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01 11:59:31

고연수

高延壽

(? ~ 645년)

1. 개요2. 생애3. 기타4. 같이보기

1. 개요

고구려 말기의 장수, 북부 위두대형(5품) 관등에 욕살(褥薩)의 직책을 가졌다고 한다. 고혜진과 함께 고구려-당 전쟁 당시 주필산 전투에서 패해 항복한다.

2. 생애

보장왕 대인 645년, 이세민이 역적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당 전쟁을 일으켜 안시성에 이르자 보장왕은 고연수에게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연수는 남부 욕살 고혜진과 함께 고구려 군대와 말갈병의 연합군으로 구성된 15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맞서려 하였다. 이때 나이가 많아서 노련하고 경험이 많았던 대로(對盧)[1] 고정의가 "당 태종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당나라 군사와 정면으로 대적하지 말고 방어선을 구축하여 시간을 벌다가 적의 보급로를 끊어 패퇴시켜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듣지 않았다. 이런 선택을 한데는 여러가지 가설이 제시되는데 안시성과의 알력이 있었을 가능성, 당태종을 비롯한 거물들을 일거에 노린 승부수로써 전략적인 유연함이 떨어졌을 가능성, 당에 의해 안시성과의 연계가 차단했을 가능성 등이 제시된다.

당 태종은 우선 돌궐 기병을 보내서 고연수를 가까이 유인한 다음, 고연수가 이끌고 온 고구려군에게 겁을 먹은 척하며 서신을 보내어 화의를 요청하였다. 고연수는 이를 보고는 안심하여 방어를 가볍게 하였는데, 당 태종은 그 틈을 노려서 명장 이세적장손무기 등에게 병사를 나누어 주어 부대를 배치시켜놓았다.

6월 22일 벌어진 전투에서 장창으로 벽을 쌓은 이세적의 군대는 고구려군의 돌격에 밀리다가 마침내 사방에서 포위를 당했다. 이세적의 군대가 포위되고 본인의 친위대까지 제압당하여 당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말갈 기병의 칼날은 그 시각에 당태종의 본진을 쑤시고 있었다. 그러나 당의 본진이 무너지기 전에 배후에서 장손무기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의 진이 어지럽혀졌고 고구려군은 양면에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이때 설인귀가 선두에서 뛰어난 무용으로 고구려군을 몰아붙였고 당 태종의 친위기병까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역습을 가해 고구려군은 패배한다. 산속으로 달아난 고연수는 사방이 당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하고 산 밖으로 빠져나갈 통로인 교량마저 파괴당하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혜진과 함께 항복하였다. 당 태종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전투가 벌어졌던 산에 '주필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붙였고[2], 이후 이 전투는 주필산 전투로 불린다.

항복한 고연수는 고혜진과 함께 당 태종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후로 당나라 군대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안시성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안시성주가 굳건히 수성하면서 안시성에서 시간이 지체되자 고구려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어 당 태종에게 안시성에서 시간을 끌지말고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장손무기가 반대하는 바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군은 안시성과 신성 그리고 건안성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을 와해시키지 못하고 결국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고연수는 당 태종의 군대와 함께 당나라로 향하던 중에 나라를 배신하고 항복한 일에 대하여 후회하고 탄식하다가 결국 근심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반면 함께 항복했던 고혜진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했다.

3. 기타

  • 《태백일사》에서는 고연수와 고혜진이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이세민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쓰여있다. 물론 환단고기는 위서이므로 신빙성있는 서술이 아니다.

4. 같이보기



[1] 혹은 대대로[2] 주필(駐蹕)은 황제의 행차를 일컫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