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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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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태막리지(太莫離支)
초대 2대 3대 4대
연개소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참고: 고구려 국왕

파일:external/www.mookas.com/091014-seol-m3.jpg
경극 독목관 대본 표지. 설인귀(좌)와 연개소문(우)
관직 대대로(大對盧)
막리지(莫離支)
태대대로(太大對盧)[1]
부족 동부(東部)
성씨 천(泉)[2] / 연(淵)
이름 개소문(蓋蘇文) / 개금(蓋金) /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아버지 연태조(淵太祚)
생몰연도 595년(?) / 614년(?) ~ 666년[3][4]
1. 개요2. 연개소문의 본명에 대한 추론3. 생애
3.1. 출신과 계보
3.1.1. 출생3.1.2. 10월의 유혈 쿠데타3.1.3.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3.2. 정권을 장악하다
3.2.1. 중앙 정계의 장악3.2.2. 전국 장악
3.3. 김춘추와의 회담
3.3.1. 회담의 결렬3.3.2. 김춘추를 풀어주다3.3.3. 회담 결렬 원인
3.4. 당나라와의 대립
3.4.1. 당태종의 분노3.4.2. 도교를 받아들이다3.4.3. 신라를 공격하다
3.5. 고구려-당 전쟁3.6. 죽음과 사후
4. 평가
4.1. 과거의 평가4.2. 현대의 평가4.3. 고구려 멸망의 책임
5. 가족관계6. 그 외에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연개소문은
(一) 고구려의 9백 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二)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三)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
연개소문은 고구려 5부 중 동부 대인[5]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 동부 대인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후 정변을 일으켜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옥좌에 앉혔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정권을 휘둘렀다.[6]

이후 연개소문이 당나라신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 따라 고구려신라당나라 사이에는 수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그 생전에는 방어에 성공했지만, 사후 권력을 물려준 세 아들간에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다.

근대 이전부터 임금을 시해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중화 질서에 거스르고 고구려를 사후 2년만에 멸망에 이르게 한 대역죄인이라는 점이 많이 부각되었으나 동시에 외세에 맞선 명장이라는 점 역시 높이 평가받는 등 상당히 평가가 복합적인 인물이다.

2. 연개소문의 본명에 대한 추론

淵蓋蘇文
연개소문

우선 연개소문의 성이 연(淵)씨라고 언급한 직접적인 기록은 하나도 없다.
  • 삼국사기》의 천개소문열전에서는 연개소문의 이름을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쇠를 뜻하는 걸로 추정되는 '소문'을 '金' 자로 가차하여 훈독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의하면 현대인의 인명에 가까운 한자식 이름은 연개금(淵蓋金)이 된다.[7] 일본 기록인 등씨가전에도 연개소문이 '개금'이라 표기되어 있다.
  •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사신에게서 연개소문의 정변에 대해 직접 들은 걸 기록한 파트가 있는데 여기서는 고구려 사신이 말한 걸 그대로 음차하여 연개소문을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라고 적어놨다. 여기서 이리(伊梨)는 연(淵)에, 카스미(柯須彌)는 개소문(蓋蘇文)에 해당한다.
  • 대의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 《천남생묘지명》 에 따르면 연씨 가문은 그 성씨가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이걸 생각 없이 따라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형적인 복사 붙여 넣기의 폐해(...). 하지만 천개소문이 당 측의 피휘고 사실은 연씨라는 건 김부식이 살던 고려 중기에서 500년도 넘게 지나 조선 후기나 가야 밝혀낸 거라서 그걸 못 알아챈 게 김부식 뿐만은 아니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연태조갓 쉰(50) 살 때 얻은 아이라고 해서 아이 이름을 '갓쉰'으로 지었고 그것을 고구려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이 개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갓쉰둥전'의 갓쉰둥[8]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정받진 못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라는 설은 18세기에 이르러 국학안정복이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처음 주장한 것이다. 안정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과 '통고(通攷)와 신당서에 정토는 소문(개소문)의 아우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사실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였으나 그 이름이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글씨가 겹치므로 당나라 사람들이 피휘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9] 이는 오늘날 한국사학계에 거의 정설로 인정받아 오늘날에는 개소문의 성을 연씨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개소문열전에서 이를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인 것 때문에 아직도 중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이라 표기하던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런 추세가 어느 정도 줄어든 듯 하다.

임병준 씨의 경북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고구려말의 차자표기 연구'에 따르면 淵(연)은 훈독으로 읽는 게 아니라 泉(천)이 가지고 있는 뜻인 '샘'을 음차해놓은 것이라고 한다.[10] 이 논문에서는 성인 淵(연)의 원래 발음[11]에 대해서만 분석했다. 이름의 경우, 蓋蘇文과 柯須彌의 발음이 일치하지 않아서 추정에 난점이 있다. 정확히는 蓋와 柯는 '가'로 읽혔다는 게 거의 확실한데 뒤의 두 글자는 ㅅ, ㅁ이라는 자음은 확실하지만 모음이 불확실하다.[12]

종합해 보면 연개소문(=천개소문)=연개금=이리카스미가 되는데, 우선 '연못 연(淵)'과 '샘 천(泉)'은 각각 뜻이 통하고 이것이 일본에서 음차한 '이리'라는 음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고구려 고유어로 '연못'을 뜻하는 '이리' 비슷한 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泉井郡一云於乙買”에서 ‘泉井’은 새김을 이용한 표기이고, ‘於乙買’는 음을 이용한 표기라고 보면, 고구려어의 ‘어을(於乙)’과 ‘매(買)’가 각각 샘[泉]과 우물[井]을 의미한 단어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연못 연(淵)'과 '샘 천(泉)'을 고구려어로 '이리'라고 발음했으며, '샘 천(泉)'이 '어을(於乙)이라고도 읽힌 것에서 '이리'와 '어을'이 같은 단어였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소문'과 '카스미'는 음이 통하고 이것이 뒷글자를 뜻으로 읽은 '개금'에 해당됨을 보아, '쇠'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유어 '소문(스미)'이 있었음을 추측 가능하다.[13] 이 경우는 현대어 '쇠'와도 대충 비슷해 보이긴 한다.[14] 견훤의 아들 중 '수미강(須彌康)'이라는 인물이 기록에 남아 있는데, 이 사람을 금강(金剛)으로 보기도 한다. '수미(須彌)'를 '금(金)'의 훈독으로 적었다고 보는 설이다.

성 외에 개소문이라는 이름의 경우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소문'이 신라시중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이고 성이 개 씨, 이름은 금으로 본명은 '개금'이라고 쓰고 있다. 즉 '개소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유황숙이나 김과장 같이 성+지위라는 것. 다만 삼국유사가 1차 사료나 체계적인 역사서는 아니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연개소문 가문이 연씨(피휘해 천씨)를 칭했다는 당시 기록은 차고 넘친다.

3. 생애

3.1. 출신과 계보

3.1.1. 출생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隤祉?)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천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15]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16]를 가리고(혹은 적시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17]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18]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천남생 묘지명 中

삼국사기 및 구,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동부 대인(혹은 서부 대인)이었던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서부와 동부 중 정확히 어느 쪽 출신인지는 알기 힘들지만 동부 대인이었다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동부 출신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연개소문의 출생연도에 관한 설에는 590년설, 594년설, 595년설, 601년설, 603년설, 614년설, 617년설까지 다양하다. 그 중 614년설은 꽤 의심스러운데, 그 출처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인용한 <고려고기>란 책으로 내용부터가 오류가 많은 책이다. 그 책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성을 개씨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다.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
삼국유사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옮기다. 中

연개소문의 성씨도 제대로 옮기지 못했고, 개소문과 개금이 같은 말이란 것도 모르고 소문을 벼슬 이름으로 착각하였다. 내용 전반적으로도 친불교 및 반도교적 색채가 강하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부터가 승려였으므로, 이런 기록에 다소 편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양왕 즉, 영류왕 때에 연개소문이 도교를 받아들일 것을 간언했다고 하는데 영류왕이 도교를 받아들인 건 624년의 일이다. 만약 연개소문이 614년 생이라면 11세에 불과했을 시기다. 그런데 그 문제의 <고려고기>란 책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양제가 죽은 뒤에 양명이 고구려에서 태어났는데 15세가 되자 총명하고도 신기한 무용이 있었다. 당시에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국사』에서는 영류왕의 이름을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양무라고 했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불러서 신하로 삼았다.
삼국유사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암자를 옮기다. 中

624년에 연개소문은 11세에 불과했을 텐데 이런 일이 있었을 수는 없다. 이건 일찍이 삼국유사의 편집자 일연조차 의문을 표한 기록이다. 학계에서조차도 614년 설을 신뢰하고 있지 않으며 614년설을 긍정적으로 보는 건 네이버의 부흥 카페 정도밖에 없다. 614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634년생이라서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연개소문이 늦장가를 갔을 수도 있고 결혼을 빨리 했어도 자식을 늦게 봤을 수도 있다. 진짜 연개소문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갓쉰동전>에선 아버지 연태조가 연개소문을 50에야 낳았다고 하여 갓쉰동이라 하지 않았던가? 혹은 연남생 위에 누나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보통 여자들은 사서에 잘 기록을 안 하기 때문에 연남생 위에 누나들이 없었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연개소문과 연남생의 나이 차에만 집착해서 무조건 연개소문이 614년생이었다고 할 순 없는 것이다.

또 위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천리장성을 축조할 것을 간언했다고 하는데 천리장성은 일반적으로 631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게 천리장성 축조를 간언했고 그걸 영류왕이 받아들였다면 이미 그 당시 연개소문은 조정 내 중신들 중 한 사람이었단 뜻일 텐데 614년생이라면 연개소문은 겨우 18세에 불과하다. 아무리 가문을 잘 타고 났다도 하더라도 겨우 18세에 불과한 연개소문이 국가 대사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게 봐도 610년대 이후에 태어났다는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런가 하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595년설, 환단고기는 603년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전자는 그 출처가 불분명하고 후자는 현전하지 않는 <조대기>란 사서를 인용해 쓰고 있다. 이 두 설에 대해선 추후 검증이 필요하지만 614년설보다는 좀 더 그럴 듯하다. 단지 연개소문과 연남생의 나이차이만 가지고 614년설이 옳다고 하기엔 그 기록에 너무나도 모순점이 많다. 보다 정확한 것은 연개소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야 분명해지겠지만 최소한 610년대 이후 출생이라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 대인의 직위를 계승한 연개소문은 이후 642년 1월에 영류왕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받고 고구려의 북쪽 국경 지대로 파견되었다. 이는 6세기 이래의 고구려의 귀족연립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연씨 가문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동부 대인이 된 이후에도 흉포하고 잔인무도한 행동을 계속 하였다고 하며 또한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권을 범하려 했다고도 한다. 이는 당시 고구려 내에서 강성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연씨 가문과 영류태왕, 귀족들간의 정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영류태왕까지 포함된 연개소문 제거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연개소문의 가문의 힘은 고구려의 왕위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게 성장해 있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암살 모의도 이미 고구려 조정 깊숙히 세력을 심어두었던 연개소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모든 고위 대신, 심지어 태왕마저 자신을 죽이려하는 가운데 연개소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바로 유혈 쿠데타였다.이판사판

3.1.2. 10월의 유혈 쿠데타

冬十月 蓋蘇文 弑王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임진일, 고려의 사신이 나니와진(難波津)[19]에 다다랐다.
정미일, 여러 대부들을 나니와부(難波郡)에 보내어 고려국에서 바치는 금,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20]가 죽고 가을 9월에 대신(大臣)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가 대왕이리코세시(伊梨渠世事) 등 180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동성(同姓)인 츠스루코무루(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비인 동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당연히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병(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나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신당서》 권 제220 동이열전 제145

642년 10월, 왕과 대신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과감하게도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살해할 계획을 꾸몄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21]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모아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 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서열식 중에 연개소문이 관할하는 동부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 살해당한 대신들은 무려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대신들을 어육으로 만들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구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사열식을 하던 중에 갑자기 동부의 군사를 휘몰아쳐 대신들을 죽였다고 하였으나 신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군사들을 숨겨두었다가 대신들이 도착하는 족족 하나씩 죽여 없애버렸다고 하였다.

의문점이 있다면 왜 하필이면, 고위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적인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사열하는 행사에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에서 그랬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아무래도 그 행사가 보통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참석해야 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행사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의 지위를 내놓는 이임식 행사나, 혹은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위해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베푼 송별식일 가능성이 크다.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 대신들을 제거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기 위해 궁궐로 쳐들어갔다. 다른 4부의 군사들이 저지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왕을 죽이고 궁성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궁궐을 향해 달려가면서 일부러 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는 수도 경비병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경비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창고로 달려가는 동안 연개소문의 사병들은 큰 저항없이 왕이 거처하는 궁전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위해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계략을 짜놓았고, 이를 신속히 행동으로 옮겼다.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난입한 연개소문은 마침내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그 시체를 토막내서 시궁창에 내팽겨 쳐버렸다. 사실이라면 이는 아마도 최대 정적이었던 왕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거나, 혹은 자신에게 대적한 자는 왕이라도 이리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남기기 위해 이런 행위를 하였을 것이다.[22]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스산하게 기록되어 있다. 642년 9월에 대신 이리카스미(연개소문)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대왕을 시해하고 이리코세시 등을 비롯한 180여 명의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어서 왕의 어린 조카(보장왕)를 왕으로 세우고 동성(同姓)인 츠스루코무루를 대신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동성(同姓)이라는 기록이 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직관적으로 봐도 츠스루코무루보다 이리코세시쪽이 연개소문과 동성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은 아예 그냥 오기라 하거나 혹은 동성(同姓)은 같은 부(部) 소속을 의미하기에 츠스루코무루도 연개소문과 같은 부의 인물이었으며 이리코세시는 연씨 가문 내에서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고 하기도 하는 등[23] 해석이 확립되어 있지는 않다

3.1.3.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이처럼 기록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집권층 귀족들을 도륙내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자신의 세력들을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연개소문이 왜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첫 번째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 개소문열전에 기록되어있듯이 영류왕과 당시의 집권층 귀족들과 연개소문 사이에 일어난 권력 다툼의 결과라는 설이다. 위에서도 여러번 설명하였듯이 연개소문의 가문은 이미 할아버지대인 연자유 때부터 2대에 걸쳐 막리지 직위를 역임하였으며, 강력한 무력과 동부대인의 지위를 바탕으로 당대 고구려의 막강한 신흥 귀족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고구려 왕실과 기존 권력층은 연개소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가 동부대인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한편 천리장성 건축의 감독을 맡긴다는 핑계로 변방으로 몰아내려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씨 가문의 힘이 꺾이지 않자 결국 연개소문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려다가 연개소문이 이를 먼저 알고는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집권층을 갈아 엎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당시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과 결탁하였다는 설이다. 영류왕은 사실 선왕인 영양왕의 배다른 아우였으나 여수전쟁 당시에 큰 전공을 세웠으며 또한 영양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영양왕의 또다른 아우였던 태양(太陽)과 그의 아들인 보장왕이 이에 불만을 품었고, 그들 또한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에 불타 당시 영류왕과 대립하던 연개소문과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24]
  • 세 번째는 대당외교 문제와 관련된 설이다. 당시 영류왕은 당나라에 대해 온건하고 저자세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대당강경파이자 신흥귀족 세력의 대표였던 연개소문이 이에 반대하며 영류왕과 충돌한 끝에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25] 이 설을 주장했던 학자들은 그 근거로 영류왕과는 달리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을 들고 있다. 단 드라마 등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마냥 연개소문의 대당외교가 강경일변도는 아니었고 영류왕에 비해 비교적 강경했을 뿐 전체적으로는 유연한 외교기조를 유지하려 했다.

3.2. 정권을 장악하다

3.2.1. 중앙 정계의 장악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아우인 태양(太陽)의 아들 보장을 불러와 왕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는 직책을 가졌다. 막리지라는 직책은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나라의 군사력과 궁중의 행정을 모두 맡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즉,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력과 궁중의 권력을 모두 장악해 버린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김유신열전이나 연남생의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의 벼슬을 지냈다고 기록하였는데 정권을 일으킨 이후 어느정도 세력이 안정되자 고구려 귀족회의의 장인 대대로 직위까지 얻은 것으로 보인다.[26]

또한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이 대신 이리거세사 등을 죽이고 도수류금류 등을 대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중앙정계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처형한 후에 자신의 사람들로 그 자리를 메꾸는 등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연개소문은 왕을 뛰어넘는 권세를 부리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삼국사기에서 이 시기의 고구려사를 기록한 보장왕본기는 사실상 연개소문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후로 연개소문은 그 권위적인 성격을 마음껏 과시하고 다녔다(...).

/신당서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관복을 금으로 장식하였으며, 평소에도 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고, 을 타고 내릴 때는 장수를 받침 삼았다고 묘사하였지만 실제로 모든 고구려 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다섯 자루의 칼을 가지고 다녔다. 이를 보면 구/신당서의 경우 연개소문의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각색하기 위한 내용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경우 이러한 구/신당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므로 논외로 한다.[27] 또한 연개소문이 행차를 할 때에는 호위병들로 하여금 엄중하게 대오를 이루어 다녔으며, 길을 지날 때에는 행차를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는데 이럴 때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숨었다고 한다.

3.2.2. 전국 장악

일단 도읍인 평양에서 일으킨 정변으로 반대파를 제압하고 보장왕을 옹립하기는 하였으나 저항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듯 하다.[28] 당태종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안시성주[29]는 연개소문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까지 하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주는 이를 잘 막아내었고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 속의 불화는 고당전쟁 수행에 차질이 있었다는 가설로 설명하거나 반대로 당나라의 패배를 희석하기 위해 삽입된 과장된 풍문이라는 견해가 있는 등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안시성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647년에 오골성 등의 대성에서 동원되어 지휘를 받는 것을 보면 안시성의 반발은 과장되었거나, 642년 당시엔 실제로 있었으나 고구려-당 전쟁 시기 이전까지 어떻게든 봉합이 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당나라와의 전쟁때 명확히 알 수 있는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0,000명을 시작해서, 중앙의 통제에 따라 각 성에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고 있었던 것과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15만명, 667년 금산 전투에서 20만명을 동원하는 등 이 전력을 백제신라에다가 들이 부었으면 과연 두 국가가 버틸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량을 들이부었을 정도로 국가통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국을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3.3. 김춘추와의 회담

3.3.1. 회담의 결렬

한편 642년 겨울,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딸과 사위, 손주들을 잃은 신라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 조정에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청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의 일이었는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왕명을 받들어 김춘추를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30]

이처럼 신라와의 회담은 처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다음날에 김춘추가 보장왕과 만나 논의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보장왕은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는 조건으로 죽령 서북의 땅을 요구하였다. 죽령은 지금의 충청도경상도를 잇는 길목으로, 고구려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영토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는데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이후 신라 진흥왕 때 이를 빼앗았다.

비록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고 있던 김춘추라고는 하나 김춘추 입장에서는 난처한 게 이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다. 그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차단되고, 고구려에게 신라로 통하는 진격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보장왕이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뜻이 되는데, 보장왕의 뜻은 사실상 실권을 움켜쥐고 있던 연개소문의 뜻이었다.

3.3.2. 김춘추를 풀어주다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그를 가두어 억류해버렸다. 그러자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구하도록 조치하였고, 곧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 지대로 나아가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에서는 곧 김춘추를 풀어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춘추가 풀려나 귀국하게 된 사연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라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에 나타나 무력 시위를 벌이자 보장왕이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보장왕의 측근이었던 선도해가 김유신에게 뇌물을 받고는 '토끼의 간'에 대한 이야기[31]를 들려주며 꾀를 내주자 김춘추가 이를 받아들여 보장왕에게 땅을 내어주기로 약조하고는 정작 국경에 이르자 이를 어기고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도 김춘추 석방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김유신이 고구려 국경으로 군사를 끌고 가 무력시위를 벌였다고 하였다.[32]

3.3.3. 회담 결렬 원인

연개소문이 어찌하여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하며, 신라와 동맹을 맺지 않고 적대관계를 초래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연개소문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빚어내 군사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연개소문이 애초부터 신라를 전혀 믿지 않았으며, 후방의 신라 정도는 백제나 왜를 이용해 견제할 수 있다는 연개소문의 자만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보다는 백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제의를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무왕, 의자왕의 2대에 걸쳐 신라를 압박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며 더욱이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쳐서(대야성 전투) 빼앗은 이후로 고구려와는 화친을 맺고 있었다. 고구려 측의 입장에서는 한창 신라를 신나게 몰아붙이던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견제하여 후방을 안전하게 만든 후 곧 닥쳐올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사료중 백제의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김춘추가 제의하러 왔을때 맞춰 글을 보냈는데 만약 신라와 손을 잡는다면 백제는 당과 손을 잡고 그렇게 되면 당은 고구려에 진격할 길과 자원을 쉽게 공급받아 앞뒤로 압박받게 된다는 것이 있다. 지도만 보면 한강 쪽은 신라땅에 가로막히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싶지만 당시 신라는 아주 위급했고 무엇보다도 자원 공급 쪽으로 가면 신라보다 백제쪽이 훨씬 빠르고 수월했다. 당시 신라는 당항성이 함락 위기에 놓일 정도로 백제의 공세에 시달렸다. 그리고 해로나 수로를 통해 일시적으로 군사를 보낼 수도 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특히 오랫동안 백제와의 마찰이 적은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신라와 알게 모르게 마찰을 빚었고, 대표적으로 김유신이 함락한 성이 고구려의 낭비성이었다. 그러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백제의 제안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즉, 성충이 연개소문을 협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은 옛 장수왕 때의 영토 반환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거절했다는 것이다.사실 이 말대로라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백제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 맞았다. 만약 신라와 손을 잡았다면 백제와 당의 손에 신라나 고구려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제당 연합군(?)에 의한 통일 백제 시대(?) 도래 또한 연개소문이 내건 죽령 서북 땅이라는 무리한 요구 또한 납득이 되는데 완곡히 신라와 결렬하는 이유로도 충분하고 만에 하나지만 수락이 되어 백제와 척을 진다 해도 이 정도의 땅을 가진다면 당이 수로를 통해 오는 것도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한 이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득보단 손해가 많으니 거절할 걸 노려 요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어찌 되었든간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일어났던 회담 결렬의 결과는 매우 큰 것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고립된 처지가 된 신라는 이후로 당나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결국 이는 신라와 당의 연계 작전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3.4. 당나라와의 대립

3.4.1. 당태종의 분노

이토록 권위적인 성격의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력자가 된 이후로 당나라고구려의 관계는 차츰 악화되었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기 전에 고구려를 다스렸던 영류왕은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런 영류왕을 숙청했으니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분노할만한 일이었다.

거기다 당태종은 당시 내부적으로 태자교체의 후유증으로 인해 상당히 통치력이 감소해 있었고, 장손무기를 필두로 하는 외척의 힘이 강대해져 한참 어지러웠던 시대였다. 심지어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에게 환속해서 자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정치적 어려움이 심각했다. 또한 동시에 고구려에 대해 그닥 좋은 감정은 가지지 않았던 것이 당태종이기 때문에(대표적인 게 진대덕 귀국 후 고구려 공격 의사를 내비친 것) 고구려에 대한 공격도 정국 타개를 위해 고려할만한 옵션이었다. 게다가 당태종은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군사적 역량을 지닌 명장이기도 하였으니 고구려 정복이라는 군사적 활동을 통해 당태종 자신과 막 세운 태자 이치의 권위를 세우고 정국을 안정화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태종에게는 말 그대로 딱 들어맞는 대의명분인 것.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을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문란케 하는 역적이라 일컫으며 고구려를 칠 것을 계획하였으나, 측근이었던 장손무기가 아직 방비가 단단하니 상황을 지켜봐야 옳다고 만류하자 계획을 보류하였다.

3.4.2. 도교를 받아들이다

643년 3월,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에는 유교불교는 번성하나 도교가 없다."라면서 보장왕에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이에 응하여 고구려에 숙달 등을 비롯한 8명의 도사를 파견하여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전해주도록 하였다. 연개소문 역시 이에 화답하여 도사들을 절과 객관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사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도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류왕본기에도 당시의 고구려에 도교가 번창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즈음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도 이전에 불교적 색채가 짙었던 것과는 달리 도교적인 요소가 매우 늘어났음을 볼 수 있다. 을지문덕여수장우중문시도 도교적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연개소문이 새삼스럽게 당나라에 도교 전파를 요청한 이유는 당시 당나라 이씨 황실이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도교를 무척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즉, 연개소문이 당나라 조정이 받드는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에 대한 유화책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온 도사들에게 절을 숙소로 내준 것은 불교에 대한 탄압책으로 여겨진다.[33] 보장왕 본기에는 650년 6월에 변룡사의 승려인 보덕화상이 나라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한다 하여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반발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삼국의 불교가 왕실을 보위하는 호국불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왕실의 친위세력인 불교의 권위를 약화시켜 왕의 위상 자체도 떨어뜨리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스님들은 귀족 가문의 출신들이 많았고, 학문과 무예를 익힌 엘리트였으며, 스님들이 숙식하는 사찰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군사적 기능도 하였기에 그 대항마로 도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교 우선시 정책과 상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한 점 때문에 이후 불교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수백 년 동안 굉장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듯 하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의하면, 고구려가 불의(不義)를 많이 저질렀으니 제석(帝釋)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인간세상에 보낸 괴물 무상대귀(無常大鬼)가 바로 개금(=연개소문)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도 연개소문이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환생한 것이라는 전승을 싣는 등 대체로 당대 불교계 기록에서 연개소문을 고구려를 망친 장본인으로서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3.4.3. 신라를 공격하다

한편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643년 9월에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신라의 40여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신라의 뱃길을 끊어 버렸다"라면서 도움을 청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었다.

644년 정월에 당태종은 고구려 조정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을 그만 두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여 2개의 성을 격파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보장왕이 사자를 보내 부르자 그제서야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리현장은 개소문에게 신라를 치지 말 것을 권유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지난날 수나라와 싸우는 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땅을 빼앗아갔으므로 이를 되찾아야 한다며 듣지 않았다.

이에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할 뜻을 밝히고는 사신 장엄을 보내 재차 연개소문을 나무랐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태종의 조서를 받들지 않고, 도리어 장엄을 협박하고는 굴방에 가두어 버렸다. 이에 크게 노한 당태종은 644년 7월에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였다.

한편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백금을 보내었으나 당나라의 대신인 저수량은 이를 고구려 측이 보낸 뇌물이라 주장하였으므로 당태종은 이를 받지 않았다. 또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보낸 50여 명의 사신들을 가리켜서 왕을 죽인 막리지를 섬기는 죄인들이라 하며 잡아 처벌하였다.

3.5. 고구려-당 전쟁


645년, 마침내 진노한 당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다. 당 태종이 직접 지휘하던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과 요동성 그 밖에 백암성 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고연수가 이끄는 15만 대군을 주필산 전투에서 기세좋게 무찌르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당태종은 안시성 공격에 나섰다가 안시성주의 분전으로 막히고 신성, 건안성 등 여러 곳에서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패퇴한다. 이후로도 당태종은 군사를 보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며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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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 전투 기록화

한편 그 뒤를 이은 당고종 역시 수차례 고구려를 침공해왔으며, 싸움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마저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662년에는 연개소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수에서 당나라 장수인 방효태와 싸워서 방효태 지휘하의 옥저도행군을 몰살시키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모두 죽임으로써 평양 앞까지 당도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당 전쟁 항목을 참고하기를.

3.6. 죽음과 사후

고구려-당 전쟁 중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을 수차례 격퇴했으나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후방도 매우 위험해졌다.

이러한 시기에 연개소문은 건봉 원년(666년)에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였다. 이는 구당서와 신당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642년 겨울에 난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를 제거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지 24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천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665년에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태대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연개소문이 이미 665년에 죽었거나 혹은 그때에 큰 병이 들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미리 연남생에게 직위를 넘겨주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일본서기 천지천황 3년 10월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664년에 죽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며 죽었는데 죽으면서도 아들들이 서로 분쟁하여 나라를 분열시킬까봐 두려웠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 달에 고려(高麗)의 대신 개금(蓋金, 개소문의 다른 이름)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漁水)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27 천지천황 3년 10월
그러나 결국 웃음거리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맏아들이었던 연남생이 막리지의 직위를 계승하였으며, 남생의 두 아우였던 연남건연남산은 형을 도와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주위의 여러 사람들은 이들 삼형제들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이간질하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결국 맏아들 연남생의 마음이 흔들려 남건과 남산에게 첩자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남생을 의심하여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미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연남생을 더욱 의심하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급기야 남생의 아들인 연헌충을 살해하였고, 이후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무리들과 거란, 말갈병 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는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하던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버려 고구려는 더 이상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668년에 당고종신라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4. 평가

4.1. 과거의 평가

기자가 남긴 풍속이 아직 남아서 6백여 년을 편안히 지내다가, 그 쇠할 무렵에 연개소문이 흉악하게 굴어서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의 군사를 불러들였고..(중략)..연개소문 때부터 난리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다'...(중략).. 지방에 가면 반드시 임금의 덕과 위엄을 펴고, 교화를 밝혀서 이미 잘 된 것은 그대로 지키고 아직 미진한 것은 더 장려하여, 기자(箕子)의 유풍을 되찾는 데 힘쓰고 연개소문의 나쁜 습관을 깨끗이 없애서, 덕성을 훈도하여 기르자
하륜
조선이 비록 그런 흠이 있지만, 천개소문(泉蓋蘇文)처럼 임금을 시해한 죄가 없고 천조(天朝)를 섬기어 신하의 예절이 어긋나지 않았으니...(조선을 합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일한, 사학천[34]
근거없는 말을 답습하여 요신(饒伸)은, 개소문(蓋蘇文)에 비유하고...
광해군[35]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때를 타고 진출하여,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 되었으니, 간사함으로 손바닥 위에 나라의 권력을 놓고 농단하고, 정사(政事)에 임해서는 편리에 따라 충신을 죽이고 말았도다. 중외(中外)에 권력을 천단하고 날로 포악해지니, 민(民)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기틀은 기울었네.
이승휴[36]

근대 즈음에 하여 연개소문이 '민족적 영웅'으로 재평가되기까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대역죄라는 틀이 강하게 작용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은 왕을 제멋대로 갈아치우며 전횡을 일삼은 포악한 역적이라는 것이 당시의 비판이었다. 특히나 조선시대 문집이나 자료를 찾아보면 해동이 배출한 대역죄인의 대명사 정도의 취급, 명나라에서 조선을 깔때도 소환되곤 한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을 엄청나게 깠다. '고려고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사서를 인용하여, 수양제의 신하가 고구려를 멸망시켜 양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환생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전설을 실어 놓았을 정도. 또한 연개소문이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도입함으로써 고구려를 쇠망하게 만들었다는 기록까지 실어놓았다. 물론 이건 친불교적 관점에서 도교를 도입한 연개소문을 욕하는 내용의 설화이기는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책이 당시 불교계에 반발을 불러왔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7]
전해지는 말에 대당에는 위징이 있고, 고려에는 개금(蓋金), 백제에는 선중(善仲), 신라에는 짐순(鴆淳)이 있다.[38]이들은 각자 일방을 맡아 이름을 만리에 떨쳤으니 이들은 모두 당세의 준걸로 지략이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등씨가전(藤氏家伝 )에서 덴지 덴노[39]
지난날 선제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고구려[40]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언충[41]
(당태종고구려를 이기지 못 한 것은) 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안석[42]
역시 연개소문은 재주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는데 곧은 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김부식[43]
개소문(蓋蘇文)은 안시성(安市城) 하나로 천하의 대병을 당해 내었으니 이는 사람을 제대로 얻은 효과입니다."
홍식[44]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소유하여 삼국 중에..(결락)... 수(隨)나라와 당(唐)나라가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원이 광활하여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지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씩씩하고 호방한 사람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역사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고 일컫는 자는 비록 찬역(簒逆)한 도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수가 없는 효웅(梟雄無敵之人)입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군신(群臣)들과 당세의 웅걸(雄傑)을 논하였는데 연개소문이 7인 가운데에 끼었으니, 그 인물이 어떠한지 상상이 됩니다.”
홍서봉
연개소문의 재주는 조조(曹操)에 뒤지지 않을 듯하다.
인조
당나라 태종은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이 견고한 성을 넘지 못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연개소문이 영웅이었는데도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양 간주함이 지나쳤던 것이다 고종 때에는 개소문이 죽었으니 이적 한 사람만으로도 취하기에 충분했다 이적의 재주가 어찌 태종을 능가했겠는가 상대방의 때가 달랐던 것이다
장뢰[45]
고구려에 연개소문이 있어 소동파가 그를 영웅이라 여겼으니 역시 보는 안목이 있도다
이수광[46]

하지만 그 능력이나 업적에 관한 평가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요약하자면 "역적인데 인물은 인물이다." 정도로 강조점이 다를 뿐 이것은 사실 당대부터 근대의 신채호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시성의 승리 역시 연개소문의 공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역적이라고 욕을 하다가도 막상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통쾌하게 질러버리는 연개소문을 은근히 찾는 분위기이며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당태종이 역사를 왜곡하고 전과를 부풀린 사실을 감안하고 능력을 후하게 평가하였다.

김부식을 비롯하여 연개소문에 대해 내리는 대체적인 평은 '재주는 뛰어나지만, 나라를 올바르게 받들지 못했고 성질이 더러워서 끝내 대역죄까지 저지른 인물'이었고 일단 나라를 구한 공은 높이 쳐주었지만, 함부로 임금을 죽이고 오만하고 잔인한 행동을 한 데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깠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그나마 병들어 천수를 누리다 간 것도 반역자 치고는 운이 좋은 최후였다고 사론에 적기도 하였다.

다만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평과는 미묘하게 다른듯 하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등은 그냥 대놓고 나라 말아먹은 것들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중국에서도 당나라의 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낸 연개소문의 능력을 꽤 높게 평가해줬다. 관련된 전승이나 소설에선 거의 최종보스급의 위엄을 자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설인귀가 주인공인 설인귀정사략. 심지어 강소성에까지 그런 형태의 연개소문 전설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요동을 지나는 기행문을 보면 연개소문의 고장으로 아직까지도 연개소문의 강대함을 논하고 상을 세워 기리기까지 하는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또한 군사적으로 유능한 면모를 보였는데 사수 대첩처럼 직접 군을 이끌고 지휘하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국력과 군사력을 감안해야겠지만 이후 연남생, 연남건 형제나 후대의 강조, 최충헌 등 고려의 무신권력자와 비교하면 군사적 능력을 실감할 수 있다. 당나라의 명장 이정(李靖)이 당 태종과 했던 군사학 토론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의 내용에는 '연개소문이 스스로 병법을 아는 것을 믿고 토벌당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내게 3만 군사를 주면 그를 사로잡겠다.'라는 내용이 나와있다. 전체적으로는 스스로와 이세민을 띄우면서 연개소문을 깔보는 발언이지만 역으로 병법가로서의 연개소문의 면모를 파편적으로나마 드러내주는 대목이랄 수 있다.

4.2. 현대의 평가

그 선악 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아무튼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중략) 봉건세습(封建世襲)의 호족공치제(豪族共治制)의 정치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 곳에 집중시켰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大局)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묻지 않고 한꺼 번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하 수백 명 대관을 죽이고, 침노해온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진격하여 지나 전국을 놀라 떨게 하였으니 그는 다만 혁명가의 기백(氣魄)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능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함이 옳겠다. 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 어진 이를 골라 자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한 자식 형제에게 대권(大權)을 맡겨 마침내 이룬 공업(功業)을 뒤옆어버렸으니 대개 야심이 많고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역사가 아주 없어져서 오직 적국 사람들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사실의 전말을 환히 알아볼 수 없으니...
신채호
연개소문은 분명히 지략가이고 당당한 무인이었으며 결과로 볼 때도 대국인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한 정략가였다. 그리고 외세인 당이 자신의 지위를 문제삼을 때 그를 거부하고 당의 침략을 일단 격퇴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도 있겠다.  당과 신라가 연결되어 국가의 운명이 내다보이는데도 그는 자신과 가족의 집권에 일단은 집착하였다. 그러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 그같은 자세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의 국제감각은 국가경영자로서 너무나 미흡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장기간의 집권기간에 이렇다할 국정의 개선조치가 없었던 사실을 보면, 그는 체제 붕괴기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정권의 재창출에 나섰다고 볼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자주적인 영웅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한말 그리고 일제 침략기에는 연개소문이 거대한 당나라에 대항한 민족적 영웅으로서 주목을 받았지만, 이제는 보다 면밀한 재검토를 받아야 할 시점에 처한 듯 하다. 이러한 재검토와 재평가는 그만큼 우리의 민족적 역량이 축적된 데서 가능해진 만큼 이를 피하거나 터부시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김기흥

근대를 거치면서 연개소문의 평가는 조금 더 복잡해지는데 다른 면으로 극단성을 띄기도 한다. 외세에 유린당한 무력한 시대를 거치고 왕조시대의 군신간의 충의라는 가치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외세를 무찌른 영웅으로서의 용맹하고 자주적인 모습이 한층 더 부각되는가 하면 이전까지 단순히 당태종의 침입을 막아냈다는 개략적인 부분을 넘어 그 행적이 왜곡되고 은폐된 정황까지 찾아내어 그 업적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이뤄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주의적인 욕구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그와 정치성향이 반대인 쪽에서는 업적까지 비판적으로 검토되거나 심지어 여타 독재자들의 폐해까지 소급해서 연개소문에게 책임을 지우는 가설이 세워지는 경우도 적잖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 세조와 마찬가지인 경우.

바로 그 예가 밑의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연개소문은 최충헌이나 사마소와 같이 역적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최충헌도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었지만 그가 역적 간신배 취급받는 것이 최고의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민심 수습과 몽골 침략과 거란 침략을 막아낼 노력을 하지 않고 자기 보신과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고려 전 국토를 유린했으니까 말이다.'

참고로 최충헌은 몽골 침략 이전에 사망했다. 즉, 자기가 원하는대로 남을 이지메하기 위해 논리를 끼워맞추는 것이다.

또 있다.

그게 아니라도 연개소문이 생각한 연씨독재체제의 후계자가 장남이었든 차남 이하였든, 누군가를 내정했다면 그에게 권력을 제대로 몰아주고 나머지는 공식 후계자에 개길 수 없도록 권력을 한정시켰어야 한다. 이는 원소견훤의 파멸 과정이나 최충헌, 김일성 독재가 대대로 안정적으로 세습된 것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이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삼형제가 서로 다투기 딱 적당하도록 비등비등한 권력을 나눠주었고 이는 연개소문 사후 3년도 되지 않아 고구려가 내전으로 자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구려 멸망이 아들들의 단순한 개인적 무능뿐 아니라 서로 싸웠던 점이 크다고 본다면, 서로 싸울 판을 깔아놓았던 연개소문의 책임은 적지 않다.

이건 틀린 것인데, 연개소문의 첫째 아들이 시찰을 나간 사이에 쿠데타를 벌인 것이다. 이걸 막을려면 처단 밖에 답이 없다.

4.3. 고구려 멸망의 책임

그는 7세기 고구려의 한계 상황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그는 명장, 혁명가, 정치가로 만족해야 했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권신의 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솔한 것은 이점보다는 폐해가 많았다. 그의 라이벌로 지칭되는 이세민과 김춘추는 모두 일국의 왕이었다. 따라서 정적 제거나 권력 강화에서 연개소문은 이들보다 명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권력 강화는 무리한 독재권력, 세습정권의 폐해로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비정상적인 권력구조는 고구려 정치권의 비효율성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중략) 그가 죽은 후에 빚어진 카리스마의 공백은 곧 고구려의 내분과 더 나아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가 권력을 다시 왕에게 돌려주었거나, 혹은 후계자 선정을 제대로 했더라면 고구려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었다. 후계자 선정에서의 잘못이란 문제 하나만으로도 연개소문은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개소문은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략) 당나라의 경우에서 보듯 비록 후계자가 자신보다 부족한 면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를 보좌하는 정치 시스템이 부재했던 것이 고구려가 실패한 더 큰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은 대단히 뛰어난 군사지휘자의 능력을 지녔지만, 국가의 총체적 국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활용해야 하는 국가 최고경영자의 능력 면에서는 여러 부족한 면모를 보였다. (중략) 연개소문은 고구려 국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중간에 전쟁을 중지시킬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더욱이 상대인 당나라는 수나라와 달리 돌궐을 복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당의 용병으로 활용했으며,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은 설연타마저 멸망시켰으며,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힘과 의지를 갖고 있었다. (중략) 무엇보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에는 주변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적인 당나라는 새롭게 성장하는 신흥 강대국이었다. 반면 고구려는 전성기를 지난 노쇠한 대국이었다. 성장 에너지란 측면에서 고구려는 당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중략) 전통 귀족들이 여전히 권력의 한 축을 장악하고 있었고, 제도는 낡았고, 혁신은 뒤늦었다. (중략) 연개소문은 1차 고-당 전쟁과 2차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전투에만 승리했을 뿐 전쟁의 성과물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비록 위대한 전략가, 고구려의 위신을 드높인 영웅이라고 칭송될 수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 지도자였다.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은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해, 고구려의 시대를 새롭게 열지는 못했던 것이다. 다만 후대에 본인만한 지도자가 없는 게 연개소문의 책임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 김용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中

사실 저 위에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게, 이미 수, 당은 고구려를 지도상에서 지우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기 때문에 고구려에게는 군사적 대결 이외에는 선택지가 아예 없었다. 왜냐하면 고구려 자체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나 당에게는 자기들에게 개기는 버러지 같은 것들 또는 먹잇감으로 취급되어 있어서 대화라는 선택지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 은 건국 직후 국내가 어느정도 안정되자마자 바로 고구려 원정을 선택할 정도로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왔다. 심지어는 고구려에서 먼저 굽히고자 공물과 함께 사신을 보냈을 뿐 아니라 후엔 태자까지 입조시켰음에도 타국의 사신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고구려의 사신에게 면박을 주거나, 예우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 등 대놓고 고구려의 화친요청을 받아줄 의향이 없음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왔다.

아무리 백제와 신라에 비해 막대한 물자와 군비를 생산하던 고구려였지만[47] 당나라고구려보다 더 많은 물자와 군비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48] 지휘관들의 역량도 절정기를 달리고 있던 시점이었으며 전쟁이 주로 고구려 영토 안에서 벌어진 점,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청야 전술도 장기적으로는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즉 연개소문은 그를 중심으로 고구려를 재편하여 당과 오랫동안 맞서 싸울 수 있게 했지만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그건 연개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이도 하기 어려웠던 것이 일단 고구려와 당나라는 인구 자체가 6배 이상 차이가 났다. 즉, 1인당 GDP에서 고구려가 당나라보다 2배 더 잘 살았다고 해도 총 GDP는 당나라가 여전히 고구려보다 3배 이상 더 크다. 다시 말해 당나라가 고구려보다 투입할 수 있는 전비가 3배 이상 더 많았단 뜻이다. 고구려의 영토를 대폭 늘리고 인구도 훗날 루마니아차우셰스쿠 같이 무식하게 출산장려운동을 벌여 증식시키지 않는 한 그건 연개소문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연개소문은 당이 작정을 하고 멸망시키려 하고 영류왕은 당에 밀리는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면서 당의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자국 내 요충지들을 보여주어 고구려-당 전쟁에서 고구려가 밀리게 되는 큰 실책을 저지른 상황에서 고구려를 지켜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권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다만 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은 고구려 멸망까지 이르는 연개소문 책임론의 핵심이다. 위의 김용만이 언급한 '권력을 다시 왕에게 돌려준다'는 이상주의적인 대책은 연개소문이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그게 아니라도 연개소문이 생각한 연씨독재체제의 후계자가 장남이었든 차남 이하였든, 누군가를 내정했다면 그에게 권력을 제대로 몰아주고 나머지는 공식 후계자에 개길 수 없도록 권력을 한정시켰어야 한다. 이는 원소견훤의 파멸 과정이나 최충헌, 김일성 독재가 대대로 안정적으로 세습된 것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이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그러지 않았고 이는 연개소문 사후 3년도 되지 않아 고구려가 내전으로 자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구려 멸망이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서로 싸웠던 점이 크다고 본다면, 서로 싸울 판을 깔아놓았던 연개소문의 책임은 적지 않다. 다만 이 점을 제외하면 연개소문은 확실히 고구려를 이끄는 전시지도자로서 그리 큰 실책은 저지르지 않았다.

5. 가족관계

아버지로 연태조, 동생으로 연정토, 아들로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이 있다.

연개소문의 부인에 대한 기록도 전하는데, 남생의 아들인 연헌성 묘지명에 '조모(祖母)'란 인물이 등장한다. 조모는 682년에 당나라에서 죽었다. 헌성의 조모는 당연히 남생의 어머니, 연개소문의 아내를 의미한다. 이를 보아 연남생이 당으로 도망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간 걸로 보인다. 아니면 고구려 패망 후 따로 모시고 왔던지.

6. 그 외에

  • 연개소문이 평소에 차고 다녔다는 5자루의 칼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중국 쪽의 기록에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칼을 5자루씩 가지고 다닌다는 기록도 있다. 혹은 이것이 사냥용, 가죽 다듬기용 등의 크고 작은 칼을 차고 다닌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실제로 황남대총에선 칠지도의 이전 단계로 추정되는, 큰 칼 칼날에 작은 검집 6개가 달려 있고 거기에 작은 칼 6개가 꽂혀 있는 환두대도 유물도 있다.[49]
  • 중국 경극에서는 연개소문이 비도술(飛刀術)에 능통한 것으로 묘사된다. 중국의 민간 설화에서는 칼이 5자루가 아닌 7자루로 묘사되며, 이것으로 당태종을 뒤쫓다 설인귀가 창으로 이것을 막아내어 연개소문의 추격을 막아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한편, 스펀지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중국 전통무용)중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것도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로 꽤나 용맹스럽고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경극 팬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과 고구려 사람인 것까지 알고 있다고 할 정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의 힘을 가진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패퇴시키고 뒤쫓지만, 최후에는 당 태종을 구하러온 설인귀와 싸우다 패하는 내용으로 끝난다.[50]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411010395_01.jpg
비도술을 시전하는 천개소문

사실 유명세에 비해 관련 기록도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기록마저 생전 자신의 적들이었던 당나라와 신라의 기록이기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나오나 고구려 말기를 다루는 만화소설 등에 왠지 자주 나오는 인물로, 대개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온다.

스펀지에서 비도술과 엮이어 등장해주셨다.

선덕여왕에서는 설정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았다. 당시 홈페이지에는 등장인물 란에 고구려 인물로서는 보장왕과 단 둘이 유이하게 올라가 있었지만 배우는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그 상태로 선덕여왕이 종영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았다.

7.1. 규염객전

중국 무협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규염객전의 주인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51] 때문에 한국에서 규염객전하면 연개소문 왕년 이야기 정도로 회자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작 중 규염은 왕을 죽이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 나라의 이름이 '부여국'이었기 때문이다. 1)당태종 시대에 2)중국 동남쪽에 위치한 '부여'국에서 3)쿠데타로 권력자가 된 인물이라니. 이게 연개소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 라는 세간의 인식을 조선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규염객전은 그 이름이 무색할만큼 주역인 규염이 늦게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전까지 극을 이끌어가는게 바로 이정과 장출진인데, 이 중 이정은 실존인물로서 당나라는 물론 중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힐 희대의 명장이다. 장출진은 이정의 부인으로 붉은색 불진(장식용 먼지떨이개)을 지니고 다녔기에 홍불녀라 불린다. 물론 이건 규염객전에서의 설정이고 실제 이정의 부인 이름이 뭔지, 불진을 갖고 댕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그만큼 이들 부부에게 기이한 일화가 많았고, 그런 점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겠거니 하고 넘어가는게 속편할 것이다.

규염객전은 홍불녀와 이정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홍불녀는 원래 수나라 실세 양소의 시중을 드는 기생인데, 이 아가씨가 허구헌날 보는게 양소를 찾아오는 인간군상들이었다. 말기의 왕조가 다 그렇듯이, 고관대작을 찾아오는 이들은 하나같이 속물이거나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인물이 바로 이정이었는데, 장래에 대한 비전이 확실한 이정을 본 홍불녀는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한다. 어차피 이대로 양소 옆에 죽치고 있어봐야 평생을 먼지떨이로 바람이나 일으키다 죽는 것 밖에 없다. 그럴 바에야 미래를 걸어볼 사람과 함께 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장출진은 이정을 찾아갔고, 이정도 보통 아닌 기백과 현명함에 미모까지 완벽한 장출진에게 마음이 뺏긴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두 청춘은 평생의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백년커플로 거듭난다 - 여기까지가 규염객전의 초반 스토리다.

그렇게 이정과 홍불녀의 꽁냥꽁냥한 난세 신혼 여행이 시작되나 싶을 시점에, 글자 그대로 갑툭튀한 규염객이 합류하면서 비로소 규염객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쁜 남자 규염객, 팜므파탈 홍불녀, 거기에 쿨하지만 아직 어린 이정의 이 조합이야말로, 무협 소설의 원류이자, 동서고금의 수많은 문화 콘텐츠에 영향을 끼친 '풍진삼협(風塵三俠)'이다.

생각해보면, 창작자 입장에서 스토리를 뽑아내는데 남2 여1 조합은 꽤나 유용하다. 진짜 고전적으로 생각하면 여자 하나를 두고 남자 둘이서 벌이는 쟁투를 쓸 수도 있고, 언피씨하게 생각하면 거무튀튀한 남자들 틈에서 한송이 꽃을 넣어 극에 청량감을 더할 수 있으며, 두 남자를 제압한 여자가 승리하는 전개로 이어갈 수도 있다. 더욱이 탁월한 것은 규염객전의 저자는 당나라 말기라는 매우 고전적인 시대적 환경에도 불구, 세 명의 주역에게 거의 비슷한 주체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여하간에, 당나라 때 만들어진 이 풍진삼협이 후대의 서브컬쳐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한국에서는 아예 규염객전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박성우 작가의 '천랑열전' 되시겠다. 여기선 풍진삼협이 '태원삼협'으로 바뀌어져 나온다. 해당 작품의 설정상의 인물인 규염 역시 거기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

7.2. 설인귀 전기

중국 드라마 설인귀전기(2006)에서는 철세문(鐵世文/铁世文)이라는 적 최종보스로 나오는데 모티브는 연개소문이 거의 확실하다.[52] 왕을 협박하고 실권을 찬탈한 악역으로 나오지만 그 카리스마는 엄청나게 나오고 오히려 적인 당태종 이세민이 찌질하고 권력욕에 찌든 음흉한 황제로 나온다.[53] 심지어 철세문에게 쫓기자 국토의 반을 할양하겠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드라마의 주인공은 설인귀인만큼, 그에게는 발리지만 일단 설인귀를 제외하면 개인적 무력 같은 것도 작중 최강 레벨이다. 원작 소설의 경우, 안전보라는 장수가 연개소문보다도 더 강하다는 설정인데, 드라마에서는 철세문에게 발린다.

7.3. 삼한지

삼국시대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인 김정산의 삼한지에서도 등장하는데 용맹하고 호탕하며 의기로운 모습과 잔인하고 포악하며 적에게는 인정사정없는 모습을 모두 드러내며 이중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이미지로 묘사된다.

다만 행적에는 문제가 많은 편인데 실제 역사와 다른 면이 많다. 아직 어린 시절에 여수전쟁 이후 정계에서 축출당한 을지문덕을 스승으로 삼아 중국을 여행하고 심지어는 훗날 당태종이 되는 이세민, 그리고 당시 당나라에 와있었던 김춘추 등과 사귀어 호형호제 할정도로 친해진다(...).[54] 훗날 고구려에 귀국해서는 을지문덕의 양자인 을지유자를 친구로 사귀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작가가 창작하여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꽤 많다.

이후 당나라에 굽신거리는 영류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아버지 연태조가 사망해 그 뒤를 이어 동부대인이 된 이후로 나라를 갈아 엎을 계획을 세워 결국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다. 영류왕을 죽인 직후의 묘사가 실로 압권이라 할 수 있는데, 다음 후계자로 영류왕의 동생인 대양의 아들 장을 낙점하고는 곧바로 대양의 집으로 달려가 "왕이 죽고 없는 지금 아무나 빈 궁궐에 입성하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어찌 왕좌를 탐내겠습니까."라며 장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비는 장면은 작중 연개소문의 이중성을 극단적으로 나타낸다.[55]

이후 고구려에 쳐들어온 당태종과 싸우게 되었는데 주필산에서 고연수가 15만 대군을 날려먹은 소식을 듣고도 별로 신경쓰지 않다가 당태종이 안시성주에게 패하여 물러날 때를 노려 퇴로를 막아서고 당태종과 대면한다. 이때 당태종을 '형님'이라 부르면서도 부드럽게 협박하는 장면이 일품(...). 그러나 당태종이 죽고 나서도 당나라가 반드시 복수하려 할 것이라 생각하여 당태종을 죽이지 않고 놓아 보낸다.

작중에는 키가 작은 추남으로 묘사되는데, 얼마나 키가 작은지 특유의 덥수룩한 수염이 없으면 다들 어린아이로 착각할 정도라고 묘사해놓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신기에 가까운 무술 실력과 지략을 지니고 있는데 고구려에 쳐들어온 당태종을 농락하는 모습도 보여주며 작중 주인공이자 먼치킨에 가까운 실력을 자랑하는 김유신마저도 겁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분량 문제도 있고 하다보니 그리 등장이 많지 않다.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며 고구려를 침략해온 당태종을 무찌르는 6~7권 까지는 거의 주인공 행세를 하지만 이후로 등장도 거의 없이 간간히 얼굴만 비추다가 9권에서 그냥 늙어 죽는다(..).

7.4. 삼국기

KBS 사극삼국기에서는 중견 배우 조경환이 연기하였다. 사실상 최로로 영상물에 재현된 연개소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작중에는 호탕하면서도 잔인한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닌다.

조경환의 하차로 중간에 배역이 변경되었다. 그야말로 드라마 사상 초유의 사태(...). 결국 연개소문은 이전에 죽고 그의 카게무샤가 활동한다는 실로 어설픈 전개로 이어졌다.

7.5.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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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는 이태곤, 중-장년기는 유동근이 열연하였다. 드라마의 분위기 자체가 미화를 넘어서서 거의 신격화(...)하는 수준으로 연개소문을 띄워준다. 다만 연개소문의 청년기의 기록은 부실하기 때문에 상당부분은 설화적 옛 기록의 짜집기와 창작으로 메꿨다. 갓쉰둥전을 반영해서 연개소문이 어릴 적 신라 김유신 가문에 몸종으로 있기도 하고[56] 이 때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연개소문이 중국 수나라로 넘어가 소싯적 이세민과 뜻을 같이 한 동지 관계를 맺는데 이런 설정은 규염객전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수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밀의 난에 참가하고[57] 당태종 이세민이랑 친구 먹기도(...) 하는등 활약하긴 하였지만 아무래도 창작만으론 한계가 있어서인지 청년기엔 메인 악역인 수양제 쪽 비중이 더 높다.[58] 페이크 주인공인 셈. 후반기엔 유동근이 연개소문 역으로 나오면서 좀 달라지긴 했지만 역시 당나라의 비중이 만만치 않았다. 연개소문을 신격화 혹은 메리수급 먼치킨으로 다루다보니 정작 연개소문의 인간적인 면모는 잘 다루지 못하였다.[59] 게다가 드라마 자체가 워낙 병맛이라 유동근 특유의 중후함과 카리스마도 빛을 많이 잃었다는 평. 특히 비도술로 쓰리쿠션을 날리지 않나, 설인귀가 쏜 화살을 연개소문이 단검을 던져 막아내는 실로 황당무계한 장면이 유명하다(...). 일명 '만렙 연개소문', '고구려의 뮤탈리스크'라고 부른다. 영상 게다가 고증은 완전히 무시하고 연개소문이 고구려가 멸망할 때 까지 살아있는 것 처럼 묘사된다. 게다가 죽는 장면에서는 삼족오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 이쯤되면 사극이 아닌 판타지 드라마 수준. 환개소문

7.6.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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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이라면 하늘도 이 연개소문의 허락을 받아야지.

드라마 연개소문과 비슷한 시기에 KBS에서 방영하였던 사극 대조영에서는 김진태가 분하였다. 1차 고당전쟁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전멸시키면서 임팩트 있게 등판하고 당태종을 당나라 영토까지 마구 추격하여 몰아붙인다. 대체적으로 명장이자 애국자로 묘사되지만 독선적인 독재자의 모습도 종종 보여주었다.[60] 2차 고당전쟁 당시 설인귀가 쏜 화살에 맞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자 자신이 죽기 전에 당나라를 멸망시켜야 된다고 생각하고선 무작정 당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작중 설정상 몇 년간 가뭄에다가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졌으므로 원래부터 연개소문에 적대적인 5부가의 대신들은 물론, 심지어 그의 부하들과 아들 연남생도 전쟁에 반대를 표한다. 이 때 연개소문은 막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번 정벌에 반대하면 국왕이건 내 아들이건 다 죽여버리겠다!'고 연남생을 혼내고 조정에서 대신들과 장수들에게 살기 어린 표정으로 호통을 치는 것도 모자라서 수십 년 지기이자 전우인 양만춘을 적으로 간주하고 양만춘의 친서를 전하러 온 요동 군사들을 마구 화살로 쏴 죽이고 내전까지 벌이려 한다. 이러한 갈등은 대조영과 양만춘의 목숨 건 직언과 설득으로 간신히 끝나게 되고 연개소문은 병사한다.

고구려의 먼 훗날을 생각하라는 양만춘의 말을 처음엔 거부했으나 아기 대조영과 그의 어미(대중상의 부인)를 찾은 후에 상황을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대조영의 출신을 숨기고 노비로 삼아 자기가 키운다.[61] 노비였던 대조영을 교육 기관 근처에서 자라게 하여 교육을 받을 기회는 제공하나, 왕이 될 운명이 실현될까봐 대조영을 끊임없이 감시하고[62] 무장이 되게 숭무대연에 나가게 해 달라는 대조영을 방해한다. 그러나 2차 고당전쟁 승리에 기여하고 성숙해 가는 대조영을 큰 인물로 키우고자 자신의 최측근 무장으로 두는 등 조력자가 된다. 죽기 전에는 자식 연남생보다 대조영을 총애하고, "누가 뭐래도 난 네 아비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대중상[63]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으며(...) 심지어는 최종화 부근까지 나온다. 어쨌든 배우의 연기에 이중적인 캐릭터성에 힘입어 설인귀, 양만춘과 함께 극 초반의 시청률을 책임 졌다.

여담으로 대막리지가 아니라 합하라고 불리는데, 조선시대 기준이기는 하지만 정 1품 관리들에게도 이렇게 불렀으니 그대로 가져다 쓴 듯[64].

거칠고 냉혹한 절대권력자 이미지이나, 따스한 모습도 보여준다. 대조영(개동이)이 자꾸 부모를 찾겠다며 도망치자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아야 겠냐?' 화내다가 대조영이 식사를 거부하자 '이러면 네 부모에게 불효하는 짓이다.' 설득하면서 직접 밥을 떠 먹여 주는 모습도 보여주고, 장남인 연남생이 2차 고당전쟁 당시 압수 전투에 패하자 처음엔 그를 대역죄인이라고 일컬으며 '이 자식 어딨냐?' 극노한 모습을 보였으나, 고당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고 나중에 연남생이 돌아와서 죽여달라 죄를 빌자, '너 때문에 고구려 망할 뻔한 거 아냐?' 질책하다가 이를 교훈으로 삼으라며 다독거린다. 연남생 말로는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혼을 낸 뒤, 따스하게 다독거렸다고 한다.

연개소문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초반부의 주역인 만큼, 등장기간 자체는 그리 길지는 못하다. 하지만 연개소문(드라마)의 연개소문에 비하면 어느 정도 균형잡힌 캐릭터성에 김진태의 명연기가 더해진 결과, 오히려 유동근의 연개소문보다도 더 낫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덕분에 배우 김진태는 연말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65]

7.7. 황산벌

영화 황산벌에서는 이원종이 역할을 맡아 인트로에서 구수한 서북 방언으로 연기했다. 여기서 당나라한테 개기는 역할로 나오면서
보라우. 아바디 당태종이가 형제들 처죽이고 황제된 것도 하늘이 정해준 질서네?(…) (김춘추가 정권의 철학적 정통성을 거론하자) 정통성? 기래. 내레 쿠데타 일으켜서 정권잡았다. 와? 김춘추 너레 반쪽자리 왕족 주제김유신이랑 짝짜꿍해서리 정권잡디 않았서? 의자왕, 니 아바이도 서자디?[66]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래 누구래 있어야?! 전쟁은 정통성 없는 것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기라야!

라는 나름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황산벌의 후속편격인 평양성의 앞부분에 짤막히 등장해, 농성전을 벌이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당군과 싸웠지만 화살을 수없이 많이 맞아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기며 사망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7.8.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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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동준이 맡아 연기했다. 역사서 중 정사의 기록들인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등을 보면 연개소문의 성격과 외모에 대해 성격은 '거칠고 잔인하면서도 동시에 용맹스럽고 호탕하며 대범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외모에 대해서는 '얼굴이 잘생겼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수염이 아름답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동준이 맡은 연개소문은 역덕후들에게 역대 연개소문 배역중에서도 가장 역사적기록에 근접한 외모와 인상과 느낌을 잘 묘사주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지금까지 여러 사극영화들과 사극드라마들에서는 연개소문이 무인으로 묘사되었지만 대왕의 꿈의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실권자답게 문관과 정치인으로서의 묘사를 더 중시했다.[67]

우스꽝스러운 점이 최동준은 전작인 광개토태왕에서 고구려의 개혁을 구상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죽음을 당하는 가상인물인 개연수 역을 맡았는데 대왕의 꿈에서 쿠데타에 성공하여 고구려의 개혁을 추진하는 역의 연개소문으로 복귀함으로써 드디어 수세기만에 꿈☆을 이루게 됐다는 배우개그가 성립된다.[68]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기 직전 당시 국제 정세를 설명하는 나레이션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철퇴로 영류왕을 쳐죽이는 장면이 나왔으며, 이후 고구려의 대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총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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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온 김춘추를 시험해 보기 위해 처음에 칼을 들고 협박했으나 쫄지 않는 김춘추를 보고 마음에 들어하며 회담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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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춘추와의 합의점을 찾지는 못하고 회담 결렬. 이후 당을 끌어들이려는 김춘추의 움직임을 포착하고는 김춘추에게 크게 실망해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계속 움직인다. 김춘추가 즉위한 후 김유신이 김춘추의 친당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노리고 김춘추와 김유신의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계책을 꾸민다.

일단은 드라마 중후반의 보스 포지션인데, 작중에서 고구려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등장이 많지는 않다. 가끔 보장왕과 함께 있으면서 국제정세와 함께 고구려의 대응책을 논의하는 정도. 실제로는 보장왕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보장왕이 연개소문을 많이 의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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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칼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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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가 연기한다. 대부분의 사극에서 연개소문을 영웅처럼 묘사하는거에 반해 이 드라마는 악역같은 느낌이 든다.[69]최민수 본인이 분장을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기른 머리와 수염(덤으로 화장도 안한 생얼)으로 출연해서인지 카리스마 넘치는 연개소문이 나왔는데, 심지어 연개소문이 주인공인 위의 드라마보다도 포스가 넘친다. 드라마의 미장센이 워낙 독특하고 대사가 적다(...)마는 이것이 도리어 그의 눈빛 연기를 부각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사실 말 많은 악당 캐릭터가 도리어 카리스마를 해치게 되니 오히려 입체적인 악역 포스엔 과묵한 설정이 더 어울렸다. 거기에 더불어 역대 최고의 카리스마 있는 영류왕을 연기한 김영철과 함께 뒤통수를 치고 받는 정쟁을 벌이는 모습이 극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로 평가되었다. 가만, 주인공은 이 사람들이 아닌데? 특히 영류왕을 직접 찔러 죽이고 나서 피를 뒤집어쓰고 드러나는 광기에 찬 눈빛은 그 어느 연개소문보다도 연개소문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백미.

7.10. 천랑열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언급만 된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연개소문인게 확실한게 아니라, 정황상 연개소문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인 연오랑의 스승이라고 언급되며, '사신무'의 창시자'라고 나온다. 자세한 설명은 규염 항목 참고.

7.11.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고대 무장 데이터가 존재함이 확인되었다. 병종은 중기병.

7.12. 안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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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오성이 연기했다. 작중 비중은 거의 카메오 수준으로 등장이 많지 않다. 영화의 설정으로 양만춘과의 불화설을 채택하였으므로 중후반까지 사실상 안시성을 반역자 취급하며 버리고, 지속적으로 양만춘의 암살을 시도하며 악역 포스를 풍긴다.

첫 등장은 고구려군이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군에게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후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평양성으로 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기로 하고 큰 부상을 입은 친구를 들쳐업은 사물(남주혁)과 마주친다. 사물에게 “내려놓아라”라고 하자 사물은 “끝까지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답변하지만, 연개소문은 그런 사물에게 “이미 죽었다”고 해준다. 이후 사물과 독대하면서 "안시성 출신인데, 안시성주 양만춘(조인성)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사물은 "직접 본 적이 없다"고 답변했고, 연개소문은 다시 "그가 어떤 인물인 것으로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사물은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수였으나 현재 반역자로 알려져있다”고 대답한다.[70] 연개소문은 사물에게 "안시성 출신인 너를 곁에 둔 이유는 양만춘과 달리 사물이 나에게 충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단검을 주면서 "양만춘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다. 이후 평양성에 도착해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물에게 양만춘을 죽이라고 보낸 자가 오히려 "양만춘을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연개소문은 당연히 열 받아 사물에게 칼을 겨누지만, 사물은 "그들도 고구려인들이고 지금도 고구려를 위해 목숨바쳐 싸우고 있다"고 호소하자 후반부에서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당군을 격퇴했다.


[1] 이상 삼국사기, 남생 묘지명 참조[2] 당서에나오는 연개소문의 성씨다. 이는 당 고조인 이연의 이름이 연개소문의 성씨와 같은 자를 썼기 때문에 이를 피휘한 것이다.[3] 614년이라는 출생연도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기술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연개소문이 614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 설에 부정적인 쪽에선 기록 자체에 허구성이 짙기 때문에 믿기 힘들다고 한다. 특히 그 기록은 <고려고기>라는 책을 인용한 것인데 연개소문의 이름도 제대로 못 적은 잡서에 가깝다. 신채호조선상고사를 인용해 595년이라 주장했지만 출처를 알 수가 없다. 이전 버전에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던 642년 당시에 맏아들 연남생의 나이가 9세라서 삼국유사 쪽 기록에 신뢰성을 두고 있는데 꼭 그렇다고 볼 순 없다. 연개소문이 늦장가를 갔을 수도 있고 연남생 위에 누나들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보통 여자들은 기록을 잘 안 하기 때문에 부자들 간 나이차가 크다고 해서 무조건 614년 설을 맹신해선 안 된다.[4] 연개소문의 사망년도에 대한 기록으로는 구당서, 신당서 및 삼국사기의 666년 6월 사망기록과 일본서기의 664년 사망기록이 있다.[5] 혹은 서부 대인이라고도 한다.[6] 대막리지는 중국측 기록으로 계급의 일종인 막리지를 직책명칭인 대대로와 같게 본 오류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천남생 묘비명에는 ‘태대대로’ 라고 기록되어 있다.[7] "善化公主主隱"을 "선화공주님은"이라고 읽는 신라의 향찰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8] SBS 연개소문에서는 이 이름을 '개똥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아명으로 설정했다.[9] 다만 연남생, 연남산 등 당나라에 들어가서 평생 산 아들들은 당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휘하여 천(泉)을 성씨로 삼았을 것이므로, 개명(개성)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10] 다만 淵(연)과 가까운 뜻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의미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어서 일종의 훈독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그냥 단순한 훈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1] 으리 혹은 이리.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에 쓸 때는 이리.[12] 蓋蘇文을 따르면 가소문이라 읽을 수도 있고, 柯須彌를 따르면 가스미, 가수미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자음이 받침으로 쓰였을 경우나(가솜, 가슴, 가숨 등) 아래 아 같은 사라진 발음까지 합쳐서 추정하면 더더욱 복잡해진다.[13] 고국원왕의 본명인 사유(斯由), 소(釗), 소(召)와도 통하는 말이라 추정된다.[14] 참고 일본서기에 금관가야를 수내라(須奈羅) 혹은 소내라(素奈羅)라 표기한 기록이 있다. 둘 다 스나라(すなら)라고 읽는데 이는 현대어의 쇠나라에 해당하는 고대어를 가차한 걸로 보인다.[15] 霍光의 고사가 있을 것 같으나 未詳.[16] 군주의 大權?[17] 군주의 영화를 의미?, 典故 未詳.[18] 바탕[19] 현재의 오사카시에 위치한 난바(難波) 인근을 의미한다.[20] 영류왕의 동생이자 보장왕의 아버지인 고태양[21] 정확히 어느 성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추정된다.[22] SBS에서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방영한 연개소문(드라마)에선 나레이션에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것이 연개소문에 대해 원한이 많아서 연개소문을 악하게 묘사하려는 중국기록의 왜곡이라고 본다고 나오고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는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함께 구하기위해 뜻을 함께하려했지만 영류왕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연개소문에게 고구려를 부탁한다며 자살하는 걸로 나온다. 때문에 연개소문에 대한 미화가 너무 지나치다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영류왕 역을 맡은 최종환씨의 연기력 덕분에 장렬함이 부각되는 나름의 명장면.[23] 성씨의 개념을 만든 중국에선 성과 씨는 다른 개념이었다가 후대에 하나로 합쳐졌지만 중국 문물을 수입한 고대 일본에서는 카바네(姓)와 우지(氏)를 분리해서 구분했다.[24]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대왕의 꿈이나 칼과 꽃 등에서는 이 설을 바탕으로 한 내용전개가 펼쳐진다.[25] 특히 SBS에서 방영했던 사극 연개소문(드라마)나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 등에서는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26] 막리지는 1. 제일 높은 관직인 대대로와 같은 관직이라는 설 2.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태대형과 같은 관직이라는 설 3. 연개소문의 정변 이후 신설된 관직이라는 설이 있다.[27] 대조영이 어린 시절에 연개소문이 말을 탈 때 달려와 엎드리는 묘사도 드라마에 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실제로 대조영일 가능성은 없다.[28] 연개소문이 죽인 중앙 귀족들 중에는 지방과의 커넥션을 가진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29] 현재 양만춘(楊萬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으나 실제 본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30] 해당기록에는 연개소문을 태대대로 개금이라 표기하였다.[31]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궁가와 같은 이야기이다.[32] 세간에는 연개소문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김춘추를 가둔 것은 보장왕이고,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 것은 신원미상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연개소문이 실권자인 상황에서 보장왕이 마음대로 김춘추를 죽이려고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딱히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죽일려고 했다는 것은 증거가 없는 셈.[33] 실제로 삼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유기에서는 도교의 도사들을 극악한 무리인 양 묘사한다.[34] 명나라 급사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틈에 조선을 병합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며 나온 이야기다.[35] 명나라 일부 대신들이 조선을 병합하고자 모함한 언사를 인용[36] 제왕운기 내용이다.[37] 연개소문의 이러한 시도는 도교를 수용해서 기존의 불교를 견제하거나 억압하려 한 의도였다고 평가된다.[38] 이 중 '짐순'은 일반적으로 김유신을 뜻한다고 해석되는데, 발음 때문에 김유신이 아니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자세한 것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항목 참고.[39] 사실 등씨(藤氏=후지와라씨藤原氏) 가전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책은 후지와라씨의 내력을 서술한 서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한국의 행장 비슷하다. 이 발언은 후지와라씨의 시조가 되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를 덴지 덴노가 칭찬하면서 했다고 기록된 말이다. "우리 카마타리는 위징, 연개소문, 성충, 김유신(혹은 김흠순)과 견줄만한 인재라고!"라는 의도로 한 말.[40] 오랑캐 虜로 표기[41] 당나라 시어사, 668년 2월에 고구려 전선에서 장안으로 귀환하여 보고하는 중에[42] 송신종과 왕안석의 대화[43] 삼국사기에서 위의 왕안석의 대화를 인용하면서[44] 조선 선조 때의 대사헌, 선조와의 강론에서[45] 소동파의 4학사 중 하나, 조충국론을 저술하여 국방을 논하면서 나온 발언이다.[46] 문맥상으로 소동파의 제자(위에 언급된 장뢰)를 소동파로 썼을 가능성도 보인다.[47] 실제로 수당과의 전쟁당시의 고구려 병력을 백제와 신라전선에 투입시켰으면 백제와 신라는 절대 못견딘다. 국내성 하나에서 4만을 동원하였는데 이 4만은 백제가 원정을 나갔을 때 최대규모로 편성될때나 나타나는 수치이며 백제 내부에서 전쟁을 벌일 때는 그만한 규모를 동원한 기록이 없다. 신라도 일부러 과장되게 적은 것들을 제외하면 백제로 5만이 원정을 나갔을 때가 최대규모이며 이를 넘는 병력동원은 신라 후기 내전을 벌일 때나 나타난다. 그런데 그런 규모를 넘는 병력동원을 고구려는 642년 국내성 하나에서 4만, 661년 안시성과 그 주변의 3만, 642년 주필산에서의 15만, 667년 금산에서의 20만을 동원했다. 게다가 상대는 한창 군사적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던 시기였고 고구려를 뛰어넘는 물량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설프게 머릿수만 채우는 수준으로는 중동에서 미군상대하는 이슬람 반군 마냥 상대가 도저히 되지 못한다. 즉 저들 못지 않은 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를 감안하면 고구려는 요동, 송화강 유역, 압록이남과 한강 이북의 한반도 서부 지역, 함흥평야, 기타 지역의 인구와 물자 생산량을 바탕으로 백제와 신라를 뛰어넘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48] 수양제 때 건설된 대운하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강남 지역의 막대한 물자들이 신속하게 화북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 이 대운하가 없었다면 아무리 당나라라고 고구려를 상대로 그 정도의 장기전을 치루는 것은 불가능했다.[49] 신라 지역에서 출토되었기는 하지만 여하튼 많은 칼이 위엄과 관계된 문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50] 연개소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 설인귀에게 패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사실 경극을 만든 중국인들이 그들이 존경하는 당태종이나 설인귀를 미화했으면 미화했지 연개소문을 미화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51] 재미있는 것은 이 규염객전이 사실상 최초의 무협지라는 것은 차처하고, 내용상 규염객이 당의 건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이 2번 항목의 드라마에 영향을 준 듯하다.[52] 당시 한국이 동북공정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었어서 이를 의식해서인지 연개소문을 가상의 인물 철세문으로 바꾸었고 철세문의 나라도 고구려가 아닌 발료(渤遼/渤辽)라는 가상의 국가로 나온다. 나라 이름은 발해(보하이 해)과 요하(랴오허)에서 따온 것. 중국에서는 이 드라마에 대해 "한국은 우리를 비하하는 드라마들을 만드는데 우리는 한국한테 쫄아서(...)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냐"며 불평하는 반응도 나왔다.[53] 당장 철세문의 입으로 이세민의 골육상잔 흑역사인 현무문의 변을 까기도 하고, 발요 원정이 끝나자 공신들을 홀대하는 바람에 울지경덕이 사석에서 "폐하는 천하가 평정되자 우리 공신들을 버리셨다."고 불평, 이세적은 "너 간덩이가 부었냐?"며 사색이 되어서 말린다. 심지어 태자에게 후사를 맡길 때 공신들에 대한 경계와 견제를 대놓고 밝힌다.[54] 그래서 7권에서 고구려에 쳐들어온 당태종과 만나서는 '형님'이라 부른다.[55] 작중 대양도 연개소문의 말을 듣고는 "이 자는 대체 충신인가, 역신인가.."라며 혼란스러워 한다.[56] 이는 당시 사극에서 유행하던 소싯적 노예 체험 연출과도 통한다.[57] 연개소문의 첫 아내가 무려 이밀의 일가라는 설정이다. 이 둘이 낳은 아들이 바로... 참고로 나머지 2명은 고구려에 건너온 후에 들인 고구려 왕족 출신의 부인 소생으로 나온다.[58] 수양제를 맡은 배우 김갑수씨의 열연으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는게 중론.[59] 어쩌면 연개소문의 적들인 수양제, 당태종, 영류왕 등이 더 부각되는 이유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60] 자신의 뜻에 반하게 당나라와 화친을 주선하려는 남부 욕살 부기원을 궁궐의 전각을 잇는 한 통로에 데려와서는 내게 칼 맞은 영류왕이 피를 흘리며 이 길로 도망쳤었다. 그 때 내 손에 죽은 신하가 백 명은 넘었지?라며 제대로 협박을 하는데 그 포스가 후덜덜하다. 마지막 대사는 "나이를 먹고 힘만 없어지는 게 아니야. '참을 인'자도 없어졌어."인데 그야말로 소름 돋는다.[61] 주로 쓰는 용도는 말 탈 때 발 받침대.[62] 장산해의 말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대조영의 상황을 살폈다고 한다.[63] 당나라 사서 중엔 '걸걸중상'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것이 있다는데(그 사서가 극 중에 등장했다.) 어차피 그 '걸걸'이 '크다.'라는 뜻이라고 해서 대중상이라고 부르는 것. 실제로 사극 대조영에서 그 사서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걸걸중상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대중상이라고 읽었다. 하긴 이건 그 드라마에서 해당 인물의 이름을 대중상으로 쓰고 있으니까 그런 거긴 한데.[64] 이 밖에도 무신에서 최충헌, 최우, 최항, 김준 등 집권자들이 합하라고 불렸으며, 정도전에서도 이인임이 이 호칭으로 불렸다.[65] 고주원과 공동 수상을 해서 잠시 논란이 있었다.[66] 무왕의 출신이 불확실한 것을 반영한 대사인 듯.[67] 다만 문관과 재상으로써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뿐이지 고구려 최후의 최강 명장중 한명인 연개소문답게 싸울때는 잘 싸운다. 고구려의 정예병사들을 이끌고 김춘추를 추격하였을때 아버지 김춘추를 모시러 나온 김춘추의 큰아들 김법민과 신라군과 싸울때는 뛰어난 칼솜씨와 용맹으로 김법민과 신라군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신라국경 근처에 김춘추를 데리러나온 김유신과 신라의 정예군들과도 맞붙을뻔하였으나 여기서 고구려가 신라가 원수가되어 전쟁에 돌입하게되면 고구려는 뒤에 신라를 적으로 두고 막강한 초강적인 당나라를 이길수 없을거라는 김춘추의 설득으로 인해 결국 김춘추와 김유신을 놓아보내게 되어 김유신과의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68] 이름도 비슷하니 두작품을 본 사람들은 대왕의 꿈의 연개소문은 광개토태왕의 개연수의 환생 아니냐고 개연소문이라고 비아냥거렸다.[69] 고당전쟁이 나오는 드라마 중에서 당나라와의 전쟁을 달갑게 보지 않는 몇 안 되는 드라마다.[70] 실제로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당시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그와 연개소문과 대립이 있었으며, 주필산 전투에서 병사들을 보내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본작에서는 이 설을 차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