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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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삼국시대 임진강 이남에 있었던 세 느슨한 소국 연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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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삼한(三韓)은 중남부[1]에서 거주하던 민족들이다. 이후 고대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에서 거주하던 반농반목 및 수렵채집 민족인 예맥(濊貊)인과 융합 되었고, 현대 한민족의 주류 조상이 되는 한(韓)인들의 나라들을 말한다.기록에 의하면 진국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 쪼개졌다고 나온다.
각 숫자는 왼쪽부터 마한, 변한, 진한 문서 참고.
1.2. 상세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에 도읍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4군(郡)과 2부(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쪼개어져 마한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 서문 中 #
《동국여지승람》 서문 中 #
傳子至孫右渠, …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중략) 진번·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2]
《한서》(漢書)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중략) 진번·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2]
《한서》(漢書)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로 백제(伯濟)는 그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후한서』「동이열전」「한(韓)」조
『후한서』「동이열전」「한(韓)」조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변진
위에서는 삼한 중에서 마한이 가장 강력하다고 나온다.(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변진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古之辰國也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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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한(韓)의 기록}}}[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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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에서 쫓겨난 준왕이 새로 자리잡아 왕에 오른 한(韓), 혹은 소국 연맹체 진국(辰國)과 고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서 형성된 소국들의 연맹체인 마한, 진한, 변한과 함께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편의상 세 나라로 분류하지만 실상은 수많은 소국이 난립했으며, 같은 정체성으로서 서로 단결할 때도 있었고 열심히 싸우기도 하며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마한 54개, 진한 12개, 변한 12개국으로 통칭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국들의 목록의 근거는 자체 기록이 아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니 정확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목록을 자세히 보면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가 쉬운, 서해와 남해에 인접한 지역 위주이다. 따라서 한반도 내륙에도 여러 성읍국가가 있었는데 기록에서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국립청주박물관은 2019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충북 지역에서도 1~3세기 마한계 소국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면서 충북 지역 소국들이 《삼국지》 기록에서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고고학 연구를 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관련 유물이 나오다 보니 학자들조차도 몇 개인지 모른다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소국들의 크기는 지금의 시·군 한두 개, 커봐야 몇 개 정도 묶어놓은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된 고대 국가라기보다는 성읍국가나 지역들의 연맹체에 가까운 형태였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연맹이라는 것도 거대 국가인 중국이나 한반도 북부 지역과의 교류에 있어 그런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지, 포상팔국의 난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서로 싸우기도 했다. 따라서 원삼국시대의 삼한이 생겨난 시기는 한국사판 춘추시대[4]라고도 볼 수 있으며,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수수께끼의 나라들이다.
사서에 따르면 진국(辰國)에서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지만 진국이라는 실체는 불분명한 측면이 많아 잘 인정되지 않으며, 마한과 진한, 변한의 각 나라들은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백제가 3세기 중후반 제 모습을 갖춘 이래로도 마한의 모든 구성국이 백제국 아래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성되기까지는 무려 300여 년이 걸렸다. 일단 마한, 진한, 변한 등은 묘제와 생활 문화 등으로 봤을 때 그럭저럭 구성이 비슷했고, 그 중에서도 변한과 진한이 특히 더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강 마한은 졸본부여 사람들이 남하해 세운 한성백제가 목지국에게서 주도권을 뺏은 뒤 나머지 소국들을 병합하고, 변한은 후에 가야연맹으로[5] 발전했으며, 진한은 사로국에게 흡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금세 일어난 일 같지만, 실제로는 백제와 신라의 건국 이후에도 삼한의 소국 세력들이 상당 기간 동안 남아있었다. 백제와 신라도 처음에는 삼한의 소국 중 하나였으며, 결국 시간이 흘러 마한은 백제국을 중심으로, 진한은 신라국을 중심으로 흡수된 것이다. 교과서에서도 잘 다루지 않으니[6]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신라와 백제는 현재 쉽게 접할 수 있는 삼국시대 지도처럼 건국하자마자 한반도 동부와 서부를 다 영토로 편입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신라는 맨 처음에 수많은 진한 지역 소국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는데, 수도 경주 인근인 울산, 안강, 영천에 각각 우시산국, 음즙벌국, 골벌국이 존재했을 정도니 초기 신라가 얼마나 작은 나라였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작은 나라들을 하나하나 연합하고 복속해나가면서 경상도 일대, 나아가 충청도와 강원도 등 바깥까지 지배하는 영역국가가 된 것이다.
백제 역시 그 세력이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는 건국 직후 마한을 복속시켰다고 나오나, 《삼국지》 등 당대의 문헌과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를 참고하면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자치를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차 마지막 개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 추정이 공식적으로 삽입되어 마한이 천안, 익산, 나주 등을 중심지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실제로는 백제국이 천안 청당동에 위치한 목지국을 타도하고 대신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으며, 이후 왕도에 가까운 소국들부터 서서히 자치권을 빼앗고 직접 지배로 전환했던 것이다.
또한 마한의 최초 중심지는 다름아닌 익산의 건마국이었을 가능성이 최근 높아지고 있다. 오래 전부터 고조선의 준왕이 익산 근처에 남래했다는 전승이 있었으나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었는데, 최근 확인된 것이다. 국사 교과서 상 언급을 요즘 학계 정설에 맞게 다시 고치면, 마한의 중심지는 익산 → 천안 → 서울 → 공주 → 부여가 된다.[7] 나주의 경우 영암 세력의 분가로 있었다가, 서진 시대에 마한 신미국을 자처하면서 백제의 마한 영도국 자격을 잠깐 부정했던 침미다례 연합의 영암 및 해남 일대 세력을 백제가 제압한 후 키워준 세력이다. 때문에 마한이라는 명칭은 아예 사용하지도 못했으니 여기에 낄 여지가 없다.
한편 후기 마한의 영도국인 백제와 그 나머지 소국들에 대해 더 얘기해보면, 목지국을 타도한 직후의 한성백제는 지금의 충청-전라 지역의 마한 소국들을 공납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스렸다. 다만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서 독자적인 운동력을 잃지 않은 소국들이 익산, 영암, 해남 등지에 있었던 것인데, 그 소국들마저 백제의 강력한 견제 탓에 일정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던 정황이 고고학적으로 관찰된다. 거리가 상대적으로 백제국과 멀었던데다 본디부터 부강했던 침미다례조차도 최전성기에조차 전남의 1/3밖에 통할하지 못했을 정도다. 독자 세력이라고 하기에도 쑥스럽고, 한동안 신라, 백제 등과 대등한 외교·경쟁 상대였던 가야의 소국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마한의 경우 워낙에 영역이 넓고 독자적 수계도 다섯이라, 목지국 같은 맹주격 국가가 있었고 수많은 마한계 소국들은 연맹체로 존속하거나 세력을 넓혔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고이왕 시기에 통역 오류로 인해 마한과 한군현이 정면으로 충돌한 기리영 전투의 기록에 따르면 대방군의 태수 궁준이 전사하는 등 일부 소국들은 상당한 세력을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신분활국이 임진강 인근에 소재한 북부 마한 소국들의 리더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군현의 반격으로 신분활국이 아예 멸망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유언 중 "나의 묘지기 일은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잡아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게 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예인들과 함께 언급되는 한인들은 곧 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만 삼한의 주민 구성은 '삼한인'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말할 정도로 간단하지 않고 복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중국 전국 7웅 중의 하나였던 연나라가 고조선을 밀어붙였던 기원전 3세기 무렵 조선인들이 대거 남하했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원전 194년 준왕이 위만의 정변으로 쫓겨날 때도 준왕과 함께 대거 남하하였다. 물론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도 비슷한 흐름이 발생했다.
그리고 기원후 2세기 중후반경 후한이 혼란해지자 또 다시 낙랑으로부터 대거 낙랑인들이 남하하는 흐름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조선의 유민들이 혁거세 거서간을 왕으로 추대해 신라의 건국 집단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 4세기경부터 기존 고인돌 집단과 다른 새로운 집단의 여러 차례 유입이 확인된다. 그 외에도 위말갈, 한나라 환령지말의 혼란을 피해 이주한 중국인 등 여러 이질적인 집단이 섞여 살았다.
문헌상에 이처럼 한반도 중남부에 여러차례 이주민 내지 유이민의 유입에 대한 기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으로는 같은 시기 토착사회를 완전히 대체하는 수준의 급격한 주민교체는 확인된 바 없으며, 대체로는 기원전 13-12세기 경 청동기시대 전기 이후의 주민구성이 큰 변화없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요서 및 예맥계 종족의 이주를 중심으로 한국사의 시원을 연구한 문안식 역시 한(韓)족은 송국리 문화 및 지석묘를 영위하던 토착민이 주체가 되었으며, 요녕지방의 이주민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흡수-동화되었다고 보고 있다.[8] 주로 고고학계에서는 이들 청동기시대 말기의 이주민들이 종래 토착사회에 국가형성을 자극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인정하나, 이전의 토착주민들을 대체하거나 이주민들이 다수가 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고고학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4-3세기무렵부터 한반도 중서부일대에 처음 세형동검문화가 수립되고, 이것이 점진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재래의 토착 송국리문화 및 울산 검단리문화 등과 결합함에 따라 마한 및 진-변한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영남일대에서는 세형동검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이전에도 이미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농경을 기반으로한 인구집단이 집중되어 있어서, 해당지역에는 이들이 삼한시대 '읍락'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이미 영산강-만경강 사회와 교류하여 세형동검을 수용하고 대규모 지석묘를 건설하는 등 수장사회에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100년 경 무렵을 전후하여 중서부의 세형동검문화를 향유하던 세력들이 직접적으로 이주하고, 이들이 상위읍락을 형성, 기존 사회를 재편함으로써 진-변한이 성립된 것이다.[9]
그런데 이 때 한반도 중서부일대에 처음 등장한 세형동검문화의 성립 혹은 전파의 과정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그 연대나 담지 주체에 대해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한다. 종래에는 진개의 동정이나 준왕의 남천과 같은 문헌기록과 연관시켜, 기원전 4-3세기 무렵 고조선계 이주민의 이주로 인해 점토대토기문화 내지 세형동검문화 등으로 불리는 초기철기문화가 한반도 중남부에 일시에 성립했다고 보았으며, 극단적으로는 이들 이주민들이 재래의 청동기시대 주민들을 완전히 대체했다는 주민교체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즉,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한반도 내 삼한사회의 등장은 전적으로 이주민의 영향이며, 토착사회는 이주민들에 의해 대체되거나 흡수되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계에서는 고고자료만을 분석, 검토하여 유물군 간의 자체적인 상대연대를 정립한 연구들이 새롭게 나오게 되면서, 문헌기록에 의존한 종래의 연대관과 이에 근거한 주민교체설 등을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이 우세해지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에는 점토대토기문화의 유입과 세형동검의 유입, 그리고 진개의 동정이나 준왕의 남방도래 등이 서로 연대가 상이하다고 보고, 삼한의 기초가 되는 초기철기문화가 이주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토착사회와 이주민과의 지속적인 상호관계의 결과로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입장이 주류를 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소수설이지만, 이러한 세형동검문화의 유입이,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있었던 요동-서북한-한반도 중서부에 이르는 네트워크를 통해 청동장인집단이 점진적으로 외래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하여 초기철기문화 성립에 청동기시대 후기의 이주민의 역할이 거의 없었다고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10] [11]
다만 근래에 이르러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준왕의 남래나 진개의 동정과 같은 사건으로 고조선계 이주민이 여러차례 한반도 중서부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이들이 가져온 여러 문화요소들은 오랫동안 종래의 토착문화와 공존하면서 토착사회와 적극적으로 교섭하면서 점진적으로 동화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삼한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이러한 이주민 혹은 적어도 이 무렵 세형동검문화의 성립에 기여한 외래문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하지 않되, 한편으로 외부세력 내지 이주민과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이주민들을 흡수, 동화하거나 새로 유입된 외래문화의 기층민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토착민들의 역할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고자료 상에서는 청동기시대 말-초기철기시대 무렵에 종래 고고학계에서 막연히 '이주민'이라고 지칭되던 외래문화의 유물세트 자체가 명확하게 전모를 드러낸 경우가 거의 없는 반면, 송국리 사회 등 토착사회에서 새로운 외래유물을 수용하고 있는 현상 내지는 토착유물과 외래유물이 공반하는 현상이 오히려 더 일반적으로 관찰된다. [12] 이는 이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토착민들의 간섭없이 오랫동안 자신들만의 문화요소를 보존한 이주민 집단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는 설령 세형동검문화를 전파한 이주민이 존재하였더라도 그들의 수가 매우 적었거나, 이들 이주민들이 토착사회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말-삼한시대 한반도 중남부의 상황은 차라리 이들 선주민들의 기후, 환경 등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한 결과로서 외부집단 혹은 새로운 이주민들과의 적극적인 교섭과 융화로 나타난 변화에 가까울 것이다.
삼한은 각각 백제, 신라, 가야로 판도가 정리되어 북쪽을 장악한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만들게 된다. 사실 고구려도 처음에는 압록강 중류 척박한 산악지역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해[13][14] 부여나 낙랑, 옥저 등을 전부 정리하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고구려가 될 때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15] 이 무렵 백제는 이제 막 목지국을 밀어내고 맹주국이 되어 경기도나 겨우 추스르는 수준이었고, 신라는 겨우 경주시 및 경북 동부 일대나 다스리는 부족국가 수준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한사군, 마한, 진한, 가야 등을 병합하면서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했는데, 고구려는 4세기 초(314년)에 이미 이 임무를 끝냈지만 백제와 신라는 각각 6세기 초(520년경), 6세기 중후반(562년)에서야 이를 완료했다.
1.3. '한(韓)'의 의미
기원전 11세기 기록인 죽서기년에 한(韓)후의 기록이 등장한다또한 시경(詩經)에는, 주여왕~선왕 시기(기원전 9~8세기) 한(韓)후의 기록이 등장한다薄彼韓城 燕師所完 因先祖受命 因時百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저 웅대한 한성, 연사(燕師)가 완성해 주었네. 네 선조가 명을 받아 백만을 관리하였네. 왕이 한후에게 (다시 명을) 내리니 추(追)와 맥(貊)을 (복속하여) 북국을 받아 그 우두머리가 되어라.
시경 한혁편#
한나라의 왕부는 잠부론에서 한후를 언급한다저 웅대한 한성, 연사(燕師)가 완성해 주었네. 네 선조가 명을 받아 백만을 관리하였네. 왕이 한후에게 (다시 명을) 내리니 추(追)와 맥(貊)을 (복속하여) 북국을 받아 그 우두머리가 되어라.
시경 한혁편#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 其後韓西亦姓韓,為衛滿所伐,遷居海中。
옛날에 주나라 선왕 대에[16]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 또한 연나라에 가까웠고, 그 후 한서 또한 한씨로 위만에게 벌받아 바다로 이주하였다.
잠부론 - 왕부
옛날에 주나라 선왕 대에[16]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 또한 연나라에 가까웠고, 그 후 한서 또한 한씨로 위만에게 벌받아 바다로 이주하였다.
잠부론 - 왕부
기원전 323년경 한국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의 왕이 스스로 칭왕을 했을때 한(韓)씨라고 자칭한 기록이 있고[17],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익산에서 건마국의 왕으로 새 출발을 했을때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자칭했다는 기록이 있다.[18]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 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은 그의 근신과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韓)의 지역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
이 한(韓)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마찬가지로 음차(音借)였기에 발음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빌릴 음에 해당되는 한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신라, 고구려, 백제와는 약간 다르다.[19][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은 그의 근신과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韓)의 지역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
한(韓)이라는 표기가 음차했을 본래 고유어 국명의 발음과 의미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韓의 상고한어 재구음 '*ɡˤar(가르)'와 변한의 계승국 가야의 이표기 가라(加羅)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가라' 정도의 발음으로 읽혔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심지어 널리 쓰이는 표기인 가야의 야(耶)는 상고음이 /*laː(라)/로 재구되기 때문에 가야의 국명은 '가라'에 가깝게 발음되었다고 보는게 합당하다. 한편 삼국시대 당시 옆나라 왜국에서는 고대부터 韓을 'から(가라)'라고 훈독해 왔으며, 시집 《만요슈》 15권에서도 한국을 가라쿠니(可良國)라고 지칭하였다. 그렇다면 이 '가라'가 무엇을 뜻하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고을 내지 도시를 뜻하는 고대 한국어 '골' 내지 '구루'와 관련이 있다는 설과, 현대 한국어 겨레의 고대 발음이라는 설이 존재하며, 현재까지는 후자를 지지하는 증거가 많다. 일본서기에서 겨레 족 자를 '가라'로 읽은 것이 보이기 때문.
이외에도 크다는 뜻의 옛말 '하다'의 관형사형 '한'의 음차[20]라거나 군주를 가리키는 간(干)을 의미한다는 등 몇 가지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韓)으로 불리게 되었고, 훗날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일컫는 말로 확장 변형되었다.
1.4. 삼한의 군장
자세한 내용은 삼한/군장 문서 참고하십시오.《삼국지》 한전에서 당시 목지국 '진왕(辰王)'이 한(韓) 연맹체의 수장을 맡았으며 진왕은 마한에서 독점해왔다고 전하는데, 이 기록은 대체로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서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 내 소국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삼한의 군장들은 나라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검측(儉側,후한서)/험측(險側,삼국지)-번지(樊秖,후한서)/번예(樊濊,삼국지)-살해(殺奚)-읍차(邑借) 순으로 불렸다.
마한 진왕이 목지국에 도읍하며 삼한 전체를 다스리며, 삼한의 여러나라 임금들의 선대는 모두 마한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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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고 마한에 내려와 한왕이 되었다. 준왕의 후대가 끊어진 후 마한 사람이 스스로 올라 진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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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준왕이 후대가 끊어졌으나 아직 준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한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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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중에 호칭을 덧붙여 높여 부르는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신운신국의 견지보), 안야축지(安邪踧支,안야국의 축지),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 신분활국의 불례), 구야진지렴(狗邪秦支廉, 구야국의 진지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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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진왕은 목지국을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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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과 변한 24개국 중 12국은 진왕에 신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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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의 나라들은 늘 마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으며, 계승하더라도 스스로 임금을 세우지 않고 마한의 통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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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중국 측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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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은 연대가 일러 고대사가 부실한 한국 사서의 현황 때문에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 그래서 서지학적 관찰은 중국 사서들에 곁다리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후한서》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 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嚾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삼국지》 〈위서〉 동이전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嚾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학계에서는 이를 지게로 해석한다. 실제로 등을 뚫거나 한 게 아니라 지게를 진 모습을 잘못 보아 착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삼국지》를 기록한 서진 제국의 진수는 한반도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이므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분은 대부분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인 만큼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곳의 노인들이 세대를 넘어 전하기를 자신들이 옛날 진나라의 사역(秦役)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고 한다.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을 떼어내 주었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변진'# #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변진'# #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신라는 진한의 한 종류였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시대에는 낙랑의 땅이었다. 진한은 진(秦)한이라고도 하는데, 옛말에서 전하기로는 중국 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로서 마한과 언어가 달랐으며 중국 사람과 언어가 비슷하다.
《삼국유사》 <기이>1 -진한-#
북사 열전 신라편에서는 진한이 사실 진나라 유민들이 세웠다는 주장이 쓰여 있으며 삼국유사는 그것을 인용했으나,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진한의 원 거주민들이 고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辰韓)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이해되고 있다.[21]신라는 진한의 한 종류였다. 땅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시대에는 낙랑의 땅이었다. 진한은 진(秦)한이라고도 하는데, 옛말에서 전하기로는 중국 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로서 마한과 언어가 달랐으며 중국 사람과 언어가 비슷하다.
《삼국유사》 <기이>1 -진한-#
1.6. 삼한정통론 또는 마한정통론
자세한 내용은 삼한정통론 문서 참고하십시오.1.7. 용어 사용 사례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한(韓)인에 대한 구절
광개토대왕비에는 삼한과 예족[22]에 관계된 문장이 있는데 둘은 병렬관계로 서로 구분되어 고고학적 삼한인과 예족의 부여나 동예, 그리고 자신들인 맥족의 고구려를 서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한(韓)인에 대한 구절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23]에 드날렸다.
《부여융 묘지명》, 682년
《부여융 묘지명》을 보면 굳이 삼한과 함께 예맥을 따로 구분했다. 양맥은 '두 맥족'이란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뜻한다. 만약 신라도 맥족으로 본다면 양맥이 아닌 '삼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두 나라만 '양맥'이라고 했다. 삼한과 양맥인 고구려, 백제를 병렬관계로 본 것이다.[24]《부여융 묘지명》, 682년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陳壽曰: 三韓凡七十八國, 百濟其一也. 據李延壽 史, 其先以百家濟海, 後浸強盛以立國, 故曰百濟. 晉世 句麗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위나라(북위)가 병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지만, 백제에게 패배했다. 【진수가 말하길, 삼한은 78개국이고, 백제는 그 중 하나이다.】 【이연수의 사서에는, 그 전에 100가가 바다를 건넜는데, 후에 강성한 국가를 세웠으므로 '백제'라고 했다. 진나라 시기에, 구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에 의탁했다.】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북송 시대의 편년체 대역사서인《자치통감》에서는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참고하여 삼한은 78개국이라 했는데 마한 54개국, 변한 12개국, 진한 12개국의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여러 소국들의 집합인 고고학적 '삼한'의 뜻으로 용어를 사용했다.위나라(북위)가 병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지만, 백제에게 패배했다. 【진수가 말하길, 삼한은 78개국이고, 백제는 그 중 하나이다.】 【이연수의 사서에는, 그 전에 100가가 바다를 건넜는데, 후에 강성한 국가를 세웠으므로 '백제'라고 했다. 진나라 시기에, 구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에 의탁했다.】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요나라가 국서에서 고려 숙종을 언급할때 삼한(三韓)과 5부(五部)의 주인으로 불렀는데 5부란 고구려 내의 비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 계루부의 5부족을 뜻했다. 즉 삼한과 고구려를 서로 다른 병렬관계로 보고 양쪽 모두의 주인이라 호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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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삼한시대의 문화재
1.9. 교과서상 내용
- 마한: 처음에 고조선을 공부할 때 '진국'의 언급이 마한의 등장을 암시한다. 54개국이 있었다라는 내용은 잘 나오지 않으며, 마한의 소국 중 백제가 있었다는 것만 주로 다뤄진다. 그나마 삼한 중 유일하게 목지국이 초기 마한의 맹주로 언급되는데 한성백제 시대 제8대 고이왕에게 멸망당했다고 되어 있다. 목지국 이외에는 침미다례 등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친 나라도 일체 나오지 않는다. 삼한 중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적혀있기라도 한데 제13대 근초고왕이 4세기 중반에 마한의 남은 세력을 병합했다라고 나온다. 물론 이 내용은 오직 문헌학적 내용이며, 고고학과는 관련이 없다.
- 변한: 12개 나라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으며, 변한의 땅에서 가야가 일어났다와 철이 많았다가 끝이다.
- 진한: 과거에는 내물 마립간 시기 때 멸망당했다는 이야기가 서술되었으나 최근 교과서에서는 3~4세기까지 신라가 진한의 소국들을 병합시키고, 이후 내물 마립간 시기 때 김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는 이야기로 바뀌어서 나오고 있다. 왜곡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줄었다. 사실 진한은 마한이나 변한과는 달리 애초부터 수장국이었던 사로국이 그 나머지 휘하 소국들을 직접 지배지로 편성해 신라로 순조롭게 전환되었으니, 신라가 진한을 멸망시켰다는 얘기는 자체로 성립 불가한 자기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 문화: 소국을 다스리는 군장으로 신지, 읍차 등이 있고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소도를 다스린다는 것, 5월과 10월에 제천 행사가 있다는 내용 정도가 있다.
2.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를 지칭하는 단어
2.1. 개요
원시의 삼한(三韓)은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부족국가연맹 마한, 진한, 변한을 뜻했으나, 이후 진한에서는 신라가, 예맥에서는 고구려가, 마한에서는 백제가 세력을 키워, 삼국이 한반도 일대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는 삼국체제가 형성되자, 이 '삼한'은 삼국시대 후반부가 되면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발전된다. 가야는 하나의 세력이 아닌, 금관국, 안라국, 고자국, 다라국 등의 소국연합체였기에, 마한, 진한, 변한이 소멸된 삼국시대 시점에서, 삼한이라는 명칭은 가야를 포함하지 않는 삼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삼한이 삼국으로 와전된 유래는 신라인, 백제인, 가야인들에게 진한, 마한, 변한을 이르는 삼한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관을 의미했던 것에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삼한인을 한인(韓人)이라고 호칭하며 고구려인과 구별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 북부 예맥 문화권과의 차이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당으로 귀순한 고구려인인 고현(高玄)의 묘지명에서 그는 '요동 삼한인'이라고 기술되었는데, 묘비명은 중국인이 지은 것으로 보여서, 당시 중국에서는 삼한은 삼국을 지칭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고현 묘지명
삼한을 삼국 정립 이전, 한반도 중남부로 보는 관점은 실학자들의 고증이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 중·후기 이익, 한백겸,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후부터였다. 원삼국시대 당시의 사서인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위 항목대로 마한, 진한, 변한을 삼한으로 설명했지만[26], 삼국통일전쟁이 벌어지는 삼국시대 후반부쯤 가면 이 '삼한'이라는 개념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인식되어 삼국의 다른 표현으로 여겨졌고, 그것이 1,000년 이상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고려 시대 중기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말기의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의 삼한 중 마한이 고구려, 변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와 연결된다는 의견을 정론으로 삼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시대에도 권근의 《동국통감》을 통해 이어진다.[27]
즉, 현대인들은 과거 기록을 토대로 백제, 신라, 가야를 '삼한'[28]과 연결짓고[29]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삼한과는 별도의 '예맥' 계통 국가로 인식하지만 이것은 근현대 역사학 지식이 축적된 결과물이고, 그 전에는 1,000년이 넘도록 '삼한[30]=고구려+백제+신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고증해내기 전까지 마한, 진한, 변한은 고구려, 신라, 백제로 발전 및 대체되었다는 것이 전근대 지식인들의 인식이었다. 이는 비단 신라가 삼한일통을 이룬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생긴 인식도 아니고, 삼한일통 이전이나 직후에도 그랬다.
당 태종 이세민은 주필산 대전에서 고구려군을 이끌고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고연수와 고혜진을 '마한 추장'이라고 불렀다.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大兄前部軍主高惠真等, 幷馬韓酋長.
고려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 고연수, 대형 전부군주 고혜진은 병마한 추장[31]이다.
《전당문》, 태종 황제, 645년
고려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 고연수, 대형 전부군주 고혜진은 병마한 추장[31]이다.
《전당문》, 태종 황제, 645년
고구려인이 삼한인이라고 지칭된 사례는 위에서 든 예나, 당나라에서 죽은 고구려인들의 묘비명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 지역에서는 해당 사례와 같은 삼한인을 자칭한 묘지명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32] 노태돈 교수는 멸망때까지 고구려인이 자신들의 천하관을 중시한 것을 볼 때 '삼한'이라고 자칭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고구려가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확장을 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인구를 흡수하여 인구적인 측면에서는 '한인'(韓人)과의 동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계루부 고씨 왕실과 지배층 내에서는 멸망의 시기까지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언어나 문화적인 면에서 유사했기에 '삼한'으로 묶어서 바라보았고, 당나라에서 죽은 고구려 지배층 인사들의 묘에 이러한 인식을 가진 중국인들이 묘비명을 썼기 때문에 삼한인으로 표현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피난민을 받아들일 때 하필 고구려와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금마저(전북 익산) 땅을 내 준 것도 고구려가 기자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기자의 후손(으로 당시에 알려져 있었던) 준왕이 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평양을 떠나 마한 땅으로 남하해서 한왕이 되었다는 전승을 근거로 해서 고구려 유민들이 마한과 자신들을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있었기에 익산 지역의 땅을 내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33]
즉, 고대 '삼한'(三韓)이란 정체성은 '마한, 진한, 변한'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역사학적 고증은 다른 대답을 내놓지만 고대인들이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계승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와 별개로 정신적으로는 삼한을 계승했다는 인식이 존재한 것이다.[34]
이는 중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나 초나라 등은 각각 스스로를 '오족'과 '초족'이라 부르면서 중원의 '한족'(漢族)과는 구분짓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국시대 말기와 초한쟁패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이러한 개념이 희석되고 말았다. 따라서 고구려도 초중기까지는 스스로를 '예맥' 계통으로 인식하고, '한(韓)인'들과 구분짓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이게 희미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인'(韓人)으로 동화되어버린 것이 아닌가이다.
2.2. 용어 사용사례
2.2.1. 한국
况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조 기사 中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조 기사 中
11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 (高宗)이 조서(詔書)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칼과 도마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 (金法敏)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갔던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 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하게 되어, 사녀(士女)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651년 당 고종이 내려보낸 조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651년 당 고종이 내려보낸 조서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中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中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최영, 《태조실록》1권, 총서 66번째 기사 #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최영, 《태조실록》1권, 총서 66번째 기사 #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민(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기사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기사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3월 13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3월 13일
2.2.2. 일본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을 일컫는 말로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 문단에서 등장한다. 물론 당시 왜국의 국력으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대한 정벌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진구 황후의 기록은 훗날 정한론에 악용되기도 했다.진구 황후 자체가 《일본서기》에 의하면 (스이닌 덴노(垂仁 天皇) 3년 3월 조)에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라는 신라 또는 가야 왕자가 일본 열도로 도래하여 하리마노쿠니(播磨國)에 거주하자 천황이 오미와노 오토모누시(大三輪 大友主)와 이치시노 나가오치(市磯 長尾市)를 하리마노쿠니에 파견하여 아메노히보코에게 왜 왔냐고 질문하니 왜국에 성황(聖皇)이 있어 왜국에 귀속하길 원한다고 하여 정착하여 낳은 후손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 후손이 천황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 진구 황후로 되어 있어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천황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일 창작된 글이라는 견해도 있고, 진구 황후가 벌인 삼한정벌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백제 근초고왕과의 동맹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벌인 마한(침미다례국)과 변한(가야)의 전쟁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전쟁으로 각색되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3. '한민족, 국가, 문화권'의 통칭
- 한(지역) 문서 참조.
3.1. 개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삼한이라는 인식은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여 삼한을 일통했다고 이른 것으로 이어지며, 그 신라가 다시 나뉘어진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고 신라의 왕족을 받아들인 고려에도 이 신라의 삼한 세계관이 이어져, '삼한'은 한반도 일대 또는 한민족의 강역 혹은 세계관을 의미하는 관용적 명칭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조선 시대와 구한말때까지도 이러한 인식이 잔존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유래인 대한제국에 반영되어 오늘날에 이른다.3.2. 용어 사용 사례
고려시대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라는 공신위가 있었으며, 고관대작의 아내에게 내리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라는 작위도 있었다.[35]여요전쟁 이후, 요나라는 포로로 끌고 간 고려인을 모아서 내몽골에 삼한현(三韓縣)을 편성하기도 했다.
원나라 간섭기때의 제2차 입성책동 당시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명명한 통치기구의 설치를 검토했다.
충선왕의 왕비였던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 결혼하면서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로 봉해졌다.
공양왕의 아버지 왕균은 사후 '삼한국 인효대공'으로 추존되었다. 왕균의 대공 작위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대공 작위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서 을사의 변때 '소가노 이루카가 한인(韓人)[36]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온다. 이를 두고 일본측에서는 덴지 덴노나 후지와라노 카마타리가 도래인은 아니고, 단지 내정과 외교 정세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의 주장이 주류지만 어쨋든 '한인'(韓人)이라는 표현 자체는 한국계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해석한다. 또한 정변은 삼한의 사신이 온 날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에 고고학적 의미의 삼한은 사라진 상태였기에 삼국 내지는 한민족 계열 국가 자체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조선을 '한토'(韓土), '한인'(韓人)이나 '한국'(韓國)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정한론이 대표적이다. 정한론이 생겨났을 때는 국호가 아직 대한제국이 아닌 조선이었을 때였다.
3.3. 기록
3.3.1. 금석문
3.3.1.1. 한국
[최사전이 이르기를] '삼한(三韓)이라는 것은 삼한의 삼한(三韓之三韓)이니, 폐하의 삼한(陛下之三韓)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군(先君)이신 태조(太祖)께서 근로하셨기에 (삼한이) 이렇게 완전해진 것인데, 부디 멈춰주십시오.'
상께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넌(汝)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
(중략)
상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삼한(三韓)을 바로 되돌리고 종사(宗社)[37]를 안정시킨 것은 공의 힘으로 한 것이다."
- 《최사전 묘지명》 中.
상께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시길 '넌(汝) 생사와 육골을 되돌릴 수 있는가?'
(중략)
상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삼한(三韓)을 바로 되돌리고 종사(宗社)[37]를 안정시킨 것은 공의 힘으로 한 것이다."
- 《최사전 묘지명》 中.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오니, 위세가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에 용서하시며 넉넉히 예로써 맞아주시니, 표정을 고치고 웃는 낯으로 온갖 무기를 거두시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와 가벼운 갑옷, 도성의 남녀가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께서 은사를 베푸심이라. 황제께서 군사를 물려주시니 우리 백성들 살게 되었네. 흩어진 우리 백성 불쌍히 여겨 농업에 힘쓰도록 하여 주시니, 금구(金甌)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단은 나날이 새로워라.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은혜로다.
숭덕 4년(1639) 12월 8일 세우다 - 삼전도비 中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은혜로다.
숭덕 4년(1639) 12월 8일 세우다 - 삼전도비 中
3.3.1.2. 중국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고현 묘지명》, 691년 中.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고현 묘지명》, 691년 中.
3.3.1.3. 류큐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 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 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 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의 명문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의 명문
만국진량의 종[38]에서 '만국진량'은 '세상 모든 나라를 연결하는 가교(架橋)'라는 의미였는데, 각국과 교역하던 류큐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종은 1458년(조선 세조 재위기)에 쇼 타이큐(尚泰久, 상태구) 왕의 명령으로 주조된 것으로 류큐를 주변국에 비교하며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조선을 '삼한'으로 적고 있다.
3.3.2. 서지문
3.3.2.1. 한국
3.3.2.1.1. 《고려사》
짐(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고려사》, <예종 세가>, 예종의 유조(遺詔) 中.
《고려사》, <예종 세가>, 예종의 유조(遺詔) 中.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3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고려사》, <인종 세가>, 인종의 유조(遺詔) 中.
《고려사》, <인종 세가>, 인종의 유조(遺詔) 中.
(중략) 伍允孚嘗痛憤, 以爲, “此藥不宜胎産, 使三韓攴胤不蕃者, 必此人也.” (중략)
(중략) 오윤부가 분통해 하여 말하기를, “이 약은 아기를 가지는 데 좋지 못하므로, 삼한의 왕실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중략)
《고려사》, <열전>, -비-,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가 충렬왕에게 미녀를 바친 김중경을 순마소에 하옥하다. 中.
(중략) 오윤부가 분통해 하여 말하기를, “이 약은 아기를 가지는 데 좋지 못하므로, 삼한의 왕실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중략)
《고려사》, <열전>, -비-,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가 충렬왕에게 미녀를 바친 김중경을 순마소에 하옥하다. 中.
3.3.2.1.2. 《조선왕조실록》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41]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42]
《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
공(公)이여! 공(公)이여![41]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42]
《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3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3번째 기사
3.3.2.2. 중국
삼한(三韓)은 정말로 망하였구나.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
효정경황후 대공보 1910.9.21[43]
효정경황후 대공보 1910.9.21[43]
平生營事只今畢 (평생영사지금필: 평생을 벼르던 일이 이제야 끝났구려)
死地圖生非丈夫 (사지도생비장부: 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장부가 아니도다)
身在三韓名萬國 (신재삼한명만국: 삼한 땅에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도다)
生無百世死千秋 (생무백세사천추: 살아서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 년을 살리라)
위안스카이[44]
死地圖生非丈夫 (사지도생비장부: 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장부가 아니도다)
身在三韓名萬國 (신재삼한명만국: 삼한 땅에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도다)
生無百世死千秋 (생무백세사천추: 살아서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 년을 살리라)
위안스카이[44]
3.3.2.3. 일본
3.3.2.3.1. 《일본서기》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 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45],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46]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47]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 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3.4. 삼한갑족(三韓甲族)
'삼한에서 갑인 씨족'이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으뜸가는 씨족'이라는 뜻이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해동갑족'으로 개칭되어 나온다.[1] 현재 남한의 영토에서 강원도 일대를 뺀 크기와 거의 비슷하다.[2] 그러나 진번과 진국이 실제로 국가 단위의 무역을 할만큼 세력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힘들다.[3] 진국이 진한이었다는게 아니고, 진한은 진국에 있던 소국연맹체 중 하나 라는 뜻. 이름이 비슷해서 부연설명한 것으로 보인다.[4]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왕을 천자라고 부르며 봉건체제를 유지한 상황에서 구성국끼리 치고 박았고, 전국시대로 넘어가면 주나라가 망했다. 삼한 지역에서도 구성국들이 마한의 지도국인 목지국의 왕을 진왕이라 부르며 높여 칭했기 때문에 유사한 면모가 있다.[5] 삼한 중에서 유일하게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 변한의 소국들이 합병되고 남은 소국들이 개개의 국가로 발전한 형태이면서 연맹국가이다.[6] 고대의 강역 자체가 불분명한 측면이 너무 많은 데다 흐름이 명확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런 설도 있고 저런 설도 있다는 식으로 대부분이 결론나는데 이런 부분은 각종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도 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냥 출제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고, 수업시간에 가르치기도 애매하다. 삼국시대 초기의 백제와 신라 또한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수많은 삼한 국가들 가운데에서 일부 지역만 영토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현재까지 밝혀진 정도로는 백제와 신라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삼한 국가의 이름과 역사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거니와, 설령 모두 밝혀진다 해도 이를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면 국사 수업 난이도가 급격하게 오를 수밖에 없다.[7] 백제는 마한의 소국들을 전부 철폐하여 직접 지배지로 완전히 편성한 성왕 재위기에 이르러서야 형식적으로 취해온 마한이라는 껍데기를 부정하게 되었다. 관념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렇게 보면 마한은 부여가 중심지인 단계에서 완전히 소멸되어 백제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다.[8] 문안식, 요하 문명과 예맥, 2012[9] 위 단락 전체, 조진선, 진·변한의 형성과 분립 과정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2023.[10] 김현식, 남한 청동기시대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출현의 정치·사회적 의미, 2023[11] 단, 근래의 고고학계에서는 기원전 4-5세기 무렵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에 관해서는 이주민의 영향이 비교적 적은 것으로 평가하지만, 기원전 2세기 무렵 만경강유역에서 나타나는 획기적인 사회변화 등은 여전히 준왕의 남천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김승옥, 만경강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전개과정과 특징, 2016 / 천선행, 만경강유역 韓 문화의 실체와 전개, 2023 / 조진선, 진·변한의 형성과 분립 과정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2023 등). 물론 이 경우에도 토착문화는 상당수 잔존, 새 문화요소와 융합하는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해당지역에서 지배층인 고조선계 이주민과 피지배층의 토착민의 문화가 공존 및 융화했다고 본다.[12] 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13] 흔히 고구려 하면 떠올리는 만주의 평야지역은 이 때는 부여의 영역이었다. 고구려의 시작점이었던 압록강 중류는 강원도를 능가하는 산악지역이다. 첫 수도인 평지성 졸본성의 산성인 오녀산성만 봐도 매우 험준하다. 고구려는 평상시에는 평지성에서 생활하다가 전시에는 산성에서 농성을 했다.[14] 고구려의 초기 주요 지배지역인 남만주 지역은 산지비율이 많다. 그렇기에 사람이 살기 어렵다. 북만주나 요동쪽이 평야 비율이 많다.# 국경을 보면 요동부터 연해주까지 계속 해서 강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다.[15] 그럼에도 고구려의 국가 발전이 백제와 신라보다 훨씬 빠르긴 했다. 이미 1~2세기경 만주 남부와 함경도 영역을 거의 확보해 국가의 기본 체급을 갖췄고, 막 백제가 국가의 꼴을 갖추기 시작한 3세기 후반~4세기 초에는 아예 한사군을 축출하면서 요동, 평안도, 황해도 거의 전역을 차지했기 때문이다.[16] 기원전 8세기[17] 《염철론》[18] 《삼국지》 〈위서〉 동이전[19] 예를 들어 신라는 사로, 시라, 서야, 서나, 신라 등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모두 당시의 ㅅㄹ 계열 신라 고유어를 음차한 것이다. 현대에 이탈리아(Italia)를 이태리(伊太利, イタリー), 의대리(意大利, Yìdàlì) 등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후 지증왕 재위기에는 기존에 쓰이던 국호들 중 하나인 신라(新羅)에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을 부여하여 정식 국호로 확정지었다. 이렇게 음차할 한자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나라는 중국에서 한자로 가차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20] 실제로 신라에서는 17관등 중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를 한나마(韓奈麻)라고도 부르는 등 '한大'을 음차하기 위해 한자 한(韓)을 사용하기도 했다.[21] 마한을 이룬 고조선 유민들이 위만이 찬탈하기 이전의 고조선 원주민 세력이고, 진한을 이룬 고조선 유민들은 한무제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멸망한 뒤에 내려온 것으로 본다면, 《삼국지》가 쓰인 당시 위나라 사람들이 진한의 원류를 '진(秦)'으로 보려던 시도를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바로 위만 정권 시기의 고조선은 춘추전국시대와 초-한 교체기 시기에 유입된 이주민들이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진한 문서 참조.[22] 부여나 동예가 있다.[23] '두 개의 맥족'이라는 뜻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의미함[24] 반론: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로 가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하나로 묶어 삼한으로 호칭하는 일이 많았기에 먼저 삼한을 대집합으로 보아 삼국으로 보고, 맥족의 동족 계열인 고구려, 백제는 소집합인 양맥으로 분류하여 삼한에 대한 고구려와 백제를 종속관계로 보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시대 고구려 인물들의 묘지명의 내용은 고고학적인 삼한과 예맥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25] 이는 최근에 현대 중국에서 동북공정으로 주장하는것과는 달리 고대 중국 왕조에서는 왕씨의 고려가 고씨의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고구려 외 고대 한민족 계열 국가들까지 계승한 것으로 인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26] 그러나 마한, 진한, 변한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이를 '한'전(韓傳)이라고 쓰고 있지, '삼한'이라고 기록하고 있진 않다.[27] 다만 권근은 마한이 백제, 변한이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하였다.[28] 마한, 진한, 변한[29]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제 유전적, 문화적으로는 삼한도 예맥 계통이 맞다.[30] 마한, 진한, 변한[31] 변한+마한을 가리킨 건지 마한 전체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쓴 건지 확실하지 않다.[32] 그러나 도굴에 약한 고구려식 무덤 특성상 고구려 내부 묘지명 자체가 보존된 게 많지 않으므로 지금 남아있는 극소수 묘지명에 안 나온다고 해서 단언할 수도 없다.[33] 오늘날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실제 마한의 중심지가 충청남도 천안 혹은 전라북도 익산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고고학이 없었던 조선시대까지는 준왕이 남하하여 자리잡은 곳이 익산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단 준왕 남하와 건마국의 건국이 분명한 관련이 있음은 고고학적 발굴로 최근 입증되었다.[34] 삼한은 본래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부터 발전한 '백제, 신라, 가야'를 지칭했으나 중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칭하였던게 영향을 미쳐 한반도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지칭하였다는 설도 있다.[35] 대표적으로 고려 말기의 명장 최영의 어머니인 지씨(智氏)가 삼한국대부인이었다.[36] '한인'의 일본식 독음은 '카라히토'로 일본어로는 韓의 훈독이 '카라'(から)이다. 그런데 韓의 우리말 상고음을 재구해보면 '가르'로 추정되어 매우 유사하다. 한편으로는 '가라' 또는 '가락'이라고 불리는 가야와의 연관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일본과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국가가 가야였고 그래서 서로 관계가 있을 수 있다.[37] 종묘와 사직.[38] 일본 정부에서 정식으로 등록한 명칭은 '구 슈리성 정전종'(旧首里城正殿鐘)이다.[39] 원무종을 뜻한다.[40] 고려를 뜻한다.[41] 여기서 공은 태조 이성계를 부르는 것이다.[42] 최영이 이성계한테 한 말이다.[43]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직후 한 발언이다.[44] 안중근의 순국 이후, 보낸 애도시(詩)이다.[45]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46]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47]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