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09 22:05:05

연태조

막리지(莫離支) 연태조
관등 대대로(大對盧) / 막리지(莫離支)
부족 동부
이름 연태조(淵太祚)
자녀 연개소문, 연정토
아버지 연자유
생몰연도 미상

1. 개요2. 가족 관계3. 기타4.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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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권신, 정치인.

훗날 영류왕을 시해하는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아버지로 유명한 인물이다.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隤祉?)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천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 (霍光의 고사가 있을 것 같으나 未詳)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 : 군주의 大權?)를 가리고(혹은 적시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 : 군주의 영화를 의미?, 典故 未詳)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 : 바탕?)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천남생 묘지명 중[1]
증조(曾祖)인 대(태)조(大(太)祚)는 본국(本國 : 고구려)에서 막리지(莫離之)에 임용되었으며,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기세(氣勢)가 삼한(三韓)을 제압하고 명성은 오부(五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연헌성[2] 묘지명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연개소문이 연태조의 동부 대인의 지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영류왕 본기에는 연개소문이 서부 대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알기 힘들다. 다만 동부 대인이었다는 기록이 구당서신당서 등에 더 많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동부 대인이었다는 설이 더욱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대로(大對盧) 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연남생 묘지명에는 아버지인 연자유와 더불어 왕에 다음가는 높은 벼슬인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다. 어느 쪽의 기록이 맞던 간에 살아있었을 적에는 상당한 권력자였을 것이다.

본래 사서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3년, 중국에서 연개소문의 가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연남생의 묘지명이 발굴되면서 처음으로 이름과 관직이 알려지게 되었다.

연태조가 사망한 후에 연개소문이 아버지를 뒤를 이어 동부 대인과 막리지의 지위를 이어받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무도하고 잔인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크게 성장한 연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3]

이에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도록 해준다면 다시는 포악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대신들 앞에 엎드리고 싹싹 빈 후에야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영류왕과 대신들이 자신을 제거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해버렸다.

2. 가족 관계

기록이 많이 없어졌으므로 이외에도 가족들이 더 있었을 수 있다.
  • 부친 연자유(淵子遊) : 막리지를 역임했다고 한다.
  • 아들 연개소문(淵蓋蘇文) : 행적과 그의 후손에 대한 정보는 해당 항목 참고
  • 아들 연정토(淵淨土)
  • 친족?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 해당 문서 참고.
  • 친족?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 : 해당 문서 참고.

3. 기타

사이비 역사 위서환단고기』에는 598년 군사를 이끌고 수나라위충을 살해했다고 나온다.

4. 창작물

드라마 《연개소문》(SBS, 2006년 ~ 2007년)에서는 배우 박인환 씨가 연기했다.

수문제가 침공해왔을 때 막리지로 고구려 최고 재상이었고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많이 활용한 본작의 특성상 적벽대전의 제갈량 포지션이며 주유+장소 포지션을 갖고 있는 고건무와 신경전을 벌인다. 제갈량이 바람을 일으켜 주유의 승리를 도왔듯 연태조도 비와 바람을 불러 일으켜 고건무의 승리를 도운다.

하지만 비바람을 함부로 일으켜 기력이 쇠한데다 영양왕이 은퇴하고 영양왕의 아우이자 후계자인 온건파 고건무가 국정을 총괄하게 되자 물러나서 열국을 순시하는 사신으로 소임을 맡게 된다. 607년에 양제가 돌궐을 방문할 때 거기서 계민가한과 같이 있던 고구려 사신으로 있었고[4], 양제를 따라갔던 아들 개소문을 잠시 만난 뒤 왜국으로 간다며 떠나는 것을 끝으로 극중에서 퇴장한다. 배역은 이때 퇴장하나 그의 행적은 훗날 연개소문 집권 이후 좀 더 공개된다. 왜국에 도착하여 훗날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외교라인의 기틀을 닦아 놓고 이를 예견했다고 한다. 왜국의 왕의 표현을 빌자면 그러고 나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사망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작중에서는 끝끝내 '행적이 묘연하다', '신선이 됐다고들 한다' 라는 식으로만 언급된다. 이미 돌궐에서 수명이 다 되어간다는식의 묘사가 있었고 왜국 이상의 언급이 없었으니 왜국이 그의 행적의 마지막임은 확실하다.

연태수(淵太秀)라는 가상의 동생도 등장하는데 배우 정동환 씨가 맡았다. 연태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죽인 사람 중 한 명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를 모델로 한다. 연개소문이 《일본서기》에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돼 있어서 같은 집안 사람으로 보고 가상으로 연태조의 아우이자 연개소문의 숙부를 창작해낸 것이다.

아우로 알려진 연휘만(淵輝滿)의 경우 사서의 등장인물이 아닌 1977년~1980년 사이 신문에서 연재된 유현종야설 소설 연개소문에 등장하는 가공인물이다.

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서는 온달이 활동했던 당시에 연개소문 가문의 힘이 강하던 때였을 만큼 분명히 나왔어야 할 인물이지만 고증을 내다버린 드라마답게 등장은 커녕 언급도 안되었다.

[1] 알다시피 천이라는 성씨로 작성된 이유는 바로 피휘 때문. 당나라의 개창자인 당고조 이연의 휘를 피휘한 것이다.[2] 연남생의 아들. 연태조에게는 증손자가 된다.[3] 연남생 묘지명에 연씨 가문은 이미 연개소문 이전에도 2대에 걸쳐 최고위직인 막리지의 벼슬을 지내왔다. 한창 세력을 키우던 연씨 가문은 기존의 귀족 가문들과 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4] 이때 고구려 사신이 돌궐을 방문한 것 자체는 사실이나 그 사신이 연태조라는 건 극중 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