. 이후 조만식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직을 이어서 유임하였지만, 이후 소련군정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9월 8일)에 포함시키더니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련합회의(10월 8~10일)를 거쳐 북조선 5도행정국(10월 28일)[30]을 설립하고, 이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1946년 2월 16일)로 독자 제도화하는 데에 있어 소련군정과 대립각을 견지해오다 중도 사임, 이후 김일성에 의해 연금된다.

7. 같이 보기



[1] 뒤로 태극기와 여운형이 창당한 조선인민당 당기를 볼 수 있다.[2]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 라는 번역어도 쓰이는데 CPKI에 비해 빈도가 적다.[3]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 (西廣忠雄) 증언, 森田芳夫, 1964,'朝鮮終戰の記錄:米ン雨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嚴南堂書店, 67~68쪽[4] 遠藤柳作,「政權授受の眞相を語る」「宋氏への交渉は誤報」,「國際タイムズ」84, 1957년 8월 16일; 姜徳相, 2019, 「日帝末期暗黒時代の灯として(邑運亨評傳)」, 新幹社,288쪽[5] 李千秋。 「夢陽呂運亨先生を徳ぶ-彼の思想と行動」, 미간행 원고, 50~54쪽[6] '건준위원장,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 매일신보, 1945년 8월 16일자[7] 이만규, 1946, '여운형투쟁사'[8] 森田芳夫, 1964, 「朝鮮終戦の記錄: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巖南堂書店[9] 森田芳夫, 1964, 「朝鮮終戦の記錄: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巖南堂書店, 69쪽[10] '조선해방연보', 1946, 79~80쪽[11] 이규태, 2006,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통일국가의 모색', '한국근현대사연구' 36, 11쪽[12] 동아일보, 1945년 12월 2일[13] 심지어 김준연 본인의 주장도 들쑥날쑥한데, 1959년의 회고록에서는 같은 사건에 대한 날짜를 다르게 언급하기도 했다.[14] 이 자리에는 여운형, 안재홍 및 당대 좌우파 최고 인사들이 참석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15] 실제로 한민당 주요 인사들의 회고록에는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을 준비한 흔적이 드러나지 않으며, 일제 탄압에 분해하며 술을 마셨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1990, '독립에의 집념 - 고하 송진우 전기', 동아일보사, 414~423쪽[16] 森田芳夫, 1964, 「朝鮮終戦の記錄: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巖南堂書店[17] 이후 운니동은 장소가 좁아 종로청년회관, YMCA로 사무실을 이전했다.[18] 이만규, 1946, '여운형투쟁사', 190쪽[19] 森田芳夫, 1964, 「朝鮮終戦の記錄: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巖南堂書店, 76~77쪽[20] 매일신보, 1945년 8월 16일자[21] 매일신보, 1945년 8월 17일자[22] 1943년 7월 말 당시 전국의 재소자는 모두 2만 3241명이었으며, 총 28개 형무소가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 1945, '조선연감', 392쪽[23] 민주주의민족전선, 1946[24] 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2023[25] 이동화, 1978, '몽양 여운형의 정치활동: 그 재평가를 위하여(하)', '창작과비평' 가을호, 123쪽[26] 송남헌, '해방3년사', 1985, 47쪽[27] 출처: KBS 인물 현대사 여운형 편[28] 다만 에드거 스노우의 자서전에는 당시의 조직인 '건준'이 아닌 후행하는 조직인 '인민위원회'라고 명기되어 있다.[29] 38선 이북은 일찍이 소련이 대부분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접수하였고 총독부의 행정권은 일찍이 붕괴되었다. 일례로 경성 조선신궁이 스스로 승신식을 가지고 본전 건물을 철거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평양신사는 승신식조차 가지지 못하고 광복 당일 밤중에 방화로 파괴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광복 직후 이북과 이남에서 총독부 영향력 상실 속도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30] 이후 11월 24일에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이름도 평남 인민위원회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