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1:32:49

연정토

국적 고구려신라
관직 귀신(貴臣)[1]
이름 연정토 (淵淨土)
아버지 연태조
형제 연개소문
사망지 당(?)
생몰연도 ?[2] ~ 667년 이후[3]

1. 개요2. 생애3. 연씨(淵氏)4. 가족 관계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고구려귀족. 고구려 말기의 권신연개소문의 동생. <삼국사기> 신라 본기와 <신당서> 등에 행적이 남아있다.

2. 생애

최초의 행적 기록은 666년이다. 이전 642년 그의 형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독재자가 되었는데, 이 덕분인지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 전선을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666년 그의 형인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3형제 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장남 연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적국인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인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러한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543명을 들어 신라에 바치고 투항하였다.

연정토 입장에서는 조카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셈인데, 연남생이 당으로 도망간 뒤에 연정토도 항복한 걸 보아 연정토는 원래 남생을 지지하는 파벌이었거나 아니면 남건, 남산이 차지한 고구려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신라로의 투항, 귀순을 생각한 듯 하다. 연정토가 신라에 바친 12성 중 8성은 성과 주민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기에 신라 조정은 군대를 보내 이를 지키게 하는 한편 연정토와 그의 막료 24명에게 재물과 주택을 내려 신라 수도와 지방에서 편히 살도록 배려해주었다.

667년 신라 조정은 연정토와 원기(元器)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고구려 침공에 대해 당나라 조정과 의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원기는 일을 마친 후에 다시 귀국하였으나 연정토는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 남는 것을 선택해 다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신라 조정에 무언가 불만이 있어서 당나라에 남기로 한건지 아니면 당나라 조정이 억류한건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이후로 연정토가 당나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비슷한 테크를 탄 조카 연남생이나 연남산의 당나라 항복 후 행적을 봐서는 특별히 모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천수를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검모잠과 함께 고구려부흥운동을 이끌다가 674년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으로 봉해진 안승이 연정토의 아들이며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안승이 보장왕의 서자라는 다른 기록도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기록상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인들이 안승이 보장왕의 뒤를 이을만한 혈통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왕족 고씨가 아닌 연정토 아들 연씨 부계면 고구려인들이 그렇게 했겠느냐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왕족 고씨가 안 남아있어서 연씨를 쓰는 것도 아닌 게 당장 안승 휘하에서 일한 고연무부터가 고씨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안승을 대략 고구려 왕족으로 파악하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편이다.[4]

3. 연씨(淵氏)

18세기의 국학자인 안정복은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통고(通攷)에 이르기를 정토는 소문(개소문)의 아우다."라며 연정토를 연개소문의 동생이라고 보았다. 통고보다 이전에 지어진 신당서에도 '정토는 소문의 아우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당시에만 해도 연개소문의 성은 천(泉)씨로 알려져 있었는데 안정복은 '연정토가 개소문의 아우이므로 개소문의 성 역시 연(淵)씨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본래 성씨는 연씨였으나 그 이름자가 당고조 이연(李淵)의 휘와 같았기에 중국인들이 이를 피휘하여 그 성씨를 천씨라 기록하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라의 기록에는 연정토의 이름을 당나라식으로 피휘하지 않고 그대로 연씨로 표기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연개소문의 진짜 성씨가 연씨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한국 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4. 가족 관계

5. 대중매체에서

  •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기고 죽은 것으로 유명한 남당 박창화의 한문 소설 <개소문전>에는 연정토가 연개소문의 조카였다고 하였는데 박창화의 기록이 다 그렇듯 믿을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김영기[6]가 연기했다.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 선도해[7]의 권유로 신라에 남쪽 12개 성을 들어 투항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기회주의자이기보다는 그냥 수더분하고 착실한 동생 정도의 포지션.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이경영이 연기했다. 형인 연개소문을 충실하게 보좌하는 역할이였는데 100화에 3차 고당전쟁때 갑자기 연개소문에게 마지막 인사하더니 신라군의 대각간 김유신과 만나 악수하고 12개의 성과 같이 항복한다.

[1]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문 기록. '높은 신하'라는 뜻이라 관직명이 아닌 그냥 일반명사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고 대체로도 그렇게 본다.[2] 형인 연개소문의 태어난 연도 설이 590년부터 614년 설까지 있는데 610년대 설은 거의 가능성이 없고 600년대나 590년대 설이 유력하기에 연정토는 많이 잡으면 590년대 중후반, 늦게 잡아도 61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3] 신라에 투항했다가 당나라로 파견되었는데 그 후 행적이 없다. 당시 나이가 꽤 있었을 것이니 얼마 안 있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4] 일설에서는 연정토의 아내가 왕실의 일원이었다는 주장 역시 제기한다. 신라는 신분이 성별보다 앞서는 명분이자 주제였기 때문에 선덕여왕을 비롯한 여왕이 나올 수 있었다. 고구려 역시 왕실의 여인에서 나온 아이라면 왕계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실 부흥운동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5] 연정토의 아들설, 보장왕의 손자라는 설 2가지가 기록에 남아있다.[6] 불멸의 이순신징비록에서는 권율 역.[7] 김춘추에게 귀토 설화를 알려주고 신라로 도망가도록 도와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