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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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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64> 1945년 9월 9일 ~ 1948년 8월 15일
(2년 11개월 11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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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6년 3월 20일
좌우합작운동 1946년 7월 1일
대구 10.1 사건 1946년 10월 1일
제주 삼일절 발포 사건 1947년 3월 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7년 5월 21일
제주 4.3 사건 1948년 4월 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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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이전 정부 수립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제1공화국
위치 <colbgcolor=#fff,#1c1d1f>북위 38도 이남의 한반도 및 그 부속 도서
수도 서울
정치 체제 군정 체제
언어 한국어, 영어
종교 유교(성리학), 불교,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천도교, 원불교, 샤머니즘
국가 애국가(사실상)[2]
사령관 존 리드 하지 (1945년 9월 9일 ~ 1947년 2월 5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김규식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5월 30일)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1947년 2월 5일 ~ 1948년 9월 15일)
군정장관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1945년 9월 11일 ~ 1945년 12월 17일)
아처 L. 러치 (1945년 12월 18일 ~ 1947년 9월 11일)
윌리엄 프리시 딘 (1947년 10월 30일 ~ 1948년 8월 15일)
현재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북한|]][[틀:국기|]][[틀:국기|]][3]

1. 개요2. 역사
2.1. 군정 이전2.2. 미군정의 군사적 상황2.3.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2.4. 남조선과도정부
3. 대중문화에서4. 여론조사5. 같이 보기6. 관련 인물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또는 미군정()은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합중국 육군 제24군단이 점령하여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조선총독부에게서 한반도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어받아 38도선 이하 한반도(및 그 부속 도서)를 통치했던 기구, 혹은 그 시기를 가리킨다.

워싱턴 연방정부가 제24군단장 존 하지 중장을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곧이어 소장급 육군 장성들이 군정장관을 맡았다. 원래 남한의 미군정 사령관은 군정장관을 겸직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2명의 군정장관(사령관이 겸직하는 군정장관 및 사령관을 보좌하는 군정장관)이 남한의 미군정청을 함께 다스렸다. 하지 혼자서는 남한 전역을 다스릴 여유가 없어 그의 부하들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하여 여러 정무들을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 중장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예하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미군정도 맥아더가 주재하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 집중하고 있어 한국의 미군정에 대해서는 간섭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미군정은 연방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미군정 시기는 원래 구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불협화음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달러화를 그대로 쓰는 것이 나을 정도의 형편없는 통화정책을 펼쳤고, 토지 개혁을 미루는 등 정책적으로 유능하지 못했다. 특히 한국인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킨 뒤 자신들이 직접 통치를 했지만 오히려 제대로된 통치를 하지 못하여 혼란이 극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기본 밑바탕을 구축했을 정도로 미군정은 짧은 시기 집권했지만 막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2. 역사

2.1. 군정 이전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들어가던 시기, 추축국 패배가 서서히 다가오자 연합국 측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미국, 영국, 중화민국 참여)에서 일본 제국을 해체하고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에서 이를 재확인하였다. 이에 앞서 1945년 2월에는 얄타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이 이루어져 독일 항복 이후 2 ~ 3달 안에 소련이 일본 전선에 개입할 것을 약조하였다.

한편 중국 충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이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고,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보다 북쪽인 연안에서는 1942년경부터 조선독립동맹마오쩌둥 등의 공산 정부와 합작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극심한 감시로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여운형 주도로 1944년 조선 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가 세워져 있었다.

1945년 8월에 들어가면서 일본 제국은 말 그대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사실상 정리한 미국은 일본 본토 폭격에 들어갔고 종전을 앞당기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한편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점령한 다음 한반도 북부까지 진입했다.[4]

이에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대표로 여운형과 교섭을 시도했으며, 여운형은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5개조 요구를 들어 행정권, 치안권의 이양 등을 약속받았다. 여기에 송진우 선 교섭설이 존재하나, 신빙성을 놓고 말이 많다. '한국현대사 박사 1호' 연구자인 서중석은 '총독부의 송진우 접촉까지는 사실이나, 이는 명백히 여운형의 경우와는 다른 하급 수준의 것이었으며, 송진우가 총독부의 정권담당의뢰 또는 치안담당의뢰를 거절했다는 설은 한민당 측에서 자신들의 일제시기 행위를 은폐하고 건준과 여운형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요하게 주장했다'고 규정지었다.

조선총독부는 성급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운형의 요구를 사실상 전부 수락했다. 일례로 정치범 석방의 경우 엔도 정무총감은 최소한 연합군이 행정권을 이양한 뒤에 이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5] 결국 여운형의 안대로 즉시 석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하여 조선총독부에는 어떠한 훈령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당연히 이미 함경북도에서 조선주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소련군이 결국 한반도 전체를 접수할 줄 알고 급하게 신변이나마 보장받고자 했던 것. 같은 시기 이미 점령당한 만주국의 일본인들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조선총독부가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였다.

한편 전쟁 말 처절한 혈투를 벌이며 겨우 오키나와 진입에 성공하여 주둔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멸망시키고(만주 전략 공세 작전)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 미국 측도 태평양 전쟁을 조기에 끝내면서 미군의 피해를 경감시키는 효과를 누리고자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였던 것인데 현실은 일본의 마지막 카드였던 만주의 관동군은 이미 규모만 컸지 종이호랑이였으며,[6] 이 때문에 소련군은 만주에서 고전하긴커녕 많은 물자들이 소련의 전리품으로 그냥 넘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소련군이 정해진 곳에서 멈추지 않고, 청진과 함흥을 지나 평양에까지 계속해서 내려오게 되면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이 점령하지 않을까 걱정한 미국은 1945년 8월 11일경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38선 한반도 분할론을 소련 측에게 제시하였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더라도 반드시 수도인 서울은 포함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마침 서울 북쪽을 지나고 있던 38선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의 이런 제안에 대해 소련은 생각 외로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소련이 전쟁을 유럽 지역에서만 하였고 동아시아, 태평양 전역에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정도가 매우 적었으므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이러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7]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리가 먼저 들어와서 다 먹었으니 이거 다 내 거야" 라고 할 줄 알았지만, 반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이 "우리는 태평양에서부터 일본 아작냈고 니네는 숟가락만 얹었으니 이거 다 내꺼야" 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예상보다 훨씬 양보된 입장을 표명하니 양쪽 모두 놀란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여운형 등은 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건준에게 행정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아 마찰이 벌어졌는데, 이는 일본 본국에서 행정권을 미국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김성수, 송진우 등의 우익 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8]'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던 중 9월 초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건국준비위원회 측은 마음이 급해졌다. 때문에 9월 3일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비중이 좌익 측으로 기울자 안재홍 등 중도 우파 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탈퇴하였다. 그러나 9월 7일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에 얼마 가지 않아 실권이 없는 조선인민공화국은 와해됐다. 미군은 그 외의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의 한반도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시정부나 조선인민공화국과 같은 여타의 독립운동 단체 및 자칭 정부들은 당시 국민들의 보통선거와 같은 공식적 정부 수립 절차를 갖추지 않아 이들이 국민들을 대표한다는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독립 운동 단체들을 공식 정부로서 승인하게 된다면 해방 후 조선 국민들이 직접 참정권을 행사하여 정부의 형태와 인적 구성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침해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미국의 이 결정이 사실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 주민들의 대부분이 임시정부가 아닌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9]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미국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임시정부를 정부 차원에서 입국시켰다간 한반도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라고 미국은 판단한 것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고 한 것도 그나마 상당한 대우를 해준 셈이다.

미군정의 법률고문이었던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점령한 것과 미군정이 유일한 적법 정부임을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우며 정당화하였다.
1. 조선의 해방이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의 파기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고, 합병 이전의 조선을 부활시킨것이 아님
1.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들에 의한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음.[10]
1.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와 연합국의 결의에 따른 것이므로 현재 한반도는 어떠한 세력도 영향력이 없는 무주지(無主地)임.
미군정은 9월 9일[11] 서울로 진주하였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이후 총독부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은 미군정의 통치는 '주권정부 없는 점령'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이어졌으며, 결국 미군정이 점령지역의 주권을 대리하게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2.2. 미군정의 군사적 상황

원래 남한에 배치될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스틸웰 육군 대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0군이었고 초기 계획에서는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예하 3개 보병사단)을 주력으로 야전군 직할로 공병, 전차, 방공여단, 전투지원 부대, 근무 부대가 배속되어 총합 11만명의 병력이 수송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병력 계획은 폐지됐고 무려 12번이나 계속 변경되었는데 그만큼 당시의 상황과 변수가 매우 유동적이었고 미군은 최초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게 명백했다. 가장 중요했던 3가지의 변수는 해군 선박의 부족, 소련군의 진격 상황, 종전 직후 바로 시작된 미군의 군축이다. 최종적으로는 미군의 선발대가 조선총독부의 항복과 서울을 접수하고 후속 부대가 지방 곳곳으로 배치될 때인 1945년 가을이 돼서야 확정되었는데 이 때쯤 되면 크게 축소되고 많이 달라진다.

먼저 남한 군정을 담당할 사령부가 10군에서 24군단으로 격하되었는데 미군 수뇌부에서는 원래 10군에 배속된 각종 부대들을 그대로 24군단으로 전환시켜 크게 증강된 군단급 부대로 기능 유지를 도모하려고 한 듯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작전의 진행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린건지, 각지의 미군 부대를 싣고 수송할 해군 수송선단의 집결 및 도착이 계속 지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만주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진격이 매우 빨라서 한반도 전체를 금방 석권할 조짐이 포착되자 미군은 일단 24군단 본부와 일부 직할대(제24군수지원사령부, 제1특별공병여단의 분견대) 휘하 1개 사단(제7사단) 등 2만 5천명의 병력을 1차 제대로 편성하여 9월 4일까지 승선을 완료하고 5일에 출항하여 8일에 인천에 도착했다. 선박의 부족으로 각 부대에 편제된 중무기, 중장비는 대부분 남겨둬서 거의 전부가 사실상 보병 차림이었는데 그들의 장비는 후속 선단이 싣고 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9월 15일 맥아더 원수는 하지에게 무전으로 훈령을 보내어 미국 본토에서 전시 동원의 해제가 진행 중이며 태평양 전구에서 가용한 점령군의 규모를 60만명 이하로 축소시켜야 하는 관점에서 점령 작전의 진행에 중장비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장비가 많은 부대를 점령군 부대 목록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하지는 오키나와에서 대기하던 군단 직할부대 중 3개 대공포대대와 1개 포병대대, 1개 전차대대와 제20기갑단 본부를 임시로 헌병 부대로 전환시켜 후발 제대로 남한으로 이동시켰고 떠나기 전에 부대들이 편제했던 중무기, 중장비와 관련 부속, 기자재들은 섬의 창고로 이관시켰다. 그외 다른 3개의 포병대대는 점령군 목록에서 지워졌고 잔여 방공, 기갑, 포병부대의 이동은 취소시켰다. 선발대로 남한에 온 제7사단 포병대는 야포를 가져왔지만 제24군단 포병대는 모든 야포를 오키나와에 두고 왔다.

1차 제대의 주력 부대인 제7사단은 태평양 전쟁에 1943년 4월 해외파병되어 북태평양 알류샨 열도의 에투 섬 전투를 시작으로 1944년 2월과 10월에 각각 마셜 제도의 남부 콰잘린 환초 전투와 필리핀 중부의 레이테 섬 전투(지상전)를 치렀고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로 4개의 전역(Campaign)에 참전했다. 전쟁 기간 동안 총합 9,2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매 전투마다 계속 보충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단에는 그간의 전투 경험이 누적된 다수의 베테랑 장병들이 많이 포진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최소 2차례 이상의 전역을 치렀고 사단의 장병들 중 35%(5,200명)는 즉시 제대가 가능했던 전역 점수 85점 이상[12]을 획득한 상태였다. 그들은 제7사단보다 더 뛰어난 부대는 없다고 자부했는데 비록 전후 군축으로 훗날 한국 전쟁 초기의 미 7사단은 많이 열악했지만 이 당시만 해도 베테랑 사단이었다.

1945년 11월 1일경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77,000명으로 가장 최고치였지만 군축의 영향으로 감소하여 1946년 4월경에는 44,000명으로 감소했는데 그 직후 교대 병력의 도착으로 일시적으로 60,000명까지 증가했지만 1947년부터 군정 종료까지 3만명 정도로 유지된다. 상당수의 미군 장병들은 기준에 부합하는 전역 점수와 그에 상응하는 복무 기간을 이미 달성한 상태였고 군에 잔류하려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장교[13]와 사병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전역하여 집에 가고 싶어했다.[14] 제7보병사단에서만 점수제의 완화된 기준에 힘입어 1945년 가을부터 1946년 중반까지 최소 7,500명 이상의 사단 장병들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부분은 전역했다.

제7사단의 예하 연대(제17, 32, 184보병연대) 중 제184보병연대도 동원해제되어 1946년 1월 20일 제7사단의 부대 서열에서 방출되며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으로 복원갔고 대타로 태평양 전쟁 초기, 1942년 필리핀 방어전의 바탄 전투에서 소멸한 제31보병연대가 재창설되어 제7사단의 3번째 보병연대로 편제되었다. 기존의 184연대원들 중 점수미달 장병은 31연대로 편입되었으며 제31보병연대는 최초 창설부터 미국령 필리핀에 기반을 둔 현지 미군의 정규 전투부대로 필리핀 방어전에서 필리핀 군이 밀릴 때 전선의 소방수 역할을 담당했으나 바탄 전투의 암울한 상황과 맞물려 결국에는 항복했고 부대의 재창설에는 GHQ의 맥아더 원수가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31연대는 훗날 한국 전쟁의 장진호 전투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게 된다. 제24군단 휘하 사단들 중 먼저 제40사단이 철수했는데 40사단은 남한에 상륙한지 1달만에 전시 동원의 해제 예정을 통보받아 미 본토로 철수하여 원래의 역할이었던 주 방위군 사단으로 캘리포니아 주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1945년 겨울부터 6, 7사단에 담당 구역을 순차적으로 인계하고 1946년 2월 20일부터 사단 본대의 철수가 예정되었고 사단의 각급 부대에서 인원을 추려서 300명 규모로 사단 후발대가 편성되어 철수 전 행정 작업을 완료하고 3월 중순 철수한다. 그동안 1946년 연초부터 40사단의 장병들 중 전역 점수가 미달되는 장병들은 24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로 내보냈고[15] 점수를 충족되어(45점) 전역을 희망하는 장병들은 일시적으로 사단에 편입되어 미 본토로 가는 철수 행렬에 합류했다.[16]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주한 미군정의 전술 부대 중 최후로 철군한 부대는 제5보병연대 전투단으로 연대의 역사를 보면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8년 처음 창설된 유서깊은 부대인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39~1943년 시기에 파나마 운하 경비대로 주둔하다 미 본토에서 제71보병사단이 신설되면서 휘하 연대로 편제되었다. 연대는 1945년 1월에 유럽 전구로 파병되어 라인란트 전투를 겪었으며 이후 남부 독일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그 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점령군으로 지내다 군축의 영향으로 1946년 11월에 해산되었다가 1949년 1월 1일에 한국에서 다시 창설되었다. 부대의 기간 장병과 장비는 일본으로 철수하던 제7보병사단에서 추려내어 편성했으며 미 군정의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후위대로 몇 달을 더 주둔했는데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는 신생 한국군이 질적으로 향상될 때까지 전쟁 억지력 차원에서 미군이 계속 주둔하기를 바랬지만 미군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내놓은 생색내기적 방안이었다. 제5보병연대는 1949년 6월 30일에 한국을 떠났으며 하와이 주둔군이 되어 지내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다.

2.3.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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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1945년 9월 9일 ~ 1947년 6월 2일
성립 이전 이후
조선총독부 남조선과도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령관 <colbgcolor=#fff,#191919>존 리드 하지 (~1947.2.5.)
군정장관 아치볼드 V. 아놀드 ,/ 초대 (1945.9.11.~1945.12.17.),
아처 L. 러치 ,/ 제2대 (1945.12.18.~),
[clearfix]
British Pathe 영상 오른쪽 영상은 1945년 9월 9일 미 육군에 항복하는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육군대장
파일:external/ifeeltong.org/45980291fd1088145229b868604911a0_ANFu1pCpTANDK16CPZwxs4l2kbOzq.jpg
그날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17] 그리고 미군정이 선포됐다.

미 군정청은 진주 직후 재조선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일본 본토로 송환하기 시작한다.[18] 동시에 정치와 경제 등,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빈자리에는 한국인들이 점차 들어왔다. 우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당 형태로 정치 세력을 전환했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 또한 당을 조직하였다. 이 시기 난립한 당파는 수백 개를 상회하므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주요 정당들을 대략적으로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중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므로 미군정 측에서도 이들에 호의적이었으나 대중적 지지율은 낮은 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지지율이 높았던 이승만을 한민당과 연대하도록 주선하였다. 또한 미군정은 김구와도 접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완고한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김구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 시기에는 정치 세력 대부분이 한반도에 단일 정부가 수립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정치 대립이 그 이후만큼 격하지는 않았다. 이건 남한 지역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에도 마찬가지여서, 38선도 원래는 소상인들이 물건 팔러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경비가 느슨했다고 한다.

다만 정치 부분을 벗어나면 일제 치하에서 눌렸던 각종 불만들이 민주주의 이식을 표방하던 미군정하에서 폭발하였으므로 이로 인한 혼란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외 동포의 다수 귀국과 공출 - 배급제 해지에 따른 쌀값 폭등이었다. 이에 1946년 1월 미곡수집령이 발표됐으나 운영 미숙으로 다시 한번 혼란을 가져왔다. 이외에 소작제, 토지 분배 등을 놓고 쟁의가 계속되었다. 미군정 측은 소작료를 수확량의 1 / 3로 제한하고 일제 아래 지주의 토지를 매각하는 등의 노력을 하긴 했으나 이는 농민의 불만을 수렴하지 못했으며 사회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진 북한과 대비되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후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의 한국문제특별위원회에서는 3년간 5억 4천만 달러를 한국에 뿌리려 했으나 계획단계에서 그쳤다.

하여튼 다시 정치로 돌아와서,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안이 전달되면서 남한 지역의 정치판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타국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신탁통치안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견딜 만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감정적으로는 35년의 식민 통치를 겨우 벗어난 한국 시민들에게 악몽의 재림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이러한 전달이 미국과 소련 측 입장이 뒤바뀌어 전달된 것이다.(신탁통치 오보사건)

이무렵 남한은 미군정인 상태로 둔 채 국회의원 선거만 실시했는데 이승만동대문구 갑 지역구[21]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잠깐 국회의원을 했다.

이후 우익 측(이승만, 김구, 한민당 등)은 반탁 운동에 나서면서 나섰고, 좌익 측(박헌영 등)은 본래 대개 반탁 혹은 중립적 행보를 보였으나 박헌영 등이 소련에 갔다온 이후에는 찬탁으로 선회하였다.[22] 반면 중도 세력 측은 신탁통치안을 보류 혹은 수용하려는 반응을 보이되 한반도 안의 임시정부 수립안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시민의 지지는 우익 측으로 향했으며 좌익 측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한편 좌우파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파(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의 세력 또한 위축됐으며, 우익의 대표 인사였던 송진우마저도 신탁통치에 대해 (다른 우익층에 비해 비교적)호의적인 발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파일:FB_IMG_1474740940271.jpg
1946년,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한 이승만, 김구, 테렌티 시티코프, 안재홍 (순서대로)

이후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위원회는 초기에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참여할 정치 세력을 놓고 미소 양측이 대립하면서 결국 결렬되었다. 소련 측은 3상회의안에 반대하는 반탁 세력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 측은 3상회의 안에서 한반도 세력이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들어 한반도 안 정치 세력을 배제할 것을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모든 정치 세력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월에 회의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남한 지역만이라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정읍발언), 이는 사실상의 단독 정부 수립안이었다. 한편 격화된 좌우 대립과 단독 정부 수립안에 위기감을 느낀 중도 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46년 10월에는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다. 이 당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대단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서 배척받는 중도의 한계점을 보였다. 가령 '무상 / 유상 / 유조건 몰수 → 무상 분배' 안의 경우 우익 측에서는 무상 분배를, 좌익 측에서는 유상 / 유조건 몰수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양측 모두 '돈 주고 사서 돈 없이 배분하면 재정이 파탄난다'는 반대 의견을 냈으며 이 또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판단은 알아서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좌우익 모두를 수렴하려는 노력이 결국 좌우익 모두의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는 동안 미군정 측은 중도 세력과 교섭하여 1946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과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세웠으나, 여운형 세력 등은 남조선 과도 정부 수립 단계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초부터 국방경비대, 경찰 등을 창설하거나 강화하며 좌익 측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23]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공산당은 쟁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6년 9월 30일, 부산에서 철도기관사들이 일으킨 파업부터 시작해 총파업이 일어났고, 여기서 경찰의 민간인 발포로 우발적으로 터진 대구 10.1 사건이었다. 그러나 쟁의가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탄압 또한 격화됐으며, '정책의 역전' 이후 좌익 측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월북하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 북부에서는 1946년 초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 주도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산업 국유화 등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월남민들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비록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와의 연관성은 부인했으나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내건 사람들이 이 정책을 주도하고 우익을 우선적인 숙청 표적으로 삼았기에 대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 세력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민선의원과 관선의원 45명씩으로 구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과도기적 국회의 역할을 하였다. 다음 해인 1947년 2월에는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꾸고 한국인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였다.[24]

경제에 있어서는 일본인 자본 및 기술자의 철수, 만주 및 일본과 교역 단절 등으로 혼란이 심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의 황폐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일제가 통화발행량을 늘려버려서 통화량이 매우 팽창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이 물가안정이나 산업부흥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통화발행량을 오히려 늘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1945년 말에 미곡 가격 자유화 정책을 펴면서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기 때문이다.[25] 여기에 미군정이 정부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미국본토에서 받기보다는 자체 지폐 발행으로 조달하는 바람에 초인플레이션 현상까지 벌어졌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 매점매석이 판을 치며 서민들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여기에 토지개혁을 차일피일 미루면서도 서울 등 도시에 필요한 쌀을 농촌에서 강제로 수매하기도 했고,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떠나고 남는 사업체들(적산)들을 사원들이 모여서 자체 운영하려고 했던것을 무효로 만들고 엉뚱한 자들에게 불하하는 등 개판의 연속이었다. 소군정이 재빠른 토지개혁과 물가통제 정책으로 경제가 재빨리 안정화되었던것과는 대조적이었고, 이 때문에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극히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이렇게 한반도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실행한 것은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얻은 정보들은 구 조선총독부가 넘겨준 정보가 전부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 중 미국에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기자회견을 통해 알리자 그 어떤 미국인들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 식민지가 된 한반도가 근대화되지 않았냐는 식의 질문을 해 이승만이 울화통이 터질 정도였다. 이는 광복 뒤에도 마찬가지로 이승만이 미군정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듣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였다가 낭패를 보았다. 심지어 한국전쟁 와중에는 구 일본군을 투입시켜 병력열세를 만회하자는 주장을 했다. 일본군이 한반도를 지배한 만큼 한반도 지리를 잘 알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주둔한 만큼 일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친근감도 있어 빠르게 적응할 것이라는 황당한 판단이었다.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군이 들어오면 일본군부터 먼저 무찌르고 볼 것"이라며 비판하였고 미국은 이 계획을 철회하였다.

다만 미군정이 정말로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는지는 의문의 여지도 있다. 1947년 8월 26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보낸 특사인 앨버트 웨드마이어 중장(1897~1987년)은 조선에 들어와서 8일 후인 9월 3일에 떠났는데, 그 와중에 정인보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해서가 아니라 친일 협력자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좌익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으나[26],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이 들은 조선인들의 말을 들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정책은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본다면,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우격다짐으로 무시해버렸다고 볼 여지도 있다.[27] 마치 2003년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이 수많은 이라크 관련 전문가들의 충고를 듣고서도 깡끄리 무시해버린 것처럼.[28] 실제로 이후에도 미국. 미군은 현지사정 개무시하는 행보를 자주 보여주기도 했고. 당연하지만 미군의 이런 현지사정 무시는 베트남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미국 참패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29]

2.4. 남조선과도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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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과도정부
南朝鮮過渡政府 |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1947년 6월 3일 ~ 1948년 8월 15일
성립 이전 이후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이승만 정부
군정장관 <colbgcolor=#fff,#191919>아서 러치 ,/ 제2대 (~1947.9.11.),
윌리엄 프리시 딘 ,/ 제3대 (1947.10.30.~),
민정장관 안재홍
[clearfix]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 또한 뒤바뀌게 되었다.[30] 이 트루먼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게 된다.[31] 이전까지의 정책이 좌익 측에 대해 비우호적일지언정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지키려 했다면, 이 이후의 정책은 아예 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성향이 강해져 좌익 측의 활동은 불법화되었다. 이에 맞춰 좌우합작운동 등에 대한 지원 또한 약해졌다.
파일:FB_IMG_1474741494307.jpg
1947년,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목(영어 통역관), 야코프 말리크, 테렌티 시티코프, 허헌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는 초기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참가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제1차 미소공위 때와 같은 문제를 넘지 못하고 끝내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서 1947년 7월에는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와해됐으며[32], 단독 정부 수립파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1947년 9월에는 미국 측이 제시한 한반도 내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UN 총회에서 가결되었으나, 소련 측은 북한 지역에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33] 이에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 수립안이 결정되었다.
1947년 서울에서의 좌-우 대립 모습을 찍은 영상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발하고 1948년 4월경 남북 회담을 열었으나 이미 북한 단독 정부 수립안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던 김일성 등에게 형식상의 합의를 얻었을 뿐이었으며, 이는 이후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는 불행만을 낳았다. 한편 무장 좌익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 총선거를 방해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진압했으나, 이에 대한 토벌 작전이 벌어지면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학살당했다.(한편 여수·순천 10.19 사건이 4.3 사건에 연동하여 벌어지면서 군내 좌익 숙청 작업이 벌어졌다.)

이후 선거가 연기된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5.10 총선거로 제1대 국회가 수립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 세력이나 중도 세력 등이 대거 불참하였다.[34] 이 선거에서는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는 북한 지역 또한 대한민국의 관할에 있다는 상징성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같은 해 7월 12일,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같은 달 17일에 공포(제헌절의 기원)했으며, 7월 20일에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시영을 선출하고 본래 이승만이 맡았던 국회의장직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1948년 8월 15일,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행정, 입법, 사법, 외교권 등의 각종 권한들을 대한민국으로 이양하여 해산되었으며, 남아있던 미군정 관리하의 토지와 공장 등 적산 또한 대한민국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관인 찰스 핼믹은 1949년 1월 11일까지 군정장관으로 재임했고, 6월까지 정치, 군사고문을 맡았다.

이 무렵 김구이승만은 정부 수립 문제로 대립했는데 김구는 남북 공동 정부를,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남북 단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끝없이 이승만과 김일성을 설득했으나 둘 다 거절했는데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보다 훨씬 과격하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라 김구의 설득을 듣기조차 싫어했으며 오히려 힘으로 부수고 남북 적화 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소련군정이 들어설 때부터 갖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이 암살 등으로 죽어야만 남북 공동 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구는 악착같이 매달려서 어떻게든 김일성을 설득해보려고 한 반면 이승만은 현실을 받아들여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당연히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김구는 불참했다.

3. 대중문화에서

2006년작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이례적으로 미 군정기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 새로운 부분들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의 패망을 다룬 21회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다룬 45회까지 20회가 넘는 분량이 해당된다.

4. 여론조사

광복 직후 1945년 10월, 중도우파 성향의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이 자료를 통해 여운형의 지지율이 매우 높았다고 단편적으로 해석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조금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일단 표본은 잡지사의 여론조사에 응할 수 있는 지식인층이었고 잡지사 구독자의 대부분은 도시민이였다 또한 이 당시에는 전화는 부유층이나 관공서에서나 가지던 사치품이었고, 농어촌 지역에서는 통신 자체가 안 깔린 경우도 허다했으며 전화보급대수가 많아 상대적으로 여론조사의 정확도가 높았던 미국,영국에서도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주먹구구식으로 일단 표본 신경 없이 응답자수 늘리기로 많은 응답자수를 확보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제 신생국가에 선거도 치러보지 못한 국가에서 여론조사의 정확도는 떨어질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여론조사는 '선구회' 잡지사에서 창간하자마자 기념으로 여론조사를 한 것이고, '그나마' 광복 직후 당시 정치색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학계에서는 이 여론조사를 자주 인용한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여운형, 박헌영은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활동을 하여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상태였고 특히 여운형은 일제와도 적당히 친분이 있어서 이런저런 공식 행사에 많이 참여하여 얼굴을 알렸고 라디오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여 대중들에게 매우 친숙한 민족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김구나 이승만 등은 일제강점기 내내 거의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 대중들은 그들의 명성은 익히 알았지만 해방된 시점에서 실제로 직접 그들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어봤던 사람은 한반도에 거의 아무도 없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1945년 10월, 11월에야 각각 귀국했다. 즉 저 조사가 실시되었던 시점은 이승만은 아직 귀국하기도 전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단순한 수치보다 해외파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한 지지율에는 또한 미군정과 교섭할 때 수월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좌익 측조차도 광복 직후 이승만을 미군정과 교섭할 인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9월 초 우익 측이 탈퇴하면서 좌경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안에서 당시 국내에 있지도 않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세운 점,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합류한 점(금방 탈퇴했지만) 등으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승만은 이러한 제안들을 거부했다. 이 시기까지만해도 이승만은 좌우익을 망라해 인지도가 높았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외에 1946년 7월,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29.2%), 김구(10.5%), 김규식과 여운형이 각 10.3%였다. 1948년 6월23일, 조선여론협회가 5개의 거리 행인에게 "누가 초대대통이 되기를 바랍니까?"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1,024), 김구(568), 서재필(118) 순이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인한 좌익 측의 위축이 눈에 띈다. 그러나 설문에 응답한 이들 가운데 '모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전체에 30%가량이나 될 정도로 많았고 미군정에서 여론조작 공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설까지 있어 신뢰성이 떨어져 학계에서는 이 자료를 그다지 많이 인용하지 않는다.

이 두 여론조사에서 유추해보면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한국민주당 세력 인사들은 단 한 명도 뽑히지도 거론되지도 않았다. 이는 당시 민심이 한민당을 얼마나 혐오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당시 민심은 미군정을 혐오했다.
<colbgcolor=#002664><colcolor=#fff>(1)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기권 4686명 98%
2위 위생 시설 96명 2%
(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식량 정책 2534명 53%
2위 산업 운영과 주택 관리 1482명 31%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종로, 본정 입구, 노량진에서 통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출처

미군정이 통치한 지 2년이 되어가는 1947년 7월 6일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당대 대중은 김구와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이미 미군정이 해체한 지 오래된 여운형과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
<colbgcolor=#002664><colcolor=#fff>(1) 국호는?
1위 조선인민공화국 1708표 70%
2위 대한민국 604표 24%
3위 기타 8표 1%
4위 기권 139표 4%
(2) 정권 형태?
1위 인민위원회 1757표 71%
2위 종래 제도 327표 14%
3위 기타 262표 10%
4위 기권 113표 5%
(3) 토지개혁 방식?
1위 무상몰수 무상분배 1673표 68%
2위 유상몰수 유상분배 427표 17%
3위 유상몰수 무상분배 260표 10%
4위 기권 99표 5%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출처

광복 이후 당시 민심은 사회주의 성향이 다분히 강했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35]의 기사에 따르면, 미군정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시민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여론이 70%나 되었다. 반면,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각 14%, 7%정도였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3면 참조. 1945년 당시 한국의 문맹률이 77% ~ 80%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과연 정치 사상에 대해서 일반 시민이 얼마나 깊은 이해도를 갖고 있었을지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며 어디까지나 소작 등 부조리한 수취 구조에 대해 '부의 재분배'를 원하는 시민이 몹시 많았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시기와 주체를 달리하는 몇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대중은 일관되게 좌익 지도자에 대한 지지(1945년 10월 선구 여론조사)/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지지(1947년 7월 6일 조선일보에 실린 여론조사)/미군정에 대한 불신(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실시한 여론조사)/사회주의에 대한 선호(1946년 8월 미군정청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여준다. '정치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양민' 이미지가 후대인의 환상이고 당대 대중은 뚜렷한 가치관과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과연 '정치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양민'들이 시기와 주체를 달리하는 각종 여론조사마다 저렇게 일관된 선호를 표시할 수 있을까? 또한 당대 대중이 지지한 사회주의가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자유주의였다는 의견이 있다. 사회주의를 지지한 70%의 당대 대중이 무엇을 원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냥 거의 비슷하게 70% 선호를 보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면 된다. 조선인민공화국을 원한 것이다. 한편 해당 조사에서 제일 지지받는 정당은 김구나 여운형이 속한 한독당과 인민당이었지만, 제일 지지받지 못하는 정당은 다름 아닌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고, 북한에서 재빠르게 토지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조치나 내놓는 미군정과 대비되어 공산당에 대한 여론 자체는 호의적이었지만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공산당이 타격을 입기도 했고, 내심으로는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공산당에 대한 테러가 극심해져 공공연히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벌어진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이 속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이승만에 대한 비토하는 여론에 의해 제3당으로 밀려났고, 친 이승만파의 의석은 210석 가운데 57석에 불과하였다. 물론 이 때는 전체 국회의원 당선자들 중 무려 절반이 정당이 없는 무소속이었다.

5. 같이 보기

6. 관련 인물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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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군정이었으므로 성조기가 곧 국기였을 것이라 오해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독립준비를 완료할 때까지만 통치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민, 관, 모두에서 태극기가 사용되었다. 1946년 1월 14일 존 리드 하지 중장 등이 참여한 행사에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역사 자료가 남아 있다. # 성조기는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장 등 일부 시설과 미군부대에서만 게양되었다.[2]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개원식 등 각종 정부 행사에서 애국가를 국가로 제창하는 영상이 남아있다.[3] 경기도(개성시, 개풍군 전체와 장단군 진서면, 장단면 일부) 및 황해도(옹진군, 연백군) 모두 정전 협정 때 북한 측에 넘어가 상실한 영토.[4] 원래부터 소련군의 일본군 무장해제 지역에 두만강 하류의 함북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5] 같은 시기 일본은 10월 GHQ의 인권 지령에 의거하여 치안유지법이 철폐될 때까지 정치범과 사상범이 그대로 수감되어 있었다.[6] 규모는 71만 3천 명이나 되었지만 격화된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최정예 사단들이 전부 남방으로 빠진 상태라 관동군은 완전히 3류 잡병으로 전락해 있었다. 오죽하면 일본 자체적으로도 관동군 전체 전력이 미군 4개 사단도 안 된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7] 참고로 이 제안을 소련에서 불복할 시에는 37도선까지로 합의를 보려고 했다는 기밀 문서의 내용도 존재한다. 북위 37도선은 아산만부터 울진 앞바다까지를 가른다. 즉, 서울특별시를 포함한 경기도강원도 전 지역이 소련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8] 奉戴, 받들어 추대함[9] 여운형, 박헌영[10] 좌익계가 아닌 우익계를 가리킴. 미국은 좌익계의 독립운동을 혁명적 행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11] 이날 구 중앙청 건물에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로 대체되었다.[12] 2차대전에서 해외파병된 미군들은 점수제를 통해 전후 순차 전역하는데, 각종 복무 요소(복무기간, 해외파병기간, 훈장획득개수, 전역참가횟수 등)를 점수로 계량화하여 특정 점수를 획득한 장병을 제대시켜주는 것이었다. 종전까지는 전역 기준 점수는 대개 85점이었으나 전후 기준을 낮춰서 1945년 연말에는 일반적으로 장교와 사병은 각각 70, 50점과 또는 공통으로 복무 기간이 4년이면 귀향할 수 있었고 미국의 전시동원체제가 최종 해제된 1947년 6월까지 이 제도에 의한 소집 해제와 전역이 계속된다. 제7사단의 경우, 오키나와 전투 도중 5월에 사단의 최초 점수 획득자들이 본토로 돌아갔고 전투 종료 후 6~8월에 2번째 행렬, 사단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1945년 겨울부터 1946년 가을까지 다시 전역 장병의 전출 행렬이 이어진다.[13] 확인된 사례로는 소령 계급 이하의 장교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배경상으로는 전쟁 전에는 생업이 있던 민간인이었고 전시임관으로 참전했던 이들이 대다수였던 집단이어서 그런 듯하다. 물론 중-대령과 장성들도 전후 전역을 택한 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본래 직업군인들 출신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다. 전역이 결정된 장교들은 그들의 최후 보직에서 이임되어 개별적으로는 미국 본토로 복귀하는 장병 행렬에 편입되어 일시적으로 각급 인솔자가 되어 본토에서 전역 절차를 밟을 때까지 사병들을 관리했고 함께 전역했다.[14] 최근 기록으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5년 하반기에 전세계 곳곳에 파병되고 구 추축국의 점령군으로 있던 연합군 장병들(미국, 영국, 호주)의 일부가 연달아 시위를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각국의 국민 여론도 이에 호응해서 전시 동원을 빨리 해제하라고 정계에 압력을 가했고 그 영향으로 군축의 속도가 빨라진 점이 있다. 미군은 이에 점수제를 개편, 전역 기준을 낮춰갔고 46년 시점에선 파병기한을 최소 15개월을 채운 장병들이 (이들의 경우, 파병시작시점이 빨라도 44년 연말이며 전쟁 중 대규모 작전을 고작 1번 겪고 전쟁이 끝남) 기록상으론 46년 여름까지 전역했고, 전쟁 끝 시점에 배치된 전투경험이 아예 없는 보충 징집병도 47년에 전역했다.[15] 이것은 전후 해외 점령군으로 주둔 중인 미군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 인사 정책으로 현지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부대엔 부대 자체의 점수 고득점자 + 타 부대들의 고득점자들로 정원을 맞춰 귀국시켰고 점수가 낮은 장병들은 기존 부대에서 방출돼 점령군으로 잔류하는 부대에 남아서 점수를 마저 채우고 귀국하는 식으로 병력 및 부대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점령군의 많은 부대들은 현지에서 해산했고 부대 귀국 스케줄이 안맞을 땐 각지의 전역예정자이 특정 항구에 모여 귀국행 선박을 기다렸다.[16] 주일미군의 경우, 제43보병사단 (뉴잉글랜드 주방위군) 이 45년 9월에 가장 먼저 귀국하는데 사단은 필리핀에서 점령군으로 9/13에 요코하마에 상륙했고 불과 2주가 지난 9/28에 일본을 출항, 미국으로 항해한다. 귀국 준비 당시에 사단엔 주일미군의 온갖 부대에서 가장 점수가 높았던 장병들이 전입왔다. 다른 예로 점령군으로 잔류해 6.25전쟁에 참전한 제1기병사단은 45년 7월부터 47년 여름까지 사단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연 인원이 3만명을 넘었는데, 이 중 점수저점자의 비율이 많았을 것이다.[17] 사진을 보면 깨알같이 미군들이 성조기가 게양되는 순간 성조기에 경례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18] 이들은 히키아게샤라 불린다.[19] 김구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환하기를 원했으나 이를 거부한 미국 측과 한동안 마찰을 겪었으며, 결국 한국독립당이라는 정당의 형태로 전환하였다.[20] 이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된다.[21] 현재 기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성북구 돈암동, 성북동. 지금의 동대문 갑 지역구와는 완전히 다르다.[22] 여기에 존스턴의 왜곡보도도 커다란 한몫을 했다.#[23] 다만, 국립 경찰을 강화하는 부분은 좌익 측뿐만 아니라 민심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을 초래시켰다.[24]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인 군정장관이 우위에 있었다.[25] 1911년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777달러였으나, 해방되던 1945년에는 1911년만도 못한 616달러로 내려 앉았다.링크[26] #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 정무용(28)씨는 당시 한국인들이 미 육군 중국전구(中國戰區) 사령관 출신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 사절단에게 보낸 편지 450여 통을 16일 공개했다.정씨는 논문에서 한국인이 호소한 요구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 사절단이 남한의 대표로 우익 세력을 선택하기 위해 편지가 지적한 문제들을 묵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1951년 ‘우익이 한국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 한다’는 부분을 빼고 보고서를 작성했다가 1972년 이를 되살렸다.#[27] 실제로 서울 주재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샵신(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Шабшин, 1910년 10월 15일 ~ 1967년 1월 15일)의 아내로, 1940년에서 1946년까지 남한에서 살았던 파냐 샵시나(Фаня Исааковна Шабшина, 1906년 10월 25일 ~ 1998년 10월 4일)와 대화를 나눈 조선인 화학 교수는 "미국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오만하게 대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전쟁 전까지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조선에 살았었답니다. 그들은 우리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우리처럼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양키들을 잘 알고 있지요."라고 말한바 있다. #[28] 이 때문에 몇몇 역사학자들은 한반도의 연합국 점령통치가 실시되는 데 있어 태평양 전구 출신 인사가 아닌 앨버트 웨드마이어와 같은 미 육군 중국 전구 출신 인사가 남한 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되었거나, 신탁통치를 논하는데 있어 미국,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도 어느정도 한반도 문제에 관여를 했다면 훨씬 나았을 거라고 가정하기도 한다.(이러한 가정을 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한국광복군출신이자 직접 웨드마이어로부터 OSS훈련을 받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이 있다.) 이는 왜냐하면 한국을 일본의 통치를 받던 아시아 국가로만 취급하던 미.소 양국과 달리 중국은 그나마 오래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을 하면서 연합국 중에서는 한반도 사정에 밝았기 때문. 물론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장제스중화민국을 뜻한다. 사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날 때 미.소.영.중 4개국의 합의에 따라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이 났지만 미소공동위원회의 지속된 결렬 때문에 무산되었다.[29]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이기는 하나 중국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공산권 분열이라는 좋은 기회임에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호치민을 적대했으며 미국은 베트남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안았고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집귄 국가가 아닌 부족연맹국가고 현지 문화와 관습을 대놓고 무시한 결과 천문학적인 자본과 물자,병력을 투입함에도 제대로된 성과 없이 참패한다.[30] 정책의 역전, Reverse Course[31] 이는 한반도뿐만이 아닌 일본 GHQ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일본GHQ의 '레드퍼지'(특히 역코스 정책) 이전까지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32] 이때 민정관 E. A. J. 존슨에 따르면 여운형 암살 당일 미국은 여운형에게 민정장관직을 타진하려고 했고, 여운형 역시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문서를 지참했다고 한다.[33]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 수 배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34] 이는 당대에는 신념에 따른 일종의 보이콧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제1대 국회가 이승만을 위시로 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한국민주당 위주로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35] 한국민주당김성수가 창립해서 한국민주당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였다.[36] 사건 자체는 일제강점기 때 일어났으며,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광복 후 《조선말 큰사전》을 출판한 것은 미군정 시기인 194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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