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막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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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c5b356>국적 | 고구려 |
관등 | 막리지(莫離支)[1] |
이름 | 연남건(淵男建) |
이명 | 천남건(泉男建) |
아버지 | 연개소문 |
형제 | 연남생, 연남산 |
사망지 | 당 검주(黔州)(?) |
생몰연도 | ?[2] ~ ?[3] |
1. 개요
......승려 신성이 문을 열었다. 장수 이적이 병사를 이끌고 성을 올라 북을 치며 소리 지르고 성을 불태웠다.
남건은 칼로 스스로를 찔렀으나 죽지 못했다.
왕과 남건 등은 붙잡혔다.
- 668년 9월, 고구려 왕조의 절망적인 최후를 서술한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
남건은 칼로 스스로를 찔렀으나 죽지 못했다.
왕과 남건 등은 붙잡혔다.
- 668년 9월, 고구려 왕조의 절망적인 최후를 서술한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
고구려 말기 보장왕 때의 권신.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당나라에 맞서 싸웠던 인물로 나머지 두 형제는 훗날 당나라에 귀순하여 천수를 누렸다.[4]
그러나 그 때문에 연씨 3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생몰년이 미상이며[5]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없다.[6]
2. 생애
2.1. 권력 투쟁
665년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자 맏형 연남생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대막리지가 되었다. 666년 연남생이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는 동안 연남건은 동생인 연남산과 함께 수도에 남아 뒷일을 맡아 보았다. 그러던 중에 측근들로부터 연남생이 동생들을 믿지 못하니 장차 모두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연남건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연남생이 수도에 남기고 온 자신을 의심하여 밀정을 보내 염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보장왕의 명을 칭해 연남생을 수도로 불렀다.[7] 그러나 연남생이 이에 응하지 않자 결국 형을 의심하고는 동생 연남산과 더불어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서 수도를 장악하였으며 이때 수도에 머물던 연남생의 맏아들 연헌충을 살해하였다. 666년 8월 연남건은 막리지 관등에 올라 대권을 장악하였다.2.2. 고구려 멸망
이후에 연남건은 군사를 보내 지방에 순시를 나가있던 연남생의 세력마저 토벌하려 하였으나 궁지에 몰린 연남생과 연헌성은 국내성에 숨어 이를 방어하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끝내 투항하고 말았다(666년 6월).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은 당나라 군대와 결탁하여 고구려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었고 과거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던 방어선과 후방 보급을 맡았던 지역 상당수가 연남생을 따라 당나라에 붙고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전황은 암울하게 전개되었다.이 과정에서 당나라 수군장수 곽대봉이 다른 길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갔다가 보급이 끊겨 굶주리고 곤궁해지자 대총관 이적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보냈다. 일반적인 보고서로 쓰면 혹시 전달과정에서 적에게 문서를 빼앗겨 자기네 내부문제가 알려질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다. 즉 지원요청 내용을 삼행시, 오행시, 칠행시 등으로 위장한 것이다.처음에는 이적이 이 시를 보더니만 화를 내며 말하였다.
군의 상황이 바야흐로 위급하거늘 한가롭게 이따위 시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 이놈의 목을 반드시 베고야 말겠노라.
옆에 있던 원만경이란 자가 그 시의 내용을 해석해주니 이적 대총관은 그때서야 군량과 병기를 곽대봉의 진영으로 보냈다.하루는 원만경이 다음과 같은 격고려문(檄高麗文)을 지어 연남건에게 보냈다.그대는 압록의 천험(天險)을 지킬 줄 모르는가.
연남건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삼가 명령을 듣겠습니다.
이에 연남건이 즉시 군사를 움직여 압록의 나루를 점거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너지 못했다. 당 고종이 이러한 보고를 듣고 원만경을 영남으로 유배 보냈다고 한다.하지만 수도인 평양성마저 당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에 보장왕은 연남산과 92명의 수령들[8]을 성 밖으로 보내 당나라군에 항복 의사를 보였으나 연남건은 끝까지 당나라군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연남건은 교전에서 당나라군과 수 차례 맞붙었다가 패하여 전세는 점차 기울어갔다. 1달간의 공방전 끝에 패배가 확정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남건이 항복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연남건의 심복이자 승려인 신성이 다른 장수들을 선동하여 결국 당나라군과 내통하여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668년 멸망하게 되었다.
2.3. 이후의 삶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연남건은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9] 결국 당나라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 연남건은 당나라 장안에 끌려갔다가 현 쓰촨성 첸저우(검주/黔州)에 유배되었는데 이후의 삶은 전해지지 않는다. 형 연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잡히자마자 주살당할 운명이었으나 연남생이 연남건을 살려달라고 간청한 덕분에 유배형으로 끝났다고 한다. 연남건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체포하려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정이 남아있었는듯 하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 대조영의 장면처럼 자기들의 불화로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한 회의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혔으니 다른 두 형제들과는 달리 당나라에서 잘 대접해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역사에 흔히 보이는 몰락한 정치인들의 유배 생활 비슷하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과 연남산은 죽은 후에 그들의 행적과 삶에 대해 기록된 묘지명을 남겨 이후의 삶이 알려졌다.3. 가족
아버지는 연개소문, 어머니는 미상이나 조카 연헌성 묘지명에서 조금 언급이 나온다.작은 아버지로 연정토가 있다.
형으로는 연남생, 동생으로는 연남산이 있다.
조카로는 형 연남생의 아들 연헌충과 연헌성이 있는데, 남건은 헌충을 죽이고 연남생의 둘째 아들인 헌성도 잡으려 했으나 헌성이 당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실패했다.
4.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매체마다 캐릭터가 매우 다르지만, 역사대로 연씨 아들 삼형제 중 혼자 끝까지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구한승이 연기했다. 연개소문 사후 자신의 일파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형 연남생을 몰아낸다. 평양성이 함락되는 순간 자살을 하려 했지만, 당나라 병사들에게 제지당한 후 생포되어 포로로 끌려나가는 모습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김홍표가 연기했다. 작중 후반부 사이에 장성해 등장하며 신성, 동생 연남산과 짜고 연남생(안재모 분)을 몰아내는 것으로 전개했다가 고구려 패망 이후 앞잡이가 된 연남생과 당나라 장수들, 그리고 신성[10]과 짜고 성문을 열어 배신한 동생 연남산에게 잡히고 굴욕적으로 퇴장.
-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배우 안홍진이 연기했다. 신성, 부기원이 도와줘서 연남생을 같이 몰아내고 이후 대막리지가 되지만 결국 고구려가 망하자 원래 역사대로 자결하려고 했으나 포로로 잡히고 평양성 전투 이후 보장왕과 같이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극에서 퇴장당한다. 그래도 마지막에 스스로를 칼로 찌른 순간 달려온 형 연남생(임호 분)과 조우해 서로 후회하면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명장면이다. 동시대에 방영한 《연개소문》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나름대로 능력이며 인품, 애국심도 어느 정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지나치게 우유부단해 자신을 대막리지의 자리에 추대한 귀족들에게 매번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고,[11] 스스로 자신의 형에게 남긴 유언에서도 말했듯 국가의 운명을 감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 2011년 개봉한 영화 《평양성》에서는 배우 류승룡이 연기했다. 주전파로써 연개소문의 의지를 잇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연남생의 대막리지 자리를 빼앗는 과정도 권력욕이나 열폭이 아닌 협상을 하자는 연남생에 반발해 맞서 싸워야 고구려를 지킬 수 있다며 연남생과 대립하는 것을 수하들이 연남건의 편을 들면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원래 역사와 다르게 평양성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그려지며 역대 연남건 중에선 가장 멋지게 묘사된다.
[1] 의외로 연남건이 대막리지, 태막리지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엔 남건이 666년 8월에 막리지를 받았다고만 나와있다. 다만 연개소문 관련 기록을 보면 대막리지를 그냥 막리지라 줄여서 부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연남건이 연남생의 자리를 탈취했다는 것은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인다.[2] 634년 - 638년 사이.[3] 668년 이후(향년 30세 이상)[4] 사실 형 연남생은 처음부터 당나라에 붙어서 고구려 침입에 앞장섰고 동생 연남산은 평양성이 포위당해 승산이 완전히 제로가 된 막판에야 항복했으니 둘을 세트로 묶기는 어렵다. 묘지명에 따르면 연남생은 시호까지 받으며 잘 살다 갔고 연남산은 고국을 그리워하며 늘 우울하게 살다가 자택에서 죽었다고 한다. 사실 날짜만 봐도 연남건이 연남산보다 고작 며칠 정도 더 저항한 것이다. 물론 서로간에 오해가 쌓였다지만 먼저 내전을 유도해 조카를 죽임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만들고 연남생이 당에 투항하게 만들었으니, 최고통치권자로서 바로 항복한다면 어떻게 평가받을지 두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5] 연남생의 동생이며 연남산의 형이니만큼 대략적인 출생년도는 추정이 가능하다. 대략 634년~638년.[6] 연남생과 연남산은 당나라에 투항한 덕분에 죽은 후에 묘지명을 남겨 그 행적과 삶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7] 숙부 연정토가 이들을 이간질했다는 말도 있다.[8] 고구려가 지배하던 부족과 그 수장들을 의미한다.[9] 칼로 스스로를 찔렀다 한다.[10] 작중에서는 '신승'으로 나온다.[11] 다만 나중에 항전에 대한 노선 차이나 양만춘 일로 인해 귀족들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12]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정도전의 장남 역할로 등장한다. 《대왕의 꿈》에서 맡은 연남건의 경우 극 후반부가 조기종영되어 고구려 멸망 스토리가 급전개한 영향도 있고 배우 연기력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