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리지 연태조 | |
관등 | 대대로(大對盧) / 막리지(莫離支) |
부족 | 동부 |
이름 | 연태조(淵太祚) |
자녀 | 연개소문, 연정토 |
아버지 | 연자유 |
생몰연도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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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권신, 정치인.훗날 영류왕을 시해하는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의 아버지로 유명한 인물이다.
曾祖子遊, 祖太祚, 幷任莫離支, 父蓋金, 任太大對盧. 乃祖乃父, 良冶良弓, 幷執兵鈐, 咸專國柄. 桂婁盛業, 赫然凌替之資, 蓬山高視, 確乎伊霍之任.
증조부는 자유(子遊)이며 조부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를 역임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가업을 잘 계승하여 군권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바탕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천남생 묘지명 中[1]
증조부는 자유(子遊)이며 조부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를 역임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가업을 잘 계승하여 군권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바탕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천남생 묘지명 中[1]
曾祖大祚, 本國任莫離之, 捉兵馬, 氣壓三韓, 聲雄五部.
증조부인 대조(大祚)는 본국에서 막리지(莫離之)에 임용되었으며,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기세(氣勢)가 삼한(三韓)을 제압하고 명성은 오부(五部)에서 뛰어났다.
천헌성[2] 묘지명
증조부인 대조(大祚)는 본국에서 막리지(莫離之)에 임용되었으며,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기세(氣勢)가 삼한(三韓)을 제압하고 명성은 오부(五部)에서 뛰어났다.
천헌성[2] 묘지명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연개소문이 연태조의 동부 대인의 지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영류왕 본기에는 연개소문이 서부 대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알기 힘들다. 다만 동부 대인이었다는 기록이 구당서나 신당서 등에 더 많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동부 대인이었다는 설이 사실일 확률이 높다.
삼국사기에는 대대로(大對盧) 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연남생 묘지명에는 아버지인 연자유와 더불어 왕에 다음가는 높은 벼슬인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다. 어느 쪽의 기록이 맞든 간에 살아있었을 적에는 상당한 권력자였을 것이다.
본래 사서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3년, 중국에서 연개소문의 가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연남생의 묘지명이 발굴되면서 처음으로 이름과 관직이 알려지게 되었다.
연태조가 사망한 후에 연개소문이 아버지를 뒤를 이어 동부 대인과 막리지의 지위를 이어받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무도하고 잔인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크게 성장한 연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3]
이에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도록 해준다면 다시는 포악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대신들 앞에 엎드리고 싹싹 빈 후에야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영류왕과 대신들이 자신을 제거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해버렸다.
2. 가족 관계
기록이 많이 없어졌으므로 이외에도 가족들이 더 있었을 수 있다.- 부친 연자유(淵子遊): 막리지를 역임했다고 한다.
- 아들 연개소문(淵蓋蘇文): 행적과 그의 후손에 대한 정보는 해당 항목 참고
- 아들 연정토(淵淨土)
- 친족?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해당 문서 참고.
- 친족?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 해당 문서 참고.
3. 기타
사이비 역사 위서 환단고기에는 598년 군사를 이끌고 수나라의 위충을 살해했다고 나온다.을지문덕이 연태조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소수 학설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연태조가 속한 연씨 일가의 성씨를 '이리(伊梨)'라고 읽었는데, 이것이 을지문덕의 을(乙)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연남생 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막리지를 역임한 것으로 확인된다. 막리지가 당시 고구려에서 정치·군사적 실세였음을 생각하면, 살수 대첩에서 대규모 고구려군을 이끌고 회전을 치른 뒤 협상권을 가지고 수나라 사령부와 담판을 지은 을지문덕의 행적은 오로지 막리지여야만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해당 설에서는 현대 한국어의 '으리으리하다'라는 표현을 근거로 '을'이 고대 한국어에서 '크다'라는 뜻을 지녔으며, '을지문덕'은 본명이 아닌 일종의 칭호였을 것이라 가정한다. 이에 따르면 을지(乙支)는 '큰 신하'라는 뜻의 고유어, 문덕(文德)은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붙인 수식어로 해석할 수 있다. 만일 을지문덕이 연태조와 동일 인물이라면,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영류왕의 시체를 분시한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대중국 강경노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아버지와 자신의 가문을 배척하는 영류왕의 태도에 대한 답변으로 보면 충분한 인과성이 있다.
그러나 '으리으리하다'는 근대 이전으로 변천사를 추적할 수 없는 단어이므로 고대의 언어상을 논하는 데 쓰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이외에 '을'이 고대 한국어에서 크다는 의미로 쓰였다는 근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연개소문 문서에 자세히 논증되어 있듯이, 연씨 일가의 성 '이리'는 정황상 연못 또는 샘을 일컫는 단어로 추정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아울러 을지문덕이 본명이 아니라 단정짓기에는 비슷한 칭호를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무리한 가정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백제의 문득지(汶得至)라는 인명과 비교해볼 때 '문덕' 역시 본명의 음차 표기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러한 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아무래도 을지문덕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임에도 개인사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현전하는 고대사 기록의 분량이 워낙 소략하기 때문에, 을지문덕처럼 전투에서의 공만 알려지고 개인적인 사항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을지문덕이 결코 특별한 경우인 것은 아니다.
4. 창작물
드라마 《연개소문》(SBS, 2006년 ~ 2007년)에서는 배우 박인환이 연기했다.수문제가 침공해왔을 때 막리지로 고구려 최고 재상이었고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많이 활용한 본작의 특성상 적벽대전의 제갈량 포지션이며 주유+장소 포지션을 갖고 있는 고건무와 신경전을 벌인다. 제갈량이 바람을 일으켜 주유의 승리를 도왔듯 연태조도 비와 바람을 불러 일으켜 고건무의 승리를 도운다.
하지만 비바람을 함부로 일으켜 기력이 쇠한데다 영양왕이 은퇴하고 영양왕의 아우이자 후계자인 온건파 고건무가 국정을 총괄하게 되자 물러나서 열국을 순시하는 사신으로 소임을 맡게 된다. 607년에 양제가 돌궐을 방문할 때 거기서 계민가한과 같이 있던 고구려 사신으로 있었고[4], 양제를 따라갔던 아들 개소문을 잠시 만난 뒤 왜국으로 간다며 떠나는 것을 끝으로 극중에서 퇴장한다. 배역은 이때 퇴장하나 그의 행적은 훗날 연개소문 집권 이후 좀 더 공개된다. 왜국에 도착하여 훗날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외교라인의 기틀을 닦아 놓고 이를 예견했다고 한다. 왜국의 왕의 표현을 빌자면 그러고 나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사망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작중에서는 끝끝내 '행적이 묘연하다', '신선이 됐다고들 한다' 라는 식으로만 언급된다. 이미 돌궐에서 수명이 다 되어간다는식의 묘사가 있었고 왜국 이상의 언급이 없었으니 왜국이 그의 행적의 마지막임은 확실하다.
연태수(淵太秀)라는 가상의 동생도 등장하는데 배우 정동환 씨가 맡았다. 연태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죽인 사람 중 한 명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를 모델로 한다. 연개소문이 《일본서기》에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돼 있어서 같은 집안 사람으로 보고 가상으로 연태조의 아우이자 연개소문의 숙부를 창작해낸 것이다.
아우로 알려진 연휘만(淵輝滿)의 경우 사서의 등장인물이 아닌 1977년~1980년 사이 신문에서 연재된 유현종의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는 온달이 활동했던 당시에 연개소문 가문의 힘이 강하던 때였을 만큼 분명히 나왔어야 할 인물이지만 고증을 내다버린 드라마답게 등장은 커녕 언급도 안되었다.
[1] 알다시피 천이라는 성씨로 작성된 이유는 바로 피휘 때문. 당나라의 개창자인 당고조 이연의 휘를 피휘한 것이다.[2] 연남생의 아들. 연태조에게는 증손자가 된다.[3] 연남생 묘지명에 연씨 가문은 이미 연개소문 이전에도 2대에 걸쳐 최고위직인 막리지의 벼슬을 지내왔다. 한창 세력을 키우던 연씨 가문은 기존의 귀족 가문들과 왕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4] 이때 고구려 사신이 돌궐을 방문한 것 자체는 사실이나 그 사신이 연태조라는 건 극중 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